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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FocuS]원자력의 값싼 전기에 언제까지 취해 있을 것인가?-_원자력 르네상스에 대한 성찰과 대안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4/08 22:29
  • 수정일
    2011/04/08 22:50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진과 해일로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면서 노출된 방사능에 전세계가 벌벌 떨고 있다. 최근 한반도의 공기와 비에서도 제논과 세슘, 방사능요오드 등의 방사능물질이 연이어 검출되었다. 편서풍의 영향으로 한반도는 방사능으로부터 절대 안전하다고 호언장담하던 남한정부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기는커녕 이번에 측정된 방사능 수치가 연간 방사선량 한도의 몇만분의 일이라며 혼란을 수습하기에 급급하다.
어느 에너지보다 깨끗하고 안전하다고 선전되었던 원자력의 신화는 무너지고 있다. 핵을 ‘통제’할 수 있다던 지배계급의 주장은 악명높은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비롯하여 끊이지 않고 또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통해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지탱하기 위해 고도로 발전한 산업시설을 가동시키고 밤낮없이 풍요로운 전기를 제공하는 원자력의 생산력을 당장에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운동세력 역시 원자력의 편의와 재앙의 잠재력을 양날의 칼처럼 여기면서 ‘잘’ 통제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이’ 통제를 해야한다 등의 주장을 펼쳐왔다.
그러나 원자력강국을 자임하던 일본도 예기치 않은 상황에 굴복했고 결국 수조 원의 비용과 수십 년의 시간을 들여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한다는 최후의 방법을 택했다. 대중들은 지배계급의 정보 비공개에 대해 점점 불만이 커지고 있으며 그들의 위기대처능력을 의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 정치단체를 포함한 대부분의 진보진영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원자력 발전에 대한 기존의 애매모호한 입장들을 뒤집고 핵발전 완전폐기로 입장을 선회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환경운동을 하는 문주란 동지가 최근 불거지고 있는 원자력발전의 실태와 위험성을 은폐하려는 지배계급의 기만성을 폭로하는 글을 기고해 주셨다.
기고글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수 있다. [편집자주]

 

 3월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는 2만 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15미터의 쓰나미는 사람들의 목숨과 함께 집, 경작지와 공장. 도로 등 모든 것을 순식간에 삼켜버렸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갈 곳을 잃은 채 추위와 배고픔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자가 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일본인들 그리고 세계인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원전폭발이다. 후쿠시마 원전의 1~4호기가 모두 폭발하고 방사성물질이 유출됐다. 사람들이 피폭됐고 우유와 시금치 등 식료품과 수돗물에서 방사능이 검출됐으며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방사능 수치가 올라가기도 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 사태가 언제 끝날지, 그 피해가 어디에까지 얼마나 미칠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미국 과학국제안보연구소는 “현 상황은 6등급에 가깝지만, 불행하게도 7등급까지 갈 것이다”라며 체르노빌의 악몽을 되살렸다.

 

말로만 “안전한” 원자력

원자력이 안전하고 깨끗하다는 터무니없는 미신이 있다.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티비 광고 속 원자력은 시청자의 마음까지 맑게 할 정도다. 정부 당국자나 핵전문가들의 입을 통해 그려지는 원자력 역시 더할 나위 없는 안전 그 자체다. 그러나 이들 원자력마피아의 주옥같은 거짓말 뒤에 감춰진 진실은 다름 아닌 원자력사고와 은폐, 그리고 그로 인한 끔찍한 고통의 역사다.
원전선진국이라는 러시아, 미국, 프랑스, 일본의 사건과 사고만으로도 그 참혹함은 끝을 알 수 없다.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원전에서 노심이 공기 중에 노출됐고 연료봉의 50%가 바닥에 녹아 흘러내렸다. 미국 전체 유아 평균사망률은 감소하고 있었던 시기였지만 사고 발생 후 4개월 동안 펜실베이니아 주 전체 유아 사망률은 16% 정도, 메릴랜드는 41%, 뉴욕은 16% 상승했다. 캘리포니아 랜초세코 원전 역시 가동 후 지역에 선천성 기형으로 인한 사망률이 크게 증가했다.

 

 

원전사고의 대표적 사례인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발전소를 자랑스러워”하던 주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악몽을 가져다 줬다. 「유엔보고서를 반박하다」라는 보고서는 방사능에 의한 암 사망자가 6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그리고 러시아 3개국에서만 약 840만 명의 사람들이 방사선에 피폭됐고 영유아의 3분의 1 이상이 갑상선암 징후를 보였으며 남한 면적의 1.5배가 넘는 155,000㎢의 지역이 오염됐다. 벨라루스는 오염에서 자유로운 곳이 국토의 1%밖에 되지 않고, 경작지의 25%가 작물 생산이 영영 불가능해졌으며 갑상선암으로 사망하는 어린이의 수가 매년 1,000명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 예산의 25%를 체르노빌 재앙으로 인한 후유증을 완화하는 데 써야 할 정도로 고통을 겪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2008년 우라늄 용액이 강과 지하수로 흘러들어갔고 2009년 예상치 않은 곳에서 플루토늄이 발견되는 등 사고가 잇따랐다. 장정욱 마쓰야마대 교수는 “일본에서 도쿄전력이 도요타와 함께 엄청난 정치적 힘, 막강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 나머지 9개 전력이 힘을 합해도 도쿄전력에 대항하지 못할 정도의 파워”라면서 “그동안 사고 정보를 많이 감추고 있었다. 상습범이다. 1987년부터 15년 동안 중요한 사고를 감춘 것이 2002년 들통나서 한꺼번에 재점검을 하느라 총 17개의 원전발전소가 몽땅 멈춘 일도 있었다”고 했다.
남한의 원전운영은 더 형편없다. 지난 1978년 고리 1호기가 가동된 이후 2009년까지 고장으로 인해 원자력발전소 가동이 정지된 건수가 423건이나 되고 고장 외의 이유로 원자로가 멈춘 것도 2000년 이래 140회에 이른다. 발전 중단으로 인한 손실은 1999년까지 총 982억 원 이상이다. 2002년 울진 원전의 증기발생기관이 절단돼 냉각수가 45톤 이상 누출됐고 스리마일 사고처럼 큰 사고가 터질 뻔 했지만 월드컵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은폐되기도 했다. 2003년 영광 원전의 방사능 누출사고 실태조사에서는 근무자들이 방사능 오염 사실도 모른 채 오염된 물을 마셨는가 하면 방사선 감지기가 경보를 울렸는데도 5일간 오염된 물 3,500톤을 그대로 바다에 흘려보낸 사실이 확인됐다.

 

원자력, 과연 구원의 메시아인가

이번 일본 원전폭발 직전까지 체르노빌 원전사고 후 주춤했던 원자력은 다시 부흥기를 맞고 있는 듯했다. 화석연료의 고갈과 기후변화의 대안은 원자력 밖에 없다는 신화가 연출됐다. 만화영화 속의 원자력에너지로 힘이 솟는 메칸더V가 지구의 평화를 지켜줄 것이란 믿음이, 원자력에 대한 우상화가, 깨끗하고 안전하며 지속적이고 무한한 에너지의 신화가 시대를 지배했다.
원자력은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기 때문에 청정에너지, 녹색에너지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원자력이 기후변화에 대한 대안이라고 한다. 물론 원전 가동에 따른 전기 생산 시 온실가스 배출은 없으나 우라늄의 채굴, 정련, 농축, 핵연료성형가공, 운반, 원전 건설 및 폐로, 해체, 핵폐기물의 처리 및 운송과 저장 등의 과정에서 화석연료가 쓰이고 있다. 독일 환경연구소가 원자력발전의 전 과정 중 현재 계산 가능한 부분만 고려한 것에 따르더라도, 전기 1kWh 생산 시 33g, 연간 250,000톤의 온실가스를 간접적으로 배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2007년 기준, 전 세계 전체 소비에너지의 2.3%, 전력생산의 13.7%의 비중을 갖고 있는 원자력이 기후변화를 막는 수단이 되려면 전 세계 소비에너지의 11.6%, 전력생산의 76.8%를 차지하는 화석연료를 최소한 50년 안에 대체해야 한다. 그런데 이는 50년간 1주일에 하나씩 원전을 짓고 자동차와 비행기, 난방 등을 전면적으로 전기에너지 시스템으로 바꿔야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원자력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원전 건설은 화석연료를 대체하거나 그 사용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 오지 않았다. 그리고 우라늄 매장량의 한계로 원자력도 점차 비싼 에너지가 될 수밖에 없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종착역에 이르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원자력발전의 결과로 생성되는 핵폐기물의 존재는 결코 원자력이 청정에너지, 안전한 에너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고준위방사성폐기물에 대해 아직까지 그 어느 나라도, 그 누구도 확실한 처리방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처리방식이 없다는 것은 그 비용 역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으로 원자력에 대한 연구에서 원전건설, 해체 및 핵폐기물 처리와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원전사고에 따른 피해까지 더한다면 결국 경제적으로도 원자력은 그 대가를 얼마나 치러야 할지 알 수 없는 재앙일 뿐이다.

 

 

원자력마피아의 독점과 비밀주의

체르노빌 원전사고 때도 그렇고 이번 일본 원전사고 역시 마찬가지로 원자력에 대한 독점과 비밀주의가 더 큰 피해를 가져왔다. 방사능 유출은 절대 없을 것이란 일본 정부의 말은 사흘도 되지 않아 거짓말이 돼버렸다. 사고 초기 원전을 잃지 않기 위해 해수 냉각을 회피했고 결국 더 큰 재앙을 불러왔다는 비난이 도쿄전력에게 쏟아지고 있다. 소수에 의해 독점적으로 운영되면서도 사고에 의한 피해는 다수의 시민이 고스란히 감수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은 연구에서 건설과 운영, 폐기의 전 과정을 볼 때 막대한 위험과 책임에 비해 경제성이 떨어지고 안정성 문제로 사회적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으며 항상 테러의 대상의 된다. 뿐만 아니라 우라늄 농축과 폐연료 재처리과정에서 핵무기원료 생산가능성이 있어 국가차원의 직간접적 지원과 특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기업, 국가관료, 학자 등으로 형성된 원자력마피아가 원자력운영을 독점해 왔다.
원자력마피아는 언제나 원자력이 깨끗하고 안전하며 쉽게 다룰 수 있는 대상인 듯 말한다. 일본 원전폭발로 유럽에서는 반핵 시위가 번지고 독일 정부 등이 원자력 조기폐기로 정책을 전환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작 일본의 이웃 나라인 남한에서는 “우리는 절대 안전하다”는 말만 난무하고 있다.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은 프랑스원자력산업회의와 협정을 통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국민이해 증진과 원자력안전 홍보협력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러시아 정부, 일본 정부, 도쿄전력이 해왔던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남한정부는 편서풍 때문에 남한은 안전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현재 13기의 원전을 운영하고 있고 동안지역에 50기의 원전을 추가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중국의 원전에 대해 얼마나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고 안전을 장담할 수 있을까? 이번 일본 원전폭발 사고에서 알 수 있듯 원자력은 개인, 집단, 국가 심지어 세계인 모두가 운영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통제가 불가능하며 통제를 벗어난 순간 그 피해는 국경과 세대를 넘어 수천 킬로미터, 수백 년에 걸쳐 지속될 수밖에 없다. 21기의 원전을 운영하고 있는 남한은 고리, 월성에서 원전 수명연장, 신규 건설을 진행하고 있는데 실제 그 안정성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고 있지 않다. 정부는 남한의 원전은 일본의 것과 방식이 다르고 보다 안전하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장정욱 교수는 “이번 사고의 경우 문제는 비상 상황에서 전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기종이나 저 기종이나 파이프가 끊어지면 똑같다. 이번 같은 사고라면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기종마다 다 장단점이 있다. 일본도 예전엔 절대 사고 안 일어난다고 했었다”고 말하고 있다. 3월 프레스센타에서 있었던 토론회에서 핵전문가라는 사람이  “신규원전은 진도 7.5의 내진설계를 하고 있어 괜찮다”고 했다가 그럼 기존 원전은 대책이 있냐는 질문에 “진도 6.5 이상 지진이 오지 않길 기도하자”고 해 참석자들을 어이 없게 하기도 했다.
현재 남한에서 원자력 연구개발에 투자되는 정부투자금은 2007년 기준으로 2731억원에 이르고 이외에도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은 전기요금 중 일부로 조성된 전력산업기반기금에서 원자력 홍보비 명목으로 매년 110억 원 정도의 금액을 티비 등의 광고를 통해 원자력의 이미지를 재고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원자력에 대한 이 같은 특혜로 결국 재생에너지에 대한 연구는 싹을 틔우기가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 출처 : 환경운동연합

