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봄, 롯데월드 계약직/비정규직 직원이 추락사했을 때

롯데그룹 측이 보였던 대응과 이에 관란 언론보도를 놓고 썼던 글.

 

 

***

 

 

지난 해까지 동종업계에서 내리 7년을 짱 먹으며 '모험과 신비가 가득한 나라, 우리가 꿈꾸던 그 곳'으로 각광받아온 대한민국 테마파크의 지존. 롯데월드 어드벤쳐.

 

이 롯데월드가 요즘, 대략난감한 처지에 몰렸다.

 

올 3월 초 계약직 직원이 놀이기구에서 추락, 사망하는 사고 일어났음은 주지의 사실. 이에 대한 책임공방과 사건 은폐의혹 등 시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롯데월드 측에서는 분위기와 이미지 일신하겠다며 지난 26일부터 통 크게 일주일간 무료개장 행사를 벌였더랬다.

 

그랬는데 결국, 차라리 아니함만 못했다는 욕만 바가지로 먹었다. 주말이라고는 하나, 첫날에만 무려 10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몰려 또다시 안전사고가 나는 바람에, 이벤트는 하루만에 쫑났던 거다. 입장객들은 입장객대로 인파로 북적이는 피곤한 상황에 지치고, 새벽부터 기다린 보람도 없이 입장마저 못한 이들 중 일부는 병원신세까지 져야 했다.

 

이런 상황 두고 주최측에서야 의도와 완벽하게 어긋나버린 결과에 억울해 할 수도 있겠다만, 꼭 그럴 일만도 아니다.

 

특히 첫날 인파의 약 70%를 차지하며, 부산 등지에서도 먼 길 마다 않고서 잠실을 찾았던 청소년들의 가열찬 의지는, 롯데월드가 십대들한테 얼마나 동경과 선망의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줬다. 어찌 됐건 롯데월드, 자타공인 대한민국 막강파워 브랜드라는 게 새삼 확인됐으니 말이다.

 

이번 사태를 놓고 재래언론이 써먹은 레파토리 목록 세 가지. 즉, '얄팍한 상혼'과 '안전불감', 그리고 '시민의식의 부재'다. 언론에서는 이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객을 봉으로 아는 롯데월드의 현주소 고발하느라 며칠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얄팍한 상혼? 이거 확실히, 문제는 문제다.

 

발상의 전환이 돋보이는 컨셉도 아니고 망자의 핏자국을 인파로 덮어보려는 졸속의 냄새가 다분했던 걸 감안하면 섣부른 자충수였다는 소리, 충분히 들을 만 했다. 선심을 쓰더라도 타이밍과 완급조절이 중요한 고려요소이건만, 반성문으로 사용한 이벤트에 조바심만으로 화를 자초했던 셈이었으니까.

 

그런데 사실, 그게 어디 어제오늘 얘기던가. 게다가 상혼이란, 아무리 품격을 앞세운들 그 영혼의 본질상 늘 얄팍해지기 마련이다.

 

유무형의 재화 팔아 이문 남기는 일이 모든 장사치에게 요구되는 '본능'이자 '게임의 법칙'인 판에, 상혼 자체와 씨름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상혼이 얄팍하다고들 정색을 하니 정작 이런 비판이야말로 얄팍함의 극치 아닐 수 없다.

 

얄팍한 상혼이 고쳐져야 같은 일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을 거라 하는데, 좋다. 그런데 정작 그게 어떻게 고쳐질 수 있는지, 고쳐질 수 있기는 한 건지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더욱이 놀이기구 놓고 판타지 팔아 장사하는, 한마디로 이미지가 주요 밑천인 놀이동산 업체 롯데월드에서 사람이 죽어나갔다. 그로 인한 막대한 이미지 손실은 곧 영업매출과 직관되는 것이었으니, 이런 위기를 돌파하려는 나름의 고육책으로 이 업체가 생각해 낸 게 무료개장 이벤트였다. 아이디어가 무식했다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이건 돈 좀 더 벌겠다고 수 쓰는 거하곤 달리 봐야 한다.

