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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힘이 우리 모두에게서 빛으로 발화하기를 바라며
2013-07-23 18:09
명숙(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연일 흐린 서울 하늘과 폭우로 몸은 가라앉고 마음도 무겁다. 벌써 2주 가까이 햇빛을 쐬지 못했다. 방은 습기로 가득하고 마음도 습기를 빨아들인 스펀지처럼 아팠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이런 날이 삶에서 계속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하늘을 덮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메이데이, 2013.6. 이하 『하늘을 덮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자꾸 맴돌았다. 그녀는 언제 빛을 볼 수 있을까.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삶을 온통 덮은 2008년 12월 6일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과 그 후 벌어진 2차 가해는 햇빛을 가린 구름보다 더했다. 상처에 계속 생채기를 가하는 폭력이 빛을 막고 있었다. 구름이라면 형광등이나 백열등으로, 가습기나 에어컨으로 어찌 이겨 볼 텐데, 그녀의 삶을 갉아먹고 있는 그 수많은 '폭력의 말'은 고장 난 라디오보다 더하게 반복될 뿐 아니라 소음마저 더해져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도 악몽을 꾸고", "낮이어도 몇 번씩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확인"해야 하고, 낮에는 "평소보다 더 크게 밝게 웃고 떠들"기도 하지만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다.
더 큰 것은 그녀가 스스로 "나는 '나를 말하는' 게 제일 힘들다"고 한 부분이다. 수많은 2차 가해를 당한 경험으로 당사자인 그녀가 그 사건을 말하더라도 그것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읽힐지 자신할 수 없어, 말하는 게 제일 힘들다고 한다. 개별적 존재인 인간이 다른 개별적 존재인 타인을 다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함께 사는 ‘인간’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때가 아닐까. 듣는 귀와 마음만이 그녀를 맘 편히 밤잠 이루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보다 나은 인간적인 사회, 폭력과 위계가 없는 다른 질서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설령 읽는 내내 고통에 마주해서 몇 주간 잠을 설칠 정도로 아프더라도 말이다. 외면하지 않고 '성폭력과 고통'을 직시해야만 우리는 남성중심적, 가부장적 우리 사회 권력구조의 문제를 심각하게 체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근 통합진보당 충남도당 성폭력사건의 2차 가해자들이 '또 다른 피해자 모임'을 만들어 성폭력 피해 생존자에게 더 큰 가해를 저지르고 있는 현실에서 피해 생존자의 기록을 읽는 일은 더욱 필요하다. 2차 가해라는 뻔뻔한 폭력의 과거가 여전히 반복되는 지금, 우리가 벼리고 버려야 할 관점이 무엇인지 모두가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이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생존과 지지의 기록’을 읽어야 한다.
사실 통합진보당 충남도당 성폭력 사건 2차 가해자들의 행태를 보는 일 자체가 괴롭기도 했지만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의 피해 생존자는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에 더 가슴이 아팠다.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비슷한 사건을 접했을 때 다시 생생하게 사건과 고통을 되살아나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시 그녀는 고통의 기억에 헤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권운동을 하는 나는 부끄럽다. 그래서 자본의 폭력과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 권력을 바꾸어내겠다고 활동하는 나는 무기력에 빠진다.
그런 괴로움에도 『하늘을 덮다』를 권하는 것은, 이 책이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아 그녀를 지지하는 모임이 다같이 만든 책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녀는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을 함께하는 지지자들이 있기에 그녀와 그/녀들은 그야말로 서로 기대어 '버텨낼' 수 있었다.
◈ 가해자와 공동체의 책임을 경감시키는 논리들과 이중적 태도
운동사회 내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를 지지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조직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더욱 키울 것이다, 가해자가 '정부와 자본에 맞서' 싸운 사람이다, 조직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 등등의 이유를 들어 사건을 축소하거나 은폐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의 경우, 전교조를 비롯한 민주노총에 대한 정부의 탄압과 이데올로기적 공세가 심하기에 이러한 논리는 더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나는 운동사회가 성폭력 사건에 이러한 이중적 잣대를 고수하는 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대통령을 수행하기 위해 미국에 간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미국대사관 인턴직원에게 벌인 성폭력 사건으로 세상이 들끓었다. 성폭력 사건에서 으레 가해자는 처음에 부인하고, 다음에 지인들이나 조직이 사건을 은폐하고, 그래도 은폐가 안 되면 형식적인 사과를 하고 사퇴한다. 그리고 성폭력 사건을 고발한 피해자에 대해 믿거나 말거나 식의 소문을 흘리면서 '성폭력 사건'을 다르게 보이게 하려고 노력한다.
