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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겨울

97년 겨울 (1998년 2월 어느 밤)

 

산다고 살았는데

콧구멍 먹먹하게 먼지숨 들이키며

화공 뿜칠 독기운 종일 취한 머리로

귀가길 지옥철, 거적 같은 봉고차

엔진 위 들썩들썩 시큰한 허리춤을 잡고

빙빙 비틀대며 집 가던 저녁

 

우리 산다고 살았는데

경기며 충청이며 강원이며 구석구석 누비며

사장이 길참 삼아 사다 던진

호떡 한 쪽 목구멍에 디밀며

그렇게 우기듯이 버티며 살아왔는데

 

칠쟁이 일이란 게 무슨...

도깨비 방망이 한방으로 끝날 일인 양

공사주들 곁눈질 한끝에 내던지는

남의 속 울궈놓는 모진 한마디

오늘도 가슴에 묻고 난 다시 후끼를 들었다

 

산다고 살았는데

몇 억, 몇 십억 짜리 건물에 드나들며

옷을 입히고 꽃 치장을 해도

일 끝나면 그 뿐

 

어느 날 지나던 길 오줌마려 들를까

편한 속으로야 다시는 들를 일 없을 것 같은

까마득히 낯선 어제의 내 노동이

또 다른 자본의 성전, 착취의 보루가 되어

저만치 위 높은 데서 커다란 배 내민 채

날, 우릴 비웃을 때

 

날 담배 한 모금에 허한 가슴 흩어버리고

얼굴 돌려 발걸음 재촉하는 저녁

 

"설탕값이 또 천원이나 올랐어"

"내년엔 간접세를 몇 조나 더 늘린다는군"

날마다 달아나는 음식값에, 교육비에, 세금에

얼굴 부비며 매달리는 애들 등쌀에

졸라맬 허리띠는 거...뒤질래도 없는데

 

이 저녁도 텔레비선

경제위기 임금억제 다시 뛰자 전화위복

재탕삼탕 때깔좋은 월드컵 나팔에

멍멍 찍찍 한마음 하나로

웅성웅성 호들갑 바쁘게도 뱉어내고

 

고용조정 유연성 요상한 말 써가며

짜를란다 굳힐란다 암때나 줄란다

늘켰다 줄퀐다 아무케나 쓸란다

이나저나 매한가지 내게는 딱 한마디

값싸게 독하게 뺑이치라는데

 

차라리 저놈의 것 내쳐 꺼버리고

자식내미 손목 한번 더 쓸어주고

물 젖은 걸레같은 몸뚱이

늦저녁 이불속에 파묻을 참에

 

어느 굵직한 재벌 하청 건설업체 사무실로

밀린 것 삼천만원 내놓으라 열 다섯이 몰려가

진종일 버티며 싸우던 판에

철근하던 서른 다섯 또 어느 한 이가

온몸 옮겨 붙은 불에 타 금방 세상 떴다는...

 

젖은 베겟녘을 파고드는...

참... 지랄같이도 짧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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