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5/12/06

문정현 신부와 함께한 하루, 그리고 부산.

아침 8:30분 인천에 도착.

이스탄불에서 출발할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평택주민의 국방부 앞 기자회견 소식에 달려가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기자회견의 내용은 그 동안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의 기록을 모아 만든 "들이 운다"라는 책의 출간 기자회견이었습니다.

"눈이 있으면 보고 귀가 있으면 들어라"는 할머니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맞은 것은 시커먼 전투경찰일 뿐이었습니다.

기자회견을 마친 후 매월 한 차례씩 진행되는 미 대사관 앞 집회를 위해 이동했습죠.

미대사관 앞에 도착해보니... 같은 날 있었던 농민집회에 모두 동원되어서인지, 소위 아는 얼굴인 종로서 정보과 형사들도 없고 처음 보는 전투경찰 부대만 있었습죠.


사전에 "들이 운다"를 미대사관에 전달할 것을 공지했었고 합의도 되었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미 대사관으로 향하는 길은 전투경찰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고 우회해서 가려는 신부님과 일행을 막아서는 통에 일이 커졌던것 같습니다.

나중에 전경 소대장이 한다는 말이... "차도를 행진하는 것은 불법이다"라고 하더군요.
인도를 안 막아서면 차도로 나갈 일도 없었을 것을... 게다가 행진을 한 것도 아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 모시고 책 한권 전하러 간다는 것이...

우리는 그날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습니다.

인도를 걸어갈 권리도 없고, 80먹은 노인네가 행여 테러라도 저지를까봐 움직이기만 하면 전경이 겹겹히 애워싸는 그런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국민이었다면 그런 대접을 받았겠습니까.

아니면, 그들이 대한민국 경찰이 아니었겠지요.

대한민국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인 경찰이 국민을 그런식으로 내동댕이 쳤겠습니까?

암튼 이때서야 나타난 구(라)과장(종로경찰서의 정보과장, 워낙에 구라를 잘 쳐서)은 오늘도 어김없이 진가를 보여줬습니다.

신부님을 속여서... 대표단만 간다면 미대사관에 갈수 있게 해주겠다고...
미 대사관을 경찰의 허가가 있어야 갈수 있는 것만으로도 열받는 상황이었지만, 책과 항의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그 의견을 받아들였지만...

대표단을 일차 전경의 벽을 통과시켜... 집회장과 대표단을 분리한 후...

기자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대표단은 채 50여미터도 가지 못한 채 다시 전경에 둘러 쌓인 거죠.

그래봐야... 인터넷 언론사의 기자들 몇 명이 있었을 뿐인데... 기자들을 우리손으로 내쫓으란것도 아니고...

구 과장이 진가가 나타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와서 하는 변명 비스무리한 것이... 구 과장의 밑에서 일하는 형사가 말이죠...

쟤네들은 우리 말 안 듣는다. 우리도 통제가 안돼 죽겠다.

뭐 이런 말만 늘어 놓더라구요.

결국 밤샘 농성을 하게 되었는데... 시차적응도 안된 상태에 여독도 풀리질 않아 먼저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부산에 있습니다.

부산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조용합니다. 보수단체들에 의해 모든 집회장소를 선점당하고, 조그만한 집회라도 그 자체가 모두 불법이 되는 상황이어서 일겁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폭풍전의 고요함 같습니다.

얼마전 농민열사의 죽음과 엊그제 농민집회에서 도저히 경찰이라고 볼수 없는 진압(심지어 현금 65만원을 강도질 해 가기도 했다죠), 그리고 귀가하다 사망한 농민의 죽음으로 인해...

이곳의 집회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을것만 같습니다.

18일 집회도 집회지만, 19일 집회는 농민 집중집회로 잡혀 있었는데요.

18일 집회부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부산은 거의 반계엄 상황인것 같습니다.

해운대로 들어가는 길 자체가 막혀있으니까요.

이 곳에서 제가 할 일은 사진을 많이 찍어 올리는 일 같습니다.

지역에서 송희진 사무차장 한 명만 부산에 오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다 전달하진 못하겠지만, 또한 언론사들의 사진보다 못하겠지만...

지역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Amed(디아르바크르)를 떠나며...

18일간의 아메드(디아르바크르)는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티그리스강을 끼고 움직이는 아메드는 짧은 여행이었던 지난번과는 다른 느낌이엇고, 짧은 경험으로 인한 오해를 풀어주기도 하였다.

50여명이 코숄루파크에서 집회를 하던 날, 이전 방문에서도 마지막날 집회갇 있었기에 분위기는 대략 알수 있었지만 단 50여명의 집회때문에 시내 곳곳에 장갑차가 배치되고 평소의 서너배 가량의 경찰이 순찰을 하는가 하면, 시내에서 무장군인을 목격하는 일은 가히 충격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들어왔던 이야기들이 있었고, 하영식씨의 '굿바이 바그다드'라는 책을 통해 얻은 정보(그 책에 의하면 아메드는 거의 계엄상황이다)보다는 자유롭고 활기찬 도시였고, 많은 단체들이 외형상으로는 문제 없이 활동하고 있고 그런 곳들만 골라 방문하는 우리의 뒤를 쫓는 경찰의 시선은 느낄수 없었다.

하지만, 집회 취재를 위해 타고가는 버스 안에서 본 장갑차(이것들 때문에 교통 정체가 일어날 만큼 당당하게 도로 한 가운데 서 있었다)들, 그리고 집회장 근처에 배치괸 장갑차는 여차하면 참가자들을 바로 진압할 수 있다는 터키 정부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리고, 한국의 전투경찰처럼 집회장 근처에서 무리지어 대기하는 경찰의 모습은 눈에 익숙했다. 방탄복을 입고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든 모습만 빼면...

너무 많은 것을 보아서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지만, 아메드를 떠나 이스탄불로 향하는 내 가슴엔 그래도 희망으로 두근거린다.

기아자동차 비리 사건, 강승규 부위원장 구속, 민주노총 지도부 총사퇴, 민주노동당 지도부 총사퇴 등으로 이러지고 있는 한국 운동의 위기속에서 작으나마 희망이 보이기 때문이다.

렝긴을 돕기 위해 한달여 짧은 기간동안 50만원이 넘는 큰 돈을 모아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돈은 렝긴의 교과서와 약값이 되었고 힘이 되었다.

국제 연대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도움주시는 모든 후원인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렝긴 후원금 관련 사용내역

교통비 - 28 YTL
교과서 - 42.8 YTL
문구류 - 79 YTL
약값 - 200 YTL
통역 - 20 YTL
합계 - 369.8 YTL

총 모금액은 530,000원이 모금되었습니다.

이 중 핸드폰 후원등 아직 입금되지 않은 금액을 제외하고 40,6000원 정도가 첫 지원금으로 잡혔고, 현지에서 500 YTL을 인출하니, 1600원정도가 남았습니다.

렝긴의 사연이 알려진 후 현지에서도 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어서 당뇨병에 대한 치료는 현지의 도움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합병증인 신장이상에 대한 검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상진씨와 저는 렝긴 지원금의 사용에 관해 논의한 후, 신장약값과 교과서와 학용품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단, 현금지원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합의하였습니다.

개학(9월)한지 2개월이 넘었지만 교과서가 한 권도 없는 렝긴이었습니다. 교과서를 사기 위해 돌아다녔지만, 렝긴이 살고 있는 지역에는 단 한 종류의 교과서도 없었고 그나마 아메드 지역에서 몇 종류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만, 모든 교과서를 살순 없었고 반 정도만 살 수 있었습니다. 돈을 들고서도 교과서를 살 수 없다니...

