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4/10/25 23:29
Filed Under 손가락 수다방

#1. 의문 어렵다. 전공의라는 하나의 ‘직업’이 가지는 노동자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 2000년 의사 파업이후 전공의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기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하고 전공의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을 조사하고 국가인권위에 제소를 하고 병원협회와의 사전 논의 통해 전공의 노동조합의 건설을 미뤄놓은 지금까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솔직히 고민해 본적이 거의 없다. 나도 전공의인데 왜 그랬을까? 술김에 친구와 덜커덕 약속을 해 버리는 바람에 이 글을 쓰게 되면서도 정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또는 아는 단체와 조직의 이러저러한 활동가들에게 전공의의 노동자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지만 아무도 속 시원히 대답해 주지 못했다. 노동운동진영에서도 ‘전공의’라는 직업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왜 그랬을까?


#2. 노동자성?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이 글의 제목으로 사용한 ‘노동자다, 아니다’는 한 독립다큐의 제목이다. 지입차주제(레미콘 기사는 개인이 각 레미콘의 소유주로 되어 있어 시멘트회사와의 개별계약을 통해 운송하는 업무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자영업자로 분류되어 있다.)로 인해 노동자성이 부정당하고 있는 레미콘기사들이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얻어내고 행사해 나가기 위한 처절한 투쟁을 그리고 있다. 다큐는 승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레미콘 기사들은 자신들이 ‘노동자’임을 주장하지만 정부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법적으로 노동자성이 인정되지 않는 ‘노동자’는 결국 투쟁과 교섭에 실패하고 해고(=계약해지)되고 만다. 싸움에서 지고 만 그들에게 남은 것은 아픔이지만 그들은 다시 머리띠를 묶는다. 자신이 ‘노동자’임을 인정받기 위해서... 현실에서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은 비정규직 투쟁만큼이나 힘들고 어렵다. 이런 투쟁을 전개한 노동자들은 위에 언급한 레미콘 기사뿐만이 아니라 재능교사 학습지 선생님들, 골프장 캐디, 공무원, 학교 선생님들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이미 노동운동판 안에서 인정되는 ‘노동조합’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특수고용직 노동자라 부른다. 다만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제 전공의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노동조합이란 ‘노동자성’을 전제로 하는 것 아닌가? 그럼 전공의들은 노동자인가? #3. 현실은 어떠한가? 노동자성의 문제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논쟁은 차치하고 일단 전공의들의 ‘현실’에 대해 살펴보자. 대한전공의협의회의 국가인권위 진정서에 따르면 직업란에 ‘전공의’라고 적어 넣을 수 있는 사람은 전국적으로 14,795명으로 이들은 평균 하루 16시간의 노동을 하고 있고 이들 중 일부는 주당 140시간이 넘게 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 평균 약 200만원을 받고 있을 뿐이며 여성의 경우에는 법적으로 보장된 출산휴가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숙소가 부족해 남성과 같이 쓰는 등의 반인권적인 처우를 감내하며 살고 있다. 이런 열악한 노동조건에도 불구하고 전공의의 절반이 안 되는 약 43.2%만이 ‘노동자’라 생각한다고 답하고 있다. 전국에서 겨우 254명 밖에 대답하지 않아 설문자체의 타당도를 의심할 수는 있겠으나 나의 경험상 그리고 내 친구들의 경험상 이러한 현실은 사실이다. 실제 100일 당직등의 살인적인 기간이 있는 경우에는 노동시간이 하루 24시간이라 할 수 있다. 병원을 떠나 개인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 병원에서 자든, 먹든...그것은 노동이다. #4. 노동? 노동자? 노동조합? 나는 ‘노동’이라는 것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자본과의 ‘착취-피착취’ 관계가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전공의들의 일은 병원자본의 이윤확보를 위해 착취 당하는 ‘노동’이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또한 이러한 노동이 병원의 사유화와 함께 상재적으로 더 광범위하고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니 전공의들은 ‘노동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이니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명쾌한 결론은 내리기는 어렵다. 그것은 몇 가지 이유와 한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먼저 ‘전공의’라는 것이 ‘의사’라는 집단의 생애주기를 놓고 보면 아주 일시적인 시간일 뿐이며 계급의 이동이 가능한 (또는 전제되어 있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전공의라는 엄혹한 4-5년의 시기를 거치고 나면 소부르주아(중소형 대학 병원의 경영자) 또는 자영업자(대부분의 개원의)의 길을 가게 되기 때문이다. 또는 전문직 노동자(봉직의)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의사 집단내부의 계급적 분화에 따라 전공의는 자신의 계급이 정해지게 되므로 현재의 ‘전공의’라는 순간만을 가지고 계급을 논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또한 의사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자본에 대한 판단도 필요하다. 의사만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무형의 ‘자본’이 의사에게 부르주아로의(최소한 친부르주아적) 길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라 쉽게 얘기할 수 없다. 