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8/07/04 08:44
Filed Under 머리굴리는 창고

우웩.. 너무 재미 없어서 죽을뻔했다. 쉽게 얘기할 수 있는걸 굳이 어렵게 쓰는 실로 놀라운 기술이라고나 할까? 인문학적 소양이 없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인문학 서적이 필요하다. 그런게 널리널리 퍼져야 운동도 되지 않을까? 자본이 내는 처세술 책은 그렇게 쉽고 이해가 쏙쏙 되는데... 우리 영역의 책들은 너무 어렵기만 하다. ㅠㅠ

 

표지에 쓰인 그림이 누구의 작품인지 궁금하다. 어디서 한번 보긴 본 거 같은데 기억이 안난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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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노동지상주의 

 

-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시작이 '선한' 상인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었고 화약이었다는 분석에는 한편 동의함. 군대라는 조직을 통해 규율에 따르고 끊임없이 노동에 종사하게 되는 과정을 겪고 학습하게 된다는 것에 동의함. 이것은 여전히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도 전쟁과 자본의 관계를 살필 수 있으므로 유효하다 할 것임. 그리고 이를 강화시키는 기전으로서의 아동노동과 이어진 교육의 문제에도 충분히 공감함.

 

- 노동을 지양한다는 것은 '좋은 삶'의 기준으로 세상을 재구성하는 것임.

 

- 파편화된 노동(labor)가 아니라 자신의 필요와 욕구에 따른 일(work)이 되어야 할 것임. 노동은 사유와 교환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일은 서로의 관계망 속에서의 사회적 필요에 의해 재구성 된 것임.

 

O 노동시간

 

- 시간에 속박되어 무엇을 해야할 시간이라고 나의 삶의 시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것을 하고 있고 이것을 위한 시간의 양을 파악하는 방식으로의 재구성. 흔한 시계나 자명종과 모래시계의 차이. 하지만 사람의 동작을 기준으로 생산 라인을 재구성하는 모답스나 맨아워는 또다른 형태의 모래시계 아닐까? 1/8초라는 절대적 시간으로 전체 24시간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시간을 발언하고 요구하는 방식이어야 함.

 

- 노동시간 문제를 고민할때 남는 것은 노동이외의 시간에 대한 문제임. 노동하는 시간과 일상시간의 분리뿐만이 아니라 일상시간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를 주목해야 할 것임. 노동시간 단축투쟁이 노동시간을 줄이는 문제나 고용의 문제 또는 임금의 문제로 가는 것에 대한 경계가 필요. 노동시간을 줄인다고 일자리가 느는 것도 아니고 노동시간을 줄였을때의 여가 시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도 문제임. 우리가 요구하는 임금이라는 것은 현재의 '소비'를 전제로한 임금임. 우리의 필요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하고 그것이 임금이라는 형태 외에 또 어떤 형태로 제공되고 나눠질 수 잇는지에 대한 고민.

 

- 창조적으로 빈둥거릴 시간이 있어야 창의력이 발휘되는 발랄하면서도 발칙한 운동을 할 수 있다.

 

O 노동시간 단축 운동

 

- 월급제 쟁취도 기준노동시간의 단축도 핵심이 아닐 수 있음.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식은 사람들과 사람들의 사이의 시간을 어떻게 재구성 할 수 있느냐임. 노동이 사적 소유에서 자유로운 일이 되어야 하고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시간 역시 소비가 아닌 무언가로 채워질 수 있어야 함.

 

- 결국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함. 수십년간 다양한 형태의 교육을 통해 인입되어있던 노동에 대한 패러다임과 여가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함.

 

- 시간의 재구성.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체적 프로그램은 뭘까? 나무늘보처럼 살아보기? 시계없이 살아보기?

 

O 기타

 

- 급진적 문제인식임. 많은 부분 최근의 고민과 닿아있음. 특히 '고용안정투쟁이나 임금인상투쟁은 이제 그만!' 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심정이 통함. 

 

- 하지만 우리가 찾고 싶은 것은 발랄하고 창의적인 구체성이다. 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대중들과 소통하고 나눌 것인가이다.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그리고 사람들의 '즐거운 삶'을 위해 시간을 재구성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필요를 서로 읽어주고 나눌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 방법을 만드는게 우리의 과제 아닐까? 어떻게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발랄하고 깜찍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툭툭 던지게 된걸까?

 

 

 

 



- 대량 실업과 경쟁 논리 속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불안정하고 값싼 노동을 강요박고 있는 때 노동을 '위한' 운동, 곧 자신의 일자리를 고수하고 더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한 운동에만 매달리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이해관계들로 파편화되어 있는 주체들 사이에 더 많은 대립을 초래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노동이 우리 삶의 가치 실현과 얼마나 거리가 먼가를 지적하며 노동을 '단순한 삶'이 아니라 더 '좋은 삶'의 가치와 관계 맺으려는 운동일 것이다.