또한, 문구류가 없는 렝긴을 위해 교과서와 함께 한 학기 내내 사용할 수 있는 문구를 지원하였습니다.

약값은 현금지원 불가의 원칙에 따라 한 약국을 선정, 렝긴이 원할 때마다 약을 지급하기로 하고 약국에 선불하였습니다.

현재 130.2 YTL이 남아 있으며, 핸드폰 지원금이 수납되면 잔액은 더 늘어날 예정입니다.

앞으로 렝긴 뿐만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정치범 가족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로 발전시키기로 하였으며 그에 따른 여러 방법을 연구중에 있습니다.

앞으로도 관심갖고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소외되는 것보다 무서운 것

이번 쿠르디스탄 여행에서 가장 큰 것이라면, 소외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쿠르드 민족은 4천만 명이나 되지만, 5개 나라(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제르바이잔, 터키)에 의해 나뉘어졌다. 이 중 2천 5백만 명 정도가 터키라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쿠르드 민족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쿠르디스탄이라고 부르는데, 터키 지역내에 있는 디야르바크르라는 도시가 쿠르디스탄의 수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인구 2백만 명의 중심도시이다. 쿠르드 민족이 어떻게 소외되어 살았는지 구구절절 말하자면 너무나 긴 이야기이므로 몇 가지의 사례만 들어보고자 한다.

터키 지역에는 쿠르드 민족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무장봉기했던 쿠르드 사회주의 노동자당(PKK)이 있다. PKK가 1984년 8월 15일(공교롭게도 한국의 해방기념일과 일치한다) 터키군에 반격하여 무장봉기를 기점으로 게릴라 투쟁이 벌어졌다. 이후 90년대 초반, ‘터키군이 쿠르드족의 산악마을에 올라와서 농부에게 게릴라들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쿠르드 농부가 난생 처음 듣는 터키어를 알아들을 리 없었다. 우물쭈물하던 농부는 터키에 살면서 터키어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터키군에게 죽임을 당했다.(굿바이 바그다드/하영식)’

또한 지난 90년대, 쿠르드 담배를 피운 것이 이유가 되어 죽은 사람이 있다. 쿠르드 담배는 예전 한국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피우던 쌈지담배와 비슷하다. 시장에서 담배를 사다 피우는 것이 탈세혐의가 되어 경찰에 체포되었고,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다 죽었다고 한다.

이렇듯 이유 같지 않은 이유(한국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소위 막걸리 반공법)로 사람이 죽어나갔지만, 이런 사실들은 이제야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지난 10월 2일 이스탄불에서는 PKK 당수 오잘란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는데,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며 사격을 가해 19살 청년 알틸라가 즉사하는 사건이 있었다.

디야르바크르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을 여행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점이 바로 소외되어 살아가는 것보다 힘든 것은 소외된 사실을 알면서 견뎌야 하는 것임을 알았다.

디야르바크르에서 가까운 에르가니라는 도시를 갔을 때였다. 한상진에게서 ‘알리’라는 친구에게 연락을 해 놓을테니 시청직원인 그를 찾으라는 당부를 듣고 무작정 시청으로 직행, 지난 사람들을 붙잡고 알리를 찾아갔던 적이 있다. 마침 알리는 시청 밖에 있었고, 그를 호출하여 그가 시청으로 돌아오는 동안 약간은 당황스러운 일을 당했는데, 에르가니 시장과의 면담이었다.

시청내에 영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고, 시장도 영어를 하지 못했다. (뭐 영어로 말한다한들 내가 알아들었을리 없지만...) 그래서 음료수 한 잔을 대접받으며 알리를 기다리는 동안 시장과 한 일을 그냥 서로 웃으며 약간의 터키어와 바디랭귀지로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것과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말을 하고선 눈만 쳐다봤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나를 한 도시의 시장이 왜 만났을까. 나중에 한상진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에르가니의 시장은 나를 무척 반가워했고(이건 분위기상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워했을 것이라 한다.

외국인인 내가 그 도시를 방문한 것만으로 고마워한다. 시장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사람들이 죽어가도 알려지지 않고, 9000년이나 된 유적이 사방에 깔려있어도 찾아오는 외국인은 일 년에 몇 명뿐이라고 한다.

그들은 소외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맞지 않는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내 말에 의심이 가거든 권하고 싶다. 터키에 갈 기회가 생기거든 꼭 쿠르디스탄을 방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어느 도시이든 시청에 방문하여 가이드를 부탁해 보라. 그러면 그 도시의 시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단, 디야르바크르 시장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디야르바크르가 쿠르디스탄의 수도라 불리는 만큼 그는 쿠르디스탄의 대통령과 비슷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정상들이 쿠르드 지역을 방문하면 만나는 상대가 디야르바크르 시장이다. 하지만, 지방도시는 확실하다.

한국에서는 구청장 한 번 만나려고 해도 무척이나 어렵지만 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터키에 오면 이런 곳에 방문을 해 보세요.

안녕하세요. 단풍입니다.

며칠동안 소식이 통 없었습니다. 그 동안 인터넷에 대한 접근이 어려웠습니다. 가는 곳마다 인터넷을 연결할 수 없는 지역이었거나, 마음이 급해서 피씨방을 들릴수가 없었습니다. 또 피씨방에 들려도 한글을 쓸 수 없는 환경이어서 메일 정도만 확인하고 그랬습니다.

지난 며칠동안 되도록 많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외국인 입장에서 그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더욱 깨달았습니다.

첫 방문지로 선택한 곳은 '에르가니'였습니다. 에르가니가 선택된 이유는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 9,000년정도 된 마을의 흔적이 발견된 곳이라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위 사진은 그 흔적의 전경사진입니다. 현재 이 곳에서 사람의 뼈가 발견되어 DNA검사중에 있다고 합니다. 현재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 곳은 수렵생활에서 유목생활을 거치지 않고 농경사회로 바로 전환된 지역이라고 합니다. 이 곳에는 신전-우리식으로 치면 신당 정도?-의 흔적, 무덤의 흔적까지 뚜렷하게 남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지역이 늘 그렇듯 제대로된 보호조치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많은 훼손이 있었습니다. 지방정부가 설치한 철조망이 수없이 뚫려 있었지만 그것을 보수하기조차 어려운 처지인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를 해주었던 '알리'는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설명해주기 위해 한 마디 한 마디에 혼신을 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알리는 매우 유쾌하고 입심(?)좋은 양반으로 꽤나 즐겁게 만들어주는 그런 힘이 있었습니다. (알리의 영어는 그리 유창하지 못하고 저 역시 유창하지 못한 관계로...ㅋㅋㅋ 말도 안통하는데 얼마나 재밌었겠습니까.)



알리의 안내에 따라 이동한 곳은 최초의 정착을 이루었던 곳에서 동굴을 파고 들어가 생활을 하게 된 곳이었습니다. 예로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비옥하기로 소문나 있어서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린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평지에서 이루던 마을이 동굴로 들어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의 사진들은 그 동굴마을의 사진들입니다.





몇 장의 사진과 몇 줄의 이야기로 다 설명한다는 것에, 그리고 글쓰기 실력이 짧다는 것에 한계를 느낍니다.

유적지 방문을 끝내고 체르믹으로 가서 온천을 했습니다. 체르믹은 이 지역에서 유명한 온천으로 유황온천이어서 피부에 매우 좋습니다. 온천을 하고 나왔을때 그 매끄러운 피부란...ㅋㅋㅋ




온천을 마치고 알리의 집에 가서 홈스테이를 했습니다. 알리는 시청의 문화재 관련 담당 공무원인데요 알리의 유쾌함은 가족과의 즐거운 생활에서 나오는 듯 했습니다. 제게 쿠르드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 온 가족을 소개시켜주기도 하고, 특히 알리 부부는 친구처럼 살아가는 듯 보였습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그런 모습을 본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경험이었습니다.... 아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하산케이프'로 이동했습니다.