 

롯데월드가 잘했다는 게 아니다. 이 업체를 상대로 언론이 쏟아내는 준열한 성토의 향연, 요란만 하지 정작 먹을 건 찾아보기 힘들 뿐이라는 거다. 결국 위락산업자본 본연의 속성 갖고 뒷북성 훈계 아무리 늘어 놓은들, 뱁새 보고 봉황 되라며 핏대 올리는 거랑 하나도 다를 게 없다.

 

그럼, '시민의식의 부재'란 레파토리는 또 어떤가.

 

이것과 '얄팍한 상혼'이 함께 쓰이면, 늘 다음과 같은 공식이 만들어진다. 즉, 이번 사태는 주최측의 '얄팍한 상혼'과 잠실을 찾은 대중들의 '시민의식 부재'가 빚어낸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더라는.

 

굳이 롯데월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사태 앞에 롯데월드 아니라 에버랜드, 서울랜드 등 뭘 넣든 상관없이 편리하고 신속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게 이 공식의 장점이니까.

 

때문에, 뜯어보면 볼수록 이 공식엔 뜯어보는 쪽이 부끄러울 정도로 아무 내용이 없다. 즉, "피차 차카케 살자"는 뻔한 메시지를 교양이라는 이름의 포장지로 둘러치고 있을 뿐이라는 거다. 누구나 다 하는 말 자기만 하는 줄 아는 언론인들 특유의 선민의식 말고는 건질 내용이 없는 셈이다.

 

다시 말해 이 공식엔 대중은 곧 우중이며, 따라서 언제나 깨몽의 대상일 뿐이라는 그네들의 시대착오적 나르시시즘만이 가득하다. 이들에게 '시민의식'이란 말은 결국, 자신들의 시대착오를 어떻게든 부여잡고자 우중이라는 허상에 대고 휘두르는 언어의 채찍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공짜라면 그저 껄떡대는 대중들의 거지근성의 발로라는 소리까지 나왔으니.

 

까놓고 말해보자. 단언컨대 공짜 싫어하는 사람, 없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하는 줄 아는 거대기업 CEO인들 안그럴 것 같냐면, 물론 좋아한다. 대외적으로만 아니라 할 뿐, 비자금 형성 등 나름 호박씨 까는 기술들  따로 연마해 두고 있다는 거야 익히 알려진 바다. '기업비용의 외부화'나, '노무관리 유연화'라 불리는 경영기법도 결국, 치러야 할 대가를 합법적으로 면제받으려는 공짜추구 행위다.

 

공짜에 대한 선호는 이렇듯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러 형태로 변주될 뿐, 도처에 널려 있다.

 

더구나 엄청난 인파가 몰릴 줄 알고 일찌감치 무료혜택을 단념했다 해서 공짜를 싫어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가볼까 하다가도 현장의 번잡함 등 여타 변수들이 공짜에 대한 개인적 선호를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기에 그 공짜 포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본 기자는 그랬다.

 

따라서, 어떻게든 입장하고 싶어 새벽부터 기어이 잠실을 찾았던 많은 이들이 내린 결정의 합리성이 후줄근하다 할 순 없다. 이들이 내린 결정의 합리성이란 이미, 롯데월드에 대한 선망이 여타 변수들을 압도한 데 따른 결과였을테니까.

 

분명한 건 이번 사태, 사람이 많을 땐 줄 잘 서고 질서정연해야 한다는 둥, 공짜에 껄떡대는 건 찌질한 짓이라는 지당한 경구들로는 설명도, 해결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런 거 몰라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렸을 사람, 설사 있다 한들 얼마나 될까.

 

게다다 행사 첫날 부상을 입었다는 35명이라는 숫자, 가만 따지고 보면 그날 롯데월드 찾은 10만 명에 비추어 아주 경미한 수준이었고 부상 정도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 정도면 엄청난 인파에도 불구하고 꽤 준수한 질서의식이 발휘됐던 셈.