 

핵 없는 세상으로

 지난 1월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이 최근 전력수요 급증으로 인한 대책의 일환으로 전기난방 자제를 당부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기후변화로 인해 한파가 계속 되면서 연일 최대전력수요를 갱신하게 됐고 예비전력까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자 시민들의 실천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지식경제부는 이를 발표하면서 2009년 한파로 전기소비가 급증해 프랑스가 취한 전력공급 차단을 예로 들어 국민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프랑스와 남한의 전력난은 모두, 전력정책의 방향을 수요관리를 통한 효율증대보다 과도한 수요예측을 통해 일단 대규모 대용량 원자력과 화력발전소를 짓고 보자는 식의 무책임한 전력 정책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일단 가동하면 1년 이상 멈추기 힘든 원자력발전소의 특성과 저장하기 어려운 교류전기의 특성상 생산된 전기는 최대한 소비를 해야 했으므로 80년대에 10년간 9차례에 걸쳐 전기요금을 계속 인하함으로써 전력낭비를 유도해 온 결과다. 원자력은 전력 정책을 과잉공급이 수요를 창출하고, 증가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다시 공급설비를 증가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트린다.
OECD의 30개 회원국 가운데 처음부터 전력생산에 원자력을 이용하지 않은 국가는 오스트레일리아, 덴마크, 그리스,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뉴질랜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터키, 폴란드 등 총 11개 국가이고 국민투표나 의회를 통해 원자력을 단계적으로 폐쇄하기로 결정한 국가는 오스트리아(1978년), 스웨덴(1980년), 이탈리아(1980년), 네덜란드(1994년), 벨기에(1999), 독일(2000년), 스페인(2004년) 등 총 7개국이 있다.
남한처럼 에너지 해외의존도가 74.5%로 높고 에너지를 많이 쓰는 제조업이 경제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독일의 경우 2002년 원자력법을 통해 신규 원전건설을 불허했다. 2009년 들어선 보수정권이 원전수명을 늘리기는 했지만 원전폐쇄의 기본 방향은 변하지 않았으며 이번 일본 원전폭발 사건 이후 원자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시점을 2017년으로 앞당기겠다고 발표했다. 1차 에너지 중 풍력 등 재생에너지 비중을 2030년 30%, 2050년 60%로 끌어올리고 전력 중 재생에너지 비중을 2020년 35%, 2030년 50%, 2050년 80%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또 재생에너지 확대와 동시에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고 효율을 높이는 작업을 추진한다. 1차 에너지 소비는 2008년에 견줘 2020년까지 20% 줄이고 2050년엔 50% 줄일 계획이다. 전력 소비도 2050년까지 20% 줄인다. 에너지 효율은 주택의 개량을 늘려나가는 것을 포함해 에너지 생산성을 해마다 2.1% 높여 나간다. 주마다 도입연도가 다르지만 프랑크푸르트 주의 경우 2009년 3월부터 모든 신축 공공건물은 패시브 하우스(passive house,단위면적당 연간 냉난방에너지가 15kWh 이하)로 건설하는 것을 의무화했고 2015년까지 독일 내 모든 신축건물은 패시브 하우스로 지어야 한다. 그리고 기존 건물은 저에너지 건물로 개선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 기준은 40~70kWh/㎡다.
남한의 경우 작년에 도입하기로 돼있던 건물의 에너지소비총량제도가 올 7월에 연면적 1만㎡(약 3천평)이상의 건물에 한해서 시행하는 것으로 미뤄졌다. 한편, 2010년부터 공공기관에서 건설하는 공동주택, 즉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짓는 아파트는 에너지효율등급 2등급을 의무화하도록 했고 공공기관에서 건설하는 신축 업무용 건물은 에너지효율등급 1등급을 의무화하도록 했는데 2등급은 연간 사용하는 에너지가 단위 면적당 300~350kWh, 1등급은 300kWh 미만으로 패시브 하우스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원자력의 값싼 전기에 취해 프랑스와 같은 전력난이나 일본과 같은 방사선 누출의 위험을 지고 갈 것인가, 위험한 원자력을 폐기하고 건강한 에너지로 전환할 것인가는 행동의 문제다. 원자력마피아는 스스로 지금껏 누렸던 특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원전폭발 이후 10만 명이 반핵시위에 나섰던 독일인들의 의식적인 노력과 저항 없었다면 독일은 아직도 원자력의 환영을 뒤쫓고 있을 것이다.
남한정부는 일본 원전폭발에서 아무것도 배우려하지 않고 원전확대에 더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폐연료 재처리에 대한 욕심때문에 더 위험한 늪 속으로 한반도를 밀어 넣고 있다. 지반 침하로 해수에 의한 침수와 방사능 누출이 뻔히 예측되고 있는 가운데 경주의 방폐장 건설도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원자력마피아의 살 길일 수는 있어도 지구 위 생명체들을 위태롭게 할 뿐이다.
수명이 다 된 원전의 연장운행과 신규 원전건설 그리고 원전수출을 중단 시키고 가동 중인 원전을 단계적으로 폐기해야 한다. 원자력에 대한 거짓된 환상을 유포하고 있는 한국원자력문화재단에 대한 정부의 모든 지원과 특혜를 중단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에너지 효율을 떨어뜨리는 원자력이 아니라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하며 안전하고 분산적인, 지역별 · 건물별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면서 민주적 통제가 가능한 재생에너지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한다. 그리고 무한 에너지라는 헛된 욕심을 버리고 과도한 에너지 소비를 줄이며 패시브 하우스와 같이 에너지 사용효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찾아야 한다.

 

 

△ 출처 : 환경운동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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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국가의 탄압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1/04/08 19:59
  • 수정일
    2011/04/08 19:59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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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6년 동안 사회주의 운동이 공개적인 성격을 띠게 되면서 과거 공유되었던 수사에 대한 원칙이나 경찰탄압에 대한 방어원칙이 많은 부분 망각되었다. 하지만 <사노련>을 “국가변란 선전·선동 단체”로 규정한 이번 유죄 판결은 실제로 단순한 문필과 선전활동에 대한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 적용의 선례가 될 소지가 농후해 이후 유사 사건들이 발생할 우려를 낳고 있다.
<사노련> 유죄판결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공권력의 탄압이 현실이 된 상황에서 국가권력의 탄압에 대한 기본적인 대응방식을 다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관용의 자유

군사독재 시절 남한의 반정부세력은 공권력의 가혹한 탄압 때문에 대개 비밀스럽게 활동해야 했다. 일제시대의 치안유지법에 기원을 둔 국보법은 이러한 탄압의 가장 유력한 무기로 기능했다.
이런 상황은 87년 민주화 투쟁 이후에도 별반 변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은 90년부터 92년 사이 세 차례나 공권력의 침탈을 받은 끝에 백태웅, 박노해, 남진현 등 체포된 지도부가 국보법에 의해 최고 형량인 무기징역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 받았다.
이런 엄혹한 탄압과 더불어, 동구권의 붕괴로 인한 스탈린주의에 대한 환멸, 김영삼 정권의 등장으로 인한 민주주의의 확대 등은 많은 급진적 정치단체들을 합법정당 운동이나 공개단체와 같은 제도권으로 들어서게 했다.
하지만 국보법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반체제적 성격을 띤 운동에 대해서는 정파를 막론하고 국보법에 의한 탄압이 가해졌다. 혁명적 사회주의를 걸고 비공개·비합법 활동을 하던 단체들에 대한 국보법 탄압 역시 9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93년과 94년 <혁명적국제사회주의노동자동맹(‘혁사노’)>와 <노동자계급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자들(‘노해투사’)> 등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방한 단체들이 국가보안법의 탄압을 받았다. 95년과 96년에는 <학생사회주의자 기간대오>, <사회주의학생연맹> 사건 등이 벌어졌고, 97년과 98년에도 <전국학생연대>, <북부노동자회>, <관악노동청년회> 등 많은 단체들이 국보법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통일운동세력과는 무관한 단체들이었다. 심지어 북한을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국제사회주의자(IS)> 역시 90년대 내내 주기적인 탄압에 시달렸다.
때문에 제도적 틀 안에서, 공개적인 운동에서 사회주의는 공공연하게 선동될 수 없었다. 사실상 2000년대 초까지 운동진영에서 사회주의라는 말은 비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단체들의 불법 출판물 외에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2003년 노무현 정권의 등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2001년 내부문건과 교육자료가 문제가 되어 기소된 좌파 성향의 의료운동 단체 <진보와 연대를 위한 보건의료연합(진보의련)> 사건같은 예외가 있긴 했지만 친북단체가 아니면 탄압 받지 않는다는 인식이 점차 공유되기 시작했다. (<진보의련> 사건도 결국 2007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와 함께 비합법 사회주의 그룹들이 합법주의 세력이라고 비판하던 정치단체들 역시 점차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혁명적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비공개활동을 하던 활동가 단체들도 공개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대중의 지지로부터 생겨나는 자유가 아닌 자유주의자들의 관용에 의한 불안정한 자유였다. 정치적 자유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력은 갈수록 왜소해졌다. 과거 십여 년 간 지배계급이 사회주의자들에게 암묵적인 관용을 베풀어온 것은 사실 사회주의 운동이 현실에 영향을 줄 만한 세력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관용에 의한 자유조차도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함께 박탈되었다.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동시에 김대중·노무현 정권 하에서 계속 축소되고 있던 일선 공안기관들이 일제히 활발한 활동에 나섰다. 운동단체들이 자주 이용하는 인쇄소와 대학교 주변 사회과학 서점에 대한 사찰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어진 촛불투쟁 국면에서 공권력의 전방위적인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결국 촛불투쟁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지난 2008년 8월 <사노련> 사건이 벌어졌다.