하산케이프는 고대 캐슬로 유명한 지역이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아 관광객의 발길이 드문 곳입니다. 터키하면 다들 이스탄불을 이야기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하산케이프를 방문하지 않고서 터키를 방문했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산케이프는 말보다는 사진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듯 합니다. ^^








그렇게 하산케이프에서 하룻밤을 또 보내고 간 곳은 미디얏. 미디얏에서는 아주 놀라운 경험을 했더랬습니다.

이슬람지역이라고만 알려진 이 지역에서 '동방정교회' 교회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로마카톨릭과는 다른 종파이지만 비슷한 점도 매우 많은 그 교회는 한국의 카톨릭 교회의 모습과는 다른듯 하면서도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이 지역의 다양한 문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미디얏을 빠르게 방문하고 당도한 곳은 누사이빈이라는 시리아 국경지대였습니다.

쿠르디스탄이 강대국의 힘에 의해 지도상에서 어떻게 분할되었는지는 보여주는 그런 도시였습니다. 지금은 국경지대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갈리워졌지만, 원래는 한 마을이었던 이 곳은 도시의 절반은 시리아, 절반은 터키로 갈리워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곳의 사람들은 시리아에 친척이 있기도 하고 서로 장을 보러 국경을 넘기도 합니다.

누사이빈은 국경지대이며, PKK라고 불리우는 게릴라들의 활동지역이기도 해서 군대가 넓게 주둔하고 있으며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경계가 삼엄해서 사진찍는 것마저 금지당했는데요. 몰래 몇 장을 찍었습니다.

이 곳의 심각한 문제는 지뢰매설이 전쟁의 과정에서 매설된 것이 아니라 게릴라 소탕작전의 일환으로 지뢰를 매설하였는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오늘은 이 정도까지입니다. 할 말은 많은데 정리가 않는군요.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기자도 미행당하는 터키는 계엄상황?

이 글은 대자보에 제공된 기사입니다.


2005년 11월 1일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광화문에서 집회가 열렸다. 이 시위를 막기 위해 서울시내 도처에는 경찰 장갑차 십여 대가 배치되고, 무장한 경찰과 무장군인이 배치되었으며 시위대열은 이 기세에 눌린 탓인지 수 십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시위대 숫자와 같은 수의 경찰이 시위대에 섞여 사진을 찍기도 하고 비디오 카메라를 이용해 시위대의 모습을 구석구석 담는다. 집회를 취재하는 해외 통신사 외국인 기자의 모습도 경찰의 카메라에 담기고 촬영하는 경찰을 찍는 기자의 카메라는 경찰에 의해 제지받았다.

집회를 주도한 연사는 연설을 끝내자마자 경호원에 둘러싸인 경찰서장으로 보이는 자에 의해 신분증 제시를 요구받으며 검문을 받았다. 그리고 집회는 끝났고, 집회장을 떠나는 해외 통신사의 외국인 기자는 상당 거리를 이동하면서 경찰의 미행을 당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소설이거나 지난 70-80년대 이야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이야기는 2005년 터키의 현실이다.

11월 1일 터키 디야르바크르주 디야르바크르시 코숄루 공원에서는 터키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2000년이 넘는 만리장성 다음으로 긴 성벽을 가진 디야르바크르는 소위 쿠르디스탄의 수도라 불리우며 탄압받고 있는 터키 내 쿠르드족의 중심지이다.


▲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여성

낮 1시경 디아르바크르시 중심가인 오피스 거리에는 평소보다 몇 배나 많은 정복경찰이 순찰하고 있었고, 정복이 모자랐는지 사복차림에 경찰 조끼만을 걸치고 나온 경찰도 보였다. 대규모 시위가 예상되었지만 시내 도처에 배치된 경찰 장갑차와 무장경찰 때문인지 집회참가자의 수는 생각보다 적다. 오피스 거리 잘 보이지 않는 골목에는 무장군인이 배치되어 있는 놀라움은 표현 할 길이 없다.


▲디야르바크르 번화가인 오피스(OFIS)거리에 총을 들고 경계중인 무장경찰

▲멀리 보이는 경찰 장갑차. 시위전부터 디야르바크르시내에 여러대가 주둔했다. 이 곳 터키는 경찰은 물론 모든 군, 경찰의 시설물을 촬영하면 경찰의 제지를 받는다.

▲오피스(OFIS)거리 골목안에 총을 들고 경계중인 군인.

핸드마이크를 들고 연설문을 낭독하는 여성은 낭독이 끝나자마자 집회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경호원에 둘러싸인 경찰 고위관계자의 검문을 받는다. 처음에는 몇 마디 말로 대응해보지만 곧 순순히 신분증을 제시한다. 만약 끝까지 신분증 제시를 거부했다면 그녀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곳 터키에서 경찰에 체포당할 경우 재판 없이 몇 개월을 경찰서에서 온갖 회유와 협박, 그리고 고문을 당할지도 모른다.


▲경찰 고위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이 집회연설자의 검문을 하고 있다.

시위대와 같은 수(비밀경찰의 수를 포함하면 더 많을지도 모른다)의 경찰이 시위 참석자, 언론사 기자들과 뒤섞여 비디오카메라 등을 이용해 시위 구석구석을 담는다. 그리고 집회가 끝난 후 기자는 상당거리를 미행당하며 시내를 배회할 수밖에 없었다.

통역의 말에 의하면 이제부터는 사진이 담겨있는 노트북 컴퓨터와 디지털 카메라의 도난에 대비해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고 한다. 카페에 들어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통역의 조언에 따라 벽을 등지고 사진 등을 편집하고 있다.


▲두 명의 경찰이 촬영하는 기자를 캠코더를 이용해 촬영하고 있다. 목격된 캠코더의 수는 10여대. 대부분이 경찰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시위 취재를 가는 것 자체가 우려할 만한 일이었다. 지난 10월 2일경 이스탄불에서는 독방에 수용되어 있는 쿠르드 노동자당의 당수 오잘란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는데 시위과정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있었다. 사망한 청년은 19세의 아틸라.


▲10월 2일 이스탄불 시위에서 경찰의 총을 맞고 사망한 19세의 알틸라.

이곳은 쿠르드인의 수가 많고 쿠르디스탄의 수도라고 불리우는 곳이기에 충돌이 일어난다면 이스탄불보다 강경한 진압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10월 29일로 예정되었던 집회가 오늘로 연기된 상황이기에 더욱 충돌이 예상되었다.

다행히 시위대는 오잘란의 석방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무사히 집회는 끝났고 시위대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이 한 달 후 어디에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대한민국의 형제 국가 터키, 중동지역에서 가장 민주화된 국가 터키, EU가입을 준비하고 있는 터키는 현재 계엄상황인 듯하다.


▲기자를 촬영하고 있는 경찰을 촬영하자 얼굴을 가리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2월 11일 평택 범국민대회 - 평택지킴이 소식 16호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생명과 평화의 땅을 지키는 평택지킴이 소식_16호   [ 2005. 10. 20 ]

 

 


강제토지수용 중단! 미군기지확장계획 전면 폐기!! 

평택시청앞 1인 시위가 6일째 진행중입니다.

1인시위 6일째 - 김용한, 채한석, 석권호, 윤현수, 이은우, 최광수님 등 평택 노동시민사회단체분들께서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군기지확장저지를 위한 평택시청 앞 1인시위를 벌이고 계십니다.

