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일견 익숙해 보이다 못해 진부한 듯도 한 이 질문이, 과거에는 어떤 식으로 이뤄졌고, 반면 지금은 어떤 패러다임 전환 혹은 인식론적 전회를 통해 그 “질”을 달리하고 있는지 구분해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간에는 근대화, 또는 근대-세계의 형성 자체가 당위적인 선인 양 간주되며 이런 사회변동 과정을 보다 더 앞서 겪지 않은 비서구 세계 전체가 태만과 낙오의 딱지를 (서구 주류학계가 그래왔던 것만큼이나) 스스로 붙이는 식으로 이뤄졌더랬잖아요? 하지만 요즘엔 근대-세계의 형성 자체는 역사적 “필연”과는 무관한 국지적 맥락이 작용해서 그리 됐을 뿐이란 시각에서, 근대 세계체제의 형성과 지리적 팽창이 초래한 경제-문화-정치적 효과에 초점을 맞춰 앞서 던진 질문을 재정위하고 있으니까요.
 
전 이런 질문의 질적 전환 과정을, 역사적 자본주의하에서 제도화된 “국가”의 역할이 비서구 세계의 정치공동체 내지 통치체와는 어떤 점에서 상이했는지 초점을 맞춰 살펴봤으면 합니다. 앞질러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서구 세계에서 “근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건, 자본축적과 자웅동체를 이루는 제도적 조절장치이자 정치문화적 후견기구로 기능했던 근대(민족)국가(좀더 정확히는 열국체제)와 달리, 비서구 통치체의 존립근거는 끊임없는 자본축적 또는 근대적 잉여가치의 발생 소지를 미연에 방지,차단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라는 거죠.

 

즉, 비서구 세계(들)에선 대체로 근대적인 자본축적 양상, 잉여가치 발생 메커니즘을 좋거나 바람직한 것이긴커녕, “윤리적”으로나 통치체 운용상의 안정성 측면에서나 해악적인 것으로 봤다는 겁니다. 그것은 서유럽 지역서 발흥한 근대-세계보다 “발전”이 뒤처졌거나 “미개”해서가 아니라, 외려 “근대화”를 촉매로 구조화되는 사회관계가 불러올 여러 해악들을 직관적으로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할까요.[이같은 메커니즘을 경제인류학적으로 이론화한 논의로는 클라스트르의 <폭력의 고고학>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미개”사회가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안 된 건 “미개”해서 못 한 게 아니라 (자본주의적 축적이 불러올 재앙을 미리 내다보고) 안 한 쪽이라고 주장한 책이거든요.]
 
이 주장에 따르자면, 이런 (자본주의적) 잉여발생 방지 메커니즘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축적 매커니즘보다 지구상의 역사적 체제(들) 혹은 생산양식에 더 “보편적인” 속성이었다고 할 수 있게 됩니다. 외려 기이한 건, 그런데 어떻게 16세기 서유럽 지역에선 그런 독특하고도 기괴한 잉여발생 매커니즘이 ‘창궐’하고, 심지어 공고화될 수 있었나 하는 점이 되고요. 이런 과정을 추동했던 서유럽적 맥락이 뭐냔 물음은 이렇게 되면, 이른바 “세계보편문명의 발흥지”에 대한 열패감 어린 호기심 따위가 아니라, “우째 그런 웃기고 자빠진 일이 일어날 수 있었댜?”라는 의문으로 사태를 다시 볼 수 있게 해줍니다.ㅋ

 

물론, 이 때 말하는 근대-세계의 발전이야 (자유주의자들은 물론 정통 맑스주의자들까지 공유했듯이) 결코 예전보다 더 나은 사회관계의 창출이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잉여발생-착취 체계가 글로벌한 스케일로 발전해가는 과정임을 뜻할 뿐이지요. 역사적 자본주의 문명을, 그 지리적 확장의 내적 계기로써 인종주의`성차별주의 및 식민주의와 더불어 발전해온 독특한 역사적 체제로 보는 세계체제 분석 학파의 시각에서 보자면요. 단지 특정 분파의 시각이 아니라, 사실 실제로 그랬던 거라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긴 합니다만.
 


암튼 이런 시각에서 젤 첨에 한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되면, 그건 두 가지 효과를 발휘하게 되죠.

