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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은 역시 김철수가 아니었다

 

송두율은 역시 김철수가 아니었다

- 송두율 교수에 대한 대법원 무죄 확정에 부쳐 -

 

세계적인 사상가 위르겐 하버마스를 지도교수로 삼아 철학박사가 되어 독일의 유명 대학에서 사회학과 철학을 강의하는 교수, 일곱 권의 독일어 저서와 열권이 넘는 한국어 책을 집필한 저자, 1974년에 독일에서 만들어진 재독 반유신단체 ‘민주사회건설협의회’초대의장, 여섯차례의 남북해외학자통일학술회의를 평양에서 성사시킨 열정의 학자, 37년간 조국의 북쪽도 남쪽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었던 말그대로의 경계인, 두아들과 부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환갑의 아저씨, 칭호번호 65번 서울구치소 11동 상층 1방의 미결수, 9개월 만에 출소하던 날 리영희 교수와 포옹하며 아이처럼 웃던 출소자, 쫓기듯 독일로 돌아가 내게 고향은 없었다라며 고향의 봄을 노래한 슬픈 실향민... 내가 들어 알고 2003년부터 송두율 대책위의 한구석에서 느낄 수 있었던 송두율 교수의 단상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오늘(17일) 재독 사회학자인 독일 뮌스터대 송두율 교수 사건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렸다. 일부 파기 환송이 되어 서울고등법원에서 다시 재판이 열리기는 하겠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사실 이 사건은 이제 다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한 부분들은 모두 원심 그대로 확정했고, 송교수가 독일 국적을 취득한 이후 북한을 방문 한 것에 대해 유죄를 판결한 것에 대해 무죄취지로 원심을 파기하였다. 우선 오늘 판결의 중요한 핵심을 꼭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름을 들먹이기도 싫은 몇몇 일간지의 인터넷 보도는 마치 대법원이 송두율 교수에게 내려진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의 형량이 너무 가벼워 더 높은 형량을 주라는 뜻으로‘원심을 파기 환송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오보 아닌 오보들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송교수를 거짓말쟁이, 빨갱이로 몰게 만든 혐의인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김철수”와 동일인물이라는 검찰의 주장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정된 것이다. “김철수”의 자격으로 북으로부터 공작금을 받고 지도적 위치에서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도 사실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또 김일성 주석의 장례에 참석한 것은 단순한 조문에 해당되어 죄가 아니라고 하였고, 독일국적을 취득하고 북을 방문한 것은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도 하였다.

 

거기에 대해 대법원은 "국가보안법상 탈출이란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실지로 미치는 지역을 떠나는 행위나 대한민국의 국민에 대한 통치권이 실지로 미치는 상태를 벗어나는 행위인데, 외국인이 외국에 살다가 반국가단체 지배 지역(북한)에 들어가는 행위는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며 "송두율 교수가 독일 국적 취득 전에 북한을 방문한 것은 국가보안법상 제6조 1항 '탈출'에 해당하지만, 독일 국적 취득 뒤 북한을 방문한 것은 외국인의 신분으로 방문한 것이므로‘탈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서 원심을 파기하고 서울고등법원으로 사건을 되돌려보냈다. 이는 대법원의 기존 판례를 완전히 뒤집는 판결로 대법원은 이날 판결에 따라, '외국인의 북한 방문도 국보법상 특수탈출에 해당된다"고 판단해 온 기존 판례를 변경한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분단된 조국의 남과 북, 동양사상과 서양사상, 부자나라와 가난한나라 등의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 서로를 아루르고 공존하는 제3의 공간을 열고자 하며 스스로 경계인으로 살고자 했던 송두율 교수는 독일로 돌아간 후 많은 상념에 잠겼을 것이다. 독일로 돌아간 이후 발간한 송교수의 저서에서 그는 37년 만에 찾았던 고향에 대해 “그리던 고향은 아니었네”라는 유행가 가사를 빌어 표현했고 2003년 가을부터 2004년 여름까지의 짧은 한국 생활을“미완의 귀향”이라고 말했다.

 

그의 강연을 듣고 싶어하고 그의 저서에 서명을 받으려 줄을 서던 이들이 한순간에 등돌리는 순간 그 노학자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자신을 독일까지 와서 억지로 억지로 설득하여 한국에 데려온 기관과 그 사람들이 “송두율이 김철수인줄 알았다면 부리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가‘국정원에 가서 조사 받을 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초청했다라고 하며 발뺌을 할 때 송교수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준법서약서를 쓰거나 국정원의 조사를 받을 것이었다면 송교수가 한국에 들어올 기회는 그 이전에도 많았다. 송교수도 서울행 왕복 비행기 티켓 정도는 살 수 있는 경제력도 있었다. 그는 아마 자신을 한평짜리 독방에 가두어 둔 한국의 공권력과 법원보다 자신을 그 한평짜리 독방으로 친절히 안내하고도 냉큼 돌아선 이들이 더 밉지는 않았을까? 이성의 지혜는 엄숙하고 아릅답다고 말하며 결코 송두율을 옹호하거나 송두율을 위해 변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일부 학자들은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국가보안법이라는 녹슨 칼이 세계가 존경하는 학자이자, 조국을 사랑하는 ‘한국인’을 다시“경계인”으로 만들어 37년 만에 찾아 왔던 조국을 떠나게 했다. 오늘의 이 판결이 송교수나 그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우연의 일치인지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12월 19일 이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이들의 보도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고 사회과학서점에 대한 사찰과 20년간 진행해온 민가협 목요집회에 대한 감시가 시작되었다. 두 번의 정상회담으로 평화통일의 시대가 다가오는 듯 했지만 남북은 다시 험한 말들을 주고받으며 관계의 살얼음판을 걷게 되었다. 국가보안법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냉전과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권력을 보위하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국가정책에 반하면 무조건 잡아 가두는 신공안정국의 도래를 걱정해야하는 답답한 시절이 다시 오고 있다. 이런 시기 대법원이 임동규 전 범민련 광주전남의장이 2001년 평양축전에 참석하여 북측 범민련 인사들과 미리 보고 되지 않은 회의를 한 것에 대해“탈출·동조죄”를 인정한 원심을 무죄취지로 파기한 판결은 그래도 작은 희망을 보게 한다.

 

흐르는 물을 산꼭대기로 끌어올려 뱃길을 만들려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보안법이란 칼을 다시 빼어드는 것은 국민의 뜻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다. 송두율 교수에 대한 무죄판결이 계기가 되어 국가보안법이 없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국가보안법이 반인권, 반통일 악법이기도 하지만 너무 재미없고 너무 자존심 상하는 법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국가보안법, 이제 좀 제발 없애자고 말하고 싶다.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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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에 침 뱉기....

6년째다...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녹을 먹으며

인권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살아온게 6년째다...

 

아주 가끔 TV에 내 얼굴이 나오고 신문에 내 글이 실리는 것이

신기하고 자랑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그런 것들이 부질 없음은 진작 알았지만,

6년째 한결같이 내일을 한심하게 생각하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TV에 나오는 내모습을 좋아하시니

그저 가끔 영감님 기나 살려드렸으면 하고 생각하고는 산다.. 

 

군의문사 유족, 인혁당 유족, KAL 858기 실종자 가족,

대추리 할머니 할아버지들, 십수명의 노충국들, 

조작간첩사건 피해자들, 청송감호소의 감호자들,

농성하던 이주노동자들, 해고되어 거리로 몰린 노동자들,

교도소의 수용자들, 개목걸이를 차고 일할 뻔한 공익근무요원들,

전의경들, 전역병들, 일병 이병 상병 병장들...

 

내가 직접 당한 일만큼 열심히야 했겠냐마는 

뜨거운 태양아래서, 얼음장같은 아스팔트 위에서

그들과 함께 울고 소리치고 뒹굴고 끌려가며 살아왔다...