평택시민들의 60%가 미군기지확장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법적일정대로 기지확장사업을 추진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평택시민들은 대추리, 도두리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추리, 도두리 농민들의 심정도 알리고, 기지확장의 부당함도 알리기 위하여 평택대책위에서 1인시위를 조직하였습니다.

이후에도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 (1인시위 담당 : 평택대책위)

 

 

 

대추분교를 지키는 싸움은 이제부터 

- 두레풍물보존회 송영민 단장 -

어 제 힘든 결정을 했습니다... 

보상을 받고 나가느냐, 보상없이 계속 싸울 것이냐....

공 사비로 들어간 돈 7,500만원을 만들어 보겠다는 국방부... 

돈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그러는 가운데.... 

내가 벌어 보지도 못한 돈....만져 보지도 못한 돈... 

그 돈만 있으면 사무실 하나 얻고 살림집 하나 장만 하는데 문제가 없다....

하 지만 투쟁의 본거지인 대추분교....거기를 살고 지키고 있는 나.... 

내가 거기서 돈 받고 빠져 나오면... 

뻔한것 아닌가....국방부는 바로 밀어 버릴것이고 

여지것 힘들게 싸우시는 어르신들 더 힘들게 할 것인데... 

어찌 나 살자고 돈 받고 나오겠는가....

소 송에서 지면 손해배상 청구를 한다고 한다...2천, 3천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 정도의 액수를 청구한다고 한다....협박 아닌 협박이다...

내 일은 내일하자....아무도 앞날은 모른다 그러나 그 앞날을 위해 열심히 살다보면 좋은 일이 있겠지 하는 희망으로 살련다... 

보 존회 단원, 전수생, 교사풍물패 새미 등등 죄송합니다... 

나 하나로 인해 피해를 너무 많이 받으시는 것 같습니다...

이 것의 나의 운명이라면...... 

내년에 어떻게 될지 장담을 못합니다....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전 이 길을 걷겠습니다...... 

대추분교 대추리 땅을 지키는 날까지......

* 송영민단장님 개인 홈페이지에 올려진 글을 퍼왔습니다.


벼랑끝에서도 희망을 품는 마을  

제강제철거 위가 앞에서 담벽에 희망을 그리는 대추리 [ 인터넷참소리 기사]

넓 은 들판에 가을바람과 익은 벼들이 넘실대는 노란색 파도를 만들어내더니 어느새 한 필지씩 추수되고 듬성듬성 생긴 빈 들녘에 바람만이 스쳐지나가고 있다. 마을 길목에는 벼 베는 농기계가 묵직한 기계음을 내며 침묵을 깨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 곳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ㆍ도두리 마을도 여느 농촌과 다를 바 없는 가을 풍경이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의 뇌리 속에서는 어쩌면 이 땅에서 흙을 만지는 일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정 부의 미군기지확장부지 협의매수가 6월 14일부터 31까지 진행된 결과 349만평 가운데 229만평이 완료됐다. 또 정부는 협의매수하지 못한 나머지 120여만 평에 대해 중앙토지수용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한 상태이다. 매수하지 못한 토지를 합법적으로 강제수용 할 수 있도록 하는 수순이다. 이대로 간다면 미군기지확장에 반대하며 정부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대추리ㆍ도두리 마을은 올 겨울 강제철거가 시작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 런데 오히려 마을은 강제철거 위기에도 불구하고 새 단장되고 있다. 골목길을 종횡무진 하던 동네 아이들이 벽에 붙어 있고, 타지에서 온 손님들도 벽에 붙어 있는 기이한 현상이다. 동네 벽에 그림이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벽화그리기가 있던 지난 17일에는 대추리 마을 아이들과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의 샘물 공부방의 아이들이 모여 대추분교 앞 담 벽을 도화지 삼아 붓을 들었다.

마 음껏 낙서하라니 아이들은 마냥 신나하며 원하는 색을 집어 든다. 이곳 아이들의 진지한 손놀림 속에 움직이는 붓은 그간 자신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고충을 그려내고 있다. 초등학교 2-4학년이나 됐을 마을 아이들이 그림 속에 ‘미군기지 아저씨, 우리아빠 화났어요’, ‘우리땅을 지키자’ 등 여느 또래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단어들이 쏟아져 나온다.

또 샘물 공부방 아이들 또한 철거로 인한 고통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곳 마을 사정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다. 담당 선생님은 “동네가 재개발을 이유로 철거되면서 아이들이 인근의 다세대주택의 반지하에 머물고 있는 형편이고, 공부방도 이번 한주를 마지막으로 폐쇄하게 됐다”며 “마지막 소풍을 의논하는 가운데 아픔을 경험한 아이들이 이곳 마을의 평화를 바란다는 취지에서 방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곳 샘물 공부방뿐만 아닌 먼저 한 쪽 벽에 그림을 장식한 인천의 ‘기찻길 옆 작은학교’ 공부방도 같은 처지에 놓여있었다.   ............[인 터넷 참소리_ 관련기사]


 

 

 

 

+강제토지수용 규탄! 미군기지확장계획 폐기! 1인시위 

      (매주 월요일 - 금요일 12시30분부터 2시30분 / 평택시청정문 앞)

 

+ 10월 23일: 주한미군 영구주둔음모 분쇄! 강제토지수용저지 결의대회 

     : 참가하시는 분들은 평택미군기지확장의 부당성을 알리는 피켓을 꼭 준비해주십시요.        (오 후4시 / 평택역)

 

+ 10월 24일 : 33인 대추분교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 결심  

       (오 후 2시 /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 

 

 + 10월 25일 :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정태춘, 박은옥 거리콘서트 집중실천의 날

       (오후 7시30분 / 광화문 교보문고 앞)  

 

+ 10월 29일 :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평택역앞 무기한 농성 시작

      (오후 4시 / 평택역앞)

 

 

 

평택 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전화 031-657-8111 /홈페이지 : http://antigizi.or.kr 

이메일 : ufo-01@hanmail.net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회 교섭과 조카

사회 교섭과 조카

김진숙(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지난 설, 고향으로 가는 길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인천에 사는 조카는 집에 어려운 사정이 생겼는데도 맏이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인지, ‘휴가가 하루밖에 없다’는 둥, ‘차가 많이 막힐 거라’는 둥 핑계를 대면서 안 가려고 하기에, ‘그래도 명절인데 안가면 엄마가 얼마나 섭섭해 하겠냐, 너 안가면 나도 안 갈란다’하고 어르고 달래서 겨우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인천에 있는 주안 역에서 만나 차를 타자마자 조카가 묻습니다. “이모, 그게 모야?”“이거? 김 세트. 니네 엄마 줄려구” 저는 제 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꾸러미를 궁금해 하는 줄 알고, 한진 동지들이 마련해준 선물을 자랑스럽게 치켜들었습니다.
"아~니. 저번에 내 친구가 테레비 보구 말해 주던데 민노총이 막 싸웠대매? 한쪽에선 뭘 하자 그러구, 한쪽에선 하지말자구 신나두 뿌리구 그랬대매. 그게 모냐구" ‘망할 년. 하구 많은 말 다 놔두고 오랜만에 만나서 가장 아픈데부터 찌르다니...’저는 마음이 있는 대로 꼬여서는,“야, 너는 민노총이 아니라 민주노총이라구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냐?”하고 괜한 트집을 잡습니다. "암튼. 그게 모냐구? 모때매 그랬는데?" "사회 교섭" "엉? 그게 몬데?"