 

다시 말해 2천 8백여 명 중에 한 사람 타박상 입었다는 건데, 전체 규모 대비로 보면 백화점에서 폭탄세일할 때 붐비는 인파 속에서 무릎팍 까질 확률보다 양호한 수준이라 할 만하다. '안전불감' 운운했던 언론의 과민반응 혐의 농후한 대목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지난 롯데월드 사태를 맞아 재래언론들이 한 일이라곤, 자신들의 양비론적 까대기 메커니즘만 한번 더 안전하게 돌려먹은 것 뿐이다. 너무나도 안전감 있으시다 덜.

 


 

대체 무엇이 전국의 10만 가까운 사람들로 하여금 여타의 모든 변수들을 압도하고서 롯데월드를 찾도록 만들었을까.

 

가만 돌이켜 보면, 등하교길이던 동네 골목 구석구석이 방과 후엔 야구장으로, 또 어느 때는 축구장이다가, 휴일에는 딱지와 구슬치기터로도 돌변하던 시절이 있었다. 뉘엿뉘엿 해질녘인데도 파할 줄 몰랐다. 변변한 가로등 하나 없던 그 골목길에서, 놀이는 계속됐다.

 

본 기자 살던 수유동 골목길은 이렇게 만만찮은 변신능력을 자랑하는 전천후 놀이공간이었다. 그 땐 확실히 여건에 구애받지 않고 일상 곳곳이 간이 경기장이자 놀이터일 만큼 놀이적 상상력이 풍부했다. 아니, 그런 여건이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러다가, 서울올림픽 즈음해 가지곤 골목이 전부 시멘트로 뒤덮이고 배수구가 생겨났다. 도로는 도로일 뿐, 놀이적 상상력이 발휘될 틈새가 시멘트로 촘촘히 메워지고 그런 상상력 자체도 동네 골목길에서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된다.

 

공교롭게도, '한국의 디즈니랜드'를 표방, 온갖 볼거리와 할거리를 망라한 놀이업계의 종합선물세트가 되겠노라며 서울 잠실벌에 롯데월드 어드벤쳐라는 이름의 대규모 실내공원이 첫 선을 보인 것 역시 이 무렵이다.

 

한편으로야 우리나라에도 내로라할 테마파크 생겼다며 뿌듯해 할 일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놀이는 이제 동네 '놀이터'에서만 해야 하며, 좀더 즐거워지려면 보다 체계적으로 격리된 놀이공간에 가서 보다 많은 돈을 내고 놀아야 하는, 그런 커다란 변화 또한 암시하고 있었다.

 

100원 짜리 짬뽕공 하나면 한나절 뛰놀기에 거뜬하고, 흙바닥에 그은 선 몇 개만 갖고도 심신이 즐거움으로 충만하는 데 별 부족함이 없던 시절의 체험들은, 차츰 롯데월드 자유이용권이나 플레이스테이션 2 등 만만찮은 가격을 치르고서야 누릴 수 있는 것들한테 밀려나게 됐으니 말이다.

 

놀이의 즐거움은 곧 주머니 사정이 좌우하는 놀이 형태에 복속된 지 오래고, 이는 놀이 재화들에 대한 선망과 동경을 키워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갑이 평등하지는 않은 법이니, 주머니 사정 따라 희비가 엇갈리고, 누군가들은 이내 불만과 결핍이란 이름으로 응어리지기 십상이게 된다.

 

주머니 사정 시원찮아도 몇몇이서 맘만 먹으면 동네 이곳 저곳을 놀이터로 바꾸어내며 바로바로 풀 수 있었던 시절과 달리, 투입된 동전의 양에 따라 만족도도 비례하는 자판기가 생긴 지금은, 웬만한 돈 없인 푸는 일 자체가 힘들어진 거다.다시 말해, 주머니가 엔간히 두툼 안 하고선 놀이를 향유하고 그로부터 즐거움을 맛볼 일상적인 기회의 폭이 크게 줄어버린 셈.

 

롯데월드의 등장을 놀이 및 여가문화의 일보 진전이 아닌, 어떤 퇴행의 징후로 볼 만한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그것이 내뿜는 휘황한 매혹의 광휘는 실상, 소시적은 물론이고 몸 안에 늘상 꿈틀대기 마련인 무한한 놀이본능을 자유이용권 티켓 몇 장과 거래가능한 무엇 쯤으로 왜소화시키고 억눌러 왔던 것이니 말이다.