한 순간도 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한다고 잘난 척 한적 없었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을 알면서도 머뭇거려 본 적 없다...

 

그런데 지금 내게 드는 이 회한은 무언가....

이 끔찍한 배신감은 도대체 무언가...

그들에게 '우리들'이란 존재는

간절하고 절박할 때 호되게 쓰임 당하고,

뜻과 맞지 않을 때는 뒤로 제껴지고,

일이 잘 되면 밥 먹는 자리에도 부를 필요없는,

그런 소모품 같은 것이었던 것인가....

 

난 안다..

시간을 통해 겪어 봐서 알게된 것이다....

무슨 무슨 위원회가 생기고, 무슨 무슨 제도가 생기면

그동안 진심으로 함께 했던 사람들은 뒤로하고

우르르 몰려가 어깨에 힘주고 으시대지만

결국 벽에 부딪히고 나면 다시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오늘 이렇게 내 뒷통수를 치고, 내 발등을 찍었다가도,

내 멱살을 거세게 잡아채고, 육두문자를 내 뱉고도

얼마 안 있어 언제 그랬냐는 듯,

180ml 쥬스 열두병 든 박스를 하나 들고,

명동 구석 천주교인권위 사무실 좁은 계단을 오를 것이란 것을.... 

 

그럼 난...

그들을 향해 퉁명스럽게 몇마디 던지고 나서는

따뜻한 차를 대접하며 그들의 하소연을 두시간 동안 듣고 있겠지...

그리고 다시 해보자고, 힘들지만 같이 해보자고

그렇게 그들을 위로하고 돌려보낼테지....

몇일 밤을 새고 머리를 500바퀴는 돌려야 할 수 있는

난제들을 다시 내 책상위에 던져놓을테지...

 

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번씩, 열세번씩 차오르지만

이 길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내가 여기서 사라지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일들은 다 내가 선택의 결과이다.

그러니 모든 일이 나로부터 발생했고,

내가 부족하고 모자라 이렇게 된 것일 뿐이다...

결국 이런 말들은 내 얼굴에 침뱉기인 것을...

 

차가운 아스팔트 농성장에서 흘린 눈물보다

수백명 넋이 다년간 추모제 국화앞에서 흘린 눈물보다

대추리 집들이 포크레인에 찍혀 무너질때 흘린 눈물보다

국가보안법 십년 수배자 기진이 구속때 흘린 눈물보다

오랜도록 사랑했던 사람에게 밀쳐지고 흘린 눈물보다

오늘 내 책상 옆 파티션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여진이와 성준이 몰래 얼굴 묻고 흘린 눈물이 더 아프고 아프다....

 

마음에게 물어본다

이게 옳은 길인지...

내가 할 수 있는지...

후회하지 않을 건지...

 

마음은 대답해주지 않는다...

내가 이미 답을 알고 있음을 마음은 아는 듯...

 

명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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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중심에서 독립을 외치다

LA 중심에서 독립을 외치다 !!

 

 

전국의 인권활동가들이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통령 직속 기구화를 반대하며 명동성당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고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시민사회단체들 역시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기구 보장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요구는 더욱 강력하다. 이미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의 공식 서한이 17대 대통력직 인수위원회에 전달되었고, 국제앰네스티, 아시아인권위원회, 포럼 아시아 등의 국제인권단체들 역시 대통력 직속기구화를 반대하는 입장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명박 당선자의 지지층으로 알려진 보수성향의 시민단체들도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통력직속화만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고, 헌법학자들을 비롯한 학계의 대표적 인사들도 각종 언론 기고를 통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왜 독립기구여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국가인권기구는 독립기구여야 한다는 유엔 총회의 의결인 파리원칙이 아니더라도, 국가인권기구가 행정부 또는 입법부의 소속일 때 제 역할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경찰은 행자부산하이고, 검찰이나 교도소는 법무부 소속입니다. 여전히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공권력이 자행하는 인권침해에 대해 대통령 소속의 국가인권위원회가 과연 어떤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고 6년이 지났다. 부족한 점도 많치만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6년간 우리 사회의 의식과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나름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국가인권위원회라는 조직의 독립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도 자신의 판단대로 "인권"의 기준을 변화 시킬 수 없으며 "인권"은 정치적 고려 따위에 흔들려서는 안돼는 너무나도 보편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그 "인권"을 보호하고 인권침해를 예방하기 위한 기구가 대통령 소속이 되어서는 안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동성당에서 노숙농성 중인 인권활동가들을 응원하고 한국사회의 변화에 매우 민감한 미국의 한인들에게 국가인권위원회가 왜 독립기구여야 하는지를 알리기 위해 현재 LA에 체류중인 본인은 현지시간 1월 29일 오전 11시 30분부터 12시 30분 까지 LA 한인타운에 위치한 주LA 한국 총영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전국인권활동가들이 작성한 의견서를 민원실에 접수하였습니다. 오후 2시부터 20여 분간 한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대형 마켓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오가는 한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했습니다.

 

명동성당에서 매일 노숙을 하고 촛불을 밝히고 있는 인권활동가들의 노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뜨거운 연대의 응원을 보냅니다. 모두 아프지 말고 끝까지 싸워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을 지켜내고 포기할 수 없는 인권의 가치를 확인합시다. 이자리를 빌어 이번 1인 시위의 언론 조직 등을 도와주신 남가주한인노동상담소 박영준 소장님과 피켓 제작을 도와주신 서광미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김덕진

 

주 LA 한국 총영사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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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인수하지 않을건가?

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인권은 인수하지 않을 것인가?

 

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가 정부조직 전면에 대한 개편안을 발표하자 온 사회가 떠들썩하다. 통일부 폐지는 우리민족의 평화통일을 한반도 주요과제 중 후순위로 밀어내겠다는 것이라 생각되어 우려스럽고 여성가족부의 폐지는 여성들이 여전히 차별받고 있는 사회 구석구석을 보지 못하는 가부장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 같아 안타깝다. 또, 과거사 관련 위원회들 중 일부는 통폐합하고 한시적 기구들은 그 기한이 다하여 "자연사"하면 자동폐지 하겠다는 입장은 조사나 진상규명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정치적 지향과 거리가 있다고 여겨지는 기구들은 무조건 없애고 보겠다는 발상이라 생각되니 지난 수 십 년 동안 진상규명과 명예회복만을 위해 피눈물의 세월을 살아오신 수많은 유족들과 피해자들에게 송구할 뿐이다.

 

