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엡티에이 협상의 선결조건으로 스크린쿼터폐지가 기정사실화됐을 때,

이 조치 자체의 한심함보다 내 눈에 더 도드라졌던 건

대응방식의 구태의연함이었다.

 

뭐랄까, 하고 많은 것 중에 "국적(성)"을 앞세워

"우리"영화를 지키겠노라는, 또 그래야 한다는 "저항의 문법"이 맘에 들지 않았던 거다.

 

"한국" 영화자본 육성으로 미국을 위시한 메이저영화자본의 공세를 막아내야 한다는 논리지만,

바로 그 논리 덕분에 한국 영화자본은 "저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며

영화인 내지 영화산업 노동자들을 더더욱 닥아쳐댈 테니 말이다.

 

"한국" 영화산업의 소위 경쟁력이 이런 식으로 설사 생긴다 한들

그게 누구한테 좋은 거냐에 대한 논의는 아예 안 보이거나, 취약해 보였다고 할까.

 

 

***

 

 

1.

지난 주 초 말 많던 스크린쿼터 축소안, 국무회의에서 통과됐다.

이제 우리나라 영화의 연간 의무상영일수, 종전의 146일에서 그 절반인 73일로 줄어들게 된 거다. 대중집회와 1인 시위 등으로 축소반대 입장을 밝혀온 영화계 사람들, 안건의결이 이뤄진 7일부터 146일간의 철야농성 들어갔다. 스크린쿼터 축소를 둘러싼 싸움, 장기전 국면으로 접어든 셈이다.

그렇다고 정부의 쿼터축소 방침이 그야말로 난데없던 것이냐면, 그렇진 않다. 한미 FTA 외면하고 쿼터유지에 연연하는 건 소탐대실이라며, 이번 사태 전부터도 쿼터의 위상조정에 대한 문제제기는 워낙이 있었으니까. 이창동 전 문화부장관도 지난 2004년, 이젠 쿼터조정을 검토해야 할 시점이라며 영화인들 스스로의 자구책 마련을 요청한 바 있지 않던가.

다만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대체로 시기상조란 반응이 여론의 주조를 이뤘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쿼터유지의 필요성 내지는 당위성에 대해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돌이켜 보건대, 이번 쿼터축소 조치를 둘려싼 영화인들의 조직적 대응이 유념했어야 할 중요한 대목이 바로 여론의 변화였다. 대중들의 감각, 예전마냥 한국영화계를 무턱대고 지켜야할 것인 양 간주하며 ‘우리영화 vs 간악무도한 저들’이란 선악구도 아래 안팎을 딱 갈라 접근하던 시절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

사실 정부측 방침이 아니더라도, 1985년 이후 줄곧 시행돼온 스크린쿼터 제도가 20년이 지난 지금 그 취지를 제대로 살리고 있는가 하는 점은 워낙이 면밀한 검토를 필요로 하던 터였다. 영화계로 급격히 유입된 거대자본들이 제작, 배급, 유통까지 독점하는 상황, 아무리 영화가 흥행을 해도 산업종사자들의 노동조건은 나아지지 않는 문제는 오히려 스크린쿼터가 물량공세하는 자본만 살찌운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국내흥행 천만 관객 시대로 인해 붙은 자신감과, ‘한류’가 아시아를 ‘접수’중이라는, 현재 아주 잘 나가고 있다는 분위기를 한껏 조성했던 영화계 상황도 사람들의 인식 변화에 무엇보다 크게 일조했다. 관객들 스스로 이런 붐, 대견하게 여겼더랬다.

그런 와중에 영화인들은 쿼터 축소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며 반발했다. 그 위세대로라면 스크린쿼터만이 한국영화계의 미래를 구할 수 있어 보였다. 한국영화 열풍에 같이 좋아하던 대중들로서는, 그럼 그간의 과실이 사실은 거품이었다는 건지, 아님 쟤네들이 밥숟가락 한 술이라도 더 챙길까 엄살 섞인 투정을 부리는 건지 당최 헷갈릴 수밖에.

외려 잘나간다며 득의양양해 하더니만, 쿼터축소로 한국 영화산업 붕괴가 초읽기에라도 들어간 듯이 구는 모습에서 그만 '헐리웃 액션'의 혐의만 읽어버렸다고나 할까.


2.

하여, 이쯤에서 영화인들이 지금껏 보여준 ‘싸움의 기술’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장기전일수록 여론향배가 중요한 변수일텐데, 싸움의 기술이 이렇게 신통찮아서야 시큰둥한 여론을 바꾸는 건 고사하고 이 싸움의 의미를 제대로 납득시키는 것조차 아득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집단 행동이 하나의 운동으로서 여론의 지지와 더불어 현실을 바꿀 만한 의미를 획득하려면,

첫째, 자신들이 맞닥뜨려야 할 문제 상황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명료히 하고.

둘째, 이같은 처지가 결코 자기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럼 영화인들, 이같은 요건을 과연 얼마나 충족시켰을까. 웬걸, 쿼터축소의 부당함을 드러내는 데서부터 삐걱거렸다.