 

이런 판국에 '공짜'로 실현될 놀이를 향한 매혹은 물리적인 거리나 인파의 번잡함 등과 같은 팩터들을 압도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렸다. 억눌린 본능들이 '공짜'라는 조건 아래서 보인 이 폭발적 반응은, 따라서 찌그러질대로 찌그러진 용수철 튀어오르듯 아주 자연스런 것이었다.

 

그 억눌림의 빛깔들이야 물론, 모든 면에서 서울에 비해 부실하기 십상인 비서울 지역 거주자들의 응어리들, 마땅한 놀거리 없이 학원과 학교 오가느라 쌓여만 간 청소년들의 응어리들, 그리고 어떡하면 애들한테 좋은 아빠와 엄마일 수 있을지 고민일 부모들의 응어리들, 그 외의 이런저런 응어리들이 얼마 만큼, 어떻게 섞이느냐에 따라 좀더 다양하게 변주되겠지만 말이다.

 

아수라장이라고도 불린 그날 잠실벌의 '혼돈'은 애당초 경찰이나 안전요원이 몇 명 투입됐느냐는 관리의 규모나 테크닉으로 조절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롯데월드만 팬다고 능사 아닌 건, 이번 일로 드러난 억눌린 선망의 면면들이 비단 특정 놀이공간 내지 위락시설에만 한정될 수 없는 것들이라 그렇다.

 

놀이가 소비의 대상이 되고, 이리하야 놀이하는 본능마저 보유한 지폐 색깔과 매수로 제어되는 저 이상한 게임의 법칙.

 

'안전불감'이라는, '시민의식 부재'라는 레파토리는 바로 이 점을 놓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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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2 05:29 2008/03/02 05:29

 

 

2006년,

엡티에이 협상의 선결조건으로 스크린쿼터폐지가 기정사실화됐을 때,

이 조치 자체의 한심함보다 내 눈에 더 도드라졌던 건

대응방식의 구태의연함이었다.

 

뭐랄까, 하고 많은 것 중에 "국적(성)"을 앞세워

"우리"영화를 지키겠노라는, 또 그래야 한다는 "저항의 문법"이 맘에 들지 않았던 거다.

 

"한국" 영화자본 육성으로 미국을 위시한 메이저영화자본의 공세를 막아내야 한다는 논리지만,

바로 그 논리 덕분에 한국 영화자본은 "저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며

영화인 내지 영화산업 노동자들을 더더욱 닥아쳐댈 테니 말이다.

 

"한국" 영화산업의 소위 경쟁력이 이런 식으로 설사 생긴다 한들

그게 누구한테 좋은 거냐에 대한 논의는 아예 안 보이거나, 취약해 보였다고 할까.

 

 

***

 

 

1.

지난 주 초 말 많던 스크린쿼터 축소안, 국무회의에서 통과됐다.

이제 우리나라 영화의 연간 의무상영일수, 종전의 146일에서 그 절반인 73일로 줄어들게 된 거다. 대중집회와 1인 시위 등으로 축소반대 입장을 밝혀온 영화계 사람들, 안건의결이 이뤄진 7일부터 146일간의 철야농성 들어갔다. 스크린쿼터 축소를 둘러싼 싸움, 장기전 국면으로 접어든 셈이다.

그렇다고 정부의 쿼터축소 방침이 그야말로 난데없던 것이냐면, 그렇진 않다. 한미 FTA 외면하고 쿼터유지에 연연하는 건 소탐대실이라며, 이번 사태 전부터도 쿼터의 위상조정에 대한 문제제기는 워낙이 있었으니까. 이창동 전 문화부장관도 지난 2004년, 이젠 쿼터조정을 검토해야 할 시점이라며 영화인들 스스로의 자구책 마련을 요청한 바 있지 않던가.

