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에 대해 어린아이가 처음 경험하는 것은 “어른들이 좀 더 강하다”는 깨달음이 아니라 “오히려 어른들이 마술을 부릴 수 없다”는 깨달음이라고. 환각제를 20밀리그램 복용한 효과가 나타난 상태에서 한 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타당성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사실, 때때로 어린아이들은 자신들에게 마술을 부릴 능력이 없음을 깨닫자마자 슬픔에 압도되어 이겨내길 못하는 듯하다.
 
우리가 우리의 장점과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다. 오로지 마술만이 그렇게 해줄 수 있다. 어린아이 같은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이 점을 간파했다. 요제프 불링거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차르트는 마술과 행복의 비밀스런 연대를 명확하게 지적한 바 있다. “잘 산다는 것과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정말 별개의 일입니다. 저는 마술 없이는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행복하게 살려면 진정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야만 할 텐데.” 
 
... [마술의 본질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호출하는 것이라는 카프카의 정의에 따르면] 마술은 본질적으로 비밀스런 이름에 관한 앎이다. 각 사물, 각 존재에게는 겉으로 드러난 이름 말고도, 부름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감춰진 이름이 있다. 마술사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근원적-이름을 알고 불러낼 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강령술사들은 (악마나 천사의) 이름에 관한 끊이지 않는 목록을 통해 영적인 힘을 확실히 지배하려고 한다. 마술사에게 이 비밀스런 이름은 그 이름을 지닌 피조물을 살리고 죽이는 힘이 자기에게 있다는 징표일 뿐이다.
 
하지만 또 다른 더 계몽적인 전통에 따르면, 비밀스런 이름은 마술사의 말에 사물이 복종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암호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사물이 언어활동으로부터 해방됨을 가리키는 모노그램(두 개나 그 이상의 문자를 결합해 하나의 상징처럼 만든 것)이다. 비밀스런 이름은 피조물이 에덴동산에 불렸을 때의 이름이었다. 일단 그 이름이 발음되면 겉으로 드러난 모든 이름(이름들의 바벨탑 전체)은 산산조각난다. 이 교설에 따르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마술은 행복에의 외침이다.
 
비밀스런 이름은 피조물을 아직 표현되지 않은 것[존재]으로 되돌려주는 몸짓이다. 최종심급에서 마술은 이름에 관한 앎이 아니라 일종의 몸짓, 이름과의 단절이다. 어린아이가 자신만의 비밀 언어를 발명해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만족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린아이의 슬픔은 마술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부과된 이름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데서 온다. 이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데 성공하자마자, 새로운 이름을 발명하자마자, 어린아이는 자신에게 행복을 선사할 통행허가증을 손에 넣게 된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죄이다. 그리고 마술이 그렇듯이 정의正義에도 이름이 없다. 행복하게, 그리고 이름 없이 행복하게 피조물은 몸짓으로만 말하는 마술나라의 문을 두드린다.
 
_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세속화 예찬>(난장) 2장 ‘마술과 행복’ 중에서
 
 
 
이제 소파 방정환과 어린이날의 관계에 대해선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방식으로나마 다루지 않게 됐는갑다. 1920년대 당시의 민족주의 노선/서사로도, 코민테른판 공산주의 노선으로도 환원이 안 되는 '좌파적 지향' 속에서 어린이(성) 혹은 동심에 주목했다는 그의 문제틀을 다시 보는 일은, 어쩌면 아감벤이 위에서 말한 '어린아이-같아지는 몸짓'의 미덕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이 아닐까도 싶고마는.
 
(좀 딴 얘길지 모르나, 극장용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를 거듭 보면서 행복해졌던 이유도 어쩌면, 전형적 성장담의 소재로도 읽힐 키키의 우여곡절 자체가 아니라, 그럼에도 '마술'을 잃지 않은 키키의 삶, 그리고 그런 키키를 암치도 않게들 여기는 이웃과의 일상을 그 작품에서 봤기 때문 아녔나 싶고..ㅋ)  
 
듣자니, 당시 "동심의 계급성"을 앞세워 자신을 '동심천사주의자'라 규정, 비판했다는 좌파 계통 사람들에 대해 방정환이 저어하고 우려했던 건 계급적 접근을 중시한 그들의 좌파적 입지 자체는 아녔던 듯싶다. 다만, 그들의 계급주의가 실천적으로는 되려 아동-소년 주체를 대상화하거나 소외시킬 위험 내지 역설을 경계했다고 할까.
 
어쨌거나 소파로선 그때도 그때지만, 어린이날을 기념한다며 2012년인 지금 여기서 치러지는 ‘소문난 잔치’들에 관해서도 할 말이 꽤 많을 듯허다. 각종 볼거리로 더 없이 가득하고 왁자하긴 하나, 막상 "비밀스런 이름"의 몸짓에 행복해하긴 커녕 허기진 소외에 시달리지나 않음 그마나 다행인 요즘 풍경을 보다 보면, 아마 더더욱 그렇잖으까. 아이든 부모든 어느 쪽이 더하다 할것없어 뵌다면서 말이다.
 
 
죽은 소파야 설사 할 말이 많은들 말이 없다 치고, 그의 죽음과 별개로 그와 어떻게든 맺어진 인연 속에서 살아 가는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좋을까나. 지금 여길 사는 우리에게 나날이, 아이 어른 할것없이 (되)살려야 할 비밀스런 이름의 몸짓들이란 과연 어떤 것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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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6 23:56 2012/05/06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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