현 시점에서 쿼터 폐지도 아니고 축소가 그렇게 위급한 상황인지부터 의문인 대중들한테, 그게 왜 필요하고 심지어 절박하기까지 한지를 설득한 게 아니라,‘아무튼 아직은 쿼터사수’라는 옹색한 호소로 일관했을 뿐이다. 이미 밝혔다시피, 이런 호소가 쉽사리 먹힐 만큼 여론 지형은 그리 녹록치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제 한국영화 힘께나 쓴다고 알고 있던 대중들은, 쿼터유지로 얻는 게 일부 잘 나가는 영화계 거물 및 스타급 배우들의 현상유지인지, 아니면 영화판 자체의 체질강화인지 그래서 잘 알지 못했다. 전자가 남의 일이라면 후자는 우리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부당함을 설득하는 데도 실패하고, 자기만의 문제가 아님을 부각하는 데도 실패한 셈.

게다가, 지금이 어느 때인가. 문화적·영토적 경계허물기가 대중적인 활력의 원천으로 자리잡은 시대다. 한국문화라 할 때조차 그건 더 이상 단수가 아니라, 복수인 시대가 된 거다. 한국영화를 사랑한다며 직배영화 상영관에다 뱀 풀어놓는 일이 ‘국민적 쾌거’로 통했던 그때 그 시절의 감수성, 이제 더 이상은 안 먹힌다는 얘기 되겠다.

시대는 이렇게 바뀌었건만, 영화인들은 ‘국치’와 ‘주권’, 심지어 ‘국익’ 같은 반시대적 뉘앙스 만빵의 수사를 남발하며 문제 상황을 통짜로 진단·설명하려 했다. 의분을 담아내는 덴 손쉽고 효과적이었을지 모르나, 달라진 대중의 감수성을 도외시한 시대착오적 접근이 아닐 수 없다.

이 와중에 쿼터축소 조치를 둘러싼 싸움은 마치, 73일이냐 146일이냐를 놓고 벌이는 숫자놀음인 양 돼버렸다. 이렇다 보니 최민식의 난데없는 큰절로 화제가 되기도 했던 농민단체와의 연대집회 역시 그 원칙적 옳바름과는 별개로, ‘쪽수’ 불리기 차원에서 단발적으로 이뤄진 동원성 이벤트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더욱이 작년 농민들의 그 피터지던 FTA 반대시위 때, 영화계는 대체 무엇을 했는데. 이건 면목 없어도 한참 없는 짓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스크린쿼터의 취지가 영화판의 문화적 종다양성 확보와 함께, 이를 지지할 영화인들의 처우보장과 맞닿는 포괄적인 제도적 기반 마련에 있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필요조건일 뿐이다. 그 자체로 한국 영화계의 문화적 토양이 비옥해지진 않는 거다. 사자 없는 곳에 여우가 왕이라고, 해외자본 못들어오게 했으나 그 과실을 국내자본이 독식한다면, 결과는 마찬가지일 뿐이므로.

영화인들이 벌인 말의 성찬 속에서 축소‘철폐’라는 네거티브한 레파토리나 얄궂은 우리문화사랑론 말고, 쿼터축소와 연계된 그 어떤 포지티브한 중장기적 프로그램이나 아이디어, 찾아볼 수 없었다. 쿼터유지가 전부인 양 나오는 영화인들의 레파토리에 여론이 쉽사리 동조하지 않거나 식상한 반응을 보였던 건, 따라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수사학으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차라리, 아직도 배가 고파요 우리 밥그릇 그냥 지키게 해 주세요.. 라고 말했다면 그 용기와 진정성만이라도 빛날 뻔 했다. 싸움은 1차적으로 내 나와바리 수성에 있으니까 말이다.


3.

단순화를 무릅쓰자면, 싸울 때 ‘반독재’나 ‘민주화’란 구호만으로도 절반 이상은 먹고 들어갔던 시절이 있었다. 기술이래봐야, 쇠파이프로 전경과 백골단들 어떻게 제압할지, 또는 얼마 만큼의 ‘쪽수’로 기선을 잡느냐가 전부나 다름없던 시절. 물론 시대적 조건 탓이었다는 점을 무시 못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사회적 의제로 떠오를 만큼 세상은 변했다. 한마디로 말해 싸움, 만만치 않아진 거다.

아무리 사안이 절박한들 그게 자동적으로 사회적 공감과 명분 획득을 보장하진 않는다는 건, 포스트군사독재 시대의 냉엄한 조건이다. 이리 보면 싸움의 기술에 대한 업그레이드 요청, 외려 때늦은 감마저 있다.

상황이 나빠진 것 같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싸움의 기술을 다양하게 구사할 선택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얘기기도 하니까.

이번 스크린쿼터 축소 사태를 둘러싼 영화인들의 어설픈 대처는, 다소 역설적이지만 포스트군사독재 시대에 걸맞은 싸움의 기술은 어떻게 업그레이드돼야 하는지를 곱씹어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어차피 단판승부가 아니었던 만큼, 이번 장기전을 전기로 좀더 정교하고 섬세한 '싸움의 기술'이 연마되고, 또 널리 보급될 수 있도록 본 기자, 영화인들의 거듭된 분발과 업그레이드를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8/03/02 05:15 2008/03/02 05:15
https://blog.jinbo.net/redivy/trackback/3
YOUR COMMENT IS THE CRITICAL SUCCESS FACTOR FOR THE QUALITY OF BLOG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