다만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대체로 시기상조란 반응이 여론의 주조를 이뤘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쿼터유지의 필요성 내지는 당위성에 대해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돌이켜 보건대, 이번 쿼터축소 조치를 둘려싼 영화인들의 조직적 대응이 유념했어야 할 중요한 대목이 바로 여론의 변화였다. 대중들의 감각, 예전마냥 한국영화계를 무턱대고 지켜야할 것인 양 간주하며 ‘우리영화 vs 간악무도한 저들’이란 선악구도 아래 안팎을 딱 갈라 접근하던 시절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

사실 정부측 방침이 아니더라도, 1985년 이후 줄곧 시행돼온 스크린쿼터 제도가 20년이 지난 지금 그 취지를 제대로 살리고 있는가 하는 점은 워낙이 면밀한 검토를 필요로 하던 터였다. 영화계로 급격히 유입된 거대자본들이 제작, 배급, 유통까지 독점하는 상황, 아무리 영화가 흥행을 해도 산업종사자들의 노동조건은 나아지지 않는 문제는 오히려 스크린쿼터가 물량공세하는 자본만 살찌운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국내흥행 천만 관객 시대로 인해 붙은 자신감과, ‘한류’가 아시아를 ‘접수’중이라는, 현재 아주 잘 나가고 있다는 분위기를 한껏 조성했던 영화계 상황도 사람들의 인식 변화에 무엇보다 크게 일조했다. 관객들 스스로 이런 붐, 대견하게 여겼더랬다.

그런 와중에 영화인들은 쿼터 축소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며 반발했다. 그 위세대로라면 스크린쿼터만이 한국영화계의 미래를 구할 수 있어 보였다. 한국영화 열풍에 같이 좋아하던 대중들로서는, 그럼 그간의 과실이 사실은 거품이었다는 건지, 아님 쟤네들이 밥숟가락 한 술이라도 더 챙길까 엄살 섞인 투정을 부리는 건지 당최 헷갈릴 수밖에.

외려 잘나간다며 득의양양해 하더니만, 쿼터축소로 한국 영화산업 붕괴가 초읽기에라도 들어간 듯이 구는 모습에서 그만 '헐리웃 액션'의 혐의만 읽어버렸다고나 할까.


2.

하여, 이쯤에서 영화인들이 지금껏 보여준 ‘싸움의 기술’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장기전일수록 여론향배가 중요한 변수일텐데, 싸움의 기술이 이렇게 신통찮아서야 시큰둥한 여론을 바꾸는 건 고사하고 이 싸움의 의미를 제대로 납득시키는 것조차 아득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집단 행동이 하나의 운동으로서 여론의 지지와 더불어 현실을 바꿀 만한 의미를 획득하려면,

첫째, 자신들이 맞닥뜨려야 할 문제 상황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명료히 하고.

둘째, 이같은 처지가 결코 자기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럼 영화인들, 이같은 요건을 과연 얼마나 충족시켰을까. 웬걸, 쿼터축소의 부당함을 드러내는 데서부터 삐걱거렸다.

현 시점에서 쿼터 폐지도 아니고 축소가 그렇게 위급한 상황인지부터 의문인 대중들한테, 그게 왜 필요하고 심지어 절박하기까지 한지를 설득한 게 아니라,‘아무튼 아직은 쿼터사수’라는 옹색한 호소로 일관했을 뿐이다. 이미 밝혔다시피, 이런 호소가 쉽사리 먹힐 만큼 여론 지형은 그리 녹록치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제 한국영화 힘께나 쓴다고 알고 있던 대중들은, 쿼터유지로 얻는 게 일부 잘 나가는 영화계 거물 및 스타급 배우들의 현상유지인지, 아니면 영화판 자체의 체질강화인지 그래서 잘 알지 못했다. 전자가 남의 일이라면 후자는 우리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부당함을 설득하는 데도 실패하고, 자기만의 문제가 아님을 부각하는 데도 실패한 셈.

게다가, 지금이 어느 때인가. 문화적·영토적 경계허물기가 대중적인 활력의 원천으로 자리잡은 시대다. 한국문화라 할 때조차 그건 더 이상 단수가 아니라, 복수인 시대가 된 거다. 한국영화를 사랑한다며 직배영화 상영관에다 뱀 풀어놓는 일이 ‘국민적 쾌거’로 통했던 그때 그 시절의 감수성, 이제 더 이상은 안 먹힌다는 얘기 되겠다.

