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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월호][현자인터뷰3]싸우는 우리들이 현대차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1/03/02 15:25
  • 수정일
    2011/03/02 15:44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싸우는 우리들이 현대차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_2공장 이도한·정구영 대의원

 

2월10일 파기환송심 확정판결 이후 조합원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정 :
우리가 승소할 것이라고 대부분의 조합원이 알고 있었다. 당연히 되야하고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되고 나니까 또 의외로 안도감을 가지는 조합원이 많았다. 기자회견을 (10일) 2~3시에 했는데 수시로 DMB 틀어서 뉴스가 뜨느냐 보는 조합원도 많았고 퇴근 후 각 언론, 방송 뉴스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하지만 우리 12일 상경투쟁에 대해서 작년 10월30일 상경투쟁 했던 인원보다는 많이 적다. (상경투쟁 참여인원이) 적은 상태에서 이 판결로 인해서 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는데 그렇게 많은 효과는 없다. 어차피 (안가는 사람은) 안 간다고 했고, 개인적인 사정도 있는 거니까.
지위확인 (집단)소송 1차 심리 건이 15일에 있다. 주간조는 가지만 야간조는 새벽에 출발해야 해서 어려울 수도 있다. 자기 심리 건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야한다는 조합원도 있고 굳이 변호사 다 선임해놨는데 올라갈 필요성이 있냐는 반응도 있다. 지회 차원에서 버스가 제공되는 것도 아니고 1인당 3만~3만 5천원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이 : 어제(10일) KBS 다큐멘터리 팀에서 인터뷰를 하고 갔다. 거기서 세 가지 질문을 했다. 첫 번째 질문, 고법판결이 났는데 조합원들 사이에서 어떤 얘기가 나오느냐. 가만히 사측의 인터뷰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고법 판결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고법 판결도 맞지만 법을 지키라는 거다. 근로기준법을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자기네들이 앉아가지고 뚝딱뚝딱 만든 법인데 자기네들이 안 지키고 있으니. 최병승 동지 한 사람의 판결문을 가지고 왈가왈부 할 게 아니라 근로기준법 6조 몇 항에 나와 있는 ‘2년 이상’(고용의제)이라는 그 조항을 지키라는 거다.
두 번째 질문이 회사가 (정규직) 시켜줄 것 같냐. 그래서 나는 얘기했다. 회사가 시켜줄 것 같지 않다, 또다시 상고를 할 것이다. 그런데 명분 없는 시간 끌기다. 한 사람만의 문제로 밀고나가면서 우리를 해고시키고 할 것인데. 850만 비정규직도 있을 거고 제조업 사내하청에 근무하는 비정규직 다수가 있고, 비조합원들도 있는데 이런 식으로 탄압을 해 버리면 다음부터는 어느 누가 (투쟁) 하겠나.
세 번째 (회사가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또다시 파업을 할 것이냐. 당연히 현장에서 싸움을 만들어가야 되지 않느냐. 지금 이상수 지회장도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데 그것만 바라보고 ‘저 사람이 해결해주겠지’ 그거는 그냥 그 사람보고 죽으라는 얘기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딱 두 가지다. 첫 번째가 대국민 선전전을 통해서 전 국민한테 알려서 현대자동차를 비판하게 만드는 것이고 두 번째가 바로 현장 안에서의 싸움이다. 그 싸움만큼은 우리가 계속 만들어가야 된다고 얘기를 했다.

 

이전에 비해 조합원들이 위축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정 :
첫째로 비정규직 임금이 열악하니까. 작년 연말에 나오는 성과급이 (파업 때문에) 차질을 빚었고, 그만큼 일도 못했고. 1인당 많게는 200만원 적게는 150만원 씩 손해를 보니까. ‘나 때문에 가족들 고생하는 거 싫다’, 이런 식으로 활동 안 하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는 징계가 있다니까. 현장투쟁 중에도 많이 맞고 많이 잡혀가고 그랬다. 나 같은 경우에도 11월15일 시트에 있다가 생전 처음 유치장도 들어갔다가 하루 살고 나왔는데. 갔다 온 사람들 중에 죽을 각오로 더 해보자라는 각오가 생긴 사람이 있는 반면에 상당히 겁을 많이 먹은 조합원들도 있고. 
 

이 : 첫째 생계비, 1번이다. 두 번째 각종 정직, 해고에 대한 불안감. 세 번째 불확실한 미래, 내가 투쟁을 계속한다 하더라도 이 회사가 과연 불복을 할 것인가. 글이나 선동을 하는 것은 조합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나조차도 확신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됩니다!’ 이런 게 아니라 ‘우리 싸움이 이기든 지든 우리 동지들 함께 갑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근데 우리가 사측하고만 싸우면 되는데 사측의 뒤에는 지부가 있고 정권이 있을 거고 옆에는 언론이 있을 거다. 인터넷 다음을 보니까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시켜주면 노동시장이 고착화 되어서 유연화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아주 불안할 것이라는데. 그 말대로 하자면 비정규직을 더 늘리고 한 1~2년 쓰다가 버리고 또다시 1~2년 짜리를 받는다, 그런 논리다. 그러면 자기들 말대로 고용이 늘어나는 건 사실이다. 그 다음에 또 누군가 오고. 그러면 세상 천지에 이 회사 1~2년, 저 회사 1~2년 우리보고 이렇게 다니라는 건지.
정말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압박으로 다가와서 조합원들이 흔들리지 않나.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스스로가 결의를 하기 위해서는 대의원들이 꾸준하게 다니면서 얘기를 해야 되는데 사측의 카더라 통신이나 유언비어 같은 것에 흔들리는 조합원도 많다.
조합원 중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비정규직 중에서 조합원과 비조합원이 있고. 또 조합원 중에서는 종이조합원과 진성조합원이 있고 또 비조합원 중에서는 가입을 할까말까 망설이는 사람이 있고 아예 상관이 없는, 이렇게 많이 나눠져 있으니 싸움이 되겠나.

 

대의원으로서 현장조직하면서 어떤 점이 어렵나
정 :
정규직 대의원들처럼 자기근무 안하면서 활동하면 좋은데 우리 (비정규직) 대의원들은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이런 활동을 하는 중이니까 솔직히 몇 배로 힘들다.
조합원들이 열성적으로 잘 따라주면 수월하겠지만 안하겠다는 사람 설득하러 다니랴, (인원) 파악하러 다니랴 상당히 힘이 들고 받친다. 월수금 출투도 하고 일찍 나와서 식사시간 항상 피케팅 필수로 다 하고, 또 집으로 돌아가면서 조합원들 만나고.
힘든 이야기 하려면 나오지도 않았어야 한다. 어차피 하려고 나왔는데. 예전에는 나도 즐기는 마음으로 했고 지금도 그 마음 변함은 없는데. 조합원들도 위축이 되고 징계위 내려온다니까 나도 해고까지 각오하고 나온 사람이지만 그런 이야기가 들리니까 마음도 아프고.
 

이 : 대의원이 중요하기 때문에 활동하고 있는데. 조합원들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도 하고 있고. 그런데 흔히들 하는 말처럼 ‘니 혼자 노력한다고 세상이 바뀌냐’. 참 그 말이 맞다. 왜냐면 수백 명씩 모여 있는 조직에서 한두 명이 잘한다고 해가지고 조직 자체가 잘 꾸려지진 않는다. 전부 다 다 개인적인 생각들이 있으니까.
예를 들어서 상경투쟁이 있으니 돌아다녀보면 ‘와이프가 임신했다’, ‘내가 감기몸살이 걸렸다’, ‘나는 서울은 못 가고 현장에서 열심히 하겠다’. 누구는 내 생각을 바꾸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 붙잡고 4박5일을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걸 또 논쟁하지 않고 그냥 가버리면 안 따라온다.

 

어제(2월10일) 사측에서 지회 사무실 침탈 있었다는데 현장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관리자들이 현장을 활보하고 있다는데
정 :
사측탄압에 대해서 분노뿐이다. 말 그대로 욕까지 하면서. 안타깝다. 지회(사무실)이 가까이 있지 않아서 소식지로만 알게 되었다. 도장부에 조합원들을 잠시 보려고 쉬는 시간에 잠시 갔었다. 나하고 이진한 사업부 대표하고 올라갔었는데 10분간 이야기를 했다. 지금 상태나 조합원들 힘내라고 모아놓고 얘기하는 중에 사측 관리자 3~4명이 보였다. 이야기 끝나고 내려가니까 7~8명이 둘러싸더라. ‘여기 왜 올라왔느냐’고. 그래서 우리는 ‘쉬는 시간에 내가 우리 조합원들 보러 왔는데 그것도 안 되느냐, 우리는 가겠다’ 그랬더니 졸졸 따라오더라. 각 중요부분, 점거 우려가 있는 공정에는 관리자들이 다 배치되어 항시 보초를 서고 있다.
 