특히 독립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두겠다는 방침은 인수위내부의 인권감수성이 "바짝 말라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독립기구인 것이 삼권분립의 원칙에 맞지 않고 헌법에서 국가인권위원회를 독립기구로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통령소속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며 그 직무의 독립성은 보장하겠다는 인수위의 주장은 참으로 논리적이지 못하고 억지스러울 뿐이다. 차라리 인수위의 입장 발표 이후 한나라당에서 발표한 논평이 훨씬 솔직하게 느껴진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노무현 정권시절 지나치게 권력층의 코드에 맞추느라 정권의 시녀노릇을 충실하게 해왔고", "새 정부에서 새로운 위상과 기능으로 출범할 국가인권위원회는 북한주민들의 인권을 신장시키는 파수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라는 주장을 담고 있는 한나라당 부대변인 명의의 논평은 차라리 얼마나 솔직한가? 이제 경찰이나 검찰, 구금시설 등에서 일어나는 각종 인권침해 사안들은 국정운영을 위한 '필요악'이니 정부의 정책은 그것이 반인권적이더라도 군소리 말고 따르는 것이 좋겠고 앞으로는 북한 인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6자 회담이나 남북회담에서 우리가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도록 '인권'을 잘 이용하는 데 앞장서라는 저들의 진심이 담긴 논평이 아닌가 말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마음에 쏙 들게 일을 잘해 온 것만은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 때문에 속 터지고 열 받았던 일이 한두번 있었던 것이 아니지만 국가인권위원회가 우리 사회의 인권신장을 위해 큰 역할을 담당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교도소, 구치소, 유치장 등에서 일어나는, 너무나 빈번하고 일상적이어서 인권을 침해하는 것인지, 침해당하는 것인지도 느끼지 못했던 수많은 부분들이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쪽으로 개선된 것에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이 있다. 군대내의 의료접근권을 보장하고 군 의료시스템의 전면적인 개혁을 권고하였으며 사회복지시설과 정신병원 등의 실태를 조사하고 개선하는 일 등을 통해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노무현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의 인권침해적 독소조항들을 삭제하게 한 것이나 강력한 의지로 밀어붙이던 이라크 파병에 반대 의견을 낸 것,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대체입법을 권고 한 일, 사회보호법, 사형제도, 국가보안법 등 대표적인 반인권 법의 폐지를 권고한 일 등은 정권의 눈치를 봤다기 보다는 "인권"의 언어로 말해왔다고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 모든 것들이 국가인권위원회가 그나마 행정부나 입법부에 속하지 않고 독립기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독립기관이었던 시절에도 정권에 코드를 맞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통령 직속으로 끌어와서도 독립성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는 그동안 부족하나마 발전 해온 우리사회의 인권을 '인수'할 마음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또 인수위와 한나라당 안에는 인권감수성이나 국제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국제사회에서 독립성을 가지고 일하는 것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성'을 건드리는 일이나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의 정중한 요청에 대해 '국내 상황을 모르고 하는 답답한 소리'라는 말로 일축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성을 보장해야한다는 유엔총회 결의사항인 '파리원칙'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국가인권기구가 독립적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 아닌가? 만일 대통령이 국민의 인권을 침해하는 정책을 추진한다면 또, 같은 대통령 소속의 국가정보원이 국민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저질렀다면 과연 대통령 직속 국가인권위원회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국회가 반인권적 법안을 만들려고 하고, 법원이 인혁당 사건같은 판결을 내렸을 때 행정부 소속의 국가인권위원회가 개입하는 것이야말로 삼권 분립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일찍부터 "끔찍한 인권관"을 가지고 있음을 각종 매체를 통해 스스로 밝혀왔다. 도덕성이 바닥이어도 경제를 살리겠다는 말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 인권 감수성 수치가 "0"에 가까울 그가 국가인권위원회를 귀찮고 번거로운 존재로 인식하고 자신의 통제안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상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사회에는 인권과 평화를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힘으로 7년 전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었고 그 마음들이  그래도 이 땅이 살아볼만한 곳이라고 믿게 해왔다. 그 힘과 마음을 다시 하나로 모을 때가 왔다. 인권사회단체에서 강력한 기자회견과 성명을 통해 인수위의 방침에 반대를 표명했고 유엔인권고등판무관, 국제앰네스티, 아시아인권위원회 등 국제사회에서도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명박 당선자와 인수위가 이러한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피와 눈물로 발전시켜온 이 땅의 인권수준은 다시 바닥을 치게 될 것이다.

 

어떤 주장을 펼쳤다가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고 고쳐나갈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다. 잘못한 결정이라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으나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억지로 밀어붙이려 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다. 난 내가 지지했던, 하지 않았던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사람이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누가 보아도 잘못인 국가인권위원회 대통령직속화 추진은 지금 즉시 멈추는 것이 가장 멋있고 올바른 결정일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이명박 당선자와 인수위가 그동안 자신들에게 인권 정책이 없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되고 친기업, 친미국적인 정책이 아니라 친국민, 친인권적인 정책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인권에는 양보도 없고 포기도 있을 수 없다. 국가인권위원회를 독립기구로 지켜내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진정한 국민의 인권보호 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모두 한 마음이 되어야 할 때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통령 직속화는 절대 불가하다는 것을 국회 역시 가벼이 여기지 말고 논의에 임할 것을 촉구한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성 문제가 당리당약을 위한 협상의 조건으로 이용되어서는 않된다. 인권의 개념은 대통령도 변화 시킬 수 없다. 인권을 지키는 일은 생존권을 지키는 일이다. 이 점을 이명박 당선인과 인수위가 깨닫기를 희망해 본다.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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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억원으로도 여덟명의 생명과 32년 세월을 보상할 수는 없다


 245억으로 한많은 세월을 보상할 수 없다

[주장] 인혁당 사건 손배소송 승소에 부쳐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가슴에 품은 큰 뜻을 세상에 펼쳐보지도 못하고, 간첩으로 조작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여덟 명의 목숨 값, 마흔이 채 못 되어 남편을 잃고 간첩의 아내로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하고 살아온 일곱 명의 미망인들의 32년 통한의 세월 값,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쓰고 어깨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살아온 스물여덟 명 자식들의 32년 청춘의 값.


억울하게 먼저 간 동생을 가슴에 품고 산 누이와 큰형님을 잃고 통한의 시간을 보낸 두 명의 형제, 시동생을 따라 하늘로 간 남편 대신 홀몸으로 자식들 건사하면 살아온 두 형수, 그리고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도 삼촌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살아온 일곱 명의 조카 이들의 32년 인생 값. 지난 32년간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다 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흙바닥을 이불삼아 농성을 하며 살아온 이 땅 수십, 수백의 양심들이 살아온 세월의 무게 값.


이 값이 245억원이다. 누가 충분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천문학적인 액수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일흔을 훌쩍 넘긴 노구의 미망인들에게 누가 감히 충분한 보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8부(재판장 권택수)에서 "이른바 인혁당재건위"사건과 "민청학련"사건으로 1975년 4월 9일 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해 사형된 서도원, 도예종, 우홍선, 이수병, 송상진, 하재완, 김용원, 여정남 등 8인 열사들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청구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국가는 이들에게 총 245억원을 배상하라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지난 2007년 1월 23일 같은 법원의 형사합의23부(재판장 문용선)가 이 사건의 재심판결에서 8인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한데 이어, "이른바 인혁당재건위"사건과 "민청학련사건"에 대한 사법적 명예회복이 완성된 것이니, 매우 환영할 일이다.


또 이는 박정희 유신정권이 반민주, 반인권 정권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일이니 그 의미 역시 매우 크다.


그러나 재판과정에서 대한민국 측이 민사상의 소멸시효를 주장하며, 재판을 길게 끌어가려고 했던 사실은 꼭 짚고 넘어가야한다. 지난 1월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난 이후, 검찰은 잘못을 시인하며 항소도 하지 않았다.


법무부 장관의 '소멸시효완성' 주장은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


또, 지난 4월 여덟 분이 사형 당하신 서대문 사형장 터에서 열린 32주기 추모제에 대한민국의 법률상 대표라고 하는 법무부 장관이 추도사를 유족들의 고통을 위로한다고 해 놓고는 '소멸시효완성'을 끝까지 주장한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 재판부도 판결문을 통해 "국민 개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해야하는 피고 대한민국이, 구차하게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워 그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력하게 국가의 비겁한 태도를 꾸짖었다. 재판장의 충고처럼 정부가 먼저 유족들을 위로하고, 그 눈물을 닦아주는 일에 앞장서는 일에 나서는 것이 옳은 모습이 아닌가?


정부는 유족들과 국민 앞에 머리 숙여 사죄하고, 법원의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일흔이 훌쩍 넘은 유족들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전국 곳곳에서 새벽기차를 타고 재판을 방청하러 오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어서 빨리 '항소 포기'를 선언하고, 하루라도 빨리 유족들의 긴 기다림을 끝내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당시 이 사건의 조작에 깊이 관여했던 주요 인사들에게 국가가 직접 '구상권' 등을 청구하여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책임져야할 이들이 분명히 있는데, 또다시 국민들에게 그 부담을 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인혁당 선생들이 평생 가슴속에 담고 사신 평화통일과 이 땅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이 분들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 중대한 작업이 우리들의 과제로 남아있다. 이제 군사독재정권은 없지만, 자본과 권력은 여전히 민중의 편이 아니다.