사회 교섭이 뭔지도 모르는 제 조카는 비정규직 노동잡니다. 그러니까 “니가 용역이야?”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했다가,“야, 그런 건 파견이지”그러면 또 그런 줄 아는, 한마디로 지가 뭔지도 모르는 한심한 아이입니다.
커다란 마트에서 일하는데, 얘는 그 마트 직원이 아닙니다. 라면파트에서 온종일 라면에 치여 살면서도 얘는 그 라면회사 직원도 아닙니다. 그 마트 작업복을 입고 거기서 일하고 밥 먹고 똥 싸면서 하루 열 시간이 넘게 일 하는데, 사실은 사장이 누군지, 자기가 일하는 파견업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마트는 얘한테 일 시킬 거 다 시키고, 물건 정리하는 것이 조금만 늦어도 땍땍거리고, 늦게 밥 먹으러 가서 1분만 늦게 와도 주임이 시계를 보면서 지키고 서 있으면서도, 얘가 조그만 요구라도 할라치면 ‘니네 회사 가서 알아보라’고 말하는, 편리하기가 짝이 없는 구조입니다.

조카는 월급명세표도 없는 월급 80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돈이 줄어서 나오기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빙 둘러서있는 휴식시간에 주임한테‘명세표를 좀 볼 수 없냐’고 물었더니, ‘니네 사장한테 받으라’는 쫑코를 주더랍니다. 다음부터 이 아이는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묻지도 않는답니다. 그리고 제 딴에는 그래도 고참이라고 같이 일하는 아이들이 뭘 물어보기도 하고 그랬는데, 주임이 그 말을 한 다음부터는 지들끼리 그런답니다. “야, 저 언니 우리 회사 직원 아니래”그 다음부터 이 아이의 꿈은 정규직도 아니고, 주 40시간도 아니고 다만 그 회사 계약직이라도 됐으면 좋겠다는 거랍니다. 월급이 줄어든 것은 법이 바뀌어서 월차도 없어지고 생리수당도 없어져서 그렇다는 걸 나중에 다른 친구를 통해서 들었답니다.

이 아이는 아침 7시 30분부터 저녁 10시까지 일한답니다. 추석 때도 일하느라 추석 다음 날 잠깐 집에 다녀왔고, 이번 설에는 9일을 쉬는 회사가 있다고 언론에선 떠들어댑디다만, 그나마 1년이 넘은 짬밥 덕택에 고작 설날 하루가 휴가였습니다. 주5일제를 누리는 세상에서, 이 아이는 토요일 일요일이 더 바쁩니다. 지 동생이 장가를 가서 얘한테도 첫 조카가 생겼는데, 어깨가 아파서 조카 한번 안아주지도 못했습니다. 설날에도 밥만 먹고는 온종일 퍼 자다가 내일 출근 땜에 부스스 하게 부은 채로 밤에 갔습니다. 조카를 안지도 못하는 어깨로 박스를 들어 나르는 일을 하러... 이 아이 사는 걸 보면 시계가 70년대 평화시장 어디쯤으로 되돌아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온종일 박스를 들어 나르고 물건을 정리하는 게 일이라, 손가락이 퉁퉁 붓고 어깨가 아파 팔을 들지도 못하면서 산재 신청도 못하는 제 조카는 병신입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노조도 못 만드는 제 조카는 쪼다입니다. 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간 다니던 직장이 망하자, 서른 살이 넘은 여자를 받아주는 데가 있다는 사실에 감지덕지 하면서 말 한마디 변변히 못하고 사는 제 조카는 바보입니다.

그래도 이 아이, 저한테는 참 애틋한 아이입니다. 이 아이가 쌍둥이로 태어났을 때, 지금도 그렇지만 집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 아이 엄마인 제 큰 언니가 벌어먹고 살았는데, 쌍둥이 둘을 매달고는 길바닥에서 장사를 할 수가 없으니까 둘 중 큰 아이인 이 애는 저희 집에서 컸습니다. 제 엄마가 아픈 날이 많았는데, 아예 일어나시지도 못하는 날은 이 아이를 제가 업고 학교에 가야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는 아기를 매는 띠도 없을 때라 기저귀로 이 아이를 업고나면 왜 그렇게 흘러내리는지, 엉덩이에 치렁치렁 매달고 학교에 가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다른 애들 다 등교한 학교에 맨 나중에 가서는 정문 옆 철봉에 업고 간 기저귀로 이 아이 묶어놓고 교실로 뛰어 들어 갔습니다. 수업시간에도 저는 창문 밖 철봉만 내다 봤지요. 쉬는 시간에도 다른 애들 눈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수업시간에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쫒아 가보면, 그래도 지네 식구 왔다고 엉덩이를 짓까불며 입안에 모래를 가득 담고 벌쭉 벌쭉 웃던 그런 아이입니다. 똥을 도대체 몇 번이나 쌌던지 온몸에 똥으로 매대기를 쳐놓고도 울지 않던 그런 아이입니다.
이 아이가 커서 중학교에 다닐 때, 수배중인 이모 잡는다고 짭새가 이 아이 다니는 학교까지 와서 이것저것 묻고 따라다닐 때도, 우리 이모는 나쁜 짓 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는 그런 아이입니다. 그런 사실을 20여년이 지난 작년에야 얘기를 했던 그런 아이입니다. 자장면 한 그릇 못 사준 이모한테 옷도 사주고 신발도 사주고 명절에는 노자 하라고 용돈도 주는 그런 아이입니다. 그런 아이가... 저 때문에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98년 노사정위원회가 만들어질 때, 제가 온몸으로 반대를 안 해서 이 아이가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민주노총이 들어간 노사정위에서 파견법이 합의될 때 제가 온몸을 던져서라도 막아내지를 못해서, 이 아이가 비정규직 중에서도 가장 개털인 파견노동자가 됐습니다. 그땐 솔직히 잘 몰랐습니다. 그 합의가 이런 엄청난 사태를 몰고 올 줄은... ‘우리 조합원들은 노조가 있고, 그래서 단결된 힘으로 단체협상에서 막아내면 되지 않을까’하는 이기심이 솔직히 있었던 거지요.

제 조카는 전노투도 아니고 좌파도 아닙니다. 이모 때문에 노조라면 공포심부터 느끼는 찌질이입니다. 민주노총이 어떤 합의를 하면, 자기는 알지도 못하는 그 내용에 따라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일 뿐입니다. 또다시 사회적 교섭을 말하기 전에, 98년 합의에 대한 참회가 우선 아닐까요? 정말로 민주노총이 천만 노동자의 대표라고 한다면,'우리 조합원'보다 비정규직이 우선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일요일도 없고 재고 조사하는 날은 밤도 없는 조카 앞에서, 저는 이모가 열심히 싸워서 ‘우리 조합원’들은 주 40시간이 됐다고 자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상여금도 없고 체력단련비도 없고 효도수당도 없고 하다못해 월차도 없는 제 조카의 천만 원도 안 되는 연봉 앞에서,‘우리조합원들은 열심히 싸워서 성과금이 너의 1년 연봉을 넘는다’는 자랑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민주노총이란 게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운동한답시고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면서도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늙은 아버지까지 안기부에 경찰에 시달리게 만들었으면서도, 그까짓 상처쯤이야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살았는데... 지 잘난 맛에 살았던 그 잘나빠진 이모가 조카를 비정규직으로 만드는 세상. 그 비정규직들에게 ‘우리조합원’들이 동지애는커녕 관리자로 군림하는 세상. 이주 노동자들에게 ‘우리조합원들’이 계급적 연대는커녕 백인으로 우쭐거리는 세상.

사회교섭이, 갈등 당사자인 노사와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대화로 문제를 풀자는 거라고 제 딴에는 열심히 설명을 하고 나니,조카가 묻습디다.
"대화가 돼? 대화루 해두 되는데 근데 이모, 그 아저씬 왜 크레인까지 올라가서 죽었어?"