이 : 현장위원들도 열심히 하고 있고, 예전 같지 않게. 근데 열심히 한다는 게 사측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열심이다. 사측은 오로지 공장이 잘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우리가 피켓을 들고 있음으로 해서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일단 공장이 잘 돌아가니까 피해를 주지 않는 노조활동을 열심하고 있다고 보시면 된다. 유인물 돌린다고 해서 아침 출투, 중식선전전을 한다 해가지고 공장이 서는 것도 아니고. 비조합원, 정규직 조합원, 우리 조합원들에게 계속해서 알려나가고 그러한 부분은 좋지만 사측에게 아무런 피해가 없다. 그걸 통해가지고 대대적인 가입이 이뤄진다고 하면 또 다른 문제가 되겠지만. 스스로가 가입할 수 있는 그런 역량이 또 필요한 거고.
 

정 : 지금 사태를 보면 비조합원들이 가입을 하는 것보다는 더 우려되는 게 지금 가입해있는 조합원들이 가입 떨어져나가는 상태니까 그게 더 우려스러운 거다. 
사측도 말은 분명히 점거농성 풀고 내려왔을 때 교섭장에서 고법판결 보고 어떻게 답을 주던지 하겠다고 해놓고 지금에 와서 한 사람 만에 국한된 판결이지 여러분들하고 상관없다 이런 식으로 한 입으로 두 말하고.
그리고 우리 한참 투쟁 중일 때 고등학생 알바들이 와서 차를 만들었다. 시민들도 알아야 될 게 그 차 불량률이 엄청 많았다. 지금도 많이 나갔을 거다. 근데 지금 또 알바를 모집해놨다고 한다. 분명히 우리들 대량해고나 징계 먹고 이러면. 지금 인원 다 맞춰놨다고 한다, 사측에서. 내가 들은 이야기로는.

 

사측 징계에 대한 예상은 어떻게 하나
정 :
상경투쟁 이후에 교섭결렬 선포하면 바로 징계위가 발동이 될 거다. 그렇게 되면 현장위원, 대의원, 각 조장들까지 징계가 떨어질 것 같다. 대의원이나 좀 많이 활동한 현장위원까지는 당연히 해고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고. 일반 조합원 징계도 (정직) 3월, 2개월, 1개월 이런 식으로 수위를 따질 것 같다. 거기에 대해 우리 지도부의 시급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해고가 된 상태에서 밖에서 활동하는 것도 상당히 어렵다.
사측에서 다음 주부터 교섭결렬 선포라든지 연장투쟁이 발생할 즉시 정리를 하겠다 이런 식으로 돼있는 상태다. 그래서 이번 상경투쟁 갔다 와서 다음 주부터는 많은 파국이랄까 시끄러운 사태가 많이 벌어지지 싶다.
이 : (2005년 불파투쟁) 당시에는 파업권을 한 번은 얻었다. 이번 같은 경우에는 파업권이 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들어갔으니까 아무래도 후폭풍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차이점이 있지만 조합원들이 정규직에 대한 열망이 7월22일 이후로 높아졌기 때문에 그것을 힘의 원천으로 해서 버티고 올 수 있었는데 사측의 탄압이 정말 하늘을 찌를 듯하다. 오죽하면 황인화 동지가 그런 결심을 했고, 류기혁 열사도 있었고. 내가 오늘 곰곰이 일을 하면서 생각해보니까 정말 사측이 사람 몇 명을 죽이지 않나, 그런 생각까지 했다. 아마 다음 주부터는 대놓고 노골적으로, 현장 안이니까 그런 탄압을 100% 할 것 같다.

 

정규직노조인 현대차지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이 :
솔직하게 얘기해서 이경훈 지부장이 잘못한 게 거의 없다. 왜? 이경훈 지부장님은 처음부터 중도실리를 표방하고 나오셨고 그리고 말은 안했지만 조합원들 사이에서 어용이다, 어용이다라는 말은 수차례 들었고. 그 분은 TV에도 나왔지만 자기는 노조활동가지 노동운동가가 아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했다고 생각한다.
단지 기분 나쁜 건, 슬픈 건 자기가 우리보다 노동운동의 선배라면 그런 모습은 안 보였으면 싶었는데 자기는 마치 진정한 중도실리의 표상이라고 그렇게 나온 거다. 때문에 중도실리에 맞는 합의문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회사한테도 욕 안 들어먹고 여기에도 욕 안 들어먹는 그런 애매모호한 이상한 합의서. 아 여기서는 욕 들어먹는다.
정 : 그걸 알면서 뽑아줬던 정규직 조합원들이 문제가 있다. 정규직들이 생각하는 게 얘네(비정규직)들이 있음으로 내가 잘려나갈 때 얘들이 먼저 잘려나가야 된다, 우리 보호막이라는 인식을 가진 정규직들이 대다수다. 거의 열 명 중에 아홉 명 정도는 그런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당연히 우리 쪽을 못 도와주고.
지금 나 같은 경우는 자재를 갖다 대주는 일을 하고 있는데 98년도 IMF때 많은 정규직이 해고되면서 희망퇴직이나 그만두면서 들어온 자리다. 근데 빠진 자리 그대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두 사람 자리에 한 사람 메우는 식으로.
우리는 오른쪽 왼쪽 있으면 혼자 다했는데 자기들(정규직)은 ‘오른쪽은 니하고 왼쪽은 내 할게’  이러면서 두 명이서 한다든지. 실질적으로 몇 사람분의 일을 하는데 임금을 더 줬으면 더 줘야 하는데 훨씬 더 적게 받고. 그런 자리도 없어가지고 제발 좀 뺏어가지 말라고 하는 게 현재 비정규직 상태다. 임금은 언론 상에는 4천만 원 5천만 원 하던데 택도 없다. 내가 10년차인데 이제 3천만 원 겨우 넘는다. 또 모듈화 돼서 인원이 빠지게 되면 우리(비정규직)들을 빼서 (정규직이) 우리 자리에 들어오는데 그럼 우리가 해고되는 거다.
지부도 문제고. 현대자동차지부가 지금 큰 엄청난 키를 지부가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데 지부가 저렇게 발을 빼고 있으니. 근데 이경훈 집행부를 욕할 게 아니고, 물론 어차피 우리는 그런 사람인 줄 알았고, 어차피 우리 투쟁인데 지금 단지 힘들다 그뿐이지.
그리고 금속노조도 마찬가지지만. 허울 좋은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항상 끝까지 연대해주겠다고 우리 25일 점거투쟁 할 적에도 야4당 대표들도 와서 그렇게 약속을 해놓고 이렇게 내려와서는 ‘너희는 어찌돼도 우리는 모르겠다’는 식으로 발을 다 빼버린 상태니까 너무 한심스럽고 진짜 사람 믿을 게 못 되는 구나 함부로, 그런 생각도 들고, 배신감도 들고.

 

이 투쟁의 형식적인 결과가 전원 정규직화가 될 수도 있고, 해고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사이에 많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투쟁이 현장에 어떠한 것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 :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너무 교과서적인 대답을 해버리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당연히 이 땅의 비정규직은 철폐되어야 된다, 이런 대답은 너무 고착화되어 있고 뻔한 대답이다.
이 싸움은 당연히 전국에 있는 비정규직한테 희망이 되어야 한다. 일단 우리 당사자들이, 싸우고 있는 우리들이 현대자동차 안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좀 이기적인 생각일 수도 있는데 우리가 실패하고 우리가 끝나버리면 또다시 그냥 노동 책이라든가 이런 노동신문에는 영웅적인 투쟁이었다고만 나오지. 거기에서 배워야 할 점, 이렇게 하면 투쟁이 깨지기 때문에 저렇게 하자 이러고 싶진 않다.
왜냐하면 분명히 우리의 목표는 뚜렷이 있었는데 투쟁하는 과정만 영웅적이었고 결과는 아무것도 없다 이러면 그거는 그냥 아무 성과도 아니다. 현장에 있는 조합원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와야 된다.
우리가 25일 동안 (점거파업)했을 때 무언가는 나왔어야 했다. 정말 힘든 투쟁이었는데 도대체 이상한 옆에 있는 지부와 우리 노동 선배님들이 만들어낸 지부, 그 옛날 98년도와 87년도에 대투쟁을 이끌었던 선배님들이 만들어놓은 합의안, 그리고 야5당 그리고 금속노조. 눈앞에서 버젓이 황인화 동지가 몸에 불을 붙이는 걸 봐 놓고도 이런 합의서를 만든다는 게 참 대단하다.
우리끼리만 영웅적 투쟁이었지 일반 시민, 현대자동차나 비정규직과 관계없는 자영업자,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봤을 때 ‘거 봐라, 안 되지’ 이런 인상만 주고. 차라리 그 (점거)투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몇 십 명이라도 (정규직) 됐으면 그래도 성과가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는데. 단 한 명도 된 사람은 없고 오히려 해고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고 탄압에 시달리고 있으니 과연 이게 맞냐 이거지.
그러니까 이 투쟁의 의의를 광범위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일단 노동의 대의는 벗어날지 몰라도 우리가 성과가 있어야 그 다음을 바라볼 수가 있고 그 다음을 바라봐야 전국에 있는 비정규직이 ‘아 됐네!’ 라고 하지, 투쟁이 끝나버리고 실패하면 ‘어 해도 안 되네’라는 인식밖에는 심어줄 수가 없다. 
정 : 내가 생각해도 진짜 노동운동 역사상 엄청난 투쟁이고 일대 획을 긋는 것이다. 근데 물론 현대자동차도 (정규직) 시켜줄 수 있겠지만 정계쪽 하고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하나만은 확실하다. 이 투쟁은 위대한 투쟁이라는 것은 확신한다. 그만큼 잘해서, 전 노동자들이 우리만 보고 있는데 좋은 결과로 마무리되면 좋겠다.
이 : 난 안 봤으면 좋겠다. 안 봤으면 좋겠다는 게 우리가 정규직이 되냐 안되냐를 좀 안 봤으면 좋겠고 단지 우리가 투쟁을 하고 있으니까 지지를 해달라는 거지, 저 사람들이 정규직이 되나 안 되나 이걸 보라는 건 아니다. 이 투쟁의 과정, 지지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달라는 거지, 가만히 앉아가지고 저것들이 될까 안 될까 재지 말았으면 좋겠다.