윤창중 성폭력 사건의 흐름도 똑같았다. 피해자와 한국문화원 직원이 사건을 알렸으나 청와대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한국문화원에 압력을 가하고 윤창중의 도피 귀국을 주선했다. 야당이 무리하게 이 사건을 정치 공세로 이용하고 있다고도 했다. 결국 이 사건의 책임자인 이남기 홍보수석은 사퇴했다.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도 비슷했다. 다만 운동진영의 태도만 다를 뿐… 2008년 수배 중이던 민주노총 이석행 위원장을 잠시 집에 있게 해달라던 전교조의 친한 후배 간부 손○○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피해 생존자는 결국 그 일로 성폭력을 당한다. 의도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은 민주노총 이석행 부위원장이 경찰에 체포된 다음 날인 2008년 12월 6일에 일어난다.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피해 생존자는 손○○에게 사실을 알렸지만 그녀는 아무 일 아닌 양 무시했고, 나중에 성폭력 사건으로 신고되어 공식적으로 사건화되자 형식적인 사과만을 반복하며 피해 생존자를 괴롭혔다.
더구나 당시 전교조 정 위원장은 피해 생존자에게 '뉴라이트와 보수 단체들이 이를 빌미로 조직을 탄압하고 와해시키려고 할 것이니 참아달라'고 했다. 이렇게 사건 '해결' 과정에서 2차 가해가 발생했지만 오히려 전교조는 성폭력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기 위해 징계재심의위원회 구성에 개입했다. 게다가 가해자는 초기 제명 뒤 법적 처리로만 넘겨져 조직 내 사후 조치가 흐지부지되고, 2차 가해자 중 한 명인 박○○을 다시 간부로 내정하려고도 했으며, 게시판이나 회의 자리에서는 그뿐 아니라 손○○, 정○○ 전 위원장 등 2차 가해자들을 옹호하는 발언과 움직임이 계속됐다. 가해자를 옹호하는 발언은 바로 피해자의 상처를 후벼 파는 폭력이었다.
운동사회는 윤창중 성폭력 사건에서처럼 단일하게 대응하지 않았다. 이것이 성별 권력관계와 여성을 대상화, 도구화하는 맥락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이라는 점은 동일했지만 말이다. 피해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나 제대로 된 성폭력 사건의 해결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정파 공세를 하는 사람들로 치부되거나 이명박 정부에 맞선 투쟁을 흐리는 사람들로 치부됐다. 2차 가해자들의 '노동운동에 대한 공헌'을 운운했다. 비혼 여성의 집을 도피처로 삼은 이유가 애초에 위원장의 알리바이를 쉽게 만들기 위해서일 뿐 비혼 여성 조합원의 불편과 위험은 고려 대상도 되지 않았던 조직보위 논리나 위계적인 남성중심적 조직 문화에 대한 성찰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답답하다.
◈ 인권을 억압하는 모든 권력에 맞선다는 의미
성폭력 사건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일대일 폭력이 아니며, 가부장적 사회 구조와 권력관계, 조직 문화에서 발생하는 정치적인 사건이다. 자본은 적은 비용으로 최대한의 이윤을 내기 위해 값싸게 여성노동을 착취하며,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는 극단적으로 대상화돼 이 체제 유지에 동원된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이렇게 성별화돼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그 속에서 2등 시민으로 취급받아온 여성은 이에 대항하는 사회운동, 노동운동의 역사 속에서도 위계의 밑바닥을 구성했다. 의식적으로 성별화된 권력과 체제에 저항하지 않으면 운동조직과 사회 역시 성별화된 권력구조와 의식을 재생산하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노조는 의결 구조가 대다수 남성 간부에게 독점되는 등 남성화된 조직문화로 가득하다. 이미 여성을 대상화하고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 구조와 문화이기에 치열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이 사회는, 많은 '진보 진영'도 마찬가지로, 성폭력 사건을 성폭력 가해자의 윤리적 태도에 문제가 있는 정도로 여긴다. 권력의 사회체제를 보지 않는다. 계급과 가부장적 젠더(성별) 권력은 상호 연결되어 통일된 지배계급을 지탱한다는 사실, 억압의 연동장치라는 사실은 진보 진영 내 페미니스트의 일부 주장으로만 치부된다. 모든 사람의 보편적 인권이 실현되려면 계급권력만이 아니라 성폭력의 기반인 젠더 위계와 권력에 맞서야 한다는 사실이 소위 '진보'라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에서 남성중심적 권력체제는 얼마나 공고한가. 그렇다 보니 성폭력 사건의 해결이 쉽지 않고, 성폭력 사건은 공론화되지 못하고 사사私事로운 사건이 된다. 설사 형식적으로 조직 내 '해결'(?)이 되더라도 전교조 당시 정 위원장이 '피해 생존자를 말리기 위해' 내뱉은 논리처럼, 성폭력 사건 '해결' 이후 '가해자인 남자는 활발히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피해 생존자는 볼 수 없는' 뒤바뀐 현실을 우리는 종종 접한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하고 가부장적, 남성중심적 권력과 문화를 해체하고 바꾸는 일이다. 더 이상 피해 생존자가 침묵이라는 돌에 맞아 쓰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러시아 볼세비키 페미니스트였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머나먼 곳에 사는 알지 못하는 미래의 여자들을 위해서" 글을 써야 한다. 수많은 서사와 공감의 글들이 폭력에 맞서는 힘이 되고 피해 생존자를 위로하는 온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온기로 수많은 피해 생존자의 저 깊은 곳에 내재한 힘이, 잠재력이, 그녀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서 빛으로 발화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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