탄압에 대한 대응원칙의 재확인 필요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지난 몇 년 간 비교적 자유로웠던 활동은 활동가들로 하여금 공개 활동의 자유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도록 만든 듯하다. 필자가 만난 모 활동가는 정보기술의 발달로 과거 비공개 활동 시절의 원칙들이 이제는 아무 소용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공개성이라는 미명아래 기본적인 자기방어를 포기하는 것이다.
정보기술이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때문에 생기는 빈틈도 있다. 과거 사건들의 경우 공안기관들은 미행과 도감청 등 물리적인 감시행위를 주요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최근 몇몇 사건에서 드러나는 현상은 공안기관의 감시 방식이 미행, 도감청 등 직접 발품을 파는 방식에서 휴대폰, 인터넷 감시 등으로 무게중심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공안기관이 그것만으로 충분히 필요한 신상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정보를 주의해서 관리한다면 공안기관에 의해 불시에 체포·연행되는 일은 어느 정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미행과 도·감청은 충분히 주의할 경우 사전에 감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권력의 추적을 사전에 감지할 수 있다면 침탈로 인한 타격을 축소하고 사건에 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된다. 물론 국가권력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공권력의 수사를 보다 힘들게 만드는 것은 운동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운동진영은 공권력의 탄압에 대한 자기 방어와 수사에 대한 대응을 위헤 많은 원칙을 만들어냈다. 물론 이러한 원칙이 지나치게 경직되고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도 많다. 오히려 일부 단체의 지도부는 조직원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를 악용하는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공개활동 영역의 폭이 크게 늘어나면서 보안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 예를 들어 가명 사용, 미행에 대한 체크 등을 쓸모없는 일이라고 노골적으로 비웃고, 공권력의 수사를 먼 나라 이야기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한동안 만연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공권력의 탄압에 대한 올바른 대응으로 보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벌어졌지만 이런 문제가 공개적으로 평가가 되는 자리는 없었다.
또한 경찰이나 검찰 등 수사기관과 사상·이론 논쟁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은 오래 전에 합의된 지점이다. 그러나 근래들어 사건의 쟁점을 가지고 경찰이나 검사와 논쟁이나 토론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다니는 활동가들도 간혹 눈에 띤다. 이것이 그저 풍문일 뿐이라면 다행이지만 사실이라면 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수사에 대한 대응문제를 두고 2009년 <사노련>과 <다함께>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이러한 이유로 반드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정치적 문제를 경찰 수사에 대한 대처와 함께 묶어서 제기한 <다함께>의 제기 방식은 오히려 논점을 흐린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당시 <다함께>가 수사 대응에 대해서 문제제기한 원칙은 그 맥락과 상관없이 모두 옳은 말이었고 여전히 다시 확인되어야할 지점들이다.
당시 <다함께>가 주요하게 제기한 문제는 수사에 대한 협조 거부와 묵비 문제였다. 수사에 대한 협조 거부란 경찰의 출두요구와 수사과정에 협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노련> 사건에서 갑작스러운 체포·연행으로 경황이 없는 와중에 경찰의 압수물품 봉인해제 요구에 응한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고 당사자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있다. 경찰의 압수물품 봉인해제 요구에 거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태도이다. 하지만 경찰의 출두요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장이 엇갈리고 있는 것 같다. 노동현장의 활동가들은 경찰의 소환요구에 대해 최대한 거부하다가 체포되거나 연행되는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치·시민단체에 활동가들이 오히려 별 생각없이 그냥 출두하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물론 무조건 경찰의 소환요구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운동적인 판단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위 사회주의 운동을 한다는 활동가들이 별 고민 없이 자의적인 판단으로 경찰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출두 문제에 대한 대응은 운동단체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예외적 경우가 아니라면 직업적인 운동가들,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은 구속·수배·체포·연행을 일상적으로 각오하고 활동해야 하지 않을까.
특히 최근 들어 경찰은 ‘피내사자’라는 법에도 없는 이상한 말을 만들어서 출두요구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형사법상 ‘피의자’가 아닌 이상 경찰의 출두요구에 응할 법적 의무가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 운동진영에서 원칙을 세우고 단호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


시민으로서 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또 하나 주요하게 제기된 논점 중 하나는 ‘묵비’에 대한 문제였다. 수사기관의 소환요구에 불가피하게 응할 경우에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바로 묵비의 원칙이다.
<다함께>는 묵비를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사노련>은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묵비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운동사회에서 묵비란 <다함께>의 주장처럼 적당히 둘러대거나 핵심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진술을 거부하는 것, 묵비권의 사용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즉, 묵비란 현재 남한과 같이 진술거부권이 법제도적으로 보장된 국가에서는 수사기관의 모든 질문에 대해 진술거부권을 사용하는 것이다.
현재 남한보타 훨씬 엄혹한 상황이었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묵비를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1903년 2차 당대회에서 경찰의 심문에 대해 어떤 증언도 거부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다함께>의 지적대로 이런 원칙은 러시아 반정부 운동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둘러대는 행위, 수사관과의 대화는 오히려 더 큰 해악을 낳았다는 점을 반정부 투쟁과정에서 체득했기 때문이다.
남한의 운동경험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비합법 운동을 하던 활동가들은 조직을 지키려는 의지가 과도한 나머지, 오히려 기본적인 시민적 권리를 행사하는데 소홀했다. 하지만 진술거부권을 사용하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더 사건이 커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대충 둘러대는 것은 오히려 항상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대공분실 등 수사기관에 끌려가 수사를 받는 사람은 외부와 소통이 끊어진 고립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 속에서 여러 가지 편의적인 판단을 해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당장 수사관의 추궁을 모면해보려고 이것저것 둘러대다 보면 말꼬리를 잡혀 더욱 집요한 추궁을 당하게 될 뿐이다.
더욱이 여러 명이 함께 체포되어 조사를 받을 경우 누가 잡혔는지도 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격리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은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 진술한 말이 꼬투리가 되어 결국 더 많은 것을 진술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러므로 한번 말문을 떼기 시작하면 더 큰 곤란을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만약 이런 논리가 제정 러시아나 군사독재 시절에나 유효한 낡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최근에 한 공권력 종사자가 했던 충고를 되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현직검사로 재직하며 “수사 받는 법”이란 칼럼을 <한겨레신문>에 연재하다 옷을 벗게 된 금태섭 씨는 “유리한 주장 하려 하다보면 자칫 함정에 빠진다”며 “피의자에게 아무 것도 하지마라”고 권고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억울함을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설사 죄를 지은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유리한 점을 찾아내서 수사에 대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파멸로 이끄는 길에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 공개가 원칙인 재판과는 달리 수사를 받는 피의자는 충분한 정보도 없이 어둠 속에서 헤매야 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행동하면 상처를 입는다. 가만히 있으면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다. 더구나 수사기관에는 피의자에게 유리한 사실까지 찾아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지는 것만은 피하라. 상황을 파악한 이후에도 수사에 대응할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다. … 수사란 다른 사람이 과거에 저지른 행동을 밝혀내는 것이다. 신이 아닌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협조 없이 범죄를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검사나 경찰관은 피의자로부터 어떤 반응이라도 끌어내기 위해서 온갖 시도를 한다. 여기에 반응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다. 어떤 문명국에서도 피의자에게 수사에 협조할 의무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수사기관의 행동에 섣불리 대응하지 않고 변호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피의자의 권리이며 이러한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현명하게 수사를 받는 제1의 원칙이다.
 

검찰이든 경찰이든 수사관과는 어떤 토론도, 어떤 대화도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사상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수사과정이 아니라 법정에서 투쟁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수사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법적으로 보장된 진술거부권에 기초하여 오로지 묵비로 대응하는 것뿐이다.


활동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사회주의 운동의 본질은 자본주의 체제의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다. 그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아무리 확장된다고 할지라도 사회주의 운동은 탄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남한의 국보법은 그러한 점에서 가장 기형적이고 악랄한 형태의 제도일 뿐이다.
국보법과 같은 형태만 아닐 뿐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 역시 법제도적으로 반체제적 사상과 운동을 탄압을 할 수 있게끔 여지를 열어두고 있다. 그래서 소위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 조직에서도 가명을 사용하는 활동가들이 많다. 미국에서도 9·11 사태 이후 국토안보법이 통과되면서 반정부 활동의 여지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이번 <사노련> 유죄판결 역시 새로운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이 국가기관의 무죄판결에 지나치게 연연할 필요는 없다. 물론 무죄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허구성이 폭로될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의 법정투쟁에서 무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 운동이 실제로 체제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때, 국가기구는 이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그람시는 현직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시즘 집권 이후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수감되었다.
지금 비록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력 없음으로 인해 어느 정도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지만 과연 혁명적 시기, 사회적 불안과 혼란의 시기에도 그럴 것인가? 혁명적인 시기에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쉽게 연행되거나 체포된다면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그러한 시기에도 경찰의 소환요구에 응할 것인가?
촛불투쟁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적극적으로 결합하던 시민 중에도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국가기구의 탄압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방어수단이다.
하지만 오히려 소위 운동진영에서 수사에 대비하는 활동방식을 비웃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운동진영 내부의 이런 경향은 위험하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과신으로 보인다. 이런 태도는 실제로 공권력의 탄압이 본격화되었을 때 지레 놀라 되려 활동이 크게 위축되는 역편향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자본의 세계화로 국민국가 내에서 정치적 합의 정도가 날로 떨어지고 있고, 점차 전쟁과 혁명의 시기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오늘날 민주주의적 자유는 갈수록 제약될 가능성이 높다. 활동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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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기획][인터뷰]사노련 탄압에 맞서 국제연대 조직한 로렌 골드너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1/04/08 19:57
  • 수정일
    2011/04/08 19:57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상황은 점점 위험해지고 있다

 

어떤 계기로 이번 국제연대 활동을 조직하게 되었나

집회를 해보자는 생각은 원래 <혁명정당을 향한 동맹 (LRP, League for the Revolutionary Party)> 동지들이 낸 것이었다. 나는 <사노련> 활동가 8인을 위한 인터넷 캠페인을 조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회 조직은 <혁명정당을 향한 동맹>과 내가 공동 편집자로 참여하고 있는 온라인 저널 <반란자 통신 (Insurgent Notes)>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했다. 우리는 주로 인터넷으로 뉴욕의 활동가들에게 집회 계획을 널리 알렸다.

국제연대에 참여해서 직접 활동한 동지들은 어떤 동지들인가

뉴욕에서 1월24일은 기온이 영하 10도에 이르는 몹시 추운 날이었다. 바람도 불었다. 집회는 오후 5시 반부터 7시까지 진행되었고, 우리는 브로드웨이 32번가에 있는 “코리안타운”에서 유인물을 돌렸다. 하지만 코리안타운에 있는 한국인들은 대개 부르주아들이라 우리가 한국어로 피켓과 유인물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집회의 참여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트로츠키주의 조직이나 좌익공산주의 조직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최대 20여명 정도가 참여했다. 하지만 분명 추위 때문에 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에도 사회주의자에 대한 법적 탄압이 있나

유럽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은 9/11 사태 이후 국토보안법(Homeland Security Law)이 의회를 통과했다. “테러리즘”에 대한 규정이 계속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미국 제 3세계주의자들(맑스-레닌주의 그룹)>의 회원 몇 명이 작년 9월 이란 대통령 아흐마디네자드가 UN 연설을 하러 뉴욕에 왔을 때 그를 만났다. 그 직후 그들 중 일부가 “테러리즘 지원” 혐의로 체포되었다. 상황은 점점 더 위험해 지고 있다.


사노련 재판은 2심이 진행될 예정이다. 모금활동 등을 계획한다고 들었는데, 앞으로 활동계획은 어떠한가

<혁명정당을 향한 동맹>과 <반란자 통신>을 대표해서 내가 주로 인터넷을 통해 모금을 했다. 세계 곳곳에서 기부금이 들어왔다. 지금은 딱히 다른 계획이 없다.