시대는 이렇게 바뀌었건만, 영화인들은 ‘국치’와 ‘주권’, 심지어 ‘국익’ 같은 반시대적 뉘앙스 만빵의 수사를 남발하며 문제 상황을 통짜로 진단·설명하려 했다. 의분을 담아내는 덴 손쉽고 효과적이었을지 모르나, 달라진 대중의 감수성을 도외시한 시대착오적 접근이 아닐 수 없다.

이 와중에 쿼터축소 조치를 둘러싼 싸움은 마치, 73일이냐 146일이냐를 놓고 벌이는 숫자놀음인 양 돼버렸다. 이렇다 보니 최민식의 난데없는 큰절로 화제가 되기도 했던 농민단체와의 연대집회 역시 그 원칙적 옳바름과는 별개로, ‘쪽수’ 불리기 차원에서 단발적으로 이뤄진 동원성 이벤트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더욱이 작년 농민들의 그 피터지던 FTA 반대시위 때, 영화계는 대체 무엇을 했는데. 이건 면목 없어도 한참 없는 짓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스크린쿼터의 취지가 영화판의 문화적 종다양성 확보와 함께, 이를 지지할 영화인들의 처우보장과 맞닿는 포괄적인 제도적 기반 마련에 있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필요조건일 뿐이다. 그 자체로 한국 영화계의 문화적 토양이 비옥해지진 않는 거다. 사자 없는 곳에 여우가 왕이라고, 해외자본 못들어오게 했으나 그 과실을 국내자본이 독식한다면, 결과는 마찬가지일 뿐이므로.

영화인들이 벌인 말의 성찬 속에서 축소‘철폐’라는 네거티브한 레파토리나 얄궂은 우리문화사랑론 말고, 쿼터축소와 연계된 그 어떤 포지티브한 중장기적 프로그램이나 아이디어, 찾아볼 수 없었다. 쿼터유지가 전부인 양 나오는 영화인들의 레파토리에 여론이 쉽사리 동조하지 않거나 식상한 반응을 보였던 건, 따라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수사학으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차라리, 아직도 배가 고파요 우리 밥그릇 그냥 지키게 해 주세요.. 라고 말했다면 그 용기와 진정성만이라도 빛날 뻔 했다. 싸움은 1차적으로 내 나와바리 수성에 있으니까 말이다.


3.

단순화를 무릅쓰자면, 싸울 때 ‘반독재’나 ‘민주화’란 구호만으로도 절반 이상은 먹고 들어갔던 시절이 있었다. 기술이래봐야, 쇠파이프로 전경과 백골단들 어떻게 제압할지, 또는 얼마 만큼의 ‘쪽수’로 기선을 잡느냐가 전부나 다름없던 시절. 물론 시대적 조건 탓이었다는 점을 무시 못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사회적 의제로 떠오를 만큼 세상은 변했다. 한마디로 말해 싸움, 만만치 않아진 거다.

아무리 사안이 절박한들 그게 자동적으로 사회적 공감과 명분 획득을 보장하진 않는다는 건, 포스트군사독재 시대의 냉엄한 조건이다. 이리 보면 싸움의 기술에 대한 업그레이드 요청, 외려 때늦은 감마저 있다.

상황이 나빠진 것 같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싸움의 기술을 다양하게 구사할 선택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얘기기도 하니까.

이번 스크린쿼터 축소 사태를 둘러싼 영화인들의 어설픈 대처는, 다소 역설적이지만 포스트군사독재 시대에 걸맞은 싸움의 기술은 어떻게 업그레이드돼야 하는지를 곱씹어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어차피 단판승부가 아니었던 만큼, 이번 장기전을 전기로 좀더 정교하고 섬세한 '싸움의 기술'이 연마되고, 또 널리 보급될 수 있도록 본 기자, 영화인들의 거듭된 분발과 업그레이드를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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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2 05:15 2008/03/02 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