이 땅은 아직도 둘로 갈라져 있고, 강대국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한반도를 좌지우지 하려고 한다. 신자유주의 정책과 한미 FTA 체결로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우리 민중들,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에게 착취당하고 차별당하는 노동자들, 명분 없는 전쟁에 국가가 동참한 이유로, 멀리 이국땅에서 안타깝게 죽어간 이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인혁당 열사들 살아있다면 민중의 편에 섰을 것


인혁당 여덟 분의 열사들이 살아계셨더라면, 분명 민중들의 편에 서서 사셨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우리가 이 분들의 정신을 진정으로 계승하는 것은 추모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이분들의 이름을 딴 기념사업회 따위를 화려하게 만드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분들의 정신을 이어 받아 현실사회에서 여전히 억압받고, 차별받는 이들의 편에 서서 정의와 평화를 지키는 일에 함께 하는 것이, 열사들이 우리들에게 바라는 진정한 정신계승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17인의 형사재심과 손해배상청구소송이 남아있다. 이분들 역시 모진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하고, 피를 토하며 옥살이를 견디어 내신 분들이다. 이미 연로하시어,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법원은 이분들의 재심을 개시하고, 사법적 명예회복을 이루는 일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현재 인혁당 재건위 사건 외에도 권위주의정권시절 발생한 수많은 조작 간첩 사건들에 대한 재심이 청구되었고, 그 중 일부는 재판 중에 있다. 이 사건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역시 더 이상 늦어져서는 안 된다. 사법부와 검찰은 더 이상 이분들께 죄 짓지 말아야한다. 괜한 시간 끌기나 억지스러운 주장으로 진실을 은폐하는 일에 동참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당부한다.


이번 판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그대로 보여줘

오늘의 결과는 그동안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싸워 오신 유족들의 승리이자, 인권의 승리이다. 물론, 이번 손해배상판결로도 지난 32년간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왔던 우리 유족들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죄를 받았지만, 8인의 열사들은 살아 돌아 올 수 없고, 배상을 받아도 유족들은 여전히 밥알을 모래알처럼 씹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범인 국정원이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들의 고문․조작 사실을 밝혔고, 법원이 형사재심 무죄판결에 이어,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유족들에게 승소 판결을 한 것은, 유족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진실은 아무리 감추어도 언젠가는 드러나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이번 판결이 그대로 보여주었다.


유족들은 이미 승소 시, 배상금액의 상당액을 여덟 분 열사들의 정신을 계승하며, 우리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이 땅의 인권과 평화를 지키는 일에, 내어 놓기로 약속한 바 있다. 참으로 아름답고 용기 있는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먼저 가신 열사들에 버금가는 신념을 가진 유족들의 결정에 존경과 박수를 보낸다. 우리들은 이 결정을 존중하고, 그 사업이 아름답게 진행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혁당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의 유족들, 사건 관련자들, 그리고 그 곁에서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리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살아온 이들, 또 인혁당의 진실과 그 정신을 이미 알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양심들에게, 누구보다 인혁당 가족들을 근거리에서 보아온 활동가의 자격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오늘의 승리는 우리 모두의 승리이고, 대한민국 역사의 승리이다. 앞으로도 이런 승리, 진실의 승리가 계속 이어지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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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빨갱이가 아닌 이들을 위한 첫번째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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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재건위 민주열사 32주기 추모제에 부쳐 -

  

사형 8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5명, 징역 15년 3명, 징역 5년 1명... 이는 소위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관련자 24명에게 지난 1975년 4월 대한민국의 대법원이 내린 최종 선고 결과이다. 알려진 대로 사형을 선고 받은 여덟 분은 대법원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고, 일곱 분은 고문과 수감생활의 후유증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 살아계신 분들도 대부분 일흔을 넘겼고, 아직도 고문의 흔적들을 온몸에 감춘 채 살아가고 있다. 또, 당사자들보다도 더 가혹한 세월을 살아온 유족들이 있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고, 아버지를 잃은 것도 서러운데, 공안기관의 감시를 받으며,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아오기를 30년.... 재심을 신청하고, 무죄가 결정나는 그 순간까지도 노구를 끌고, 밀며, 대구와 서울을 오갔던 어머님들... 빨갱이 자식이라는 놀림에 몰래 눈물을 흘려야 했던 아들, 딸들.. 그들의 상처를 우리가 어찌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30년의 세월을 넘겨, 이제 그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났고, 세상은 그들에게 손가락질 대신 카메라 플래쉬와 명예회복이라는 월계관을 씌워주었지만, 그것으로 그들의 세월을 보상할 수 있을까? 불행한 시대에서 내려진 어쩔 수 없는 판결이었다고, 이제라도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고, 검찰은 항소를 포기했으니 사법부와 검찰이 이들에게 지은 죄는 물을 수 없는 것인가? 다시는 권력에 의해 이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사설 몇 줄을 쓰면, 공권력과 공모하여 조작간첩 사건을 만 만들었던 언론의 과오들은 씻겨나가는 것인가? 과거란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서, 세월의 먼지 속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인가? 누가 이 대답을 해 줄 수 있을까.


나는 2002년 12월 서울중앙지법 기자실에서 소위 ‘인혁당 사람들’을 처음 만났다. 유족들과 관련자 선생들은 물론 문정현 신부와 함세웅 신부도 그날 처음 보았다. 75년 사형집행이 있고서, 27년 만에 재심을 청구하는 사람들은 상기되어 있었지만, 매우 진지했다.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미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주도로, 고문과 날조로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을 밝혀냈지만, 수구 언론과 정치세력들은 법원에서 내린 결정을 고작 ‘위원회’ 따위가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이라며 인정조차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인혁당 유족들과 관련자선생들, 변호인단과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으로 구성된 ‘인혁당사건진상규명과명예회복을위한대책위원회’는 의문사위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고심 끝에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을 법원에 청구하기로 결정했다. 유신정권의 세례를 받은 수구세력의 억지주장을 틀어막고,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정한 명예회복을 위해서는 재심을 통해 사법적인 명예회복을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재심을 청구한지, 3년이 지나서야 법원은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재심을 청구하고, 재심 개시를 결정하는 3년의 시간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는 인혁당 선생들은 국가를 전복하려던 반국가단체의 수괴가 아니라, 유신헌법으로 파괴된 헌법정신을 바로세우고 군사독재정권을 종식시키려는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이들을 ‘민주화운동관련자’라고 칭하며 명예회복조치를 결정했다. 또, 국정원이 내부에 만든 과거사청산기구인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고문과 불법행위를 총해 조작해낸 사건이라는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재심개시 결정이 나던 2005년 12월 27일을 앞두고, 난 두 개의 성명서를 작성했다. 하나는 “법원의 인혁당재건위사건 재심개시결정을 환영한다”라는 제목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죽었다. 법원의 인혁당재건위사건 재심청구 기각결정을 규탄한다”라는 제목이었다. 이미 조작간첩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함주명 선생이 법원의 재심을 통해 2005년 7월 무죄판결을 받은 전례가 있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재심개시결정전까지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모두 준비했던 것이다. 현수막도 두 종류였고, 보도자료도 두 가지로 만들었다. 재심은 개시되었다.