펌 : 천주교 부산교구 노동사목 소식지 바자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4살 쿠르드 소녀 렝긴을 살려줘요

** 이 글은 쿠르디스탄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쉬티가 보내온 글입니다.


한달 전쯤 한 친구가 인근 도시에 사정이 딱한 아이가 하나 있는데 도와줄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한번 아이를 찾아보겠노라고 약속을 한 후 차일피일 미루다가 며칠 전에야 겨우 아이를 찾아갔었습니다.



아이는 제가 사는 곳에서 한시간 정도 떨어진 소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14살이고, 렝긴이란 예쁜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였습니다. 아이는 8살적부터 당뇨를 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쿠르드 무장독립운동세력(PKK)을 지원했다는 죄목으로 36년 형을 선고받고 현재 13년째 복역중입니다.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설은 1차 대전후 로잔 협약으로 국제적으로 약속되었던 내용이고, 터키 공화국의 설립자인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서도 약속되었던 것입니다. PKK는 이런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를 하다가 탄압을 받고 산으로 들어가 무장 투쟁을 시작한 단체로, 흔히 알고있듯이 테러단체는 아닙니다.

로잔 협약을 주도했던 유럽의 국가들에 의해서 PKK는 작년에 EU의 테러단체 목록에 추가되었고, 이에 반발하여 로이터와 BBC는 뉴스 보도에서 PKK를 테러단체로 간주하지 않겠노라고 발표해 논란이 일기도 했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슬람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쿠르드족 공동체도 가정의 수입을 거의 전적으로 가장에게 의존합니다. 그래서 남편이 수감된 이후 이 가족은 일정한 수입이 없이 전적으로 이웃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아이의 치료비를 충당하고 있었지만 거의 한계에 이른 상황이었습니다.

아이가 병을 앓기 시작하자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위한 의료보험 카드를 만들기 위한 시도를 했었습니다. (대부분 정치범의 가족과 친척에게는 의료보험 카드가 발급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쿠르드족의 대부분은 정치범의 가족이거나 친척입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의료보험 카드를 갖고있는 쿠르드족은 약 30%남짓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이를 치료하던 의사와 함께 의료보험 카드를 만들기 위한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가버너(터키의 지방정치 형태는 독특합니다. 유럽연합의 압력으로 지방정부와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실시하긴 하였지만, 동시에 중앙 정부에서 행정관을 파견합니다. 그래서 한 도시에 두명의 시장이 존재하는 기이한 형태의 지방 정부가 구성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실권은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행정관이 갖습니다. 의료보험증을 발급받는데 필요한 간단한 서류들도 이 행정관의 서명이 없이는 발급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정치적인 이유로 발급이 거부됩니다.)를 찾아가서 의료보험 카드를 만들기 위한 서류의 발급을 요청하자 가버너 왈 "아이는 정치범의 자식이니 자라면 나중에 터러리스트가 될 것이다. 그러니 죽도록 내버려 둬라"라고 하면서 서류의 발급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아이가 8살 때의 일입니다.

그 후 아이의 가족은 다시는 의료보험 카드를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비싼 치료비를 고스란히 주위의 도움만으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을 리 만무합니다. 아이는 주위의 도움으로 마련한 당뇨병 치료약을 집에서 스스로 주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약의 부작용으로 아이의 신장은 서서히 망가져가고 있었습니다. 이 약을 복용하는 사람은 정기적으로 병원에서 신장을 보호하는 치료를 받아야하는데 이 치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신장이 상당히 망가진 듯 아이의 얼굴은 상당히 부어올라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감옥에서 아이들의 아버지가 전화를 해와서 아이의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제발 당신들이 구걸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들만은 교육을 시켜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해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이를 포함 5남매 중, 교육 시기를 놓쳐버린 큰딸을 뺀 다른 자녀들은 모두 학교엘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 가을 학기에 이 중 두명이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총 3명이 고등학교엘 다니고 있습니다. 막내아이는 지금 중학생인데 내년에 고등학생이 된다고 합니다.

중학교까지는 아이들을 교육시키는데 큰 돈이 들어가지 않지만 고등학교부터는 많은 돈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가정에서 조차도 3명을 한꺼번에 고등학교에 보내는 것은 부담이 되는 일입니다. 아이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이유입니다. 일단 이 새로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두 아이가 당장 급하게 필요한 교복과 교과서 등은 주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마련해 줄 수 있었지만, 렝긴이 지속적인 치료를 받도록 지원하고 아이들이 계속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데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가족의 13살난 막내아이는 제가 찾아갔을 때 "한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본적이 없어요"라고 말해서 필자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아이가 40일 되던날에 아버지가 수감되어 13년째 감옥에 있다고 합니다.

터키 디아르바크르에서 아쉬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위기 처한 쿠르드 전통문화유산

**이 글은 현재 쿠르디스탄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쉬티가 시민의신문에 게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메소포타미아(두 강의 사이라는 뜻)는 터키 쿠르드족의 중심지인 디야르바크르에서 시작해 이라크의 바스라에서 끝난다. 티그리스 강은 쿠르드족 거주 지역을 둘로 나누면서 이라크로 흘러들고, 유프라테스 강은 마치 감싸안듯이 쿠르드족 거주 지역을 에워싸며 흘러서 이라크로 들어가 바스라에서 다시 만난다.

이 ‘두 강 사이’ 지역의 약 절반은 현재 쿠르드족 거주 지역에 해당한다. 그리고 쿠르드족은 8천여 년에서 약 일만여년에 이르는 시간을 이 지역에서 부족 공동체를 이룬체 농업과 상업 목축업등에 종사하며 살아왔다.

우리는 흔히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이라크의 남부 메소포타미아 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지역도 메소포타미아의 일부로 남부 메소포타미아보다 앞서서 독자적인 문명을 건설했다. 또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이란, 시리아, 아나톨리아, 남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어서 남부 메소포타미아가 화려한 문명을 꽃피우는데 결정적인 배후 역할을 하기도 했다.


globalsecurity.org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 쿠르드족의 주요 거주지가 지도의 밝은색으로 표시되어있다.

이 곳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몇천년된 유적을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최근 필자는 디야르바크르주의 한 시골지역에서 약 7천년전 유물이 발견됐다는 한 밀밭을 찾은 적이 있다. 이 지역은 여전히 밀밭으로 남아 있었고 어떤 보호조처도 없었다. 심지어 동네 꼬마들이 쐐기문자가 적힌 기와조각을 주워 필자에게 줄 정도로 문화재 유출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얼마 전에는 디야르바크르 주의 한 소도시인 에르가니에서 약 9천500여년 전 마을 유적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마을은 추가 조사 결과가 나와야 하겠지만 문명인이 살았던 인류 최초의 마을로 여겨지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많은 생활 용품들이 함께 발굴되어 그 당시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25개의 서로 다른 주거 형태의 집들이 발견되어 그들의 개성과 필요에 따라 다른 형태의 집을 짓고 고도의 문화 생활을 해 왔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쿠르드족이 살았음이 분명한 유적지에서 수메르 문명의 문화로 알려진 쐐기 문자가 발견되어 쿠르드족과 수메르 문명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궁금증을 더해주고 있다. 수메르 문명의 결정체로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도 쿠르드족을 언급한 구절이 있다.