 

정리│이서윤 (cdbb@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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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월호][현자인터뷰2]‘여성’이 아닌 같은 ‘조합원’이다. 같이 맞고 같이 싸우자!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1/03/02 15:17
  • 수정일
    2011/03/02 15:45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여성’이 아닌 같은 ‘조합원’이다.  같이 맞고 같이 싸우자!

_4공장 조미선 현장위원
 

사용자 삽입 이미지파기환송심에서 승소한 것에 대해 조합원들 반응은 어떠한가
전 공장차원에서는 잘 모르겠는데 4공장 같은 경우에는 최병승 판결도 있고, 승소도 받아서 이거 가능성이 있구나, 우리가 상경투쟁으로 가야 된다 이렇게 말한다. 비조합원 같은 경우는 최병승 판결 어떻게 났냐 물어본다. 근데 판결났는데 자동차에서는 왜 인정 안 해주냐, 그러면서 많이 궁금해 한다.
 
12일 상경투쟁을 조직하는데 공장별로 분위기가 많이 다른 것 같다
맞다. 우리 지역 같은 경우에는 거의 한 90%는 다 올라간다. 그런데 다른 공장 같은 경우는 들어보니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는 곳도 있다. 우리가 11월15일부터 25일 동안 올라가서 점거파업을 할 때 이 싸움이 정말 큰 싸움이라고 보고 싸웠다. 우리가 아무런 (중재)안도 받지 않고 교섭권을 현대지부에 넘기고 내려왔는데 평화기간에 아무런 교섭도 안하고 계속 미루고 하니까 사기가 많이 꺾인 시기다.
이 싸움이 역사적으로 길이길이 남을 것인데 1공장 CTS 내려왔다 해서 이거 하나만 보고 끝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런 사람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우리가 25일 동안 너무나 큰 싸움을 했는데 원해서 내려간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아마 우리와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대화나 토론을 할 수 있게 한자리에 모여서 얘기했다면 25일이 아니라 한 달이든 두 달이든 하고 내려왔을 거라는 거다. 우리는 밖에서 이렇게 싸웠는데 너희는 안에서 그거 하나 해결 못하고 내려왔냐고 실망하는 게 아니라, 잘했구나 격려해주고 끝난 게 아니니까 다시 정비해가지고 이거보다 더 큰 싸움으로 만들어서 우리가 원하는 정규직 쟁취를 위해서 싸워나가야 한다.
이 싸움은 자기 자신을 한 단계 넘어서야 한다. 지금 시기가 점거 내려오면서 교섭안건을 아무것도 내놓지도 못하고 서울상경 얘기했다가 취소되고 얘기했다가 취소되고 그러니까 못 믿는 거다. 그럼 봐서 하자 이런 마음들이 많다. 지금은 지회가 아니라 우리 싸움이다. 우리 조합원이 하나하나 모여서 단결된 모습으로 싸우면 이기는 싸움이라고 본다. 사람들한테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지회가입은 언제 하셨나
7월22일 대법원 판결 전에 조합이 가입하라고 하니까 나섰다. 그런데 예전에도 한 번 가입했었다. 06년도인가 05년도에 가입해서 6개월 동안 집회 몇 번 왔다갔다 했다. 당시에 우리 기업에 거의 반 이상, 70~80%가 가입을 다했다. 그런데 회사에서 이거 가입하면 너희 해고다, 막 탄압을 하니까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나갔다. 결국에는 나와 남자 조합원 두 사람 밖에 안 남았는데 남자는 탈퇴해버리고 나는 남아 있다가 결국에는 나도 탈퇴해버렸다.
 
그러면 작년 대법판결 이후에 다시 조합원이 늘어나게 된 것인가
그렇다. 그런데 또 같은 일이 있었다. 가입할 때 조장이나 이런 사람도 똑같이 가입하자. 반장도 우리 이번에는 가입 같이하자. 그래놓고서는 나중에 담당부장이랑 다 빠져버리고. 가입했던 사람도 회사에서 두 시간씩 잡아가지고 면담하니 탈퇴하기도 했다.

 

점거해제 이후에 현장탄압이나 달라진 점은 없나
우리 지역 같은 경우에는 (탄압이) 별로 없다. 분위기 자체가 정말 달라졌다. 예전에는 우리가 환경에 대해서 개선해야 된다, 해주세요 해주세요 하면 안 해줬다. 요즘에는 달라졌다. 뭐가 달라졌냐면 너무 잘 해준다.
우리가 (노조) 활동하기 전에는 이게 정당한 건지 아닌 건지를 몰랐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는데, 노조가입하고서 알고 난 뒤에는 우리가 얘기를 하면 다 들어준다. 그만큼 힘이 생긴 거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바꾸었다는 것을 비조합원들한테 얘기를 한다. ‘아,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다’.
 
11월15일 점거농성 과정에서 여성조합원들은 어떻게 참여했나
우리 4공장 같은 경우에는 여성이 많이 없다. 남성분들이 많고 여성이 4공장에 딱 4명 있다. 1차 파업했을 때 여성이 정말 많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여성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보고. 여성조합원이 이렇게 많은데, 이 여성들이 할 수 있는 게 뭘까. 만약에 내가 많이 알았으면 이 여성들을 모아서 뭔가를 좀 해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피켓을 들고 11월15일에 올라갔을 때 여성들은 위험하니까 내려가라고 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정말 힘들었다. 처음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그래서 아는 사람 도움으로 피켓을 만들고, 선전물을 만들고 그런 것을 시작했다.
11월30일날 현장파업 할 때 아줌마들 정말 대단했다. 우리 조합원이 폭행당하거나 끌려갔을 때 큰 목소리, 소리를 지르며 함께 싸웠다. 역시 지지않는 어머니의 힘을 보았다.
파업하는데 여성이니까 밥 같은 거, 밥을 올려주고 이런 것을 하자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는 단지 여성이라서 밥이 일이 아니라, 밥은 얼마든지 있지 않나. 주문해서 올려줄 수도 있는 거고 김밥을 올려줄 수도 있는 문제인데. 우리 여성도 같은 파업, 파업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밥을 하는 게 아니라 피켓을 들고 얘기를 하고 선전물을 돌리고 이런 것을 하고 싶었지만 잘 안 된다는 게 참 가슴이 아팠다.
 