1년 가까이 지리한 공판이 계속되었다. 16회의 공판에 40여명의 증인이 출석했고, 수만 장의 자료가 법정을 드나들었다. 새로운 증언들도 많이 나왔다. 인혁당 유족들처럼 30년의 세월을 지나 머리카락이 하얗게 쇤 당시의 교도관들은 하재완 선생이 중앙정보부에 불려갔다가 업혀서 들어오고, 고문에 의해 탈장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치료를 받은 사실, 검찰관의 조사 시에도 중앙정보부 직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조사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 등을 증언했다. 사형집행에 입회했던 한 교도관은 집행직전 그들은 “적화통일만세” 따위의 구호를 외치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유신으로 훼손된 헌법정신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했으며, “가족들을 보고 싶다”고 했다는 기억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또, 당시 공판에 서기로 참여했던 이는 당시의 공판기록은 모두 수기로 작성된 것이며, 두 명의 서기가 검찰의 공소장에 공판 내용을 메모해 두었다가 재판이 끝나 후, 기억을 되살려 공판 조서를 작성했다고 고백했다. 이는 왜 검찰의 공소장과 공판조서가 똑 같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명백히 보여주는 증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재심재판에서 검찰이 보여준 태도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검사는 참고인으로 나온 증인들에게 항상 똑같은 질문만을 던졌다. 그것은 검찰관의 조사 시에 고문이나 가혹행위가 있었냐는 것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는 당시 수사과정에서 고문과 불법행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검찰은 직접 고문을 하거나 강압수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인들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밖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이미 수 십일을 남산 중앙정보부의 지하실에서 고문과 협박을 당한 이들이 중정 직원들이 강제로 암기시켰을 내용을 검찰관 앞에서는 그대로 줄줄 외웠을 것이기 때문에, 아마 검찰은 강압수사를 하지 않아도 원하는 진술을 얻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거기에 허리에는 총을 차고, 시뻘건 눈을 번뜩였을 서슬 퍼런 ‘중정 직원’이 포승줄에 꽁꽁 묶인 ‘인혁당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지난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재판장 문용선)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 소위 “인민혁명당재건위사건”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의 재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변호인단이 우려했던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의 일부 무죄도 없이 명명백백한 무죄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법정문을 열고나오며 오열하는 유족들과 그 유족들을 부둥켜안고 함께 통곡하는 문정현 신부를 향해 기자들의 플래쉬는 쉴 새 없이 터졌다. 기자들은 스스로 포토라인을 만들었고, 그 라인을 넘는 기자들에게는 핀잔이 이어질 정도였다. 그동안의 재판이나 추모제에서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정치인들, 또 그들과의 친분을 자랑하던 이들도 기자회견 현수막 뒤에 서고 싶어 했다. 지난 30여년 누구도 거들 떠 보지 않았던 “인혁당 사모님”들을 부축하려고 너도나도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은 방송과 일간지에 지겹도록 비춰졌다. 저들이 10년만 더 빨리, 5년만 더 빨리, 우리 어머니들의 어깨를 부축했다면, 오늘이 더 빨리 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했다. 좋은날, 모두가 함께 기뻐하면 그만인데, 난 왜 올해 말에 대통령선거가 있고, 2008년에는 총선이 있다는 것이 먼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나는 무죄선고 전날인 1월 22일 밤에도 지난 2005년 재심개시 결정 때처럼 두 개의 성명서를 썼고, 두 개의 현수막을 준비했다. 무죄선고 기자회견을 진행하며, 또 하나의 현수막을 펼치지 않아도 되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현수막이 두 개란 것을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만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지었다.


인혁당 사건의 무죄판결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법원이 판결문을 통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인혁당 사건의 무죄 판결은 곧 유신정권에 대한 유죄판결과 같다. 긴급조치나 유신헌법에 대한 위헌성을 따지는 다툼은 앞으로 필요하겠지만, 이미 이 판결로 그 결과를 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또, 군사독재정권시절 고문과 불법으로 조작된 수백 건의 사건들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고 명예회복을 이루는 날이 한걸음 가까워졌다. 인혁당 사건 만큼 가슴 아프고, 눈물 나는 이야기들이 더 얼마나 많이 있겠는가? 국가가, 법원이, 검찰이 흘리게 한 국민의 눈물이다. 이제 그 눈물을 닦아주는 일, 통곡을 웃음으로 바꾸는 일만 남았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한가지는, 바로 사형제도의 반인권성과 부당함이다. 법의 이름을 빌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 인혁당 사건이 보여주고 있다. 빨갱이의 아내와 자식들은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이제 그 멍에를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러나 무죄를 받아도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이 다시 살아 돌아 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국가가 국민에게 가하는 이 지독한 형벌이, ‘사람을 죽였으니, 똑같이 죽어야 한다’는 “보복감정” 때문에 아직도 유지 되고 있다. 범죄 억지력도, 사회방위를 위해 1%의 보탬도 되지 않으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는 사형제도 역시 마땅히 없어져야 할 제도이다.


인혁당 사건의 무죄판결은 끈질기게 싸워온 유족들의 승리이자, 인권의 승리이다. 변호인단이 오랜 시간 공을 들였고, 문정현 신부를 비롯한 종교계, 시민사회의 인사들이 참으로 눈물겹게 이일에 매달려 왔다. 또, 당시 이 사건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강제추방당하기 까지 한 조지 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라는 두 명의 파란 눈의 투사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인혁당을 잊었을 것이고, 우리는 인혁당 선생들께 용서를 구할 기회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분들 모두에게 존경과 감사의 박수를 보내야 마땅하다. 그분들은 이 땅의 양심이었고, 이 땅의 정의였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세상이 잘 모르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일을 위해 수고한 이들을 기억하고 싶다. 국가기록원에도, 검찰에도, 법원에도, 군 검찰단에도 없다고 했던 1974년 당시의 수사기록들과 공판조서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계룡대 어디 문서 창고에서 극적으로 찾아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무죄판결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미약한 권한과 부족한 인력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으로 매달려 조사해준 의문사위 조사관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수만 장의 자료를 꼬박 두 달 동안 끼고 앉아 분류하고, 목록을 만들고, 제목을 붙여주었던, 지금은 변호사가 되어있는 당시 한 사법연수생, 서당 훈장님이 와서 보아도 알아 볼 수 없을 듯 손으로 갈겨 쓴 한문공판조서 수천 장을 옥편을 찾아가며 눈이 빠져라 한글파일로 입력 작업을 하여, 검찰과 변호인, 재판부의 기록 검토 시간을 대폭 단축시켜 준 전․현직 천주교인권위원회의 활동가들, 감히 인혁당의 ‘인’자도 꺼내기 힘들었던 시절, 이수병 선생의 커다란 영정을 들고 거리행진을 하며 인혁당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고 했던 이수병기념사업회 인사들, 칠곡 현대공원에 있는 인혁당 선생들의 묘지를 지키기 위해서, 영남대와 경북대에 있던 인혁당 선생들의 비문을 지키기 위해서 몽둥이를 들어야 했던 대구의 청년들, 매년 4월 9일 추모제를 준비하느라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몸과 마음이 땀투성이, 먼지투성이가 되었던 수많은 실무자들... 모두가 한 마음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나고 나니 감회가 새롭고, 미소 짓게 되지만, 순간순간 치열하지 않았을 때가 없었고, 숨 가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인혁당 사람들’이 세상과 공감하게 되었음이 눈물겨울 뿐이다.


지난 7일 대구에서 열린 추모제와 현대공원 묘역을 다녀왔다. 4월 9일(월)에는 서울 옛 서대문 형무소 터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 민주열사 32주기” 추모제가 열린다. 32년만에 처음으로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의 허락을 받아 사형장과 옥사를 배경을 추모제를 하게 되었다. 또, 법무부 장관이 정부를 대표해서 추도사를 하러 오겠다고 한다. 우리는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기 때문에 아쉬운 감이 없지는 않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동안은 ‘빨갱이’들의 추모제였고, 이번에는 아무런 죄가 없는 ‘민주투사’, ‘통일열사’들의 추모제라 다른 모양이다. 이러한 일들이 이번 추모제를 풍성하게 하여 우리 어머님들의 마음이 조금 더 훈훈해 진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추모제가 월요일 한 낮이고, 중요한 많은 일들이 있겠지만, 이번 한번쯤은 추모제에 와서 인혁당 어머님들의 눈물을 보아달라고 말하고 싶다. 들어서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보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으니까...


