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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17
    [02] 멕시코시티로 가는 길 (5)
    태자
  2. 2009/08/17
    [01] 여행을 떠나며(1)
    태자

[02] 멕시코시티로 가는 길

  

 볼리비아 입국비자를 받으려면 한국에서 미리 황열병 예방주사를 맞아야 한다. 최소한 출국 열흘 전에는 접종을 해야 한다는 국립의료원의 안내문을 무시하고 대충 닷새 전쯤 주사를 맞았다가 거의 죽다 살아났다. 사스마와리 생활 몇달만에 몸이 완전히 망가졌는지 주사 한 방에 곧바로 속수무책. 꼬박 흘 동안 지독한 고열과 몸살 증세로 끙끙 앓아누워야 했다. 출발 당일 오후까지도 준비물 따위를 다 못 챙겨 허둥댔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오래 떨어져 있을 친구들과 작별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출발!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골치 아픈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기로 했다.
  

 

  10시간 가까운 지루한 비행 끝에 밴쿠버 도착. 현지시각으로 오전 11시가 좀 넘었다.

 

 

  입국심사대. 단체로 단기 어학연수에 나선 초등학생들 꽁무니에 달라붙어 무사히 통과.

 

 

 토론토행 비행기 환승 시간이 11시간 정도 걸린다 해서 공항 밖으로 나가 좀 돌아다니기로 했다. 미리 환전해 둔 캐나다 달러를 꺼내 공항버스(airporter) 티켓을 사려는데 표 파는 언니가 '다른 돈'을 달라며 눈웃음 짓는다. 작업 방식이 독특하군, 생각하는 찰나 다시 들여다 본 내 지폐는 분명 캐나다 달러가 아니라 호주 달러다. 도대체 왜...!? 정확히 당일 환율까지 계산해 환전하러 갔던 걸 기억하면 확실히 내 잘못은 아닐테고 은행원 언니의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순간 분노와 짜증의 쓰나미가 밀어닥치며 욕지기가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미 400달러나 환전했다는 냉엄한 현실 인식이 곧 이성을 되찾게 했다. 별 수 없었다. 적지 않은 수수료를 지불하고 다시 환전해야만 했다. ㅜ.ㅜ

 

 

 

  지폐에 그려진 할머니의 표정조차 나에 대한 조롱과 연민으로 읽힌다...

 

 

  시내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창밖의 풍경을 담아봤다. 기분 탓일까. 유난히 스산한 느낌이다.

 

 

 사철 따뜻한 날씨라던 로도스의 말과는 달리 밴쿠버의 겨울 추위는 엄혹했다. 티셔츠와 얇은 자켓 하나로 버티기엔 무리였다. 아웃도어 샵을 찾아 다운타운 근처를 한참 걸었다. 두어 시간 헤맨 결과 고어텍스 자켓이 한국의 절반 가격이라던 동대문 등산장비점 사장님의 말도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마음에 드는 것은 전부 600달러가 넘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여행의 불운한 전조를 느낄 수밖에... 결국 200달러짜리 윈드월 자켓으로 타협했다. 간신히 추위는 면했지만 시내 관광이고 뭐고 다 귀찮아져서 밴쿠버 시립미술관 로비에 있는 소파에 푹 파묻혀 꾸벅 졸며 밤까지 비행기 시간을 기다렸다.

 

 

  춥고 배고팠던 밴쿠버야, 안녕!
 

 

  토론토에서는 엔진 이상 때문에 비행기가 연착돼 또 3시간이 넘게 마냥 기다렸다.
 

 

 

 서울을 떠난지 무려 30시간 만에 드디어 멕시코시티에 도착했다. 오랜 비행에 너무 지쳐서인지 그토록 원했던 곳에 내가 있다는 설레임보다도 당장 쉬고싶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ATM으로 현지화폐를 인출하고 로도스가 소개해 준 사촌동생 분과 통화한 뒤 곧바로 공항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자태를 드러낸 멕시코시티! 해발 2200미터에 자리잡은 인구 2천만의 대도시다.

 

 

공항택시는 비싼 대신 깔끔한 편. 셔츠를 갖춰입은 택시기사는 여행 내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소나 로사(Zona Rosa) 지역은 멕시코시티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에 속한다고 했다. 상점이나 음식점 등을 경영하는 한국 교민들이 몰려있는 거주지역이기도 하다. 역시 한국분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약속한 로도스의 사촌동생 분과 조우. 일요일이라  현지식당은 모두 문을 닫은 관계로 근처의 (한국식)중국음식점에서 셋트 메뉴로 저녁을 해결. 간단히 산책 겸 시내구경을 한 뒤 택시를 타고 소칼로 근처로 숙소를 찾아나섰다.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었지만 아내와 함께 나오셔서 차마 권하지 못했다. 타향살이만으로도 힘겨울텐데 신혼부부의 휴일 저녁을 방해할 순 없었다. 어쨌든 두 분 덕분에 어렵지않게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다.

 

 

  한국교민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 일요일이라고 쉬는법이 없다. 24시간 하지 않는게 다행? ^^
 

  

  소나 로사 근처의 앙헬(Angel)탑.