 

하나는 기존의 “근대화론”적인 시각이 실제의 근대세계의 역사를 얼마나 유럽중심주의적으로 파편화, 재단해왔는지 드러낼 수 있다는 것. 또 하나는, 자본주의 세계의 형성을 이전보다 “더 나은” 경제`사회양식의 등장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매우 독특한(좀더 까놓고 말하잠 그 어떤 생산양식보다도 실로 기괴한) 생산양식의 창궐^^에 불과하다는 경제인류학적인 문제틀을 도입할 수 있다는 것. 이는 당장 지금 여러 반체제 운동 진영들이 어떤 체제(들)로의 전환을 꾀할 것이냐는 탈자본주의적 이행 전망과 맞닿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근대세계의 지리적 팽창 와중에 압살돼버린 비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 내지 사회관계(들)을 재조명하고, 이것들을 또다른 이행의 잠재성과의 관련성 속에서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생기게 되지요. 자본주의 이행이라는 경로로 수렴될 수 없는 (그러나 그렇게 수렴돼야 하는 양 다뤄져 왔던) 사회적 이행 양상에 대한 재접근의 길까지 열리는 셈이랄까요. 이 두 가지 효과는 일치하진 않지만, 서로 밀접히 연결돼 있다고 해야 할 거예요.
 
단, 조심해야 할 건 비서구세계의 통치체가 근대국가/열국체제가 육성하고 떠받쳐온 역사적 자본주의의 잉여발생 매커니즘을 미연에 차단하려 했단 점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 왕정에 기초한 재분배 체제(들)을 옹호하는 식으로 논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는 거예요. 역사적 자본주의가 압살`질식시킨 생산양식을 재발견하는 일은, 이 생산양식에 사실상 기생하며 통치기반을 지속시키려 했던 왕정 체제 등 비 혹은 전근대적 통치체를 옹호하는 일관 하등 관계가 없는 건데도요.
 
따라서 이런 경로를 밟지 않으려면, 단일한 역사적 체제(들)도 내적으로 중층 구조를 이루며 상호모순과 긴장을 이루고 있다고 했던 브로델 식의 구조사적 분석틀이 도입돼야 하잖나 합니다. 물론 브로델이 자본주의 문명을 분석하면서 도입한 삼층도식(자본주의-시장경제-물질문명 같은)을 그대로 끌어다 쓸 순 없겠지만요. 응용할 순 있겠죠. 거듭 말하지만, 착취의 지리적,지정학적 표현인 중심-주변-반주변이라는 기축분업 개념 같은 경우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역사적 독특성을 설명하고자 도입된 거였으니까요.

 

중요한 건 비서구 지역의 역사적 체제들의 독특성을 이해하는 데 유효한 독자적 설명틀을 정립, 정의하는 일일 겁니다[이 중 “동(남북)아시아” 지역 같은 경우는 “조공체제”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제가 알기로 조공체제의 개별 통치체가 지닌 자율성은 근대 세계체제의 국가간 체제보다 외려 더 높았다고 하는데요. 거듭 말하지만, 이게 조선시대가 더 좋았다거나 아름다웠다는 얘기일 리는 없겠죠. 예컨대, 이태진 설대 교수와 그 후학들처럼 '식민사관'을 극복했답시고 이와 비슷하게 반응하거나 지적으로 왕당파연하는 것 자체를 막을 수야 없겠습니다만ㅋㅋ; 이 얘길 하는 건 어디까지나 전근대 지역체제의 역사적 성격과 동학을 제대로 이해하잔 것 뿐이니까요.].
 
제가 보기에, “국가의 역할” 다시 말해 근대-세계의 등장과 팽창 과정서 근대국가/열국체제가 수행한 역할은 뭐며, 여타 전근대 통치체와 비교해 지니는 종별성은 또 뭔지를 실마리로 하여 자본주의 이행을 둘러싼 인식론적인 (대)전환이 (얼추 지난 30여년 간) 학계에서 어떻게 이뤄져왔는지, 또 이런 전환이 반체제 운동(들)은 물론 이의 일부이기도 한 비판적 역사사회과학 진영에서는 어떤 지적 과제를 던지고 있는지 정리만 해도, 아주 훌륭한 작업이 되잖을까 싶구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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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5 02:38 2011/10/05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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