여성조합원들이 많다는 것을 느낀 후에 같이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했다고 하셨다. 그러면 지금 여성노동자들이 같이 모이는 그런 것은 없나
그건 못했다. 다른 공장에 아는 분과 연락은 계속한다. 우리가 1차파업 끝나고 2차파업을 위해서 뭔가를 준비해야 되니까 과정에서 ‘언니, 우리가 2차 파업을 위해가지고 뭔가 여성을 위해서 뭔가 한번 만들어보자’ 했지만 앞에 나서는 것을 많이 두려워한다. 대신 우리가 2차파업에 돌입했을 때는 앞에서가 아니라 뒤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내가 너무 앞서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농성장에 있다가 충돌도 잦아지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여성조합원들을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고 들었는데 그 결정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었나
나도 (농성장에) 몇 번 올라갔다. 가서 거기 비닐 깔고 누워도 내 집처럼 편하게 있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침탈이 들어오면 남성들이 싸우는데 여성이 있으면 보호본능이 있으니까 너희들이 못 싸운다 이런 말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랬다. ‘아니, 여성이 아니라 같은 조합원으로 보면 안 되겠냐’. 계속 그랬다.
결국에는 내려갔는데, 내려오면서도 서운한 감정이 많으니까 내가 많이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들한테 ‘정말 그때 서운했다. 왜 여성남성 차별하느냐. 평등하지 않냐. 같이 맞고 같이 싸우면 되는 건데도 여성이니까 내려가라 이런 게 아니라 같이 싸워야지’.
우리가 천막에 있을 때도 그랬다. ‘1공장 CTS 심장부가 있으면 우리가 천막을 쳐서 역할을 하자’ 그래서 4공장에 천막을 쳤다. 천막을 지키려면 잠을 자야하지 않나. 여성이 4명인데 결혼하신 분들도 있으니까 집에 가야되지만, 나와 내 동생 같은 경우는 결혼을 안 했으니까 상주를 하겠다 했는데 친구들 반응이 ‘안 된다, 여성이니까 너희는 안 된다, 자고 내일 아침에 일찍 와라’ 이런 게 좀 있었다. 너무 화가 나가지고 ‘여성 차별하지 마라’. 근데 그래서 나도 잤다 한 날은. 우리 잘 수 있다, (웃음) 아무 일도 없는데.
 
문제제기를 하면 간부들이나 남성동지들이 잘 안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렇다. 이런 게 많다. 우리 기업에 (현장위원이) 남성 현장위원이랑 저랑 이렇게 둘이 있다. 근데 나는 활동가고 현장위원이고 그런데 내 동생조차도 이런 게 있다. 같은 식구이고 언니가 이렇게 이렇게 이야기하면 따라야지 이런 게 맞는 이야기인데, 이게 좀 반대이다. 우리 조합원들도 그렇고 여성이니까 무시하는 경향이 좀 있는 거 같다. 남성을 따른다. 여자는 연약하니까 뭐 그런 거.


이번 투쟁이 현장에 어떠한 성과로 남아야 된다고 생각을 하나
지금으로 봤을 때는 노동조합도 일단은 힘이 있어야 되고 우리가 정규직화되어야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정규직 쟁취하는 게 어려운 거다.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 대법원 판결도 났는데 회사에서 안 해주니까 이게 어려운 문제구나.
지금 이경훈이 하는 얘기가 신규채용이야기하고 있는데 나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신규채용이란 게, 원래 각 사업부별로 뽑아야 되는데 그것도 안 해주는 사람들이 우리 정규직화시켜주나. 예를 들어 10명의 조합가입해서 싸운 사람이 있다. 그런데 회사에서 2명만 (정규직화) 해 주겠다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 2명만 하고 나머지는 비정규직으로 그렇게 살 거냐? 그러면 아 그건 아니지. 하려면 몇 명이 아니라 다 같이 전부다 싸워야 되는 문제니까 같이 가야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해 달라
7월22일 대법원 판결과 2월10일 최병승 판결이 났다. 우리의 투쟁은 사기는 커지고 정확한 명분이 있다. 12일 상경투쟁에 대한 반응도 좋았고 우리 대오는 한 치 흔들림이 없었다. 11월15일 1공장 CTS 점거농성 시작으로 12월9일 파업을 중단했지만 역사에 남을 싸움을 했다고 본다. 그러나 12월10일 사측은 평화가간, 성실교섭이라고 말해놓고 헌법재판소에 옛 파견법은 위헌이라고 신청했다. 한마디로 결렬선언 했다. 그래놓고선 지회가 4대안을 받지 않았다고 우리 조합원에게 바지사장을 앞세워 징계를 내리고 있다.
우리는 법률정당성을 갖고 있다. 2월17일 1공장 이미나 동지 해고, 2월18일 엔진변속기 그리고 3공장 징계가 개최 되었다. 바지사장은 그러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우리는 단 한명의 징계해고도  절대 용납할 수 없고 이 부당징계가 2차 파업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부당징계와 정규직쟁취 요구해야 한다.
조합원 동지들에게 “2차투쟁을 알리는 부당징계에 맞선 확실한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는 정규직화 쟁취투쟁을 합시다. 1차 파업처럼 우리의 사기의 두 배 열 배로 앞으로 달려갑시다. 저 또한 동지들 그리고 지회가 더 끈끈하게 하나로 뭉쳐서 가열찬 투쟁으로 만들어 가봅시다”라고 말하고 싶다.

 

정리│이서윤 (cdbb@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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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월호][현자인터뷰1]노동자로서 눈을 떴을 때 이 싸움이 시작되었다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1/03/02 15:06
  • 수정일
    2011/03/02 15:45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노동자로서 눈을 떴을 때  이 싸움이 시작되었다

_시트사업부 김응효 대표

 

사용자 삽입 이미지점거해제 이후 상황은 어떠한가
비정규직이 25일 동안 공장잡고 점거한다는 게 보면 힘든 일인데 자부심은 대단히 많이 갖고 있다. 다만 농성해제하고 내려오기 전에 몇 가지 안건들, 사측과 교섭을 하는 차원이 아니고, 몇 가지 조항들은 마무리 짓고 나서 내려왔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아쉬움들을 조합원들이 얘기했다.  우리가 25일 동안 하면서 사측이 무서워서 겁먹었던 게 아니고, 그것보다 더 큰 벽이 있어서, 실질적인 압박들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25일 (농성)하고 내려와서 교섭을 하게 되면서  처음엔 교섭을 일주일에 두 번 하기로 했다가 그 다음에 일주일에 한 번, 2주에 한 번 하는 행태들이 벌어졌고, 통장가압류라든가 손배·고소고발 이런 것들이 계속적으로 자행되면서 조합원들끼리 2차투쟁을 해야 되는 거 아니냐, 해야 된다, 이런 얘기들이 많이 나왔다. 힘들게 잡은 교섭인데 지켜봐야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얘기들도 있어서 지금까지 교섭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2공장 해고자들과 (동성기업) 미복귀자들은 교섭내용에서 실질적으로 확실하게 나온 안건이 없다. 4대의제 중에 들어간 것은 농성해제 하면서 전원 다 복귀를 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우리 23명이 지금 미복귀를 한 상태고, 2공장 해고자 동지들 얘기는 전혀 어떤 얘기도 나오지 않고. 그래서 (2차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처음 취지가 아닌, 그걸 왜곡한 내용들만 의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취지의 내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그런 교섭으로 접어들고 있더라. 처음 8대 요구안에서 요구안으로 축소됐는데, 4대 요구안마저도 더 축소가 돼서 손배가압류 이런 문제를 최소화하자, 그런 내용의 교섭으로 줄어드는 형태가 돼서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다.

 

그렇다면 집회신고 투쟁은 동성기업과 2공장 동지들이 주축이 되어 계획했나
그렇다. 우리가 양재동을 올라가겠다, 집회신고를 하겠다, 이런 제안을 했다. 2차 투쟁의 첫 시발점을 만들자는 의지가 있어서 ‘집회신고 투쟁을 해 보자’ 이렇게 제안을 했다. 근데 잠시 기다려보자 이런 의견이 있었다. 그러다 쟁대위에서 결정을 내렸다. ‘좋다, 양재동 필요하다 올라가라’ 그런 결정이 났는데, 그 시기가 언제냐로 고민을 했다.
근데 또 지부에서 ‘간담회를 한 번 하자’고 했다. 그래서 2공장 동지들이 간담회를 한 번 가졌는데, 거기서 어느 정도의 실마리를 좀 잡았다가 그 다음날 또 말을 바꾸는 그런 과정들이 있었다. 2공장 동지들이 ‘교섭이 좋게 바뀔 거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그래도 한 번 들어보자’고 의견을 내서 (지부의 의견을) 들어봤는데 역시나 또 전혀 좋은 얘기들이 안 나오더라. 말을 계속 바꿔버리니까. 이런 것들 때문에 (상경투쟁이) 조금씩 뒤로 밀렸다. 밀리다가 간담회를 듣고 나서도 기존과 똑같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회사랑 지부에서는 우리가 양재동 올라오는 것에 대해 부담스러워 한다. 어떻게 보면 조금 안 올라왔으면 하는 그런 것들 때문에 ‘사탕발림을 해서 잡아보자’ 이런 게 좀 많았다. 저번에도 그렇게 간담회를 얘기했었고. 우리가 그래도 한번 더들어보자 했었는데, 별반 내용이 다르지 않았다.