남한에서 그동안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적인 연대가 거의 없었다. 이번에 나타난 <사노련> 탄압에 대한 연대는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연대의 실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남한 사회주의자들과 해외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연대의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불행하게도 지금 중동의 위기와 일본 핵발전소의 원자로 용해가 미국과 한국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덮고 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연대는 대개 국제적인 관심을 끄는 구체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 가능해지리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사안에 쏠리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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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기획][인터뷰]사노련 공동대책위원회 고민택 집행위원장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1/04/08 19:52
  • 수정일
    2011/04/08 19:52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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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과 시혜를 넘어 투쟁으로 국가보안법에 맞서야 한다

 

<사노련> 사건이 결국 유죄판결을 받았다. <공대위> 집행위원장으로서 이번 판결의 의미와 향후 전망을 어떻게 보는가

1심 법원이 ‘<사노련> 사건’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이 갖는 가장 첫 번째 의미는 국가보안법이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실질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것이다. 물론 국가보안법이 무력화됐거나 사문화되었다고까지 믿는 사람은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위력을 발휘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 때문에 전사회적 차원에서 국가보안법 자체를 폐지하기 위한 투쟁이나 활동이 대단히 미약해졌으며 해당 당사자 중심으로 대응이 이루어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일종의 착각이나 착시 현상이 존재한다. 국가보안법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위력이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국가보안법 그 자체가 변화했거나 약화되어서가 아니라 국가보안법과 다투는 투쟁이나 활동이 그 만큼 약화, 축소된 때문이다. 즉 한국 지배계급 전체(일반)을 긴장시키는 정치활동이 현격히 후퇴한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한국 사회 운동 대부분이 체제 내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국가보안법이 객관적으로 말도 안 되는 적용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냉소나 조소를 보내는 이면에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분노가 식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고 작은 국가보안법 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현실임에도 그에 대해 정색하고 달려들기보다는 제3자의 입장에서 관조하거나 희화화시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분노를 느끼는 활동에서 멀어져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요지는 이런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과거와 같은 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국가보안법은 당연히 폐지되어야 하며 그 전이라도 효력을 약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정당성이나 실질적인 동력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형성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투쟁, 사회주의 운동을 전면화, 대중화하는 투쟁을 통한 것이 그것이다. 이제까지처럼 자유민주주의 아래에서도 학문, 출판, 표현,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어디까지 관용과 시혜를 배풀어야 하느냐, 또는 배풀 수 있느냐를 놓고 다투는 장이 아니라 명확히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를 놓고 피 튀기는 계급투쟁을 벌여내는 속에서 국가보안법과 다시 정면으로 맞서는 상황을 이끌어 냄으로써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정당성을 이끌어내야 한다.
이번 1심 판결이 갖는 두 번째 의미는 바로 위에서 말한 바를 현실화하기 위한 하나의 출발점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재판 전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자 8명은 한 치의 물러섬이나 흔들림 없이 법정 투쟁을 벌여냈다. 1심 재판부조차, 비록 엉터리 논리에 기초해 유죄판결을 내리긴 했지만, 8명이 뿜어내는 기세와 현실인식을 전면 부정하는 것을 망설인 흔적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자본주의 철폐’, ‘생산수단 몰수 국유화’,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 ‘정치총파업’, ‘노동자정부 수립’ 등을 주장하는 것은, 비록 ‘단지 주장하는’이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무죄’라고 말한 것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1심 재판부가 의식했든 그렇지 못했든, 어쩌면 부지불식간에 신자유주의가 끼친 폐해와 그것의 파산, 그리고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세계 체제, 전 세계적으로 터져 나오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민중 투쟁을 완전히 외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2심, 3심 재판을 앞두고 있다. 법정투쟁은 더 치열하게 가져가야 한다. 한편으로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보안법에 위축되지 않고 보다 더 공공연하게 사회주의 운동을 전면화, 대중화는 투쟁과 활동을 더욱 빠르게, 더욱 광범위하게 펼쳐나가야 한다. ‘사회주의자’ 또는 ‘사회주의 활동’도 자유민주주의가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넘어, 그런 주장에 머무른 채 그 이상을 보지 않는 세력조차 사회주의로 이끌어 낼 수 있을 만큼의 투쟁과 활동을 벌여나가야 한다. 국가보안법의 부당성을 말하고 폐지를 주장하는 모든 세력과 연대를 하면서도 이번 재판이 갖는 독자의 성격과 의미를 충분히 살려나가야 한다. 이번 재판의 전망도 그것을 얼마나 현실화시켜 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재판 과정에서 <사노련>이 북한 체제를 옹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 변호인 측의 주요 논리 중 하나로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정치사상적으로 북한을 지지하는 세력에 대한 이적행위 적용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비판이 있다. 이런 논리가 자칫 정치·사상·표현의 자유를 일반적으로 침해하는 악법으로서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보다는 재판과정에서 국가보안법 자체의 부당성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방식이 옳다고 여겨진다.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노련> 사건 당사자들이 ‘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 나아가 북을 노동자계급에 의해 타도되어야 하는 사회라고 말’한 것이 위 질문과 같은 결과를 의도한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의 논리적, 현실적 귀결도 위에서 말한 것처럼 곧바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두 논리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 관계는 성립되지 않거니와 실제로 법정에서 그런 입장이나 태도를 조금이라도 내비친 적도 없다. 단지 갖고 있는 정치적 입장과 판단 그리고 태도를 분명하게 밝혔을 뿐이며 그 자체가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그들의 그러한 정치적 입장에 대한 비판이나 반대는 국가보안법과 무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한편 현실적으로 국가보안법 자체가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사노련> 사건 당사자나 변호인 측이 주장하는 논리 그 자체도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그를 통해 국가보안법의 허구성을 폭로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오히려 이 기회를 빌려 한 가지 말하자면 ‘북’에 대한 정치적 태도나 판단과 무관하게 국가보안법이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것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정면으로, 공동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 위 질문과 같이 소극적으로 대처할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국가보안법의 뿌리 자체를 흔드는 문제제기와 투쟁을 벌여나가야 한다. ‘북’에 대한 비판이나 반대를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 갖는 것과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문제 삼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로 정치적 입장과 충돌하지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노련> 사건 당사자를 포함해 <사노련 공대위>는 처음부터 이른바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에 대해서도 수미일관하게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왔다.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와 함께 활동했던 것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나아가 사노련 사건 당사자나 변호인 측의 논리나 주장도 바로 국가보안법 그 자체의 부당성을 전제한 위에서 더 구체적 차원에서 자기 논리와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 사이에 아무런 모순도 없다. ‘북’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밝힐 수 있는 것 자체도 정치사상, 표현의 자유의 영역이다. 그것을 숨기거나 우회하는 것이 연대를 더 광범위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대위> 회의가 초기 이후에는 거의 소집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재판과정 등에 대한 공동논의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사회주의 운동단체들로 구성된 <공대위>가 잘 되지 않으면서 재판에 대한 대응도 사회적으로나 현장에서 이슈를 만들기 보다는 명망가 위주의 대응으로 축소된 지점이 없지 않다. 재판 후에 있었던 지난 <공대위> 회의에서도 이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제기가 있었다

지적한 문제는 앞으로 의식적으로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다. ‘<사노련> 사건’에 대한 국가보안법 재판투쟁을 현장에서, 노동계급 속에서 쟁점화하고 그 속에서 동의 지반을 확보하고 넓혀 나가야 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같다. 특히 앞에서 말한 바와 같아 ‘<사노련> 사건’이 갖는 정치적 성격에 비춰보더라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럼에도 현장을 조직하지 못한 것은 문제의식이 없거나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현장을 조직하기 위한 시도를 적극적으로 하지 못한 때문이다. 한편 이번 재판과정을 통해 국내외 인사들로부터 적지 않은 지지와 호응을 이끌어 낸 것은 그 자체로 소중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장을 조직하지 못한 것이 명망가 위주로 대응을 해서가 아니다. 명망가에 대한 조직화는 그것대로 더욱 확대시켜 나가야 한다.

앞으로 항소 계획이 잡혀져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공대위> 집행위원장으로서 <사노련 공대위> 활동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듣고 싶다. 또한 <사노위> 회원이기도 한데, 이번 사건에 대해 현장에서의 캠페인은 많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향후에라도 사회적인 여론 조성 뿐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현장에서도 지지 서명 등 적극적인 캠페인이 필요할 것 같다. 혹시 이런 부분에 대한 계획이 있거나,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이런 활동이 이루어진 예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1심 판결 이후 <사노련 공대위> 회의를 통해 일차적으로 항의, 규탄집회를 한 바 있으며, 동시에 두 가지 정도를 말한 바 있다. 하나는 8명이 법정에서 밝힌 최후진술문을 토대로 책자나 자료집을 만들어 배포할 계획이고 또 하나는 노동자들을 포함해 지지, 서명운동을 벌여나갈 생각이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1심 판결 직전에 전주에서는 질문한 바와 같은 활동이 일부 진행된 바가 있다. <사노위>에서도 노동자들의 지지 서명을 받기 위한 계획을 갖고 있다.
사실 한 가지 소개하자면 사건이 벌어진 초기에 예컨대 ‘사회주의자 선언’과 같은 캠페인을 펼친 것을 검토하고 그 실행을 위해 사전 타진을 한 바 있었다. 결과는 몇 가지 이유와 어려움 때문에 현실화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시도해 봄직한 것이라는 판단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


<사노신>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사노신>도 <사노련 공대위> 소속 단체로 그동안 열심히 활동해 온 것에 대해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전한다. 아마 <사노신> 독자들도 음으로 양으로 ‘<사노련> 사건’에 대해 성원과 지지를 보냈을 것이라 생각하며 역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사노신> 독자들 중에 사노련 공대위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언제든지, 어떤 형태로든지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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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기획]사노련 재판과정에서 아쉬운 지점들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1/04/08 19:48
  • 수정일
    2011/04/08 19:55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사노련> 사건이 발생하자 언론, 학계 등에서 흔히 나타난 논리 중 하나는 <사노련>이 북한을 지지하지 않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국보법 적용이 부당하는 것이었다.

재판과정에서도 국보법 자체의 부당성보다는 이 문제가 과도하게 쟁점으로 부각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미 <노동자정치신문>에서 제기했듯이 “사노련이 북한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적행위 규정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바꿔 말하면 정치사상적으로 북한을 지지하는 세력들에 대해서 이적행위 적용은 정당하다고 주장이 될 수 있다.” 자칫 북한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국보법 탄압을 방조하는 논리가 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북한 체제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모든 세력에게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정치사상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입장에 서야 하며, 그러한 입장 위에서 국보법 철폐를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국보법이라는 실정법 하에서의 유/무죄를 쟁점으로 하다보면 국보법의 존재를 이미 전제로 한 법적 논리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법정투쟁은 국보법 자체에 문제제기하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법리를 따져야 하는 변호인들의 입장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면 법정에 선 활동가들의 모두·최후변론 등을 통한 법정선동과, 공동대책위와 같은 조직의 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이런 입장을 견지할 필요가 있었다.

재판과정에서 <사노련 탄압분쇄와 정치사상의 자유 억압하는 국가보안법 철폐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가 활발히 운영되지 않았다는 점도 평가가 필요하다. <공대위>는 초기 사건이 벌어졌을 때와 <사노신> 사건 등이 벌어졌을 때를 제외하면 재판과정 내내 거의 소집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재판에 대한 운동진영의 대응이 명망가들의 법정 증언 중심으로 흘러간 면이 없지 않다.

