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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독재로 귀결된 이집트 혁명(2013.1.9)

이슬람 독재로 귀결된 이집트 혁명

 

이집트 혁명의 배경과 무바라크 체제

2011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민중의 항쟁은 이집트와 리비아를 걸쳐 전 아랍의 항쟁으로 발전하였고, 벤알리와 무바라크, 카다피의 일당 혹은 일인 독재를 끝내는데 성공하였다. 아랍민중들이 거부하였던 그 체제는 무엇이었을까? 공교롭게도 이들 세 나라는 모두 세속적인 권력이란 점이 특징이다. 세속적인 국가란 샤리아(이슬람 율법)가 헌법과 법률의 근본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다르게, 타 종교를 용인하고, 여성에 대해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이슬람 율법을 강요하지 않는 국가이다, 이들 국가는 2차 대전 후 반식민지 상태에서 친제국주의적인 이슬람 왕정 통치를 대체한 국가로 그 의미에서 자주적이고 세속적인 시대정신을 구현한 국가였지만, 다른 한편으론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은 물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비롯한 다른 정치세력을 용납하지 않고 정보경찰에 의존하는 장기간에 걸친 일당 독재 혹은 일인 독재 국가였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이들 나라들 역시 신자유주의 세계화 체제에 편입되면서 국가의 후견기능이 약해지는 가운데, 2008년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식량가격의 폭등과 특히 교육받은 청년세대들을 비롯한 높은 실업률이 항쟁의 배경이 되었다.

무바라크 체제란 한마디로 군부에 기반한 독재이고 여기에 특권층이 기생하는 반민중적 체제였다. 건설업, 방직업, 숙박업까지 국가경제의 40-50%를 운영하는 군부는 이스라엘과의 평화공존정책이란 미명하에 이스라엘이 후방을 걱정하지 않고 팔레스타인과 가자지구를 유린할 수 있게 만들어 그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매년 12억 달러의 군사지원을 받는 친제국주의 세력의 온상이었다. 즉 무바라크 체제는 반민중적인 친미 친제 군부독재 국가였던 것이다.

 

무바라크 퇴출 후의 과도기와 이슬람헌법 반대투쟁

2011년 2월 무바라크를 몰아낸 이집트 혁명은 최고군사위원회(SCAF)의 과도적 시기를 거쳐 2012년 6월 무르시의 선출, 12월 22일 국민투표를 거쳐 새로운 헌법을 채택함으로써 새로운 체제로 이행하였다.

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 체제라고 비난받았던 SCAF는 민중들의 열망을 짓밟고 낡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보루였다. 그리고 2011년 말 총선에선 혁명의 과정에서 온갖 기회주의적 행보를 보인 온건 이슬람주의 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의 평화정의당(FJP)이 48%, 살라피주의(이슬람 근본주의)의 알 누르 당이 28%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의회의 다수를 장악한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군부와 친 무바라크 보수세력이 온존하고 있는 사법부 그리고 야당(친무바라크 세력, 자유주의 세력, 콥틱 기독교 세력 등)과 타협하여 헌법위원회를 구성하였지만, 이슬람주의 세력이 타협을 깨고 이슬람근본주의를 관철하려 하자 2012년 4월 사법부가 헌법위원회를 해산하였다. 2012년 11월 중순부터 시작된 반 무르시 투쟁 혹은 이슬람 헌법 반대 투쟁은 이슬람주의자들이 다수가 된 새로운 헌법위원회가 만든 헌법초안을 둘러싸고 시작하였다.