 

집회신고로 확보된 시간이 2월25일부터 3월1일까지인가
그렇다. 5일 동안을 확보했다. 그리고 서초서 여기도 집회신고가 나 있다. 여기 이제  뒤에 보시다시피 용역들이 되게 많은데 오늘도 시비가 있었다. 그건 회사에서 지시를 내려서 이렇게 얘기를 하라 한 것도 있겠지만 한 사람이 하루밖에 (신고를) 못한다. 이쪽이 밀집지역, 경쟁 집회장소, 삼성하고 현대하고 포함해서 세 군데가 이쪽에서밖에 못 낸다고 하더라 원래 인원접수 하는 곳도 안에 있었는데 옛날 동희오토 동지들의 사이 있어서 바깥으로 뺐다고 하더라. 회사 측에서 좀 당황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전에는 양재동에서 집회를 할 수 없었는데 우리가 어제 2월 25일부터 3월 1일까지의 시간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해고자나 미복귀자들과 현장에 있는 조합원들, 공장별 사업부별로 안에 있는 동지들과 접촉면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고 있나
우리가 밖에 나와 있다 보니까 우리 시트사업부 내에서도 동지들하고 소통이 좀 안 됐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와 있고, 공장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그래서 소통이 잘 안됐었는데 요번에 재정비를 하고 다시 추스르면서 간부회의를 소집을 해서 안과 밖이 소통을 하면서 계획의 수위를 높여가야 되는 것 아니냐고 얘기를 했고, 조합원들한테까지 그 얘기들이 다 전달돼서 안과 밖이 자주 만나서 이런 것들을 논의하자, 우리 사업부는 그렇게 일단 회의를 했다.
그리고 그 동안 쟁대위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회사에서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 많아서. 또 수요일 집회를 매번 한다. 매주 계속 끊임없이. 처음에 우리가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파업기간 이후에 계속적으로 수요일 집회를 통해서 소통을 많이 하고 있다. 안과 밖이 만나는 것은 공장, 사업부별로 편차는 있겠지만, 아마 사업부별로 그런 것들을 잡아나갈 것이다. 사업부 특성이 좀 있기 때문에 전체 사업부별로 조합원들이 다 만나서 얘기할 기회는 수요일밖에 없지만 우리 사업부 문제도 있고 각 공장별로 또 고민들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 조합원이 주로 1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2·3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활동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고 있나
지회에서 1차만 노조활동을 해야 된다 이런 관점은 아니다. 우리 자동차 일 하는 비정규직 동지들이 다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것이 어떤 시각의 면은 아니고. 탄압이 1차는 더 심하다. 3차 같은 경우는 인원이 되게 멀리 떨어져 있다. 한 명 한 명 떨어져 있어서 실질적으로 그들이 고민하고 있다. 가입을 해도 탄압이 왔을 때 어디다 얘기를 하기가 벅찬 거다. 그렇다고 그들이 가입한다고 해서 가입하지마라 안 된다 이런 얘기는 한 적이 없다. 왜냐, 같은 동지이기 때문에. 근데 그들이, 우리 동지들이 부담감을 많이 느끼는 것이다.

 

2·3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해있는 상황 때문에 노조가입이 어렵다는 건가
그렇다. 우리는 노동조합에 가입한 우리 동지들, 소송하고 있는 동지들만의 문제로 풀어가진 않고 있다. 우리가 목표했던 것은 현대자동차에 있는 모든 동지들을 정규직화 시켜라, 시켜야 한다 이런 얘기이다. 그런데 사측에서는 의무가 있고, 의제가 있다 이런 식으로 갈라치기를 하고 있지만 우리의 목표와 기조는 똑같다. 똑같은 비정규직, 거기서 마저도 우리 스스로들이 갈라놓는다면, 1차다, 3차다 하는데 그건 우리가 얘기한 게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1차라고 얘기 안 한다, 비정규직이라고 얘기하지. 1차다 2차다 3차다 이런 얘기들은 회사에서 얘기하는 거지 우리 스스로는 동지라고 얘기를 하고 같은 비정규직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같이 가는 게 맞고 당연히 맞는 거다. 그렇게 하면 1차는 왼쪽 문 달고, 2차는 오른쪽 문 달고 똑같은 상황이다.
지금 2차소송을 준비하고 있는 또 다른 면에 2차 조직화사업을 한다는 큰 목표, 기조가 잡혀 있다. 단지 2차소송이 1차에 안 했던 동지들과 나중에 노조에 가입한 동지들 때문에 2차소송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아시겠지만 회사에도 사측의 바지 사장들과 연관돼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친인척, 자기 고모부나 누가 정규직 관리자다 이런 것들이 있어서 2차 조직화 사업을 하는 게 힘드나, 어쨌든 나 같은 경우 사업부에 (2차 조직화해야 한다고) 얘기를 했고 다른 데도 마찬가지다. 다 돌아다니면서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거다. 그래서 2월10일날 판결이 되게 중요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 판결을 보고나서 아직 가입 안 하고 있는 우리 동지들이 더 그것을 보고 느끼는 것이 있지 않겠나. 그래서 2차준비는 2차 조직화사업도 같이, 더 큰 뜻으로 조직화사업이 같이 담겨져 있다.

 

2005년 불파투쟁에 참여했나 
동참하지 못했다. 현장에 그런 분위기들이 많이 올라왔었다. 우리도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관심이 되게 많았고, 공장 안에서 일을 하면서도 다른 공장에 있는 우리 동지들은 (투쟁) 하고 있는데 우린 일하고 있으려니 기분이 많이 그랬다. 그러면서 아, 뭐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우리 동지들이 저렇게 맞고 있고 끌려나가는데 우리 해야 되는 거 아니냐 분위기들이 한참 고조됐었다.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는데, 지회에서 노조가입원서를 갖고 올라왔는데 출입구에서 제재를 당했다. 그 때 당시에 바지 사장들의 협박도 있었고 한 명이라도 가입하면 가입하는 사람 잘라버리겠다 이런 협박도 있어가지고 그 벽을 넘지 못했다. 그 때는 겁을 많이 먹었다.
그 때 허비한 시간이 지금 돌이켜보면 (아깝다.) 근데 그러고 조용히 시간을 흘려서 보내고 있다가 몇 년에 걸쳐 탄압당하는 것을 많이 보면서 같이 옆에 일하고 있는 동료들이 나가는 것을 많이 봤다. 많이 참고 견뎌왔었는데 마침 7월22일날 대법원 판결이 났고, 우리가 늦었지만 지금 아니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우리 시트사업부도 조직을 더 가열차게 했고, 늦게 한 만큼 더 열심히 하자고 해서 좀 빠르게 진행을 했다. 그래서 신생이면서도 건방지게 깝치는 그런 것들을 많이 했지만, 어쨌든 우리가 늦게 시작한 만큼 늦게 시작한 마음들을 갖고 더 힘차게 했던 것 같다.
내가 노동자로 눈을 안 떴을 때는 이 싸움이 끝났다고 포기하고 있었다. 노조활동을 못하고 있었던 그 시간이 아마 포기를 하고 있었던 시간이 아닐까. 근데 노동자로서 눈을 떴을 때 ‘아, 이 싸움이 시작이구나, 끝이 아니구나’ 이걸 알고 나니까 그 전에 했던 우리 조합원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가를 알게 되고 반성하게 되고.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 말씀하실 때 투쟁하는 과정에서 사측과 싸우는 것도 힘들지만 좀 더 큰 벽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것은 정규직지부를 말하는 것인가
사측과 싸우는 것은 충분히 싸울 수가 있다. 힘차게 싸웠고. 젊은 친구들이 많아서 그날그날 (일과를) 찍어서 비지회 게시판에 올렸다. 분통터지는 것도 많았는데.
그렇게 투쟁하면서 진짜 힘들었던 것은 지부의 중재적인 역할이었다. 민감한 얘긴데, 지부에서 처음에 압박을 많이 했다. 금속(본조)도 그랬고. 금속에서도 처음엔 같이 이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태도로 얘기했었는데 이경훈 지부장의 벽을 넘지 못했다. 금속도 나중에는 말을 바꿔서 얘기를 했다.
벽이라는 게 밖에서 연대를 안 해줘서 힘들었던 게 아니고 그보다 더 가까운 내부의 벽 때문에, 그것을 뛰어넘지 못해서 힘들었다. 처음부터 정규직 동지들의 연대를 바라고 시작한 것은 아니나 어쨌든 파업을 하면서 압박들, 벽들을 넘지 못했다. 1차파업을 졌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더 확고하게 강력하게 했으면 지금의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2차투쟁을 다시 결의해서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지만, 그래도 2차투쟁을 계획하고 있고, 2차투쟁을 다시 계획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의지가 아직 꺾이지 않았다는 거다. 그리고 2차투쟁은 더 강력하게 할 계획이다. 아마 이번 2차투쟁을 한다고 하면 지부의 벽도 넘어설 각오를 하고 하지 않을까.