그리고 과거 이 지역의 쿠르드족은 놀랄만한 포용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타 민족이나 부족이 이 지역에 진출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기에 쿠르드족거주 지역에서는 한때 앗시리안, 아랍인, 에르메니안, 유대인 그외 여러 민족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왔다. 심지어는 지금은 쿠르드족을 극심하게 탄압하고 있는 터키족이 일천년 전에 이 지역으로 이주했을 때도 쿠르드족은 친절하게 그들이 살 땅을 내 줬었다.

인류 고대 종교의 살아있는 박물관

타 민족에 대한 포용성처럼 타 종교에 대한 포용성 역시 놀라워서, 기독교 초기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서 이 지역으로 피신한 기독교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는가 하면, 스스로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쿠르드족이 많았고(성경에서는 이들을 메대인이라고 표시하여 사비안교의 다른 이름인 만데안과의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대교와 조로아스터교의 신전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들도 종종 발견된다.

이슬람이 발생했을 때 아랍족 이외의 부족으로는 최초로 이슬람을 받아들인 부족 역시 쿠르드족이다. 그 결과 쿠르드족이 중심도시 디야르바크르에서는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가 존재하고 있으며, 1700여년 전에 세워진 교회(기독교의 초대 교회가 세워진 것과 동시대)에서 아직도 신자들이 예배를 보고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라크와 터키의 쿠르드족 마을에는 아직도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조로아스터교 율법에 따라 4천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고 있다. 그래서 많은 쿠르드족은 조로아스터교가 쿠르드족의 전통 종교라고 믿는다.

또한 이란과 이라크 일부지역에는 사비안교(만데안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사비안이 정확한 호칭이다)를 믿는 신자들이 사는 공동체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사비안교는 아담을 신의 사자로 믿는 인류 최초의 유일신교로 알려져 있다.


cdtriclub.org
쿠르드인 거주지역

생활 속에 녹아든 문화재들

아직도 깊은 산악지역에 거주하는 일부 쿠르드족은 수천년간 이어온 전통적 생활 양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문화재를 대하는는 쿠르드족의 태도는 독특하다. 문화재를 삶과 유리시켜 보호하고 관리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수천년을 이어온 삶이 일부로 보고 이용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적게는 수백년 많게는 수천년 된 주택에서 아직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2천년이 넘은 동굴 주거지는 현재 가축 우리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들 동굴 주거지에 아직도 살고있는 사람들도 간혹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그들의 수천년된 주택에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이를 보수하고 수리한다. 한국이나 서구의 관점에서 본다면 심각한 문화재 파괴 행위가 될 수도 있지만, 이들에게는 현재 살고있는 집을 수리하는 행위일 뿐이다. (물론 이런 끊임없는 보수가 있었기에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들 집이 존재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수천년에 이르는 석성도 문화재 전문가의 고증 없이 복원한다.

이들에게는 이지역에서 나오는 돌의 특성을 가장 잘 알고있는 이지역의 석공이 최고의 전문가인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보수된 부분에는 “00 시의 00대 시장 000가 0000년도에 이 성을 보수하다”라는 명판이 나붙을 지도 모른다. 지난 수천년간 성의 보수나 증 개축이 이뤄질 때마다 그래왔던 것처럼… 이들의 문화는 현대와 단절된 박제화된 문화가 아니라 아직도 삶과 함께하는 문화이고 앞으로도 수천년간 이어져나갈 문화인 것이다.

위기 처한 쿠르드 문화

민족국가를 건설한 경험이 없는 쿠르드족은 지금도 강력한 부족 공동체를 유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 결과 쿠르드족은 전통문화의 맥을 지금까지 유지해 왔다. 그러나 터키의 쿠르드족 전통문화 말살 정책의 영향으로 지금은 단절될 위기에 처해있다.

터키 정부의 지속적인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인해 쿠르드족의 전통적 생활양식에 많은 변화가 오고있고, 터키군의 지속적인 산악지역 시골마을 파괴는(약 3~5천개에 이르는 시골 마을들이 파괴됐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생활하던 마을 주민들을 난민으로 만들었다. 이들 난민들의 대부분은 인근 도시로 흘러들어 도시 빈민으로 전락한 채 살아간다. 이들이 시골에 살아가면서 이어져오던 전통적인 생활양식과 그 문화는 도시에서는 유지해 나갈 수 없기에 지금은 맥이 끊어져가고 있으며, 이들의 도시지역 유입은 급속한 인구증가로 인해 도시지역에 존재하는 문화재의 파괴를 재촉하고 있다.

이런 것 말고 터키 정부에 의한 고의적 쿠르드족 문화 파괴도 있다. 이미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터키 공화국 창설의 아버지로 존경받으며 터키의 모든 지폐를 도배하고 있는 무스타파 케말은 수천년된 쿠르드족의 고문서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쿠르드족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에는 거의 어김없이 수백년에서 수천년된 산성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들 산성에는 거의 어김없이 터키 군이 주둔하고 있다. 산꼭대기는 군사적 요충지라는 이유에서지만, 만약 이곳이 터키족의 유적이라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또한 쿠르드족 언어말살 정책도 대표적인 문화파괴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터키족의 문화 파괴에 대한 집요함은 코미디 같은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었던 마르딘이라는 쿠르드족 도시는 터키 정부의 집요한 요구에 의해서 그 등록이 취소되었다. 그리고 디야르바크르의 도시를 감싸고 있는 5Km에 달하는 성벽도 지방정부의 노력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기 직전에 터키 정부의 방해로 무산됐다.

가장 오래된 인류의 문화유산 들이 터키에서는 국제적인 보호를 받지 못한 채 터키 정부가 원할때는 언제든지 파괴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고, 파괴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자국의 문화재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보호받는 것을 거부하는 터키 정부의 행태는 바미안 석불을 파괴했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외에도 터키족의 쿠르드 문화 파괴 사례는 여기서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오래된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개입이 시급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쿠르디스탄= 아쉬티 통신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터키족 정부의 쿠르드족 민족문화 말살

** 이 글은 현재 쿠르디스탄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쉬티가 시민의신문에 게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과거 오스만 제국에서도 터키족에 의한 쿠르드족 탄압이 있었지만, 이는 간헐적이었고 민족 말살 정책의 성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 제국에서 무하메드의 가르침에 벗어난 짓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터키족의 쿠르드족에 대한 말살정책이 본격화 된 것은 터키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 터키 공화국이 설립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터키 공화국 설립 후 터키 정부의 쿠르드족 민족문화 말살 정책은 치밀하고도 집요하게 진행되어 왔다.
먼저 무스타파 케말은 쿠르드족의 고문서와 서적들을 소각시켜 버렸다. 특히 그는 쿠르드족의 역사를 말살함과 동시에 터키의 역사도 새로 집필하여, 터키 공화국의 역사를 오스만 제국과 단절시켜 버렸다. 그에 의해서 새로 쓰여진 역사책에 의하면 터키 민족은 인류 모든 문명의 시조가 된다. 수메리안, 에유비안, 바빌리안 등등 인류의 주요 고대 문명은 터키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던 문명이다.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알려져 있다.

하루는 케말이 ‘제키’라는 역사학자를 찾아가서 이런 내용으로 터키의 역사를 새로 쓸 것을 요구한다. 제키 역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역사학자였지만, 케말의 요구사항이 너무나 황당하여 머뭇거리자 케말은 “에쉑크 제키(우리말로 옮기면 ‘개새끼 제키’ 정도의 의미)야, 너는 선택할 권리가 없다. 너는 내가 시킨 일을 해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터키의 역사는 새로 쓰여졌고, 지금 이 역사책을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고 있다.

