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팬덤

2008/03/25 23:23 Tags » ,

EM님의 [동인천 심지] 에 관련된 글.

 

 

예전에 좋아했던 음악을 듣다가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 일이라니...... 자꾸 떠올리는거 나이든 증표같아 별로지만 어쨌든)

지금은 음악을 들을라치면 조금의 마우스품을 들여 스트리밍이건 남의 블로그에 링크된 것이건 혹은 외국 사이트에서건 대강 다 들을 수 있고 뮤지션 정보도 세세하게 구할 수 있다

아 참 좋다

 

90년대 초반 청소년들은 록/메탈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별로 없었을 뿐더러 간혹 라이센스되는 음반도 금지곡을 먹고 원반과 다르게 나오곤 했다. 되게 웃긴게 가사에 fuck이 엄청 들어가도 속지에 가사가 안 적혀 있으면 버젓이 출반되는 일이 잦았다. 노래를 안듣고 속지만 보고 심의를 한다는 거다. 풋. 어린 마음에 '공륜' 에 항의서명에 동참하고 그러기도 했다. (정부와 국가에 대한 최초의 뚜렷한 적개심이 '공륜' 덕에 생겼다)

그렇게 가뭄에 콩나듯 나오는 라이센스반을 테입으로 사모으고, 라이센스나 수입이 안됐지만 정녕 갖고 싶은 것은 상아레코드나 향뮤직에 개인주문을 넣어 미국에서 들여왔다. 학생이 돈이 어디 있었을까?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 3년 내내 독서실과 학원을 다닌 걸로 기억하지만 난 별로 기억이 안나는 걸 보면..........(불효자는 웁니다ㅠㅠ)

 

그리고 수업을 마치는대로, 혹은 수업을 마치지 않고;;; 동인천 심지나 주안 성림으로 출근했다. 지금에야 인터넷으로든 엠넷같은 음악채널로든 외국 뮤직비디오를 흔하게 볼 수 있지만 그때는 '뮤직비디오'라는거 자체가 희귀한 존재였다. 꼬질한 음악감상실에서 채널V나 MTV 방영 뮤직비디오 클립을 보고 간혹 DVD로 된(당시에 엄청난 첨단!) 공연실황을 네시간이고 다섯시간이고 보았다. 이때 본 날짜와 밴드명과 노래 제목을 빼곡히 적은 수첩을 몇 년 전에 발견하기도 했다. 정말 매일같이 갔더라. 휴우...........

 

'음악감상회'라는 것도 있었다. 음악감상실 벽에 '스키드로 감상회' '본조비 감상회' 이런 것들이 공지로 나붙었고 일시를 정해 두시간 정도씩 진행했다. 희귀한 음악감상회를 보러 대학로 MTV(지금은 없는...)나 신촌 백스테이지로 가끔은 진출했다. 핫뮤직 맨 뒷편 독자코너도 빠짐없이 봤다.(아직도 못버리고 있는 나으 정든 핫뮤직들........ 책벌레가 많아서 들쳐볼 수가 없어.......)

 

당시 난 XJAPAN 팬클럽 몇 군데에 가입했는데 요즘처럼 인터넷에 카페를 개설한다는 건 아직 멀었던 때고 온전히 우편!으로 소식지를 받았다. 우체국 소액환으로 회비를 보내고 조악한 인쇄로 된 소식지를 받는 식이다. 소식지엔 팬픽이나 만화, 일본잡지 인터뷰 번역본 등이 실렸다.