 

방금 말씀하셨던 내용이 동지뿐만 아니라 다른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다 같이 얘기가 된 것인가
그렇다. 내가 이렇게 얘기했을 때 다른 동지들이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내 판단에서는 그런 것 같다. 2차투쟁을 하면 전체 우리 조합원들 중 반 이상은 할 거다. 우리 조합원 수가 7월22일 이후에 1900명, 2천명 가까이 육박했었는데 실질적으로 파업에 돌입했을 때는 많이 떨어져 나갔었다. 그리고 파업하는 과정 속에서도 많이 떨어져나갔고. 투쟁에 돌입을 했을 때 얼마만큼 참가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3분의2정도는 될 것이다. 지회 싸이트를 통해서 댓글 다는 걸 보면 조합원들이 무슨 교섭이냐 교섭해서 아무 내용도 없고 한데 (투쟁) 하자 이런 댓글들이 많다. 그런 정서를 봐서도, 수요일 집회 때 나오는 인원들은 2차투쟁을 했을 때 다 동참을 하지 않을까.

 

2005년에 자동차 비정규직노조들이 생기고, 투쟁력을 갖게 되면서 지금의 상황과 비슷하게 정규직 운동질서에 의해 통제를 당하는 과정에서 독자적인 결정권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정규직지부한테 방해를 받는다고 할까. 그런 과정을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
내 생각인데, 지부에서 들으면 상당히 껄끄러운 얘기일 것 같은데 2차투쟁에 있어서는 우리 독자적으로 할 것 같다. 왜냐하면 1차 투쟁하면서 지부의 간섭이라고나 할까, 회유 이런 게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부의 힘을 빌어서 파업을 했던 것을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2차투쟁에 있어서는 아마 그런 결단을 하고 2차투쟁을 할 거다. 2차투쟁을 하는 것도 지부에서는 되게 싫어한다. 그래서 설 이전에 모든 걸 마무리하고 그렇게 할 계획을 잡고 있다. 지부에서 가지 말라고 했다, 여기 우리 올라올 때도. 근데 올라와서 집회신고 했다. 그것만 보더라도 2차투쟁에서는 지부를 배제하고 우리 독자적으로 끝장을 낼 거다.

 

방금 말씀하신 내용에 공감한다. 그러나 점거 파업 때 밖에서 보기에는 비정규직지회 쟁대위가 정규직지부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쟁대위 자체에 그런 압박이 있다. 왜냐하면 쟁대위 자체가 지금 다 구속영장이 청구되어 있는 상태고 공장안에서만 신변보장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정규직 대의원들이 와서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할 거다. 가깝게 공장 안에 있기 때문에 와서 이렇게 하자, 해봐라 저렇게 해 봐라, 질질 끌고 가고 있는 상황이고.
우리 올라온 것도 쟁대위에서 결정은 내렸지만 어쨌든 우리가 올라가겠다는 요구를 많이 했었다. 조합원들이 한다고 하는데 쟁대위에서 굳이 막는다면 그들이 파업파괴행위를 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그래서 우리가 뭔가 한다고 했을 때 쟁대위에서 그걸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만약에 지도부가 정신을 못 차린다고 하면 그걸 바로잡을 수 있는 조합원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집행부 똑바로 해라 하는 목소리를 내는 조합원들이 아직까지 있다. 비록 지도부가 마치 교섭이라는 국면에 접어들어서 이것을 잘 풀어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조합원들이 그것을 가만히 놔두진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그 부분에 있어서는 우려를 하지 않는다.

 

지회 쟁대위에서 2차투쟁 계획을 어떻게 세우고 있나
극비사항이 많아서 자세하게는 말씀 못 드리지만 2차투쟁에 대한 모든 내용을 쟁대위에서 다 결정한다고 보면 되는 게 아니다. 대의원자체는 조합원들의 목소리를 내서 대표로써 전달하는 차원이다. 조합원들이 대표한테 얘기를 하면 대표들은 대표들끼리 모여서 조합원들의 정서가 이렇고,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조합원들이 이렇기 때문에 할 수 밖에 없다, 쟁대위 자체도 조합원들이 이끌어가는 것이다. 집행부가 조합원들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고, 조합원들이 쟁대위, 그리고 집행부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쟁대위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한다.

 

정리 │김재영 (hedwig@jinbo.net)
이서윤 (cdbb@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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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월호][노동]우리의 의지는 아직 꺾이지 않았다!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1/03/02 14:55
  • 수정일
    2011/03/02 15:45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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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의지는 아직 꺾이지 않았다!

다시 불붙는 현대차 비정규직 2차투쟁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2차투쟁이 시작되었다. 2월10일 열린 파기환송심에서 법원은 또다시 최병승 조합원의 손을 들었다. 대법판결을 지켜봐야한다던 사측은 파기환송심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더니, 파기환송 확정판결이 난 지금은 또다시 항고했고 판결을 최병승 개인의 문제로 축소시키며 시간을 끌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12일에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다시 양재동 본사 앞에 섰다. 그러나 이날 예상되었던 ‘2차파업 결의대회’는 ‘금속노조 결의대회’로 그 수위가 낮아졌고 항의서한 전달이나 본사를 타격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은 없었다. 어렵게 본사까지 온 조합원은 집회가 끝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했다. 금속노조 관료들의 형식적인  행사치례만 있었을 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열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9일부터 이상수 지회장이 조계사에서 단식농성 중이고 12일 현대차 본사 옆 광고판에서 노덕우·김태윤 전 수석부지회장 2명이 고공농성을 하다 진압당하기도 했다. 현재 현대차 울산 각 공장에서는 노조간부와 활동가에 대한 징계해고가 속출하고 있고 이에 맞서는 조합원들의 잔업거부, 부분파업 등이 전개되고 있다. 비정규직지회는 17일 2차파업 출정식과 19일 조합원 총회를 가지고 구체적인 투쟁계획을 논의 중이다.
[The FocuS]는 점거해제 이후 재투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투쟁하는 현대차 울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시트사업부 김응효 대표와의 인터뷰는 서초경찰서 앞에서 집회신고 투쟁을 벌이던 지난 1월26일, 2공장 정구영 대의원과 이도한 대의원은 파기환송심 확정판결 다음 날인 2월11일에, 조미선 4공장 현장위원은 이후 전화와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음을 미리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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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월호][FocuS]소말리아 ‘해적소탕’과 대한민국 ‘군사주의’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3/02 14:27
  • 수정일
    2011/03/02 15:46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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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부터 피랍소식과 구출소식이 연이어 전해졌다. 지난 1월 21일 삼호주얼리호는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당한지 6일 만에 구출됐다. 군 당국은 현지에 파병된 청해부대로 작전을 마쳤으며, 한국인 8명 등 선원 21명 모두가 무사하다고 발표했다. 석해균 선장이 총상을 입긴 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납치된 선원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던 가족들은 지옥에 갔다 온 것 같다는 소감을 전했다.
그런데 생명에 지장이 없다던 석 선장의 병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됐다. 의료진에 따르면 석 선장은 최소 6발 이상의 총탄을 맞은 것으로 확인됐다. 초기 응급조치와 무관하게 처음부터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군 당국이 ‘작전성공’을 부각시키기 위해 축소 발표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에 충분했다. 칭찬 일색의 과열된 분위기가 가라앉으면서 이번 작전의 실상도 하나씩 드러났다.

 

MB 작품?

청해부대의 이른바 ‘아덴만 여명’ 작전이 끝나자, 이명박은 국방부를 제치고 직접 TV 앞에 섰다. “내가 명령을 내렸다” 한 마디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이명박은 자신이 군의 수장으로서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했음을 숨기지 않았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에서 고뇌에 찬 결단으로 외계인을 물리친 대통령 같은 설정이었다. 실제로 ‘아덴만 여명’ 작전은 ‘이명박 특명작전’으로 진행됐다.
삼호주얼리호 이전에도 소말리아 해적들에 의한 납치는 수차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신속한 대응이 이뤄졌다. 이명박 특명작전은 피랍 하루 만에 시작됐다. 이명박은 할 수 있는 수단을 다 써서 작전을 수행하라고 지시했고, 군 당국은 지체 없이 군사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1월18일 1차 작전은 해적들의 완강한 저항과 부대원 3명의 부상으로 실패로 끝났다. 2차 작전에서도 추가 인명피해가 우려됐다. 그런데도 이명박의 답은 “계속 하라”였다.
이명박에겐 피랍선원 구출작전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새해를 악재와 함께 시작한 이명박은 레임덕 위기관리에 직면했다.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 낙마사태는 한나라당 지도부의 반발까지 불러왔고, 구제역 늑장대응과 치솟는 물가불안으로 여론악화까지 겹쳤다. 피랍사태를 더 이상 돈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공언한 건 명분일 뿐이었다. 또한 해외 군사작전은 연평도 포격사태 이후 거세진 ‘안보무능’ 지적을 만회할 기회로도 판단했다.
 2차 작전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1차 작전의 실패 이후 해적들의 경계는 한층 강화되었다. 해적들이 납치된 선원들을 인간방패로 삼아 저항할 수도 있어, 작전과정에서 선원들의 신변보장은 불확실했다. 하지만 이명박은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군은 4500t급 최영함의 함포 사격은 물론 링스헬기의 기관총 사격까지 동원했다. 석 선장의 총상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지율 반등과 정국 반전을 노린 이명박에게 단 한 명의 인명피해는 그저 불가피한 것이었다.
피랍선원 구출작전 이후 이명박은 대대적인 치적홍보에 나섰다. 이명박이 멍석을 깔아주자 군도 덩달아 춤췄다. 언론브리핑을 자처하며 작전 당일의 시간대별 상황과 1차 작전과 2차 작전의 전술비교까지 상세히 밝혔다. 압권은 작전 실황을 담은 영상공개였다. 천안함 침몰 당시 군사기밀을 내세워 입을 꽁꽁 틀어막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도 물론 있었다.