이런 활동 역시 필요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법정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사회주의 정치활동이 정당하다는 것을 현장의 노동자들과 일반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알려내는 작업을 먼저 진행하고, 이러한 대중적 캠페인을 바탕으로 국가보안법에 의한 <사노련> 탄압이 부당함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공대위>가 단순히 정보 공유와 집회 참여를 점검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에 맞서는 투쟁의 주체가 되어 각 단체가 활동하고 있는 공간과 현장에서 국가보안법 철폐, 사회주의 정치활동의 승인에 대한 캠페인을 계획하고 점검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사노련 공대위>와 사건 당사자들은 1심에서의 유죄판결 이후 이에 대해 항소하는 것으로 이미 향후 대응방향이 결정했다. 따라서 <사노련> 사건에 대한 법정투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 속에서 앞서 지적했던 몇 가지 오류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와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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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기획]사노련 유죄판결!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1/04/08 19:46
  • 수정일
    2011/04/08 19:53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사회주의는 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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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24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7부는 구(舊)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하 ‘사노련’)> 활동가들에 대해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오세철, 양준석, 양효식, 최영익 등 4명의 활동가에게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다른 4명의 활동가들에게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또한 집시법 위반을 덧붙여 8명의 활동가 모두에게 벌금 50만원 형을 부과했다.
촛불투쟁이 계속되고 있던 지난 2008년 8월에 벌어진 <사노련> 사건은 초기에 구속영장이 연거푸 기각되는 등 사건성립조차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해프닝으로 끝난 것 같던 <사노련> 사건은 남대문경찰서와 검찰의 끈질긴 노력 끝에 2010년 결국 기소가 이루어져 이번 판결에 이르렀다.


사회주의 선전의 불법화

대부분의 국보법 사건에서 처벌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는 7조1항과 3항에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자는 7년이하의 징역에 처”하며, “제1항의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구성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는 1년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남한 사법부는 현실적으로 북한을 반국가단체(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로 해석하고 이를 이롭게 하는 단체를 이적단체로 규정하여 심판해 왔다.
하지만 <사노련>의 경우 북한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이 명확했기 때문에 검찰은 국보법 7조3항을 확대해석하여 국가변란 선전· 선동단체라는 혐의로 사노련을 기소해야했다. 이 때문에 별도의 반국가단체를 전제하지 않는 <사노련>과 같은 단체에 국보법이 적용될 수 있는가가 재판의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반국가단체를 전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사유재산 제도와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경제질서 등 자유민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면서 무장봉기 등 폭력적 수단을 통한 현 정부의 전복 및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주장하는 것을 국가변란을 선전· 선동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사노련>을 국가변란 선전·선동 단체로 규정, 유죄를 선고했다. 따라서 이번 사건에서 사노련의 구체적인 활동이 아니라 사노련이 발간했던 책과 기관지의 문구들이 주요한 유죄 근거로 제시되었다.


문필활동의 합법적 테두리 드러나

이번 판결에서 판사는 <사노련>이 발행했던 방대한 분량의 인쇄물의 구절구절을 짚어가며 기관지 몇 호의 어떤 기사는 유죄, 어떤 기사는 무죄라고 읊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든가 ‘자본주의를 철폐하자’는 구절은 ‘무죄’였다. 그러나 ‘폭력혁명’이나 ‘무장봉기’ 등의 구절에 대해서는 모두 ‘유죄’라고 해석했다.
유죄로 판단된 문구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방법에 있어 ‘무력’을 주장할 경우에 그 구체적인 행동이 없다고 하더라도 국가변란을 선동한다는 의미로 규정한 것이다. 이는 현재 지배계급이 규정하는 정치선전내용의 합법적 테두리가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
판결의 주요 근거가 된 국보법 7조1항은 구체적인 지시 없이 편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 지배계급의 입맛에 맞게 저항세력의 활동을 제약할 수 있는 대표적인 조항으로 평가되어 왔다. 이 때문에 국보법 존치론자들조자 이 조항에 대해서는 대개 수정 또는 폐지를 주장해왔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더욱 확대해석하여 단순한 문필, 선전행위까지 위법으로 규정했을 뿐 아니라, “반드시 ‘무장봉기 내지 폭력혁명 등을 통한 정부의 전복’ 등의 표현이 직접 사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주장 내용의 전체 취지가 '무장봉기 내지 폭력혁명 등을 통한 정부의 전복' 등에 해당하면 충분한 것으로 되며, 앞서 본 ‘선전'의 개념에 따르면 그와 같은 내용에 대한 토론회나 설명회를 개최하는 것 역시 ‘국가변란 선전·선동’에 해당”한다고 명시하여 더욱 자의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실질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이나 행동이 있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정치적 주장과 사상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좌파 운동 탄압의 법적 근거를 제시

이번 판결은 국보법이 존재하는 한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과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사회주의 단체들이 법적 제재를 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실제로 1990년대에는 소위 친북단체뿐 아니라 모든 반정부·반체제 세력이 국보법의 탄압을 받았다.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 타도와 사회주의를 공공연하게 주장하기 하기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사법부는 국보법 적용을 엄격히 하여 친북 운동단체에 한정해왔다.
따라서 2001년 <진보의련> 사건을 마지막으로 소위 ‘좌파’ 단체에 대한 국보법 적용 사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덕분에 2003년 경부터 많은 단체들이 ‘사회주의’를 내걸고 공개적으로 선전물을 발행하고 활동해왔다. 사실상 지난 10여년 동안 사회주의 사상의 선전선동과 정치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것이다.
이번 판결에서 법원은 사노련에 유죄를 선고하기 위해 무려 15년이나 지난 1997년 <전국학생연대> 사건을 판례로 들었다. 지난 몇 년 간 ‘좌파’ 조직에 대해서 사문화되었던 국보법을 다시 살려 공안기관이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새롭게 만든 것이다. 때문에 <사노련>뿐 아니라 현재 활동하고 있는 사회주의 정치단체 활동가와 개인의 블로그나 홈페이지까지 국보법의 적용대상이 될 수있게 되었다.
<사회주의노동자신문(이하 ‘사노신’)> 역시 2009년 사무실 압수수색으로 컴퓨터 하드디스크 및 자료, 발행물 일체를 빼앗겼고 2010년에는 활동가가 연행되기도 했다. <사노신> 사건은 현재 기소여부가 결정나지 않은 상태인데 이번 판결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작년 10월 여러 사회주의·노동 단체들의 기사를 취사선택해서 게시하는 블로그 <프롤레타리아네트워크뉴스>의 박회송 운영자가 인천 지방경찰청 공안부로부터 이메일과 블로그 자료에 대해 조사했다는 통고를 받았다고 폭로한 바 있다.
 

국가보안법에 의한 탄압은 강화되고 있다

<사노련> 유죄판결이 나고 갓 한 달이 지난 3월23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세미나와 포럼을 진행해온 <자본주의연구회> 회원 3명이 국보법 위반으로 긴급체포 되었다. 사회를 연구하는 동아리 활동까지 막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민주주의 후퇴와 국가보안법 부활이 맞물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선전과 활동이 실제로 제재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은 사회주의를 비롯한 전반적인 저항운동의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판결에 불복하는 항소가 명분이 아닌 운동사회의 공동대응으로 나아가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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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국제]리비아 전쟁이 NATO를 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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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3월24일
■ 피터 슈워츠 (Peter Schwartz)
■ 출처 : WSWS
■ 번역 기사의 내용은 본지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리비아 전쟁은 NATO(나토, 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격한 갈등을 촉발시켰다. 군사동맹을 구성하고 있는 28개국은 며칠간 이어진 협상 후에도 리비아 군사작전의 지휘체계에 대한 협의를 이끌어낼 수 없었다. 월요일에는 갈등이 고조되어 독일과 프랑스 대표단이 북대서양 이사회 회의에서 퇴장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결국 NATO가 간접적인 군사개입으로 해상에서 리비아에 대한 무기금수조치를 감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리비아전에 참가하고 있지 않은 독일은 NATO가 참전하면 지중해의 NATO 소함대에서 자국 군함을 철수시킨다는 입장이다.
프랑스와 터키는 서로 상반된 이유에서 NATO가 전쟁지휘권을 갖는데 가장 단호하게 반대했다. 프랑스는 이 전쟁의 주도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반면 터키는 프랑스 이해관계에 종속된 NATO에 반대하여 UN의 역할을 확대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프랑스는 전쟁 준비뿐 아니라 초기 군사 공격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프랑스와 정치적,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독재체제가 타도된 것은 북아프리카에서의 프랑스 영향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리비아에서의 사태는 반격을 위한 적절한 기회를 제공했다.
초기 단계에서 프랑스 정부는 벵가지의 반정부 세력과 접촉해서 군사개입을 위한 인도주의적인 구실을 만들려고 했다. 영국과 미국은 프랑스를 지원했다. 이 열강들은 리비아전을 통해 두 가지 주요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리비아 석유에 대한 접근을 확대시켜줄 꼭두각시 정권의 설립과 그 지역의 혁명적 운동을 억제하고 억압하기 위한 작전 기지의 설치가 바로 그것이다.
미국의 지원 덕분에 프랑스는 UN안전보장이사회(이하 ‘UN안보리’)에서 리비아 공격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미국 정부는 전쟁의 목표와 수단이 가능한 한 광범위하고 모호하도록 보장해주었으며 러시아와 중국이 거부권(veto, 비토)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국내의 정치적 반대 가능성에 직면해 있고 아랍 세계에 미국이 또 다른 아랍과 무슬림 사람들에 대한 전쟁을 이끌고 있다는 인상을 피하고 싶어서 오바마 대통령은 프랑스 동료인 니콜라스 사르코지가 세상의 이목을 끌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르코지로서는 외교 정책의 성과로 점수를 따서 프랑스에서의 그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지는 것을 희망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그의 지지율은 연이어 최저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는 미국이 이번 전쟁을 주도하고 있다. 프랑스 비행기가 처음으로 공격하는 것이 용인되기는 했으나 대다수의 미사일과 폭탄은 미국의 함선과 비행기에서 발사되는 것이다. 총체적인 작전 통제권은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미국 아프리카 군사령부에 있다.
오바마는 어느 상황에서도 미국군이 통제할 수 있는 NATO에 작전 지휘권을 이양하는 것을 더 선호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영국과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는 대서양 연안 국가들 간의 동맹은 아랍 국가들에서 평판이 안 좋다면서 NATO에 지휘권을 이양하는 것을 지금까지 반대했다. 사실 사르코지는 NATO가 지휘권을 가졌을 때 전쟁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통제권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
지휘 체계에 관한 격한 논쟁 뒤에는 명백한 경제적,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놓여있다. <더 글로브 앤드 메일(The Globe and mail, 캐나다 일간지)>은 제국주의적 개입의 핵심에는 리비아의 자원약탈이 있다는 것을 솔직히 밝혔다. 수요일에 올라온 이 신문의 블로그 포스팅에서는 “리비아 전쟁이 막 시작된 것 같지만 리비아를 둘러싼 경제 전쟁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고 서술했다.
<르 몽드(Le Monde)>는 기사에서 “서구의 석유 기업, 특히 유럽 석유 기업들은 리비아 반군에 의해 참여하게 된 이 게임에서 잃을 것이 많다. 어쩌면 얻을 것은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서술했다.
2009년에 프랑스는 자국 석유 수요의 9%, 이탈리아는 25%를 리비아로부터 수입했다. 작년에는 리비아 원유 수출량의 절반 이상이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로 수출되었다.
이탈리아 석유 기업인 Eni, 프랑스의 Total, 스페인의 Repsol, 오스트리아의 OMV, 독일 BASF의 자회사인 Wintershall은 지중해 연안국에서 영업하고 있다. 전쟁 전에 이탈리아의 기업 Eni그룹은 리비아에서 하루에 25만 배럴을 뽑아냈다. 이는 Total사의 5배에 달하는 수치다.
NATO의 폭탄에 의해 세워질 새로운 과도정부는 석유 채굴권을 전쟁에 참여한 국가의 이해에 따라 재분배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카다피는 그가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리비아에서 운영되고 있는 석유 기업들을 국유화한 후 채굴권을 중국, 인도, 브라질에게 주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전쟁 참가국들은 만약 그들이 카다피를 축출하지 못한다면 잃을 것이 매우 많다.
특히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공격적인 태도에 격렬히 대응했다. 전쟁 이전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수상은 리비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그리고 카다피와의 관계를 끊는데 주저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에너지 공급은 리비아의 석유와 가스에 크게 기대고 있으며 리비아는 수십억을 이탈리아 기업들에 투자했다.
비록 이탈리아가 비행금지구역 설정에 자국 전투기와 작전 기지 제공을 통해 동참하고 있기는 하지만 NATO가 지휘권을 가져야 함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처음부터 독일은 군사행동에 대해 의구심을 표했다. 독일은 UN안보리 투표에서 기권했고 프랑스로부터 확실히 거리를 두었다.
독일 정부는 독일의 비용으로 프랑스가 그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에 대해 계속 반대해 왔다. 2008년에 사르코지가 제시한 지중해 연합계획은 독일정부로부터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2007년에 독일 정부는 프랑스가 촉구했던 EU의 차드에 대한 개입을 막았다. 독일부터의 압력이 증가하자 프랑스는 영국, 미국과 밀접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현상은 리비아를 둘러싼 대립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어느 시기보다도 악화되어 있다.
<르 피가로(Le Figaro)>지에서 한 프랑스 고위 외교관은 독일이 안보리에서의 투표에 기권한 직후 “예상할 수 없는 정치적 비용”을 치를 것이라며 독일을 위협했다. 독일 정부 대표는 끊임없이 리비아 전쟁이 예상할 수 없는 위험이 따르는 모험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독일의 메르켈 총리의 태도는 독일 내에서도 격렬한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독일 사민당과 녹색당 뿐 아니라 그녀가 속한 기민당의 대부분도 독일이 서구와의 전통적 유대관계를 대가로 러시아와 화해하는 것은 재앙적인 실수라고 믿고 있다.
모순되게도 메르켈은 전 총리인 사민당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 슈뢰더 역시 러시아와의 화해모드를 진전시켰으나 늘어나는 반발에 부딪혔다. 연정 파트너인 녹색당 역시 반발했으며 이는 2005년에 사민당-녹색당 연정이 예상보다 빨리 끝나는 데 일조했다.
메르켈 총리도 유사한 문제에 처해있다는 사실은 현재 상황이 강력한 객관적 흐름이 표출된 것임을 보여준다. 유럽의 심장부에 있는 독일의 위치, 거의 나지 않는 원자재와 에너지 자원, 수출 산업의 탐욕스러운 요구는 독일과 프랑스, 영국, 미국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국제경제, 금융위기, 국내 사회의 긴장증가와 북아프리카와 중동 전역에서의 대중 봉기가 기름을 끼얹고 있는 상황에서 EU와 NATO 내부에서 깊은 균열이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차이들은 부시 대통령의 임기와 이라크전 때부터 상당히 심화되었다. 독일과 프랑스가 러시아 정부와의 화해를 시도하던 그 때에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두려워했던 동유럽 국가들은 미국과 가까워졌다.
이제 독일과 동유럽은 점증하는 갈등을 맞이하고 있다. NATO의 예전 핵심 국가와 지중해 연안 국가인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에 더해 덴마크와 노르웨이 같은 전통적인 범대서양 동맹국들이 리비아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 뿐 아니라 폴란드, 체코 공화국,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참전을 거부했다.

