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8/01/15 11:46
Filed Under 이미지적 인간

최근에 본 영화 두편. 한편은 집앞 극장서 우발적으로 봤고, 한편은 '우생순'을 보려고 씨네큐브로 갈까 말까 망설이는 와중 우연히 때가 맞아 역시 씨네큐브에서 봤다.

 

한편은 길게 쓰기에는 할 말이 별로 없고, 한편은 길게 쓰기에는 너무 괴로울것 같아서 간략하게 느낌만.

 

#1. 아메리칸 갱스터

 

리들리 스콧이 '거장'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게 해주는 영화다. 어찌보면 일방적인 흑인 마약상의 이야기를 청렴한걸 제외하면 볼게 없는 백인 형사를 대립 시키면서 서사를 풍부하게 했다.

 

거기에 악역임에도 불구하고 지적인 느낌과 신뢰감을 주는 덴젤 워싱턴과 뭘 해도 불량해보이는 러셀크로의 결합이라니... 잘 써진 각본, 적절한 긴장감과 여운을 주는 이야기의 전개 형식, 최상의 캐스팅과 연기까지.

 

흑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가족에 충실하고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안고 빈민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하는 성공한 기업가는 전쟁을 이용해 순도 높은 마약을 팔고 살인도 서슴치 않는다. 돈을 어떻게 벌든 간에 많은 돈과 자기 가족에 대한 개인적 행복, 그리고 사회환원을 하면 훌륭한 사람인양 생각하는 지금을 반영하는 프랭크.

 

폭력 남편이고 가족을 챙기지도 않고 시시 때때로 바람을 피워서 부인을 괴롭게 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형사는 청렴하고 대쪽같아서 어떤 유혹에도 잘 흔들리지 않으며 수사팀을 이끌고 주도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다. 자기 주변의 가까운 사람에게 어떻게 굴던간에 일만 잘하는 사람이면 된다는 지금을 반영하는 리치.

 

프랭크와 리치를 바라보면서 대통령 당선인과 삼성이 생각난것은 자연스럽다. 어려운 가정에서 힘들게 자라나 건설회사 CEO를 거쳐 대통령에까지 이른 그는 자식들 사랑이 넘쳐 직장도 알아서 구해주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도 하고, 가족에게도 충실해 보인다. 그리고 업무 추진력 하나는 최고로 평가 받으니 프랭크와 리치의 장점만 참으로 잘 모아 놓은것 같다. 그가 그 동안 번 돈이 어디서 온 것이든지가 중요하지 않으니 말이다.

 

비자금을 돌리고 노동자들이 죽게하고, 노조는 인정도 안하면서 온갖 자선사업에 가족의 행복을 중심축으로 하는 이미지로 기업을 만들어가면서도 세계 1위라는 타이틀에 엄청난 흑자에 성공신화로 기록되는 삼성. 그들이 1위가 되는 바탕이 된 것이 무엇인지 왜 삼성에 들어간 사람들은 10년 넘으면 더 이상 다니기 힘든지가 중요하지 않다.

 

에고 끔찍하다. 1960년대 말 미국의 모습에서 그 보다 더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니 말이다.

 

#2. 그르바비차

 

영화의 원제는 Esma's Secret이다. 에스마는 등에 기다란 상처를 가지고 있는 비혼모인 주인공의 이름이고, 그녀의 비밀이란 그녀의 소중한 딸이 보스니아 내전 당시 수용소에서 인종청소의 일환으로 반복적으로 벌어진 성폭력의 결과라는 것이다.

 

영화는 참으로 담담하다. 배경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영화를 본 것에 비하면 '문제'의 집단 강간을 집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의사를 꿈꾸던 에스마가 어떻게 지금처럼 살게 됬는지, 왜 남성들의 끈적한 시선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주룩 흘리는지, 장난을 같이 치던 딸의 뺨을 호되게 때리는지를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수학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비혼모와 아버지가 자랑스런 참전용사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강간범이라는 충격에 머리를 미는 딸의 관계에 주목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폭력의 상처가 되살아나는 소름끼치는 영화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밋밋한 모녀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닫힌 관계 맺기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사전정보 없이 본다면 뒷 배경이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것도 아니고 갈등이 폭발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갈등의 해결이 극적인 것도 아니며 로맨스가 풍부한 것도 아니니 참 밋밋한 영화이기도 하다.

 

뭐 상처를 공감하고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획일적이고 행정적으로 처리하는 성폭력 담당 공무원이나 혼자 일하는 엄마들을 도와줄 보육 시스템의 허접함이나 부모가 다 있는 가정을 전제하는 선생님이나 술집에서 더럽게 노는 군인들이나 익숙한 장면들이 넘쳐난다. 현실은 온갖 차별로 넘쳐나고 상처는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자행되고 사회적 지지망은 비루하기 그지 없는 보스니아의 현실이다.

 

이런 무거운 현실에서 그나마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여성들의 관계가 아닐까? 알바하던 술집의 사장에게 복권을 사오지 않았다고 호되게 당하고 딸의 수학여행 경비를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에스마를 도운 것은 구두공장의 여공들이고 빈곤한 여성 가장의 보육을 도와주는 것은 그녀의 친구이다.

 

엄마 속 뒤집어 놓고 수학여행 가면서도 금방 조아라 하는 어린 딸이지만 그녀와 엄마의 관계는 또 달라질 것이고 그녀들을 둘러싼 여성들의 관계는 더 단단해 질 것이라는 것이 작은 안도감으로 남는다.

 

무거워서. 뭐라 이야기하기도 어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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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5 11:46 2008/01/15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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