우리에게는 이제 이 분들이 평생 꿈꾸어 오셨던 민주주의를 완성하고, 평화로운 한반도의 통일을 이뤄야하는 과제가 남았다. 독선과 오기로 가득찬 ‘가짜 민주주의’ 말고, 진짜 민주주의 말이다. 외세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고, 7천만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는 그런 평화 통일 말이다. 민주주의와 통일 위한 7천만 민족의 ‘인혁당’을 창당하자 !!


인혁당 민주열사 32주기 추모제는 우리의 마음을 모아 만들어 갑니다.

후원금을 보내 주실 곳은 [농협 027-12-092791 예금주 이돈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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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출석 요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몇번째인지...

평택에서 연행된게 2번....

서울에서 소환 조사 받은 건 벌써 4번째...

몇군데의 경찰서를 가본거지...

평택서, 수원중부서, 안성서, 수원남부서, 종로서, 성북서...

지난 1년간 수사과 지능사수사 1팀 형사들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천주교인권위원회는 무슨 일을 주로 합니까?"란 질문으로 시작된 조사를 몇번을 받은 것인지... ㅋㅋㅋ

그런데도 아직 구치소에 가지 않고, 집에서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운이 좋은 것이라고 해야하나....

작년 9월 24일 광화문 누각에 올라가 평택미군기지 반대, 한미FTA를 외친

여섯명의 동지를 내가 사주했다고 하네... 

내가 그리 대단한 사람인가?

지난번에는 천명의 시민들이 도로로 뛰어나가, 미대사관 앞까지 간것이

내가 "청와대로 가자!"라고 외쳤기때문이라고 하더니... ㅋㅋ

그들에겐 화려할대로 화려한 나의 "전과"가 아주 달콤한 간식거리겠지...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정말 지겹다...

아직도 보안관찰법때문에 정기적으로 불려다니는

장기수 선생들은 이 나라가 얼마나 싫을까...?

세상이 허락한다면,

진짜 떠나고 싶다... 이 땅, 이 나라....

 

명랑

 

* 이런 넋두리 할데가 왜 여기밖에 없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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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덜 소극적 투쟁"

3월 8일부터 시작되는 한미 FTA 8차 협상에서 대부분의 쟁점들이 타결될 것이라고 하고,

동지들은 총력 투쟁을 결의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난 조금 덜 소극적인 투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California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Local 대형마트 몇 곳(Albertson's, Ralph's, Vons, etc)을 돌며, 조금 덜 소극적인 게릴라 시위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운전을 담당해주던 내 사촌 동생 Sean은 작년에 UCLA에 입학한 집안의 희망인데, 미국 시민권을 얻기 위해 얼마전 시험과 인터뷰를 마쳤기 때문에, 운전만 시켰다. 사진 촬영은 미국 어학연수를 위해 비자를 받는 과정에서 철저한 ‘반미주의자’가 된 내동생 김경진이 맡았다. 그는 굉장히 설레였다고 말했다. 특히 내가 일부러 CCTV 카메라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겠다고 하자, 진열장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오가며, 경비원이 오나 망을 봐주었다. 다행인지 마켓들에서는 잠시 멈춰서 쳐다보는 이들은 있었지만, 시비를 거는 미국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FTA가 뭔지 관심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미국 동네 마켓에서도 엄청난 양의 고기들을 볼 수 있다. 대부분 포장육인데, 그 가격이 매우 싸다. 내 생일날 미국에 있는 온 가족들이 모여 LA 갈비 BBQ 파티를 했는데, 고기를 다 먹은 후 할머니로부터 충격적인 증언을 들어야 했다. 고기를 양념하기전, 한조각한조각 흐르는 물에 손으로 박박비벼 닦아야 했다는... 뼛가루가 굉장히 많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이강택 피다가 찍어온 미국 도축장의 전기톱을 보았던 나는, 혹시나 먹게 되었을지 모를 뼛가루를 씻어내기 위해 한국 마켓에서 4.3불에 판매되는 참이슬을 줄창 들이 부었다. 미국으로 취업 이민을 온지 1년이 조금 넘은 내 친구는, 미국에 오고 얼마지나지 않아, 부인과 함께 쇠고기를 사다가 배터지게 먹었었다는 말을 했다. 한국에서는 비싸서 엄두도 못 내던 쇠고기를 양껏 먹을 수 있다는 현실에 기뻐하는 친구에게 미국 쇠고기는 광우병 위험이 있다더라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속삭여 주었다. 

 




미국에는 우리나라의 재래시장이나 동네슈퍼 같은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7/11 편의점들과 술과 담배를 파는 Liqour store들이 있을 뿐이다. 대부분 한 동네에 서너개씩 있는 대형마트에서 장보기가 이루어진다. 매우 싱싱해 보이는 과일과 채소들은 꽤 탐스럽다. 그러나, 이미 오렌지나 캘리포니아 메론 더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이 생겨버린 마당에 이 녀석들이 마냥 탐스럽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정말 엄청난 종류의 가공 육류들이 마켓을 가득채우고 있다. 칠면조, 닭, 소, 돼지 등으로 만든 쏘세지와 햄... 베이컨과 각종 부위별 가공육... 육류의 살과 피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포장방식은 사람들에게 “저것들을 집에 가져가서 불에 구워 먹고싶다”는 충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듯 하다. 저런 것들도 우리 동네 슈퍼에서 팔리게 되는 날이 올 것 같아 두렵다.

 




인권활동가지만 언제나 연극과 영화에 대한 로망을 품고 있는 나에게 스크린쿼터를 사수하는 싸움은 매우 절실했다. 많은 배우들과 감독들이 1인 시위를 하는 것이 화제가 되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한미 FTA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한국영화는 미국에게 제물로 바쳐지고 말았다. 한국영화의 수준이 매우 높아졌고, 대박 영화도 늘어났지만, 여전히 한국영화의 제작 환경은 열악하며, 대박나는 몇몇 영화를 제외하고는 아무리 졿은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10개 미만의 스크린에서 일주일 미만동안 걸렸다가 내려지는 일이 다반사이다. 미국 최대의 비디오 대여점 체인인 Blockbuster Video는 그 이름에서부터, 헐리우드 대작들의 돈 냄새가 난다.. 지금 미국에서는 “300”의 열풍이 대단하다. 글레디에이터보다 큰 스케일과 재미있는 스토리라며 연일 매진이 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개봉했을 텐데... 헐리우드 초국적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이 쏘아대는 문화침략 미사일들을 거부한다.

 




글리벡 싸움을 보기전까지는 제약회사들의 횡포라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었다. 미국에서는 그냥 마켓에서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는 약의 종류가 엄청나다. 그리고 그 가격이 매우 싼데, 150알이 들어있는 타이레놀이 9불 정도에 판매되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에서 비싸게 팔리고 있는 이 약이 매우 싸구려 약이라는 생각이 안들 수가 없다.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속알머리 탈모'가 심각해져서 ‘프로페시아’라는 대머리인들의 ‘꿈의 약’을 사먹으려고 피부과를 찾았을 때, 처방전 한번에 15,000원, 약 28알에 66,000원이라는 소리를 듣고 눈물을 머금은 적이 있다. 이 부분의 FTA 협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우리와 늘 함께 했던 의사, 약사님들이 흰 가운을 입고 거리에 나와 ‘절대안돼’라고 외치시는 것을 보면서, FTA 협상이후 우리는 비싼 의료비와 약값 때문에 죽어갈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니, 끔찍하기만하다. 우리한테 비싸게 팔고, 자기나라에는 싸게팔고.. 아 진짜 아픈 사람 목숨가지고 장사를 하겠다는 심보.. 근데 그걸로 돈은 엄청 벌 수 있다는 걸 너무 많은 놈들이 알고 있어....