번역│정지원(jiwon@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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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국제]아랍 민주화는 지지! 카다피는 연대? 북한에는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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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12일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지자, 남한 정치권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전했다.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없었다. 되레 보수진영은 고무된 표정을 지었다. 대중투쟁의 격화로 일국의 정권이 붕괴되었지만 보수진영에서 우려하는 목소리를 찾기란 어려웠다. “이집트 국민이 하나 된 힘으로 이뤄낸 과정은 감동”(한나라당), “민주화 시민혁명의 거센 물결은 중동을 거쳐 전 세계로 파급될 것”(자유선진당)이라는 논평이 앞 다퉈 나왔다.
하지만 아랍의 민주화 투쟁이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치자 미묘한 입장 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장 중국과 국경을 맞댄 북한이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수천, 수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아랍의 민주화를 말하면서 지척에 있는 북한의 민주화를 떠올리는 건 지극히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그건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을 대하는 해법은 제각각 달랐다. 지난 3월2일 민주당 손학규의 공개적인 입장 표명은 정치권의 동상이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정치권의 동상이몽

 

이날 손학규는 작심한 듯 보수진영을 직접 겨냥했다. “사유화한 공권력으로 시민을 유린하던 바로 그 세력이 중동의 민주화 물결을 빙자해 북한의 민주주의를 거론한다면 이는 낡은 이념의 질곡”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이어 “동포의 불행, 형제의 비극을 정치적 기회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아랍권에서 불고 있는 민주화 시위가 북한에 대해선 적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 대신 손학규는 북한을 향해 “점진적이고 평화로운 개혁, 개방의 길”을 요구하는 수준에서 입장을 정리했다.
보수진영은 즉각 반발했다. 자유선진당은 당일 논평에서 “손 대표의 말은 늑대(김정일 부자)와 토끼(북한 주민)를 한우리에 집어넣고, 토끼의 행복을 위해서 늑대의 신경을 거스르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일갈했다. 동아일보는 3월3일자 사설에서 “자유를 향한 갈망이 낡은 것인가”하는 반문과 함께 “입만 떼면 ‘진보’ 운운하면서 그 장엄한 역사의 진보가 북녘 땅에서 이뤄지기를 바라는데 대해 ‘낡은’이란 낙인을 찍는 손 대표가 바로 수구(守舊)”라며 손학규를 정면에서 비판했다.
아랍의 민주화 시위를 계기로 보수진영은 민주화의 전도사로 행세하고 있다. 종신집권이나 권력세습을 꾀한 아랍권의 독재정권을 향해 보수진영은 매의 눈을 하고 연일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자유와 인권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는 교과서적인 말은 보수진영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물론 이명박 정권 들어 제도적·형식적 민주주의조차 뒷걸음질 친 남한 사회의 현주소는 당연히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아랍권의 독재정권이 무너졌듯 북한의 김정일 정권도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한붕괴론에 대한 보수진영의 기대는 아랍 세계의 지각변동 이후 한껏 부풀어 올랐다. 이러한 주관적 기대는 대북전단의 살포로 구체화 됐다. 지난 2월 이후 자유북한운동연합의 주도로 20여개 보수단체와 한나라당 일부 의원은 파주 임진각에서 대북전단 보내기를 재개했다. 보수진영은 소셜 미디어가 발을 붙이지 못하는 거의 유일한 나라인 북한에 아랍권의 소식을 담은 전단지를 풍선에라도 매달아 보내야 한다며 정당화 하고 있다.
문제는 북한 정권에 맞선 민주주의 운동과 인권 운동이 보수진영의 전유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랍권처럼 북한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보수진영을 제외하곤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개혁 성향의 자유주의 진영은 북한 민주화 운동에 대해 한사코 반대하고 있다. 북한의 권력층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북한의 국가권력은 향후 한반도 질서를 놓고 때론 마찰을 빚을 순 있어도 결국은 협상 테이블에서 얼굴을 맞대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회피의 이중잣대

 

자유주의 진영은 북한 민주화에 앞서 현실론을 제기한다. 북한과 아랍권의 독재국가를 단순 비교할 순 없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주요하게 세 가지가 거론되고 있다. ▲북한 정권 자체가 주민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지만 외부의 제재와 고립정책 또한 통제정책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 ▲북한 주민들이 민주주의 사회를 경험하지 못한 채 아직도 주체사상과 같은 국가통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있다는 것 ▲북한의 뒤에는 중국이라는 커다란 변수가 있다는 것 등이다.
그 결과 현재 북한에서 체제 붕괴의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1990년대 소련의 몰락과 김일성의 사망 이후 보수진영이 지난 20년 동안 되풀이해온 북한붕괴론은 신념에 따른 ‘대북정책의 종교화’라고 일축한다. 물론 이 같은 주장은 보수진영의 ‘기대’와 달리 적어도 북한의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현실론만 붙잡고 있다면 “독재에 항거해 민주화를 이룬 튀니지와 이집트는 현실이 아니고 꿈인가”(자유선진당)라는 보수진영의 반박에 맞대응할 수 없게 된다.
자유주의 진영이 북한 민주화 운동에 대해 회피를 고집하는 것은 ‘합리적 대북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의 급변사태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2월 24일자 사설에서 “북한이 아랍처럼 경착륙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비용이 너무 크다. 정부는 북한의 연착륙을 모색해야 한다”며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자유주의 진영은 그래서 북한을 개혁과 개방으로 이끄는 것이 최선이라는 주장과 함께 북한의 지배 권력을 현실적인 협상의 주체로 용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의 경착륙 사태는 보수진영도 내심 우려하는 사안이다. 조선일보는 3월 10일자 칼럼에서 “중동 민주화 바람, 김정일의 죽음과 김정은 세습, 배급이 줄어든 인민군의 이탈, 장마당으로 우르르 몰려나온 주민들 혹은 궁정 쿠데타 등으로 급변사태를 기대한다면 잠깐 기분은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뒤에는 기나긴 현실의 악몽이 기다릴 게 틀림없다”고 지적했다. 자유주의 진영 못지않게 계산기를 두들기면서 북한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보수진영의 주장이 강경한 어조와는 달리 사실은 이데올로기적인 공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한다. 남한 내에서 우익적 색채를 강화하기 위한 일종의 제스처인 셈이다. 다시 말해 격동하는 아랍권을 배경으로 ‘북한 민주화’라는 말을 던져놓음으로써, 북한의 억압적 체제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반사이익을 얻어 보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실제로 이명박 정권은 최근 남북관계 경색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권력층과 자본투자, 정상회담 등을 놓고 이면접촉을 계속하고 있다.
결국 보수진영이든 자유주의 진영이든 지금의 북한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민주화는 바라지 않고 있다. 다만 자유주의 진영의 경우 노골적으로 북한 지배층과의 협상을 통한 점진적인 시장자본주의화를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민주화 세력’으로 포장한 자유주의 진영이 북한 민주주의 운동에 침묵한다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한계를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회피는 비단 자유주의 진영뿐 아니라 진보진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냉대와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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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아랍의 민주화 투쟁에 대해 곧장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민주화 투쟁이 리비아 사태로 확산되자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더니, 보수진영의 북한 민주화 공세에 대해선 지금껏 묵묵부답인 채로 남아 있다. 오히려 민주노동당은 오는 6월 당 대회에서 기존 강령에 있는 ‘북한 사회주의 경직성 극복’이라는 문구를 삭제하겠다고 공언해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당 내에서 아예 차단하려 하고 있다.
진보진영의 인사들 역시 북한 민주화라는 쟁점을 냉대하면서도 리비아 사태에 대해서는 한술 더 떠 음모론까지 제기했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은 “리비아의 무장반란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미국의 리비아 무력침공 계략에 말려드는 치명적 실책으로 된다”고 말했고, 전태일 노동대학 김승호 대표도 “누가 이렇게 무기를 밀수하고 무장봉기를 주도했는가?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세력이 리비아 구국민족전선”이라며 친미 망명자 집단을 배후로 지목했다.
일부 사회주의자들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전국노동자정치협회>는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을 여전히 “아랍 세계의 대표적인 반제정권”으로 지칭하며 “리비아의 반정부 시위가 리비아 동부 벵가지를 거점으로 발생한 것은 미 제국주의와 유럽 제국주의가 직간접으로 배후에서 개입한 것으로 의구심을 갖도록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음모론까지 내비치며 이제는 빈껍데기만 남은 ‘반제국주의’의 상징 카다피를 여전히 옹호한 것이다.
물론 리비아의 반정부 시위대가 투쟁 과정에서 과거 왕정의 상징인 삼색기를 내걸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뿐이 아니다. 반카다피 진영의 임시정부 총리 지브릴은 미국적 시각을 가진 개혁주의자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의회기구격인 과도국민위원회 위원장 잘릴은 서방의 군사적 개입을 줄곧 주장해왔다. 카다피 체제에서 소외된 상당수 부족들도 과도정부에 동참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이유로 반정부 시위대 전부를 친서방 계열의 꼭두각시라거나 반민주주의자, 왕정주의자로 매도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반카다피 진영에 서서 민주화 투쟁에 나선 리비아의 수많은 사람들이 카다피 없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으며, 그 꿈을 위해 카다피의 무자비한 학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무장하며 저항의 주체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초 서방세계의 수수방관 속에서 카다피는 전세를 역전시켜 3월17일 밤에는 시위대의 구심점인 벵가지를 향해 최후통첩까지 선언했다. 그러나 벵가지의 시민들은 백기투항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량학살이 우려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오히려 음모론은 카다피가 시위대 탄압을 정당화 하는 구실로 삼았으며, 3월 20일 서방의 군사개입 이후에는 스스로를 ‘반제투사’로 치장하는 데 활용하고 있다. 또한 이 같은 음모론은 중국, 쿠바, 베네수엘라 등의 나라들에 의해 지지받고 있다. 중국의 관영매체 <신화통신>은 미국의 배후조종설을 내놓으며 자국으로의 민주화 시위 확산을 경계했다. 쿠바의 카스트로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친미·반미의 구도를 내세워 카다피를 옹호하며 시위대를 불신의 눈길로 바라봤다. 지난 2003년 카다피의 핵 포기 선언으로 리비아가 이미 친미국가로 돌아섰음에도 말이다.
사실 이들이야말로 민주적 권리가 제한된 장기집권 체제를 유지하고 있어 아랍의 민주화 열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라들이다. 리비아 사태의 세계적 파장은 ‘현실 사회주의’ 또는 ‘21세기 사회주의’가 얼마나 기만적인지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하지만 남한의 진보진영과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서민의 위에 군림하는 이들 국가 체제를 아직도 ‘진보’로 덧씌운 채 침묵하거나 오히려 진실마저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과 투쟁