이집트 국회에서 지명된 100명으로 구성된 헌법위원회에서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이슬람주의 세력이 2/3를 장악하고, 세속주의를 부정하고 대통령과 이슬람세력의 권한 강화로 나아가자, 2012년 11월 17일 자유주의자와 콥틱 기독교 세력 29명이 헌법위원회를 사임하였다. 다음날부터 시민들은 헌법 재제정과 학살책임자 처벌 등을 외치며 타흐리르 광장에 집결하였고 11월 21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11월 22일 무르시는 학살진압 책임자의 처벌 요구에 대해 군부와 검찰 최고위층을 해임시키면서 그 이하의 군 장성과 검찰간부들을 면책하는 조치와 사법부의 헌법위원회 해산시도를 예방하고자 새로운 헌법과 법률 그리고 정부조직에 대한 사법부의 권한을 부정하고 대통령의 초월적 권한을 규정하는 헌법선언(대통령령)을 발표하였다. (헌법선언은 최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 때 미국과 군부 그리고 이집트의 자존심을 어느 정도 살린 중재로 무르시의 위상이 높아진 국면에서 진행되었다.) 극우들이 몰려 있는 사법부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무시하는 독재라고 비난하고, 자유주의자들은 이슬람근본주의로의 회귀와 독재에 대한 반대에 나섰다. 현대판 파라오법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헌법선언으로 주요 도시에서 반 무르시 투쟁이 본격화되고 격화되었다. 무르시 퇴진을 외치는 10만 명이 넘는 시위대는 12월 4일 대통령 궁으로 몰려갔고, 다음날 무슬림형제단 수천 명은 대통령궁 주변에서 농성하는 시위대를 습격하였다. 이에 격노한 시민들 수천 명이 달려와 격렬한 충돌이 빚어졌다. 시민들은 다시 타흐리르 광장 옆 내무부 건물이 있고 2011년 무바라크 축출투쟁의 상징이었던 무하마드 마흐무드 도로로 집결하였다. 계속되는 충돌로 2명이 죽고 451명(이 중 경찰 160여명 포함)이 부상당하고 250명이 연행되었다. 시위가 거세어지자 무르시는 12월 8일 헌법선언을 철회하였지만 헌법채택을 위한 국민투표는 강행되었고, 찬성 63.96%로 새 헌법이 채택되었다.

무르시는 반무르시 세력-이집트 민중, 자유주의 세력, 사법부-을 싸잡아 혁명을 반대하는 세력이라고 몰아 붙였고,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 세력은 반독재의 리더로 부상하였고, 극우보수인 사법부 또한 이슬람독재에 반대하는 전선에 얼렁뚱땅 끼어들었다. 낡은 지배계급의 핵심인 군부는 SCAF의 수장이었던 탄타위를 비롯한 한두 명의 최고위 장성을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세력이 온존될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군사지원도 계속된다는 점에서 무르시의 굳건한 동맹세력이 되었다. 토론할 기회조차 없이 한 달 만에 강요된 헌법채택을 위한 국민투표는 무르시의 승리로 끝났다.

 

지배계급의 재편-반동적인 이슬람주의 세력과 군부의 연합독재

2011년 이집트 혁명이 무바라크를 앞세운 군부와 사법부, 특권층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세력이 한편이고, 자유주의자들이 모인 제도 야당과 끊임없이 기회주의적인 온건이슬람주의 세력인 무슬림형제단과 보다 근본주의적인 이슬람주의자들(살라피주의자), 그리고 억압받는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민중을 다른 한편으로 한 혁명이었다면, 이 혁명은 단지 군부의 권력독점이 군부와 온건이슬람주의 세력의 동맹으로만 변하였을 뿐, 반민중적이고 친제국주의적인 성격은 변함이 없을 뿐 아니라 여성과 시민의 자유에 억압적이고 반동적인 이슬람근본주의의 성장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무바라크가 억압하였던 노동자계급의 단결권과 파업권은 그대로이다.

이렇게 볼 때 지난 10월 이후 격심해진 이집트의 헌법반대 투쟁 국면을 서방 언론들은 단지 무르시를 앞세운 이슬람주의 세력과 자유주의자들이 앞장 선 세속주의 세력 간의 대결로 묘사하였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바라크로 상징되었던 반민중적인 군부독재가 또 다른 반동세력인 이슬람주의 세력이 군부와 동맹한 새로운 반민중적인 독재로 재편되었다는 점이다.

이집트 혁명은 대중의 격렬한 투쟁만이 아니라 그 혁명을 중단 없이 전진시키고 그 성과를 수렴할 투쟁 속에서 대중적 권위를 쌓아온 정치세력 혹은 혁명적 세력의 성장이 동반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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