 

전화사서함이란 것도 있었다. 당시 팬클럽의 필수요소. 사서함 번호로 전화를 걸면 팬클럽 운영진 언니가 미리 녹음된 음성으로 새 소식을 줄줄줄 이야기해준다. 그거 들으려고 쉬는시간마다 공중전화에 줄섰다. 줄이 길어 못들었을땐 담을 넘어 학교 밖으로 탈출했다 아놔 이런 청소년이 다있나

 

거참 자꾸 요즘이랑 비교해서 뭣한데 그때는 일본음악 개방이 안됐을 때고 이대 앞에서 몰래몰래 일본 씨디와 비디오클립을 고액으로 구입했다. 그 가게는 일본 비주얼계 뮤지션 전문 판매처였고 사진 한장에 3백원, 씨디 한장에 3만6천원 가량, 뮤직비디오 40분짜리 5만원 가량에 판매하는 무시무시한 바가지 가게였으나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흑흑........ 불효자..................

 

 

정보량이 적어서 더 애를 태웠고 불편했던 만큼 열정을 쏟았던 내 어린 시절의 팬심...ㅠㅠ

그때가 좋았냐고 물으신다면 팬으로선 지금이 더 좋다고 말할 수밖에.

난 이미 인터넷의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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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5 23:23 2008/03/25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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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루 2008/03/26 02:0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전 그저 친구들이 녹음해서 돌려듣던 테잎이 전부였지요
    맨날 출근할 수 있는 아지트가 있었더라면 큰일이 났을텐데, 흐흐
    저도 이미 인터넷의 노예

  2. 달군 2008/03/26 10:0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와우...그런 힘은 어디서 나오는걸까? 오덕들의 신비한 세계. 크크크

  3. 염둥이 2008/03/26 10:3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부천엔 수목이라는 음악다방이 있었더랬지. 나의 흡연실.

  4. 나름 2008/03/26 10:4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나루/ 아! 라디오 녹음하던 생각도 나네요. 잡지 부록으로 나오는 예쁘게 디자인된 테입 내지를 오려서 글씨를 쓰고 끼워넣던... ㅎㅎ
    달군/ 진짜 오덕들이 들으면 코웃음칠 것이돠~
    염둥/ 이런 비행청소녀 같으니라고

  5. 이여사 2008/03/26 19:1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와아 놀라워여 재밌네요^^ 전 케이블TV 세대ㅋ

  6. 바리 2008/03/26 23:4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특정팬은 아니었지만 나도 손수제작 테이프를 근 백개를 만들었었지... 집채만큼 커다란 더블데크로. 저작권법 개정으로 이제 그것도 불법이겠다 쩝. 근데 이 덧글폼 기분 이상해.

  7. EM 2008/03/27 01:0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이야... 멋진 트랙백 고맙습니다 ^^
    나름님 덕분에 제가 생각지 못했던 것들..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생각보다 공통의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아요 ^^

    그런데 한가지.. 제가 기억하기엔 그당시엔 DVD보다는 LD를 많이 틀었었죠. 당시 심지 사장께서 일본을 통해 엄청난 분량의 엘디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그 vj박스 안에 넘쳐나던 엘디들을 바라보며 침을 흘리곤 했던 게 15년 전이란 말이네요... ㅠㅠ

  8. 나름 2008/03/27 11:0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이여사/ 니똥칼라똥
    바리/ 아니 이 덧글폼이 어때서요 이렇게나 귀여운데ㅋㅋㅋ
    EM/ 아 맞아요맞아요 LD였어요! 그 크다란게 박스 안에서 번쩍번쩍거리던 황홀함 후후후 그런데 진짜 15년 전이네요 저도... 크흑

  9. 구렛나루저~ 2008/03/27 13:0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팀장님,갑자기 세대차이가 큭큭큭
    전 전혀 접해본바 없는 문화인데,부러운걸요~ㅋ
    근데 이 시점에서 이런 질문하면 칼맞을 것 같은데 '공륜'이 누구에요~?(이런 질문은 메일로 조용히 할 것 그랬나...)

  10. 나름 2008/03/28 13:1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사람이 아니고...... 공연윤리위원회라고 영화 비디오 음반 들어오는거 사전에 심의 검열하던 곳이얌..... 질문에 대답하고 나니 나도 점점 아리송해지는건 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