 

진보진영은 물론 일부 사회주의자들까지 리비아 사태와 북한의 민주화에 대해 대중의 상식과 어긋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다. 이들은 기업의 국유화와 계획경제의 도입을 사회주의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의 본질은 생산수단의 전사회적 소유로의 전환에서 이를 누가 실제로 통제하느냐에 달려 있다. 북한을 비롯해 중국, 쿠바, 베네수엘라 등의 나라에서 생산수단은 여전히 사회의 일부 세력들, 즉 국가관료와 군부세력이 결합된 지배 엘리트들이 움켜쥐고 있으며 임금노동제 또한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북한은 군사관료가 사회적 통제권을 쥐고 있는 국가자본주의 체제일 뿐이며, 이 말은 북한의 국가권력이 남한의 국가권력과 마찬가지로 타도의 대상임을 뜻한다. 따라서 북한 민주화 운동 역시 보수진영의 주장과는 다르게 제기되어야 한다. 현재 보수진영은 북한의 고립을 요구하며 북한의 노동자들과 주민들에게 과거 1980년대 말 폴란드 등 동구권과 같이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기거나 서구식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이와는 달리 북한 사회가 민주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북한의 노동자들과 주민들이 고립에서 벗어나 남한뿐 아니라 전 세계 노동자들과 교류하고 연대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을 찾아야 한다. 사실 국가권력에 통제되지 않는 전면적인 교류확산이야말로 북한 지배층이 가장 우려하는 것이다. 북한의 지배층이 아닌 이러한 교류와 연대에 기초해 북한 체제가 왜 가짜 사회주의인지, 대중 스스로 새로운 권력의 중심에 서는 투쟁의 방향은 무엇인지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아랍의 민주화는 중대 고비를 맞고 있다. 특히 리비아에선 서방의 군사개입마저 이루어졌다. 아랍의 민주화 투쟁이 새로운 국면, 즉 국제분쟁으로 비화한 것이다. 카다피가 여전히 결사항전을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서방의 군사개입을 놓고 전 세계적으로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를 필두로 서방세계가 공습에 나선 이유는 명확하다. 안정적인 석유수급과 지역적 패권을 분명히 하려는 조치인 것이다. 인도주의적 개입이란 공연한 명분일 뿐이다.
카다피도 서방의 의도를 잘 알고 있다. ‘반제투사’ 카다피는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되자마자 리비아 내 외국인 재산은 안전하게 보호될 것이라 선언하며, 리비아의 유전이 서방에 열려 있음을 누차 강조했다. 공습 직후엔 미국과 사태수습을 위한 비밀협상에 들어갔다. 카다피의 적극적인 행보에 서방세계도 싫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다. 서방세계는 당장이야 무력대응이라는 강경카드를 내밀고 있지만 공습이 장기화되면 언제든 카다피와 이면합의로 이권만 챙기고 발을 뺄 수 있다. 리비아 서부는 트리폴리 중심의 카다피 진영, 리비아 동부는 벵가지 중심의 반카다피 진영으로 ‘동서분할론’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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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의 총공세로 대량학살의 공포감에 휩싸였던 시위대는 절박한 심정에서 서방의 군사개입을 일단 반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한의 <다함께>와 <사회진보연대>와 같은 정치단체들은 시위대의 구체적 현실은 고려하지 않은 채, ‘반제국주의’라는 잣대로 ‘서방의 군사개입에 반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카다피의 무력탄압과 학살위협이 현존하는 한, 그러한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로 그칠 수밖에 없다. 기사회생한 시위대에게 ‘서방의 군사개입 반대’와 ‘리비아의 민주주의는 리비아의 손에’라는 구호만큼 무책임한 것은 없다.
카다피마저 악용하고 있는 ‘반제국주의’는 당면한 국면에서 대립의 축을 ‘카다피 vs 서방세계’로 한정시키고 있다. 때문에 이럴 때일수록 시위대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 처음부터 외국의 개입을 바라지 않았던 시위대는 반카다피 투쟁에서 서방의 개입이 제한적이어야 하며, 주도권까지 서방에 내줄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상군 투입에 반대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총도 쏠 줄 몰랐던 리비아의 시민들은 결국에는 자력으로 카다피와 싸우길 바라고 있으며, 서방의 군대가 시위대의 열망을 통제하려는 것에 경계하고 있다.
시위대의 이 같은 입장은 전적으로 지지받아야 한다. 지금 요구되는 것은 서방의 군사개입에 대한 찬성, 반대의 대립 구도가 아니라 민주화 투쟁을 지속하고 있는 시위대를 향한 전폭적인 지지다. 해방된 지역에서 민주적 통제를 경험한 리비아의 수많은 사람들이 반카다피 투쟁 속에서 스스로의 무장력과 조직력 그리고 투쟁의식을 더욱 굳건히 하는 것이 현 국면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중투쟁의 활력이 뒷받침될 때 리비아의 사람들은 카다피와의 제휴나 서방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정부수립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국제적인 연대가 절실한 상황에서 시위대에 대한 이러한 지지는 어떠한 경우에도 왜곡되거나 회피되어선 안 된다. 설령 북한을 이유로 든다 해도 마찬가지다. 보수진영의 허구적인 언사와는 달리 북한 사회에서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열망이 대중투쟁으로 움터올 때 북한 체제도 결코 예외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년 연말부터 시작된 아랍발(發) 민주화 투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오로지 이러한 투쟁으로부터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도 실현될 수 있다. 세계사적인 사건은 아직도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김성렬(tjdfuf@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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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국제]아랍 민주화 투쟁을 말하다

아랍의 ‘혁명 세대’, 새로운 희망을 쏘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아랍권에서 타오른 민주화의 불길이 몇 달째 지속되고 있다. 지난해 12월17일 튀니지에서 분신한 한 청년의 비극적인 죽음은 이후 아랍을 뒤흔든 민주화 투쟁의 불씨가 되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억눌려온 불만과 분노는 일거에 폭발했다. 수많은 사람들은 거리로 몰려 나와 ‘빵과 자유’를 외쳤다. 이들은 국가권력의 탄압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동안 아랍권의 권위주의 정권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였다. 1970년대 남유럽,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와 동아시아, 그리고 동유럽에 불어 닥친 민주화의 도미노를 모두 비켜갔던 까닭이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철권통치는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왕정국가들도 안심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아랍 지역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식의 통념은 여지없이 깨졌다. 아랍의 민주화 투쟁에 대해 남한에서는 보수와 진보 모두 반기는 이례적인 현상이 벌어졌다. 그러나 아랍발(發) 민주화 열풍이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치자, 중국은 물론 중국과 국경을 맞댄 북한을 두고 이들의 동상이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보진영은 아랍권에서 불고 있는 민주화 투쟁을 지지하다가도 북한을 상대로 해서는 되레 자제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아랍의 민주화 물결은 중대 고비를 맞고 있다. 리비아와 바레인에서는 민주화 시위가 격화됨에 따라, 외국의 군대마저 개입해 그 양상은 한층 더 복잡해지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난 연말부터 계속되고 있는 민주화 투쟁이 세계사적 사건으로 발돋움했다는 것이며, 어떠한 반동적 시도에도 민주화의 성과를 완전히 되돌리기 힘들만큼 아랍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투쟁의 경험을 각인해 놓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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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몰랐다. 자유와 해방을 향한 에너지가 들불처럼 타오를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튀니지에 이어 아랍의 대표적 친미국가인 이집트마저 정권이 무너지자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무바라크 구하기’에 나섰던 이스라엘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아랍 전역에서 철옹성 같이 군림하던 독재자들은 앞날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북아프리카의 맹주를 자처한 리비아의 카다피도 집권 42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권위에 굴복했던 역사는 뒤집히고 있다. 튀니지를 시작으로 촉발된 민주화 시위는 과거 서구 열강들이 재단해 놓은 국경선을 뛰어넘었다. 권력에 대한 도전은 공공연히 벌어졌다. 거리로 나온 수많은 사람들은 독재자들의 개혁조치에 흔들리지 않았다. 정권퇴진과 민주주의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갔다. 그 중심엔 이른바 ‘혁명 세대’가 있었다. 아랍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혁명 세대는 아랍 민주화 투쟁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혁명 세대’의 등장