 

 

  소칼로(Zocalo) 광장의 야경

 

 

  호스텔 까떼드랄. 이곳에서 나흘밤을 보냈다. 숙박료는 140페소 정도. (1페소 = 약 100원)

 

 

 4인 1실의 도미토리 룸을 배정받았고 이층침대의 아랫칸을 쓰게 됐다. 짐을 풀면서 윗침대를 쓰는 일본인 친구와 인사를 나눴다. 그의 이름은 켄. 6개월째 여행을 하고 있으며 멕시코시티가 마지막 행선지라고. 이틀 후면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짙은 턱수염과 옷차림 등이 과연 범상치 않은 행색이었다. 동양인 여행객은 드물다며 나를 무척 반가워했다. 여행 정보 등을 묻고 답하다보니 자연스레 한 잔 하게 됐다. 감자칩에 맥주를 마시며 늦도록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멕시코에서의 첫날이 저물었다.

 

 

  숙소 옥상의 테라스에서 바라본 새벽 1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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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여행을 떠나며

 

 “세상은 당신 생각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어디 잘 해보세요.” 사장은 마지막 순간에도 악담을 잊지 않았다. 평소 내 기사를 눈여겨봤다며 ‘장래’를 운운하던 상무는 나의 퇴사 결심이 그저 황당하다는 눈치였다. 본부장이나 보도국장도 마뜩찮은 내색을 하긴 마찬가지였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에 ‘로또’나 다름없는 직장을 제발로 나가겠다니. 그들에겐 그저 철부지같은 행동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대졸 초임치고는 드문 고액연봉에다 지역사회를 주무르는 유무형의 권력까지 계산하자면 과연 ‘경제적 동물’의 선택으로는 한참 빗나간 것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월급 꼬박꼬박 챙기는 회사원 따위가 되려고 방송국에 들어간 건 아니었으니 아쉬울 건 없었다. 더구나 회사가 제공하는 물질적 보상은 그것이 크면 클수록 반드시 쓰라린 대가가 따라온다는 것이 짧은 사회생활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었다.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꿔보겠다던 다짐은 전쟁같은 일상 속에서 점점 잊혀져갔다. 눈앞의 불의와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던 원칙 역시 강고한 현실의 벽 앞에서 차례로 무너져갔다. 바꾸겠다던 세상은 그대로였고 기성언론의 관성과 조직논리에 맞춰 변해가는 건 바로 나였다. 한 번 어긋난 흐름은 무서운 속도로 나를 몰아댔다. 멈춰야만 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종내 되돌릴 수 없으리라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살인사건 현장에서부터 국제기구의 회의장까지, 안 가 본 곳이 없다.
 

 

 

 다행인 건 주변의 선배와 동료, 친구들이 나의 선택을 신뢰하고 지지해주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따뜻한 위로와 응원 덕분에 백수로 내딛는 새걸음이 한결 홀가분했다. 무적 신분이 되는 순간 나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는 그저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러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시간은 흘러넘쳤다. 기자로서의 내 삶이 방송편성표에 입력된 뉴스 시간표에 따라 직조되는 노예의 시간들이었다면, 이제 나는 비로소 내 시간의 주인으로 행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될 때까지의 여유시간들이 나에겐 인생의 보너스처럼 여겨졌다. 곧바로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다시 오기 힘든 기회인만큼 멀리 떠나고 싶었다. 기간도 두 달 이상으로 잡았다. 얼마 후, 여행은 집으로 배달된 멕시코행 비행기 티켓으로 구체화됐다.


 타인과 세상에 대한 관심/애정을 바탕으로 소통을 시도하는 관찰자/전달자라는 점에서 기자와 PD의 노동은 본질적으로 같다. 스스로에 대한 위로와 보상의 성격이 강했지만, 여행은 동시에 PD로 방송국에 재입성하기 위한 준비과정이기도 했다. 냉철한 관찰자, 진지한 전달자로서의 자세를 여행지에서도 고수할 생각이었다. 그런 점에서 라틴 아메리카는 어찌 보면 필연적인 목적지였다. 오랜 식민지배에 이은 군사정권의 독재, 그리고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수탈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과거와 현재는 우리와 너무나도 닮아있다. 하지만 중첩된 모순들을 풀어가는 사회적 방식과 개인들의 의식은 또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바로 그 ‘차이’에 주목했다. 흔히 겪듯이 우파가 차이에서 차별로 직행한다면, 좌파는 차이에서 가능성을 엿봐야하지 않을까. ‘다름’을 통해 ‘새로운 것’을 이끌어내는 긍정적 사고야말로 진보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세상의 진보에 기여하고픈 PD지망생으로서 라틴 아메리카 여행은 ‘차이’를 화두로 한 해외취재에 다름 아니었다.

 

 

    멕시코에서 시작해 브라질에서 끝나는, 다소 무모해보이는 계획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들인 해외취재가 얼마나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지 이제와 헤아리자니 부끄럽기도 하다. 직접 현장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느꼈던 차이를 통해 어떤 구체적 깨달음을 얻었는지도 미지수다. 때로는 그들과 우리 사이의 현상적 차이를 넘어 인간으로서 공유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본질을 체험하기도 했다.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이나 아이들에 대한 사랑, 정체성에 대한 고민 등이 그것이다. 어쨌거나 장황하게 늘어놓은 여행의 변은 앞으로 연재될 여행기를 통해 그 실체와 허구가 백일하에 드러날 터다. 앙상한 내면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날까 두려운 마음도 든다. 여행에서 돌아온 게 3월 중순이니 두 달 만에야 보따리를 푸는 셈이다. 언제나 시작은 힘들고 출발에는 우여곡절이 따른다. 이 정리 작업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도록 언제나 힘을 잃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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