 

실종된 민주주의

이명박에게 이번 작전은 ‘완전작전’이어야 했다. 말 그대로 결점 없이 완벽해야 했다. 이명박의 대국민 담화문과 군 당국의 발표에는 어떠한 인명피해도 담겨 있어서는 안 됐다. 때문에 석 선장의 부상은 축소되어야 했고, 석 선장이 해적뿐 아니라 해군이 쏜 총에도 맞았다는 사실은 아예 은폐되어야 했다. 천안함 침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정보에 대한 통제는 공공연히 벌어졌다. 사람들을 ‘어리석은 백성’으로 알고, 또 ‘어리석은 백성’으로 만들려는 이명박의 시대착오적인 인식은 또 한 번 드러났다.
사태는 <부산일보>가 1차 작전의 실패를 보도하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국방부는 <부산일보>를 비롯해 <미디어오늘>과 <아시아투데이>에 대해 국방부 출입금지와 취재자료 제공금지 조치를 내렸다. 엠바고(보도시점 유예)를 어겨 구출작전에 지장을 주고 피랍선원의 안전에 위협을 줬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해당 언론은 국방부의 브리핑을 받은 적도, 엠바고를 수용한 적도 없었다. 엠바고는 취재원과 언론 사이에 성립되는 약속으로 법적 구속력 같은 건 전혀 없다.
더구나 엠바고 수용여부는 전적으로 언론의 몫이다. 언론은 각자 판단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1차 작전이 실패한 상황에서는 피랍선원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섣부른 군사작전의 위험성을 알리는 것이 필요했다. 국방부의 주장대로라면 오히려 구출작전 이후 군에서 밝힌 군사작전의 전략과 기밀이야말로 더 문제가 된다. 해적들에겐 그만한 좋은 전투교범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국방부의 초강경 대응은 작전실패에 따른 책임을 피랍선원의 안전을 이유로 은폐하고, 엉뚱한 곳에 분풀이한 것에 불과했다.
국방부의 제재조치는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2차 작전이 성공했음에도 엠바고 불응을 문제로 삼은 것에는 분명 의도가 담겨 있었다. 물론 이명박의 ‘완벽작전’에 흠을 낸 괘씸죄가 적용된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건 이러한 제재조치가 전형적인 언론탄압이라는 점이다. 군의 군사작전에 보도자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강한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본때 보이기용인 것이다.
과거 70~80년대식의 보도통제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라는 최소한의 민주주의조차 권력의 입맛에 따라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음이 또 한 번 드러났다. 비판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정보를 통제하고, 자기 할 말만 하겠다는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은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건 이러한 독선적인 일방주의가 국익을 내세운 군사주의 앞에서 용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익과 군사주의

1차 작전과 2차 작전 사이에 대다수의 언론은 다른 나라의 해적소탕 사례를 집중보도했다. 국방부의 엠바고 조치에 협력하며 해외의 진압사례만 유독 부각시킨 건 2차 작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익’이라는 명분 아래 벌어지는 군사적 해결은 당연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민주주의 사회’ 대한민국에서 정보가 통제된 건 정권의 일방적인 강요 때문만은 아니었다.
군사작전의 실상은 석 선장의 부상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군사작전은 어디까지나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정치권력의 각본대로 추진되었으며, ‘자국민의 보호’는커녕 ‘자국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도 군사작전에 대해 지지 또는 방조한다는 건 군사주의를 강화하려는 정권의 노림수에 편승한 것이었다. 그렇다보니 재발방지 대책에서도 군사주의는 더욱 더 강화되고 있다.
현재 피랍사태를 막기 위한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는 ‘대양해군’이 떠오르고 있다. 효과적인 해적소탕 작전을 위해선 최소 2∼3척의 대형함정을 원거리로 파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군 당국은 청해부대에 링스헬기 한 대를 더 보강하는 한편 군수지원함을 추가 파견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참에 구축함 한 대로 운영되고 있는 청해부대의 규모를 확대·개편하겠다는 것이다. 피랍선원 구출작전을 계기로 해군력 증강 담론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대양해군에 대한 지지는 보수 진영뿐 아니라 개혁을 외치는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한겨레>는 “소말리아 인질 구출작전이 성공한 것은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에 꾸준히 해군 전력을 증강한 데 힘입은 바가 크다”(2011년 1월25일 <한겨레>)는 목소리를 전하며 대양해군의 선두에 섰다. 천안함 침몰을 계기로 추진된 이명박의 연안해군은 비판의 대상이 된 반면, 청해부대의 최영함 같은 구축함 6척을 건조한 김대중·노무현의 대양해군은 칭송의 대상이 됐다.
대양해군에 대한 이러한 호의는 이명박 정권을 ‘안보무능’ 정권으로 규정하면서부터 강화되었다. 천안함 침몰 이후 특히 연평도 포격사태를 겪으면서 자유주의 진영이 내세우는 평화의 의미는 점차 퇴색됐다. ‘평화주의’ 대신에 ‘안보주의’가 자리를 꿰차기 시작했다. 자유주의 진영에 손을 내밀고 있는 진보신당의 심상정은 자신의 블로그에 심지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기도 했다. “국방에 대한 이명박 정권의 참담한 인식 수준에 대한 우려는 이번 연평도 사건을 통해 현실로 증명되었다. 이명박 대통령 집권 3년 만에 상승의 최정예 우리 군이 연전연패의 당나라 군대가 돼 가고 있는 것은 인정하기 싫지만 우려스런 현실이 되고 있다.”(2011년 1월14일 <한겨레21> 재인용)
안보주의는 군사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명박에 대한 반발은 김대중·노무현에 대한 향수 속에서 안보무능의 극복, 즉 개혁과 진보를 외치는 쪽에서도 강한 군대를 가져야 한다는 신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양해군으로 상징되는 해군력 증강은 대수롭지 않게, 오히려 강렬한 욕구로 표출되고 있다. 결국 군사주의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보수진영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열망이 정당화되기 위해 소말리아 해적들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야 했다.

 

악순환

지난 1월30일 생포된 소말리아 해적 5명이 한국으로 압송됐다. 수사결과 삼호주얼리호를 납치한 해적들은 대부분 이십대로 밝혀졌다. 해적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은 올해 나이가 열아홉 밖에 안 됐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교를 다니던 학생이었다. 하지만 각종 언론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같은 인간의 입장에 서 있지 않았다. 흡사 짐승 쳐다보듯 했으며, 악마로 그려내기 일쑤였다.
생포된 해적이 빛나는 전리품이라면, 사살된 해적은 혁혁한 전과였다. 군사작전 과정에서 무려 8명이나 죽었지만, 그 죽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소말리아 해적들은 꺼릴 것 없이 죽여도 되는 ‘악의 화신’이었을 뿐이다. 최소한의 인도주의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소말리아 청년들이 왜 해적이 되었는지(상자기사 참조)도 관심 밖이었다. 소말리아 정부가 해적 시신 8구를 받아들인다고 하지 않았다면 그 시신들은 정말로 인도양 공해상에서 수장되었을 것이다.
급할 것도 없는 해적수송에 전력을 기울인 이명박은 득의양양한 표정이다. 석 선장의 이송, 선원들의 귀국에 이어 삼호주얼리호의 귀항까지 아덴만 이슈를 2월 말까지 끌고 가겠다는 심산이다. 하지만 이번 작전으로 소말리아 해적에 의한 피랍사태가 근절된 건 아니다. 삼호주얼리호 구출사건으로 해적들이 보복을 다짐하고 있는 가운데, 이 같은 피랍사태는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다.
소말리아 해역은 세계 물동량의 20%, 유류수송의 25%를 차지하는 무역항로다. 그런 만큼 1년에 평균 2만여 척의 선박이 지나간다. 이중 한국 국적의 선박은 280여 척으로 추산되는데, 선주들은 위험이 뻔히 보이는데도 소말리아 해역으로 계속 배를 보내고 있다. 반면 남아공 희망봉의 우회항로는 꺼리고 있다. 선원들 목숨보다는 물류비용 절감에 따른 이윤창출이 더 중요한 까닭이다. 피랍사태가 벌어져도 선주들 입장에선 배를 되찾는 게 가장 급선무다. 그러니 협상금 같은 비용이 들지 않는 군사작전은 마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명박을 수장으로 내세운 정치권력 또한 해외 군사작전에 적극적이다. 당장 이번 구출작전을 들먹이면서 해외파병을 당연시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유별나서가 아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또한 아프간·이라크 파병 등 해외파병을 강행했다. 세계 곳곳의 갈등과 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한 몫 챙길 수 있다고 여기는, 패권국가와 닮아가려는 군사주의 야망은 동일했다. ‘자국민 보호’는 명분일 뿐, 중요한 건 자본과 보조를 맞춰 그들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는 것이었다.
다행히 석 선장의 병세는 피격 2주 이후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석 선장의 병세를 걱정하던 많은 사람들도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는 건 지금 이 순간에도 소말리아 해상에서 벌어지는 비극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손쉽게 결정한 군사작전이 그만큼 손쉽게 피의 보복을 가져오지는 않을지, 우려는 점차 커지고 있다. 해적소탕을 명분으로 한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에서 이제는 되물어야 한다. 그 희생은 누구의 몫인가. 누구를 위한 군사작전인가.