 

 

모로코 57% 시리아 65%
알제리 58% 사우디 60%
튀니지 52% 이라크 68%
리비아 58% 이란 58%
이집트 61% 예멘 74%

 <아랍권 29세 이하 인구비율(2010년 유엔 인구통계)>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아랍 지역에서는 모종의 ‘사회 협약’이 존재했다. 1952년 이집트의 나세르가 아랍민족주의를 설파하며 집권한 이후, 아랍 세계에서는 국가가 노동자·서민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주는 대신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암묵적인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협약에 기초해 아랍 각국의 독재체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견고하게 권력을 유지해 왔다. 이집트 현대사에서 나세르, 사다트, 무바라크 등 단 세 명의 통치자만 있었다는 사실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90년대 들어 사회협약은 깨지기 시작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경제자유화를 추진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물론 경제성장률만 놓고 보자면 경제적 번영은 계속되었다. 튀니지는 지난 2000~2008년 연평균 4~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며 이집트도 지난 2005∼2008년 연평균 7%의 경제성장률을 구가했다. 리비아 또한 미국과의 관계개선 이후 경제제재 조치에서 벗어나며 오일머니를 두둑하게 챙겨오고 있었다.
그러나 화려한 경제성장 이면에는 심각한 불평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공공부문 일자리가 대폭 축소되었고, 생활필수품에 대한 보조금 혜택 및 가격통제가 폐지되었다. 아랍권의 실업률은 세계 최고 수준인 10%를 웃돌며, 청년실업률은 무려 30%를 넘나든다. 2008년에 이어 작년 하반기부터 다시 고개를 든 물가급등은 사회 양극화의 위기를 더욱 가중시켰다. 아랍 전역에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29세 이하 청년층의 반발은 이러한 사회 현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아랍권의 베이비붐 세대격인 이들 청년층이 이제껏 경험한 정치체제는 권위주의 정권뿐이었다. 과거 같았으면 기존 체제에 대한 불만은 이슬람주의 세력으로 수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층은 이미 자유의 공간에 익숙해져 있었다. 부모 세대보다 교육의 기회가 더 많았던 청년층은 디지털 문화에 대한 접근성 또한 높았다.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린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청년층은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그들만의 의사소통 공간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 결과 이번 투쟁 과정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은 주도적인 역할은커녕 시위에 쫓아다니기도 바빴다. 또한 이집트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수십만의 기독교인과 무슬림교도가 함께 투쟁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놀라움이었다. 아랍권은 종교적인 영향력이 강해 세속적 성격의 대중운동이 발생하기 힘들다는 세간의 평가를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종교를 뛰어넘어 청년층이 주도한 민주화 투쟁은 확실히 이전과는 달랐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대중투쟁이었다.

 

새로운 가능성

 

아랍의 민주화 투쟁은 권위주의 체제의 종식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난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시민혁명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바야흐로 21세기임에도 아랍의 독재체제에서는 시민적 권리는 고사하고 오로지 국가권력의 억압적 통제만이 난무했다. ‘현대’와 ‘전근대’의 공존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리비아에선 카다피에 의해 무려 42년간 철권통치가 행해졌고, 이집트의 경우 선거란 무바라크를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랍 전역에서 불고 있는 민주화의 봄은 과거 권력에 맞서는 싸움인 동시에 미래 투쟁을 보여주는 싸움이기도 했다. 특히 이집트에서 소셜 미디어의 위력은 대단했다. 디지털 매체로 무장한 청년층은 정권의 우민화 수단인 TV, 라디오, 신문 등을 무력화하며, 시위에서 소셜 미디어를 적극 활용했다. 트위터에서만 단번에 9만 명 이상이 시위 참가에 동의했고, 가상의 연대는 실물의 투쟁을 뒷받침했다. 고립감을 떨쳐낸 시위대는 국가권력의 탄압에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소셜 미디어의 활약상은 대중투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물론 트윗과 리트윗만으로 투쟁이 조직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트윗과 리트윗이 투쟁을 빠르게 퍼트렸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소셜 미디어와 대중투쟁의 결합은 그래서 과거에 볼 수 없었던 미래적인 현실이었다. 전 세계가 아랍권의 민주화 투쟁에 주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의 변방 아랍권 국가에서 치솟은 근대적인 시민혁명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현대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무기로 삼고 있었다.
단결과 연대로 고조된 투쟁의 활력은 과거 혁명에서 등장한 자발적인 대중투쟁기구를 다시 불러내기도 했다. 튀니지에서는 벤 알리의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민병대에 맞서 청년층을 중심으로 일부 지역에서 주민평의회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며 지금까지 접근이 금지됐던 장소들을 점거하면서 공권력을 대신해 스스로 치안유지 활동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청년들은 서로 토론하고 정보를 교환하며 결정을 내리는 민주주의를 새롭게 경험했다.
아랍 곳곳에서 전면에 나선 혁명 세대의 저항은 이처럼 광범위한 파급력과 활기찬 역동성을 발휘했다. 그것은 특정한 정치 지도자의 주도나 계획 없이 폭발한 까닭에 역설적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난 수십 년 동안 대중을 통제한 독재정권에 의해 분명 곧바로 진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항거는 같은 이유로 약점 또한 드러냈다. 독재자의 축출이 시민혁명의 승리로 여겨졌지만 시민혁명이 곧바로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굽이치는 저항의 물결

 

튀니지와 이집트에선 벤 알리와 무바라크가 권좌에서 물러났음에도 기존의 국가기구는 파괴되지 않았다. 과도정부는 과거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장악되었고, 군대·경찰·정보기관과 같은 권력기관은 해체되지 않았다. 그동안 국가에 종속된 튀니지의 노동총연맹(UGTT)과 이집트의 노동조합연맹(ETUF)은 과도정부를 지지하고 나섰다. 장차 기득권 세력으로 편입될 것이 뻔한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야권세력들은 현 질서를 유지한 채 선거를 통한 권력획득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다.
미국이 안심할 정도로 낡은 체제는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대중투쟁의 물결까지 잠잠해진 것은 아니었다. 지난 2월27일 튀니지의 간누치가 총리직을 사임한 데 이어 3월3일엔 이집트의 샤피크가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과도정부의 미적거리는 민주화 작업에 실망한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와 광장을 가득 메웠다. 통치자만 바뀌었을 뿐 국가기관의 통제와 감시, 높은 실업률, 경제적 빈곤 등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탓이다.
민주화 투쟁의 여파는 거리의 함성으로 그치지 않았다. 민주화 열기에 자극받은 공공, 민간부문의 노동자들도 저항에 동참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이며 임금인상 및 노동조건의 개선뿐 아니라 권위주의 정권의 청산을 함께 요구했다. 지난 1월30일 이집트에서는 국가와 결탁한 노동조합연맹(ETUF)에 맞서 독립노동조합연맹(EFTU)이 결성되어 민주노조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노동자 투쟁은 청년층이 주도한 저항의 물결에서 그것이 지닌 사회적 영향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벤 알리, 무바라크 정권이 시위가 격화된 지 한 달여 만에 무너졌다면, 아랍권의 다른 국가에서는 민주화 시위의 장기화를 맞고 있다. 바레인, 예멘, 시리아 등지에선 시위대에 대한 무력탄압이 자행되고 있어 아랍의 민주화 투쟁이 역류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낳고 있다. 특히 리비아에선 카다피의 대공세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자 서방세계의 군사개입까지 이뤄지고 있다. 민주화 투쟁이 내전 양상에서 국제전으로 한층 복잡한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관건은 반카다피 진영에서 스스로 무장한 사람들이 투쟁의 무기를 내려놓지 않은 채 앞으로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데 있다.
아랍의 혁명 세대는 세계사적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출구를 찾는 노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물론 기존의 권력이 새로운 권력으로 대체되지 못하고, 정치적 지향성의 문제도 아직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혁명 세대는 민주적 의사소통과 집단적 행동이라는 실천의 경험을 얻었다. 아랍의 민주화 투쟁은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진행되고 있지만 역시나 그 미래는 이들의 손에 달려 있다.

김성렬(tjdfuf@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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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 나왔따! 포커스 - 자본주의의 비극

 

 

 

자본주의의 비극

 

 

전대미문의 지진과 쓰나미가 이웃나라를 덮쳤다. 만화영화에나 나올 법한 황당무계할 정도의 무서운 자연재해 앞에 세계 3위의 경제대국 일본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물론 이런 자연재해가 자본주의 때문에 생긴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수만의 인명이 희생되고 수백만 명의 삶의 터전을 뿌리째 흔든 거대한 재난을 앞에 두고 기껏 이 재난이 자본주의 경제의 회생에, 남한 경제 회복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앞다투어 보도하는 부르주아 언론의 행태야말로 자본주의 정신이 낳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대규모의 복구 사업이 위기에 빠진 세계경제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자본가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지진의 피해는 원자력발전소를 타격하여 전 세계를 방사능 공포에 빠뜨리고 있다. 이런 공포 앞에 대중들은 원전의 잠재적인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동에 돌입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반(反)원전 시위에 25만 명이 참가했고, 엄청난 재난으로 경황이 없는 일본에서도 1,200여명이 모이는 반원전 시위가 열렸다.

그러나 한반도가 방사능 위기에 직접 노출되어 있는 지금도 이명박은 다른 나라에 원전을 팔러 다니고 있으며, 정부는 위험 가능성을 축소하기 급급할 뿐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정부는 원자력에 대한 필요 이상의 공포심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TV 애니메이션 <심슨가족> 일부 에피소드의 방영을 금지하는 참으로 명박스러운 조치를 내렸다.

한편 발전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핵 발전에 대해 불분명한 입장을 취해온 남한 좌파와 사회주의 진영은 원자력발전 반대로 빠르게 입장을 선회하고 있다. 그들의 과거 입장이 어쨌든 이런 변화는 환영할 만한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낡은 이데올로기는 리비아 사태에서 좌파와 사회주의 진영의 애매한 입장으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리비아에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비아 민중을 방어하기보다는 제국주의 국가의 군사개입에 반대하는 입장과 집회가 조직되고 있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살인마 카다피와 연대해야 한다는 무책임한 주장마저 서슴없이 튀어나오고 있다.

이들의 주장대로 제국주의 국가가 개입했을 때 리비아가 분할되는 것이 필연이라면, 카다피의 승리는 필연적으로 저항세력의 절멸로 이어질 것이다. 만약 이것이 양자택일의 문제라면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자신의 정치에 맞는 국제질서에 대한 원근법적 시야로 현실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고 있는 대중의 입장에 서는 것이 당연히 우리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모든 입장은 전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1세계 국가 사람들의 속편한 오만일 뿐이다.

이러한 사고는 스탈린주의가 (또한 그것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 유사 스탈린주의적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남겨놓은 국가주의적·발전주의적 사고의 산물에 불과하다. 제국주의에 맞서 스탈린주의 국가를 방어해야한다는 논리가 스탈린주의 국가들이 거의 사라진 지금도 유령처럼 소위 진보진영의 사고를 제약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대중의 투쟁보다 대중의 비판과 저항보다 국유경제의 방어와 뛰어난 전위들만이 알고 있는 모종의 국제적 전략이 우선한다는 박정희스럽고 명박스러운 진보, 그런 식의 사회주의와 우리는 과감히 단절해야 한다.

 

 

2011년 4월5일
사회주의노동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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