 

- 근대화를 가져온 것은 오히려 생산력과는 반대로 존재하는 것들을 깨부수는 파괴력, 곧 화약 무기의 발명이었다.

 

- 물론, 어떤 사회도 물건들의 생산과 분배를 담당하는 체제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건들의 생산과 분배를 담당하는 어떤 분리된 경제 기구들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경제적 질서는 그것이 속해 있는 사회적 질서의 한 기능일 뿐이다...... 경제활동이 사회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만의 경제 충동을 따르게 되어 버린 19세기의 사회는 사실 놀랄만한 예외 현상이었다..... 이런 제도적 조작은 그 사회가 경제 요구에 어떤 식으로든 종속되지 않는 한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시장 경제는 시장 사회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런 발전을 거쳐 인간사회가 역제 체제의 부속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 생산 시간 자체가 수요자나 생산자가 스스로 설정한 목적들에게 분리되어 착취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 시간은 돈이다.

 

- 추상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연관들에서 '떨어져 나온' 시간을 주제로 삼고, 이를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더 이상 의식되지 않는 다른 시간 형식들과 비교함으로써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시간 개념을 파악하는 것은 사회적 해방의 관점에서 중요한 일이다. 모래시계나 물시계 같은 이전 시대 대부분의 시간 측정 기구들은 '지금이 몇 시'인지가 아니라, 지금이 어떤 구체적 과정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시간'인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 자유 시간은 해방된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의 2차 기능 공간이다. 그 시간은 자유로운 여유로움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리고 매우 피곤하게 상품을 소비하게 하는 시간이다.

 

- '노동'은 그 본질상 자유롭지 못하고, 비인간적이며, 비사회적이고, 사적 소유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사적 소유에 의해 창조된 활동이다. 사적 소유의 지양은 '노동'의 지양으로 이해될 때만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845)

 

- 자본주의적 생산과 경제적 이성의 정언명법은 일종의 트로이의 목마처럼 인간 내면에 침투해 들어와서는 거의 본능과 같은 위치를 점학 반사작용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초창기부터 아이의 욕구를 규칙화시키고, 육체와 운동 능력을 규율화 시킴으로써 노동은 포착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지배적인 결정 요인이 되었다.

 

- 노동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수탈이다. 노동을 통해 구체적인 시간과 내 생산의 모든 총체성을 외화시킴으로써 나는 나 자신의 실체적인 것을, 나의 일반적인 활동과 실재성을, 나의 개체성을 다른 이의 소유로 만든다.

 

- 시장경제 안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노예일 때나 비로소 자신의 주인일 수 있다. 따라서 주인과 노예는 조건적으로만 활용할 수 있는 모델이다.

 

- 자본에게는 인간이 잘살고, 건강하며, 우호적인 상호관계를 맺는 것은 일차적인 수단이나 목표가 아니라, 싸워야만 얻어 낼 수 있는 첨가물일 뿐이다. 부르주아적 개인은 그야말로 "깔아뭉개지고, 노예화되고, 무시되며, 경멸할 만한 존재"인 것이다.

 

- 완전 고용이라는 요구는 사회의 기술 수준이 높아질수록 점점 더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어떤 유럽의 정치가가 완전 고용을 보장하기 위해 자기 나라의 기술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사고할 머리가 없거나 아니면 국민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 창조적인 빈둥거림, 곧 가치 창출이라는 강제에서 자유로운 생산활동을 계획해야 한다. 느림가 효율성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의무적으로 '해야함' 대신 '여유로움'을 확립해야 한다.

 

- 가치 특화 형태와 강제 노동소 같은 사회를 넘어서는 대안은 아직도 열정적으로 모색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전보다 더 높은 반성적 수준에서 현재의 성과중심주의 지배에 대항하고 그에 상응하는 '좋은 삶'에 대한 표상을 발전시켜 나갈 사회운돈이다. 이런 운동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비판적 반성을 통해 이중적으로 강제된 노동 사회라는 현존 질서를 넘어서는 것은 가능하다. 바로 이런 가능성이야 말로 상아탑 속의 페미니즘 공장이 공상적인 체제 내적 관점들만 고집하면서 놓쳐 버리고 있는 것이다.

 

- 오늘날 노동은 이중적 의미에서 더 낮은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상품으로서의 노동력가격이 점점 더 최소 생존 이하로 떨어질 뿐만 아니라 생산된 상품의 판매 또한 점점 더 성공적인 자본축적에 필요한 수준 이하로 떨어지고 있다.