또한 전공의가 제공하는 ‘의료’라는 서비스가 과연 임노동관계의 ‘상품’으로 취급될 수 있느냐도 하나의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전공의는 4-5년이라는 제한적인 기간이 있다. 이 기간만 ‘전공의’라는 노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활동이라는 것은 의외로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더군다 만오천가량 되고 전국에 쌀알처럼 흩어져 있는 조합이라 하면 조합활동만 하는 전임자가 병원마다 1-2명씩은 있어야 할 것이다. ‘수련’이라는 중대한 과제가 있는 ‘전공의’들이 노동조합 ‘전임’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공의 노동조합이 내어올 수 있는 성과에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현실적인 조직 운영이 어려운 것이다.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대립적이고 투쟁적인 관계로 상정되는 노-자관계의 전선을 구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이라는 것은 ‘건의’가 아닌 ‘협상’을 하는 조직이다. 힘의 절대적 우위가 자본에 있는 이상 그것은 ‘협상’이 아니라 ‘건의’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가 임금·단체 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협상’을 해야 할 대상은 우리가 존경하는 교수님과 선배님들이고 그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반감은 직접적인 압력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전공의 스스로의 ‘노동자성’에 대한 인식이다. 이 ‘노동자성’은 노동자인 것을 인정하는 것에 한발 더 나아가 ‘노동자들의 연대’를 실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절반이상의 전공의들이 노동자로 자신을 위치지우지 않는 이상, 즉 주체가 자신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노동조합’은 사상누각에 불과할 뿐이다. 해당 노동자의 구체적 의지와 요구에 기반하지 않는 ‘노동조합’은 지금의 전공의 협의회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노동조합’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장의 ‘조직력’이라고 한다. 노동조합에 대한 지지와 요구가 동시에 올라오고 활발하게 토론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노동조합’이 단순한 ‘이익집단’이 아니기 위해서는 노동자성에 기반한 ‘연대’가 필요하다. 우리와 같은 전문직 노동조합인 ‘교수 노조’나 ‘비정규직 교수노조’, ‘공무원 노조’, ‘조종사 노조’, ‘교직원 노조’ 등도 노동절 집회에 깃발을 앞세우고 참석한다. 또한 싸움이 벌어지면 앞에 나가서 싸우기도 하고 파업을 벌이기도 하고 노동탄압 받는 사업장에 연대투쟁을 가기도 하고 교육이나 교통의 문제와 같은 전사회적 문제에 개입하고 노동자적 의견을 제출한다. 전공의 노조가 되려면 의료의 공공성에 대한 문제나 시장개방 문제, 의약 분업, 전공의 수련의 국가부담등 의료 정책 전반에 걸친 개입이 다른 노동자들의 연대와 토론속에서 진행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노동절이나 노동자 대회, 열사 투쟁등 다른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정하고 있지도 않은 전공의들에게 이는 현재 거의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다. #5. 전공의가 노동자이기 위해서... 전공의가 ‘근로자’임은 이미 대법에서 인정을 하고 있다. 91년과 98년의 대법원 판례가 있으며 2000년 발간된 근로기준법 질의회시집에 따르면 전공의는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로 결론내려져 있다. 법적인 근거들이 만들어져 있는 이상, 이후의 과제는 노동자성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전공의라는 ‘직업’이 정치경제학적으로 ‘노동자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단결력을 발휘하고 이러한 단결력의 발휘가 전 민중에게 계급적으로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변혁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자신이 ‘노동자’임을 자임하고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위에 제기한 네가지 한계 중 가장 시급한 선결과제는 마지막 것이라 생각한다. 노동자성을 얻기 위해 제일 필요한 것은 ‘주체’의 의지이다. 레미콘기사 같은 특수고용직이나 교수같은 전문직이 노동자로 인정받은 것는 그들의 노동자성에 대한 자임과 계급적 이해에 기반한 연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공의들이 노동자이기 위해서는 각 개별 전공의들의 이 문제에 대한 토론과 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노동자이기 위하여 일터인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실천들을 하고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또한 실제로 ‘노동자’임을 자임하고자 하는지, 한다면 이유는 무엇인지를 묻고 앞으로의 연대활동과 조직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기획이 필요하다. 이러한 활동과 기획에 대한 주체들의 동의와 요구를 수렴하는 과정이 선결되지 않는 이상 전공의 노동조합의 건설은 요원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자다, 아니다’의 결론을 떠나 전공의 스스로 노동자임을 ‘자임’하게 하고 이름에 걸맞는 ‘활동’과 ‘삶’을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주체’의 변화에 대한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성공하면 전공의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노동자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지금의 모습을 반복한다면 노동자가 아닌 것이다. 이제, 선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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