 

교육시장의 개방은 사실 매우 두려운 일이다. 80~90년대 한국, 대만, 일본 등지에서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미국으로 유학왔다. 유학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간 그 엘리트들은 대부분 철저한 친미주의자들이 되어, 친미적인 정책을 입안하는 일에 앞장서고는 했다. 그들을 비꼬는 말로 “Banana Republic” 이라는 말이 있다. 겉은 노란데, 까보면 속은 하얗다는 뜻이다.  물론, '바나나 리퍼블릭'은 미국의 유명 옷 브랜드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가뜩이나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고, 돈만 조금 있으면 자식들을 미국에 유학을 보내려고 안달하는 부모들이 넘쳐나고, 영어마을이네, 영어수업이네 하면서 영어 맹신을 제도적으로 양산하고 있는 대한민국에, 미국학교들이 들어와서 영어로 교육하고, 본토 대학과 교환수업을 하고, 대학원이나 MBA 진학에 특전을 준다고 하면... 참 많이들 좋아하겠다.

엄청나게 넓은 UCLA의 캠퍼스에서는 UCLA라는 로고를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중에서 버클리를 이제 제RL고 1등이 되었다는 UCLA의 교정을 돌아봤다. 그래도 대학인지라, 많은 내가 든 종이에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곤 하였다. 학생회에서 부착한 것으로 보이는 ‘3.8 세계 여성의 날’ 행사에 관한 선전물들이 곳곳에 붙어 있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미국의 대학과 학교들이 한국 땅에 캠퍼스를 차리는 거... 시럿 !!!

 

한미 FTA 저지 싸움에 혼신의 힘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 항상 스스로에게도 죄스러웠다. 부지런히 밀린 일들을 해놓지 못했던 게으름을 탓할 수도 있었겠지만, 평택싸움에서 얻은 영광의 상처들이 날 조금은 위축되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누가 대통령이 되던, 우리는 싸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싸우기를 즐기기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싸우지 않고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어디서든 듣게 되지만, 난 도대체 무엇이 좋아 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지하철을 타고 천안까지 갈 수 있고, 핸드폰으로 TV를 볼 수 있으면, 그게 세상이 좋아진 것일까... 벌써 두달이 훌쩍 지난 2007년...  열심히 살아야할 한해가 아니던가... 

 

명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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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적" 투쟁....

부득이한 가정사때문에 쳐다보기도 싫은 미국 땅을 1년에 한번씩 밟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거기에 사연이 하나 더 겹쳐 하와이를 먼저 밟고, LA로 옮겨 가게 되었습니다.

 한창 바쁘고, 투쟁하는 시기에 혼자 휴가를 떠나오게 되어 마음이 무겁던 차에,

 "소극적 투쟁"이라는 제 마음속의 지향점을 미국에서도 적용시켜 보기로 하였습니다..

 

 
하와이 최대의 쇼핑몰 주차장을 시작으로, 명품매장 앞, 에스칼레이터,
우리 선조들이 일제때 강제징용으로 끌려와서 모진 노동으로 죽어간 파인애플 농장앞,
유명한 관광명소들, 와이키키 해변가 등에서 FTA와 전쟁에 반대하는
깜짝 1인시위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특별히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피켓을 잘 접어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시간이 나면 펼쳐서 들고 서있거나, 들고 길을 걷거나,
차의 유리창에 끼워두거나 하면서 그냥 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와이를 거쳐, LA, 라스베가스로 이어질 제 소극적 투쟁의 시작을 알립니다..

 
루이비통 경비원에게 끌려갈 뻔도 했지만,
버스정류장에 서 있을때는, 버스타고 가던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도 했답니다.
간혹 질문을 던지는 야속한 이들에게 유창한(?)영어로 설명하느라 진땀도 빼고 있습니다..
일상속에서 삶의 일부로 이어지는 작은 투쟁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돌아겠습니다..

평택미군기지확장 저지 싸움에 많은 어려움이 생겼고,
한미 FTA 저지는 고사하고, EU와의 FTA까지 추진되고 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우리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지만,
중동의 모래사막으로 날아간 대한민국 군대는 돌아올 생각을 안합니다.
각종 개혁 입법들은 또, 국회 창고로 처 박힐 위기에 있고,
민중들의 삶은 하루하루 더 절박해 지기만 합니다..
그래도 살아야지요...
다들 좀 더 열심히 살아보는 수 밖에요...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어도, 이 상황이 나아질 수 있을까요..?
그러나, 한걸음에도 세상은 반드시 달라집니다..
그 달라짐이 드러나는데에 시간이 걸릴 뿐이겠지요..
명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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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람들.. 세상과 공감

이철수 화백이 인혁당 사형수 여덟분을 그리고, 써서 유족들에게 선물한 작품 인혁당 사람들.. 세상과 공감

사형 8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5명, 징역 15년 3명, 징역 5년 1명... 이는 소위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관련자 24명에게 지난 1975년 4월 대한민국의 대법원이 내린, 최종 선고 결과이다. 알려진 대로 사형을 선고 받은 여덟 분은 대법원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고, 일곱 분은 고문과 수감생활의 후유증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 살아계신 분들도 대부분 일흔을 넘겼고, 아직도 고문의 흔적들을 온몸에 감춘 채 살아가고 있다. 또, 당사자들보다도 더 가혹한 세월을 살아온 유족들이 있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고, 아버지를 잃은 것도 서러운데, 공안기관들의 감시를 받으며,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아오기를 30년.... 재심을 신청하고, 무죄가 결정나는 그 순간까지도 노구를 끌고, 밀며, 대구와 서울을 오갔던 어머님들... 학창시절 짝궁이 빨갱이 자식이라고 놀리며 얼굴에 침을 뱉고, 선생에게까지 모욕을 받으며 살아온 아들, 딸들.. 그들의 상처를 우리가 어찌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30년의 세월을 넘겨, 이제 그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났고, 세상은 그들에게 손가락질 대신 카메라 플래쉬와 명예회복이라는 월계관을 씌워주었지만, 그것으로 그들의 세월을 보상할 수 있을까? 불행한 시대에서 내려진 어쩔 수 없는 판결이었다고, 이제라도 무죄를 선고했고, 항소를 포기했다는 것으로 사법부가, 검찰이 이들에게 지은 죄는 다 씻어지는 것인가? 다시는 권력에 의해 이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사설을 쓰면, 언론이 공권력과 공모하여 조작사건을 만들었던 지난 시절의 과오들은 씻겨나가는 것인가? 과거는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서, 세월의 먼지 속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인가? 누구에겐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2002년 12월 서울중앙지법 기자실에서 소위‘인혁당 사람들’을 처음 만났다. 유족들과 관련자 선생들은 물론 문정현신부와 함세웅신부도 그날 처음 보았다. 75년 판결이 있고나서, 27년 만에 재심을 청구하는 모든 사람들은 상기되어 있었지만, 매우 진지했다.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미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주도로, 고문과 날조로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을 밝혀냈지만, 수구 언론과 정치세력들은 법원에서 내린 결정을 고작 ‘위원회’ 따위가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이라며 인정조차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인혁당 유족들과 관련자선생들, 변호인단과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으로 구성된 인혁당사건진상규명과명예회복을위한대책위원회는 의문사위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고심 끝에,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을 법원에 청구하기로 결정했다. 유신정권의 세례를 받은 수구세력의 억지주장을 틀어막고,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정한 명예회복을 위해서는 재심을 통해 사법적인 명예회복을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재심을 청구한지, 3년이 지나서야 법원은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재심을 청구하고, 재심 개시를 결정하는 3년의 시간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는 인혁당 선생들은 국가를 전복하려던 반국가단체의 수괴가 아니라, 유신헌법으로 파괴된 헌법정신을 바로세우고 군사독재정권을 종식시키려는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이들을 ‘민주화운동관련자’라고 칭하며 명예회복조치를 결정했다. 또, 국정원이 내부에 만든 과거사청산기구인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되었고, 고문과 불법행위가 있었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재심개시 결정이 나던 2005년 12월 27일을 앞두고, 난 두 개의 성명서를 작성했다. 하나는 “법원의 인혁당재건위사건 재심개시결정을 환영한다”라는 제목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죽었다. 법원의 인혁당재건위사건 재심청구 기각결정을 규탄한다”라는 제목이었다. 이미 조작간첩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함주명 선생이 법원의 재심을 통해 2005년 7월 무죄판결을 받은 전례가 있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재심개시결정전까지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모두 준비했던 것이다. 현수막도 두 종류였고, 보도자료도 두 가지로 만들었다.