 

- 소위 '비공식성'은 자본주의 주변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헐값 생산과 '떨어져 나온' 빈곤 활동 사이에 존재하는 회색 지대이자, 국가 혹은 다른 제도적 규제 (노동 보호, 임금 협상, 환경 조약, 사회 시스템 등) 외부에 존재하는 경제활동이다. 그로 인해 이 경제활동은 한편으로는 국가와 제도가 제공하는 보호에서 벗어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거의 어떤 세금도 지불하지 않는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는 국각가 점차 전통적인 일반적 사회 기능에서 물러서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시장경제가 기능하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정치적 공간도 완전히 붕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사회부조는 더 이상 정상적 노동관계를 전범으로 삼지 않으며 그 목표도 노동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을 정상 노동 일상으로 재통합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부조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최대한 빨리, 별 동요 없이 비정규적이고 불안정한 값싼 임금노동 관계 속으로 몰아넣기 위한 임시 난방기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부조를 받는 일이 귀찮고 어려워질수록, 사회부조가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운래의 원리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불안정한 노동관계 속을 완전히 자신을 내맡겨야 하는 강제는 더 커지게 된다.

 

- 자기노동력의 사업가로서의 일반 시민들에게도 자신의 성공이나 실패가 순전히 개인 책임이라는 생각은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환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내적 혹은 외적 강제를 통해 개인들이 지속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을 자신의 운명적 과제로 삼는 교육 분야는, 그 운동에서 탈락하는 것은 개인의 자격 부족과 지식 결핍으로 인해 생겨난 개인적 실패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더 이상 노동력을 가지고 노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계속해서 노동에 달라붙어 있게 만든다.

 

-  그는 '새로운 노동'의 핵심을 다음과 같은 긴장된 문장으로 정리하고 있다. "당신 자신을 기업으로 생각하라, 당신 자신을 기업으로 만들어라." 결룰 우리 모두가 시장을 위해 소명되었다는 것이다.

 

- 죽은 노도이 지배하는 구조 속에서 노동의 관점이란 애완동물이나 가축의 관점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노동자의 관점'은 원리적으로 타협적일 수 밖에 없다.

 

- '게으름의 권리'가 거의 백이십 년이나 지난 후에야 재발견 되어 도발적으로 제기될 수있었다는 사실은 결국 그 기간 동안 노동 비판이 이전 시대의 오점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라파르 그 자신도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고 노동 시간을 축소하라는 요구 이사응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 서구에서 노동을 부정하는 동기는 노동조합의 '노동 시간 단축' 정책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이 '노동 시간 단축'은 그 제체로 강제 노동적 한계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체제 내적인 사회 정책은 '노동 사회의 위기'를 맞이하여 겱국 노동 시간 연장을 일상화시키는 경영 논리에 맞서 곤혹스런 입장에 빠져들고 있다. 한쪽 편에서 실업자 대중이 양산되고 있는 오늘날 '노동 시간 단축'은 이미 낡은 모델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쾌락주의적이기만 한 태도와 노동을 지양하지 않고 단지 양적으로만 감소하려는 시도는 결국 체제 위기에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다.

 

- 노동계급이라는 역사적 '즉자'는 모든 체제를 초월해 존재하는 그들의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근본적으로 강요되어) 자본의 기능 범주로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노동운동으로써의 노동운동'은 노동에 반대하는 운동일 수 없었고 오히려 그 노동을 완전히 관철시키고 보편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운동이었던 것이다.

 

- 노동에 대한 범주적 비판은 추상적인 노동 개념을 단지 다른, 어원적으로 중립적인 추상, 예를 들어 '활동'이라는 말로 대체한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떨어져 나온 경제'를 실질적으로 지양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노동에 대한 범주적 비판은 자립화된 체제 연관을 사회 속으로, 그아 함께 '노동'을 삶 속으로 재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선 사회와 관련해서는 사회적 재생산의 구체적인 사회적 연관들, 원료와 물질적, 정신적 내용들을 자립화된 사회적 형식의 비합리적 우회로에 맡겨 두는 대신 의식적이고 직접적으로 규정하고 사회적 기구들의 관련장으로 만들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범주적 비판이란 사회적 연관들을 페티시즘적 가치 범주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 구성원들이 고도로 사회화된 자기 목적저거 장치 속에서 공동으로 무엇인가를 생산해 놓고는 마치 그것이 고립된 개별 생산자들의 생산품인 양 그를 완전히 정신나간 제한 속에서 '교환'해야 하는 상태를 극복하는 것이다.

