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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멕시코시티로 가는 길

  

 볼리비아 입국비자를 받으려면 한국에서 미리 황열병 예방주사를 맞아야 한다. 최소한 출국 열흘 전에는 접종을 해야 한다는 국립의료원의 안내문을 무시하고 대충 닷새 전쯤 주사를 맞았다가 거의 죽다 살아났다. 사스마와리 생활 몇달만에 몸이 완전히 망가졌는지 주사 한 방에 곧바로 속수무책. 꼬박 흘 동안 지독한 고열과 몸살 증세로 끙끙 앓아누워야 했다. 출발 당일 오후까지도 준비물 따위를 다 못 챙겨 허둥댔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오래 떨어져 있을 친구들과 작별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출발!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골치 아픈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기로 했다.
  

 

  10시간 가까운 지루한 비행 끝에 밴쿠버 도착. 현지시각으로 오전 11시가 좀 넘었다.

 

 

  입국심사대. 단체로 단기 어학연수에 나선 초등학생들 꽁무니에 달라붙어 무사히 통과.

 

 

 토론토행 비행기 환승 시간이 11시간 정도 걸린다 해서 공항 밖으로 나가 좀 돌아다니기로 했다. 미리 환전해 둔 캐나다 달러를 꺼내 공항버스(airporter) 티켓을 사려는데 표 파는 언니가 '다른 돈'을 달라며 눈웃음 짓는다. 작업 방식이 독특하군, 생각하는 찰나 다시 들여다 본 내 지폐는 분명 캐나다 달러가 아니라 호주 달러다. 도대체 왜...!? 정확히 당일 환율까지 계산해 환전하러 갔던 걸 기억하면 확실히 내 잘못은 아닐테고 은행원 언니의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순간 분노와 짜증의 쓰나미가 밀어닥치며 욕지기가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미 400달러나 환전했다는 냉엄한 현실 인식이 곧 이성을 되찾게 했다. 별 수 없었다. 적지 않은 수수료를 지불하고 다시 환전해야만 했다. ㅜ.ㅜ

 

 

 

  지폐에 그려진 할머니의 표정조차 나에 대한 조롱과 연민으로 읽힌다...

 

 

  시내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창밖의 풍경을 담아봤다. 기분 탓일까. 유난히 스산한 느낌이다.

 

 

 사철 따뜻한 날씨라던 로도스의 말과는 달리 밴쿠버의 겨울 추위는 엄혹했다. 티셔츠와 얇은 자켓 하나로 버티기엔 무리였다. 아웃도어 샵을 찾아 다운타운 근처를 한참 걸었다. 두어 시간 헤맨 결과 고어텍스 자켓이 한국의 절반 가격이라던 동대문 등산장비점 사장님의 말도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마음에 드는 것은 전부 600달러가 넘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여행의 불운한 전조를 느낄 수밖에... 결국 200달러짜리 윈드월 자켓으로 타협했다. 간신히 추위는 면했지만 시내 관광이고 뭐고 다 귀찮아져서 밴쿠버 시립미술관 로비에 있는 소파에 푹 파묻혀 꾸벅 졸며 밤까지 비행기 시간을 기다렸다.

 

 

  춥고 배고팠던 밴쿠버야, 안녕!
 

 

  토론토에서는 엔진 이상 때문에 비행기가 연착돼 또 3시간이 넘게 마냥 기다렸다.
 

 

 

 서울을 떠난지 무려 30시간 만에 드디어 멕시코시티에 도착했다. 오랜 비행에 너무 지쳐서인지 그토록 원했던 곳에 내가 있다는 설레임보다도 당장 쉬고싶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ATM으로 현지화폐를 인출하고 로도스가 소개해 준 사촌동생 분과 통화한 뒤 곧바로 공항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자태를 드러낸 멕시코시티! 해발 2200미터에 자리잡은 인구 2천만의 대도시다.

 

 

공항택시는 비싼 대신 깔끔한 편. 셔츠를 갖춰입은 택시기사는 여행 내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소나 로사(Zona Rosa) 지역은 멕시코시티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에 속한다고 했다. 상점이나 음식점 등을 경영하는 한국 교민들이 몰려있는 거주지역이기도 하다. 역시 한국분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약속한 로도스의 사촌동생 분과 조우. 일요일이라  현지식당은 모두 문을 닫은 관계로 근처의 (한국식)중국음식점에서 셋트 메뉴로 저녁을 해결. 간단히 산책 겸 시내구경을 한 뒤 택시를 타고 소칼로 근처로 숙소를 찾아나섰다.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었지만 아내와 함께 나오셔서 차마 권하지 못했다. 타향살이만으로도 힘겨울텐데 신혼부부의 휴일 저녁을 방해할 순 없었다. 어쨌든 두 분 덕분에 어렵지않게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다.

 

 

  한국교민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 일요일이라고 쉬는법이 없다. 24시간 하지 않는게 다행? ^^
 

  

  소나 로사 근처의 앙헬(Angel)탑.

 

 

  소칼로(Zocalo) 광장의 야경

 

 

  호스텔 까떼드랄. 이곳에서 나흘밤을 보냈다. 숙박료는 140페소 정도. (1페소 = 약 100원)

 

 

 4인 1실의 도미토리 룸을 배정받았고 이층침대의 아랫칸을 쓰게 됐다. 짐을 풀면서 윗침대를 쓰는 일본인 친구와 인사를 나눴다. 그의 이름은 켄. 6개월째 여행을 하고 있으며 멕시코시티가 마지막 행선지라고. 이틀 후면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짙은 턱수염과 옷차림 등이 과연 범상치 않은 행색이었다. 동양인 여행객은 드물다며 나를 무척 반가워했다. 여행 정보 등을 묻고 답하다보니 자연스레 한 잔 하게 됐다. 감자칩에 맥주를 마시며 늦도록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멕시코에서의 첫날이 저물었다.

 

 

  숙소 옥상의 테라스에서 바라본 새벽 1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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