또한 군인이었던 케말은 언어를 새로 만들기도 하였다. 문맹을 퇴치한다는 명분으로 그간 아랍어로 표기해오던 터키어를 유럽의 로마자를 빌려와서 유럽어에 없는 발언 몇가지를 새로 추가한 터키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하지만, 아직도 터키인의 상당수는 문맹이다. 특히 농촌지역의 문맹률은 대단히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한글처럼 완전히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지만, 무스타파 케말의 이 두가지 야심찬 작업의 결과 터키의 역사는 오스만제국의 역사와 완전히 단절되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그리고 또한 이 두가지 작업은 쿠르드족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오스만제국의 역사 속에서는 쿠르드족이 터키족 이주 전에 이 지역에서 거주하던 분명히 다른 민족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이 새로운 역사책에서는 쿠르드족의 존재가 완전히 부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터키족은 쿠르드족을 독립된 민족이 아닌 ‘산악 터키인’이라고 부르며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친다. 또한 터키족 학자들을 동원하여 쿠르드족의 어원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산악지역에서 살고있는 가난하고 비천한 터키인들이 눈내린 겨울 산을 걸어갈 때 나는 소리에서 “쿠르드”란 단어가 유래했다는 것이 터키의 한 학자가 공식 학술논문으로 발표한 내용이다.

이렇듯 철저하게 역사를 왜곡한 터키족 정부는 이제는 쿠르드족 민족문화 말살 정책에 나선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쿠르드족의 언어를 배우거나 가르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또한 쿠르드어로 된 모든 지명은 터키어로 바뀌고 심지어 게릴라의 이름과 같다는 몇몇 이름은 사용 금지되어,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바꾸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터키족의 많은 학자들은 쿠르드어가 아주 조잡한 원시 언어라고 가르친다.(대단히 발달한 고등언어 터키어 단어의 60%남짓이 외래어이고, 쿠르드어가 그중 상당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터키에도 양심적인 지식인은 아직 남아있어서, 유명한 한 터키인 작가가 그의 글에서 ‘터키인의 60%는 멍청하다’고 비난을 했다가 군 참모총장으로부터 고소를 당한 일이 있었다.(무슨 죄목인지는 알수 없었다. 아마도 국가기밀 누설죄?, 어쨌든 이로서 터키에는 표현의 자유가 없다는게 확실해 졌다.) 그는 판사 앞에서 그의 실수를 정중하게 사과하고 그 실수를 바로잡는다. “60%가 아니라 80%라고...”(일천 여 년 전에 아시아의 동쪽 끝에서 이 지역으로 이주한 터키족이 이 지역에서 8~9천년 전에 발생한 문명의 주인이라고 가르치는 역사를 주입받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한번은 쿠르드족의 중심도시인 디야르바크르(쿠르드이름은 아메드)에서 코미디와 같은 일이 발생했다. 선거로 선출된 시장이 시청 주차장 벽을 장식하기 위해 10대 초반의 아이들을 불러 벽에 평화를 염원하는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그러자 중앙정부에서 임명된 시장(터키의 지자체는 선거로 선출된 시장과 중앙정부에서 임명한 총독 이렇게 두명의 시장이 존재하는 독특한 시스템이란 것은 이미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이 이 아이들을 상대로 고소를 한 것이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법적 미성년자인지라 처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아이들이 그린 평화를 염원하는 글과 그림마저도 정치적인 행위로 해석하여 처벌을 하고자했던 터키족의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 코미디와도 같은 사건이었다.

이로써 중앙정부에서 임명된 시장은 비록 아이들을 처벌하는데는 실패했지만, 디야르바크르 주민들에게 평화를 위한 모든 행위는 정치행위라는 사실을 분명히 각인시켜주는 정치적 홍보효과를 누릴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디야르바크르에는 약 오래된 성채가 존재한다.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진 이 성채는 25개의 정복자들의 흔적과 6개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어서 석성 축성양식의 열린 박물관이라고 불리면서 역사학계에서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 성벽이다. 내성은 약 6~8천년이 된 것으로 추정되면 외성은 2~3천년 된 것으로 추정된다.(케말이 문서를 모두 소각하는 바람에 정확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얼마 전 이곳의 쿠르드족 지방 정부가 이 성을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코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일이 있었다. 유네스코에서 실사를 나왔고, 이 성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한 절차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 터키 정부가 이를 방해하는 바람에 무산된 일이 있었다. 자국의 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것 마저도 단지 그것이 쿠르드족의 문화재란 이유로 터키 정부는 이를 방해한 것이다. 또한 8천 여년 된 내성에는 터키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쿠르드족의 문화재 중 많은 수가 산 위에 존재하다보니 수천 년 된 많은 수의 산성들에 터키군이 주둔을 하고 있다. 이로인한 문화재 파괴는 터키 정부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쿠르드족의 것이므로.)

최근 터키가 유럽연합 가입을 추진하면서 쿠르드족에 대한 탄압이 일부 완화되었다. 몇 년 전부터는 쿠르드어 교육이 허용되었고, 문화행사 개최도 허용되었다. 또한 지방 자치제가 도입되면서 68개 도시에서 쿠르드족이 시장으로 당선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터키 정부의 엄청난 물량공세와 선거 부정에도 불구하고 얻어낸 성과이기에 분명 값진 성과이긴 하지만, 외압에 의해 일부 법과 제도가 완화된 것일 뿐 터키 정부의 의식의 변화는 아니기에, 쿠르드족에 대한 탄압은 완화되었다기 보다는 더욱 지능화되고 교묘해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일례로, 언어 교육은 허용되었지만, 공교육 기관이나 인가 받지 않은 시설이나 개인은 쿠르드어를 가르칠 수 없도록 법은 만들어 어쩔 수 없이 쿠르드어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사설 학원으로 등록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들 학원들은 일정액 이상을 받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고, 이 금액은 가난한 쿠르드족이 감당하기엔 벅찬 금액이다.

또한 이렇게 개설된 사설 쿠르드어 학원마저도 온갖 시비에 휘말려 있다. 간판 색깔에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 깃발에 들어간 노랑, 빨강, 초록 색깔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소송에 소송에 계류되어 있다.(물론 이 간판에는 이 세가지 색깔 이외에도 다른 색깔이 두어가지 더 사용되었다.) 또한 이 학원에서 만든 교재에 쿠르드 이름으로 일부 지명과 이름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인쇄가 끝난 교재의 사용이 금지되기도 했다.(세상에 쿠르드어 교재에서 쿠르드어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니!)

이렇듯 유럽연합의 압력으로 쿠르드어 교육을 허용했지만,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괴롭히고 있으며 이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어를 공부하고있는 젊은 친구들에게는 노골적으로 감시와 미행을 붙여서 심리적 압박을 주기도 한다.(쿠르드어를 공부하는 친구는 민족의식이 강한 사람으로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분류되는 것이다.)

얼마전 노무현 대통령이 터키를 방문한 했을 때, 터키 주재 한국 대사관 관계자가 한국과 터키의 관계 증진을 필요성을 강조 하면서 ‘한국을 형제 국가라고 불러주는 나라가 터키 말고 또 있는가?’라며 했던 것을 읽은 기억이 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지금 쿠르드족이 처한 상황은 100여 년 전의 일제 식민지 시대의 한반도와 너무나 비슷하다. 또한 현재 터키의 정치 상황은 남한의 독재시대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유사하다. 물론 터키족도 여기서는 예외가 아니다.

터키는 한국의 일제 식민지 시대와 독재 시대를 혼합해 놓은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다. 마치 한국의 상황들에 대해서 자세한 연구 조사를 통해 이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듯 한국에 가까운 나라, 과연 터키는 한국의 형제국가였다.

다음에는 쿠르드족의 문화에 관해 간단하게 소개할 계획이다.


터키의 쿠르디스탄에서 아쉬티 통신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