 

- 노동의 지양이란, 내용은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완전 자동화'를 통해 양적으로만 노동 시간을 줄이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 활동들을 추상적이고 탈감성적이며 우연적인, 내용과는 무관한 형식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보편화된 상품 형식을 지양해 그를 경영, 시장, 교환과 돈에서 해방시켜야 사회적 재생산이 보편적 추상 활동 형식에 종속되는 것을 멈출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사회적 재생산은 내용적으로 서로 구별되는 수많은 구체적 활동들의 다양한 연결 조직으로 나뉠 것이며 그 활동 하나하나는 추상적 체제 연관의 외적 기준에 따라 판정되는 대신 그 자체로 다루어지고 수행 될 것이다.

 

- 노동의 지양은 나아가 다양한 재생산의 계기들이 그들의 권리르 되찾게 된다는 것일  뿐 아니라 그들 영역 사이의 구분이 지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격하게 영역들을 구분하는 것은 경제가 자기 목적적으로 '떨어져 나감'으로써, 그 자기 목적적 긴으 공간 속에서는 다른 모든 계기들은 해소되어야만 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다. 노동의 지양은 또한 '자유 시간'을 지양함으로써, 사회적 '여분 공간'이 아니라 모든 재생산을 관통하고 있는 '여유로움'을 해방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첫번쨀 이루어야 할 것은 사람들을 노동으로 몰아대는 짓을 끝장내는 것이다. 거대 규모의 생산력을 가지고도 도대체 왜 여유가 있는 생산 대신 급박한 노동을 종용하는 것인가? 고속으로 치닫는 경제의 자기 목적과 더불어 급박한 노동을 종용할 모든 동기가 이미 사라져 버렸는데도?

 이는 긴장과 여유로움 사이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계기와 영역들 사이의 상호 침투 일반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문화는 더 이상 분리된 '섹터'가 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추상적 시간의 독재에서 해방된 재생산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지금까지의 모든 '합목적적 영역들'에 문화적이고 심미적인 기준들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 노동을 극복한 미래는 추상적이고 보편주의적인 기능/조직 원리를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품 형태에 반대하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발양되어 나올 구체적 다양성들에 대해 실제적으로 '열려있는(경쟁적인 정체성 형성이나 구획 짓기를 강요받는 대신)' 사회 공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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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4 08:44 2008/07/04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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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우스 2008/07/04 09: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없수? 괜히 보자고 했나...?

  2. 요꼬 2008/07/04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목으로 낚였다 노동을 거부해라 딱 보고 거부할려고 마음먹고 열었구만...책이네요 ㅋㅋㅋ 재미없다니깐 전 읽어보고싶네요

  3. 행인 2008/07/04 13: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책 재밌게 보긴 했는데요. ㅎㅎ
    보면서 참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당장 기륭이나 이랜드 비정규직노동자들, 최저임금에 허덕이면서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생노가다를 뛰는 일용직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참 요원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많이 들더군요...

  4. 콩!!! 2008/07/04 15: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노동"이라는 의미가 정말로 모든 "노동"을 포괄할 수 있는 건지 의문이 들더라구. 노동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노동은 굴종일 뿐이다, 노동은 나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등등의 말을 읽다가 저자가 "노동"과 "작업"을 구분해서 쓴다는 게 책 어딘가 나왔던 거 같아. 그런 개념의 차이가 무언지는 알려주지 않았던 것 같고. (저자도 모르는 것이거나) 그래서인지 재미는 있었는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는 잘 모르겠더라. 노동시간 공부모임에서 댓거리하나본데, 재미난 의견들 있음 끄적끄적 많이 옮겨주셔염.

  5. 해미 2008/07/04 17: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우스/ 글쓴 방식은 재미가 없지만 내용이 재미없지는 않았어요. ㅎㅎ
    요꼬/ 이 책을 보면서 느낀것중에 하나는 '정말 제목 잘 뽑았다'라는..
    행인/ 그 요원함을 우찌 구체로 만들것인가가 우리의 과제일터인데 그게 만만해 보이지는 않아요. 누구 말마따나 10년 프로젝트라는... ㅠㅠ
    콩/ 노동자건강의 정치경제학 번역하면서 work과 labor의 차이를 알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더군요. labor라는 즉, 노동이라고 번역되는 것의 의미를 좁게 해석하면서 이 글을 쓴거 같더라구요. 저자들이 원하는 것은 labor를 거부하라는 것이고 이것이 work이 되게 만들자는 것이겠지요. 댓거리를 하긴 하는데 잘 될지 미지수라 약간 침울하긴하지만 그래도 블로그에도 올리고 함시롱 많이 끄적여 볼라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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