1년 가까이 지리한 공판이 계속되었다. 16회의 공판에 40여명의 증인이 출석했고, 수만 장의 자료가 법정을 드나들었다. 새로운 증언들도 많이 나왔다. 인혁당 유족들처럼 30년의 세월을 지나 머리카락이 하얗게 쇤 당시의 교도관들은 하재완 선생이 중정에 불려갔다가 업혀서 들어오고, 고문에 의해 탈장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치료를 받은 사실, 검찰관의 조사시에도 중앙정보부 직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조사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 등을 증언했다. 사형집행에 입회했던 한 교도관은 집행직전 그들은 “적화통일만세” 따위의 구호를 외치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유신으로 훼손된 헌법정신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했으며, “가족들을 보고 싶다”고 했다는 기억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또, 당시 공판에 서기로 참여했던 이는 당시의 공판기록은 모두 수기로 작성된 것이며, 두 명의 서기가 검찰의 공소장에 공판 내용을 메모해 두었다가 재판이 끝나 후, 기억을 되살려 공판 조서를 작성했다고 고백했다. 이는 왜 검찰의 공소장과 공판조서가 똑 같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명백히 보여주는 증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재심재판에서 검찰이 보여준 태도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검사는 참고인으로 나온 증인들에게 항상 똑같은 질문만을 던졌다. 그것은 검찰관의 조사 시에 고문이나 가혹행위가 있었냐는 것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는 당시 수사과정에서 고문과 불법행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검찰은 직접 고문을 하거나 강압수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인들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밖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이미 수 십일을 남산 중앙정보부의 지하실에서 고문과 협박을 당한 이들이 중정 직원들이 강제로 암기시켰을 내용을 검찰관 앞에서는 그대로 줄줄 외웠을 것이기 때문에, 아마 검찰은 강압수사를 하지 않아도 원하는 진술을 얻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리고 서슬 퍼런 중정 직원이 포승줄에 꽁꽁 묶인 ‘인혁당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지난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재판장 문용선)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 소위 “인민혁명당재건위사건”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의 재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변호인단이 우려했던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의 일부 무죄도 없이 명명백백한 무죄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법정문을 열고 나오며 오열하는 유족들과 그 유족들을 부둥켜안고 함께 통곡하는 문정현 신부를 향해 기자들의 플래쉬는 쉴 새 없이 터졌다. 기자들은 스스로 포토라인을 만들었고, 그 라인을 넘는 기자들에게는 핀잔이 이어졌다. 그동안의 재판이나 추모제에서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유력 정치인들, 또 그들과의 친분을 자랑하던 이들도 기자회견 현수막 뒤에 서고 싶어 했다. 지난 30여년 누구도 거들 떠 보지 않았던 “인혁당 사모님”들을 부축하려고 너도나도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은 방송과 일간지에 지겹도록 비춰졌다. 저들이 10년만 더 빨리, 5년만 더 빨리, 우리 어머니들의 어깨를 부축했다면, 오늘이 더 빨리 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했다. 좋은날, 모두가 함께 기뻐하면 그만인데, 난 왜 2007년 말에 대통령선거가 있고, 2008년 초에는 총선이 있다는 것이 먼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나는 전날인 22일 밤에도 지난 2005년 재심개시 결정 때처럼 두 개의 성명서를 썼고, 두 개의 현수막을 준비했다. 무죄선고 기자회견을 진행하며, 또 하나의 현수막을 펼치지 않아도 되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현수막이 두 개란 것을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만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지었다.

인혁당 사건의 무죄판결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법원이 판결문을 통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인혁당 사건의 무죄 판결은 곧 유신정권에 대한 유죄판결과 같다. 긴급조치나 유신헌법에 대한 위헌성을 따지는 다툼은 앞으로 필요하겠지만, 이미 이 판결로 그 결과를 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또, 군사독재정권시절 고문과 불법으로 조작된 수백 건의 사건들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고 명예회복을 이루는 날이 한걸음 가까워졌다. 인혁당 사건 만큼 가슴 아프고, 눈물 나는 이야기들이 더 얼마나 많이 있겠는가? 국가가, 법원이, 검찰이 흘리게 한 국민의 눈물이다. 이제 그 눈물을 닦아주는 일, 통곡을 웃음으로 바꾸는 일만 남았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한가지는, 바로 사형제도의 반인권성과 부당함이다. 법의 이름을 빌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 인혁당 사건이 보여주고 있다. 빨갱이의 아내와 자식들은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이제 그 멍에를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러나 무죄를 받아도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이 다시 살아 돌아 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국가가 국민에게 가하는 이 지독한 형벌이, ‘사람을 죽였으니, 똑같이 죽어야 한다’는 “보복감정” 때문에 아직도 유지 되고 있다. 범죄 억지력도, 사회방위를 위해 1%의 보탬도 되지 않으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는 사형제도 역시 마땅히 없어져야 할 제도이다.

인혁당 사건의 무죄판결은 끈질기게 싸워온 유족들의 승리이자, 인권의 승리이다. 변호인단이 오랜 시간 공을 들였고, 시민사회, 종교계의 인사들이 참으로 눈물겹게 이일에 매달려 왔다. 또, 당시 이 사건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강제추방당하기 까지 한 조지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라는 두 명의 파란 눈의 투사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인혁당을 잊었을 것이고, 우리는 인혁당 선생들께 용서를 구할 기회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분들 모두에게 존경과 감사의 박수를 보내야 마땅하다. 그분들은 이 땅의 양심이었고, 이 땅의 정의였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세상이 잘 모르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일을 위해 수고한 이들을 기억하고 싶다. 국가기록원에도, 검찰에도, 법원에도, 군 검찰단에도 없다고 했던 1974년 당시의 수사기록들과 공판조서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계룡대 어디 문서 창고에서 극적으로 찾아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무죄판결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미약한 권한과 부족한 인력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으로 매달려 조사해준 의문사위 조사관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그 수만 장의 자료를 꼬박 두 달 동안 끼고 앉아 분류하고, 목록을 만들고, 제목을 붙여주었던, 지금은 변호사가 되어있는 당시 한 사법연수생, 서당 훈장님이 와서 보아도 알아 볼 수 없을 듯 손으로 갈겨 쓴 한문공판조서 수천 장을 옥편을 찾아가며 눈이 빠져라 한글파일로 입력 작업을 하여, 검찰과 변호인, 재판부의 기록 검토 시간을 대폭 단축시켜 준 천주교인권위원회의 활동가들, 매년 4월 9일 추모제를 준비하느라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땀투성이, 먼지투성이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열혈동지들... 모두가 한 마음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나고 나니 감회가 새롭고, 미소 짓게 되지만, 순간순간 치열하지 않았을 때가 없었고, 숨가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인혁당 사람들’이 세상과 “공감”하게 되었음이 눈물겨울 뿐이다.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김덕진

 

이글은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월간 뉴스레터에 기고 한 글이고, 그림은 이철수 화백이 인혁당 유족들을 위해 만들어주신 작품 "앞서가면서" 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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