 

소말리아 : 동아프리카의 이라크

소말리아는 1990년대 내전에 휩싸이면서 나라 전체가 황폐해졌다. 해안선이 3,000km에 달해 대부분 어업으로 생계를 잇던 소말리아 사람들은 군벌들의 아귀다툼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내전과 동시에 소말리아 해역에 나타난 외국 선박들은 소말리아 사람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다.
외국 선박들은 매년 약 3억 달러어치의 해산물을 휩쓸어 갔다. 소말리아 사람들의 생존기반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심지어 일부 선박들은 유럽에서 1t당 약 1000달러의 처리비용이 드는 폐기물을 1t당 3달러에 소말리아 해역에 버리기도 했다. 그 돈은 고스란히 지역 군벌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내전으로 기아선상에 놓은 소말리아 사람들에게 해적질은 유일하게 돈을 쥘 수 있는 일이었다. 처음엔 불법어획과 불법투기에 대한 벌금 명목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해적산업’으로 커졌다. 그 대상도 소말리아 해역을 지나는 모든 선박으로 확대됐다. 소말리아 해적질은 조직폭력배와 연계된 각종 사업들처럼 자본주의 지하경제의 한 단면을 띠게 되었다.
한때 소말리아 해적질은 급속히 위축된 적이 있었다. 2006년 8월 소말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이슬람법정연대’가 수도 모가디슈를 장악하고, 소말리아 전역을 통치하면서부터다. 이슬람 율법을 신봉하는 이슬람법정연대는 도둑질을 큰 범죄로 여겨 해적들을 소탕했다.
미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교두보이자 세계적인 무역항로를 가진 소말리아를 계속 자기 영향력 아래에 두려 했다. 하지만 이슬람법정연대가 미국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자, 미국은 에티오피아와 함께 소말리아를 침공했다. 그리고 2006년 12월 이슬람법정연대를 축출해 그 자리에 친미 과도정부를 세웠다. 명분은 ‘테러와의 전쟁’으로, 이슬람법정연대가 알 카에다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친미 과도정부의 영향력은 수도 모가디슈와 그 인근지역을 빼곤 제한적이었다. 각 지역 군벌들은 다시 활개를 쳤고, 해적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미국 입장에선 문제될 게 없었다. 오히려 극성을 부리는 해적질은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해 주었다. 사실상 해적질을 방조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미국은 연합해군함대를 이끌고 있다. 여기엔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남한 등 주로 친미국가 해군이 배속되어 있다. 남한은 지난 2009년부터 청해부대를 파병했으며, 작년 12월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법안 중에는 소말리아 파병연장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 삼호주얼리호 구출작전에서도 청해부대는 미 해군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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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정치사상의 자유는 없었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3/02 14:12
  • 수정일
    2011/03/02 14:12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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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4일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하 ‘사노련’) 사건 재판1심 선고가 있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는 오세철 활동가 등 4명의 활동가들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나머지 4명의 활동가들에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또한 집시법 위반을 덧붙여 8명의 활동가 모두에게 벌금 50만원형을 부과했다.

재판부는 사노련 사건에 국가보안법 7조를 내세웠다. 위헌논란이 끊이지 않는 낡은 악법을 또다시 적용한 것이다. 반국가단체에 대한 찬양․고무 조항의 국가보안법 7조는 불고지죄인 10조와 함께 그동안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지적받아 왔다. 그 내용이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자의적으로 적용될 소지가 많고, 실제로 역대 정권에서 정치탄압의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 7조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탄압의 무기로 사용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번 판결에서 사노련은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하는 단체로 규정되었다. 사노련 명의의 정치신문과 잡지, 그리고 각종 토론회 발제문에 ‘무장봉기 및 폭력혁명을 통한 정부전복’ 주장이 담겨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재판부는 이를 집요하게 따졌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사상의 자유는 당연한 권리에 속한다. 그 누가 어떠한 정치를 가지든, 어떠한 단체를 만들든 국가권력이 개입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더 나아가 정치사상의 자유는 사회구성원 스스로 새로운 체제,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고 건설할 권리까지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말 그대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면 정치사상의 자유가 혁명의 권리로 인정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재판부는 케케묵은 국가보안법을 들먹이며 이 사회에서 정치사상의 자유가 허울에 불과한 것임을 스스로 폭로했다. 혁명의 권리는커녕 기본적인 정치사상의 자유마저 묵살했다.

지금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독재정권의 폭압에 맞서 생존권과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민주화 투쟁이지만, 이 나라 재판부는 단지 국가보안법만을 떠올릴 것이다. 국가변란의 선전․선동은 물론 직접행동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민주주의조차 거부하며 정치사상에 대한 규제와 검열, 통제를 여전히 고수하는 이 나라 공권력과 지난 수십 년 동안 노동자와 서민 위에서 군림해온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독재정권은 서로 이역만리 떨어져 있지만 국가권력의 공통된 속성이 무엇인지 하나같이 보여주고 있다.

유죄 판결을 받은 8명의 활동가들은 법정에서 나오자 곧바로 항소할 뜻을 밝혔다. 오는 28일 일괄적으로 항소장을 제출할 예정이다. 지난 2009년 8월 기소된 사노련 사건은 이제 항소투쟁에 들어가게 됐다. 그동안 1년이 넘는 경과 속에서 사노련 사건에 대한 관심은 초반에 비해 줄어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재판1심 선고를 앞두고는 국내외에서 연대의 목소리가 조직되기도 했다. 항소투쟁은 정치사상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연대의 장과 공론의 장으로 다시금 활용되어야 한다. 사회주의를 내건 정치활동의 자유를 향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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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호][FocuS]현대차 비정규직 투쟁에 다시 불을 붙이자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1/26 14:33
  • 수정일
    2011/01/26 14:33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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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1공장 점거파업이 지난 9일 일단락되었다. 11월 15일부터 25일 동안 진행된 1공장 점거파업은 ‘불법파견 정규직화에 대한 성과 없이 먼저 농성을 해제하지 않는다’는 기조 아래 비정규직 조합원들의 강고한 투쟁의지로 흐트러짐 없이 진행돼왔다. 하지만 농성 기간 동안 줄기차게 계속돼 온 현대차지부 지도부의 압박과 개별 조합원에 대한 사측의 손해배상, 가압류로 인해 결국 비정규직노조 지도부는 ‘농성을 먼저 해제하고 교섭을 진행하자’는 현대차지부와 사측의 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11월24일부터 28일까지 긴박했던 시간들

 

11월 20일 황인하 조합원이 민주노총 영남권 결의대회 도중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정문 앞에서 분신을 시도한 이후, 24일 금속노조와 현대차지부, 비정규직지회 지도부는 사측에 ‘특별교섭’을 요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특별교섭의 주요의제로 △농성장의 비정규직 고소고발, 손해배상, 치료비 등 해결 △금번 농성장의 고용보장 △비정규직지회 지도부의 신변보장 △불법파견 교섭에 대한 대책 요구 등을 설정하고자 했다.
하지만 25일, 비정규직 조합원들은 교섭의제에 대한 찬반토론에서 ‘24일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비정규직지회 지도부 간에 논의된 교섭 요구안의 내용이 이번 투쟁의 쟁점을 불법파견 정규직화가 아니라 동성기업이라는 하청업체의 고용승계 투쟁으로 협소화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불법파견 정규직화 쟁취투쟁을 위해 1공장 점거파업을 끝까지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투쟁의지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는 교섭요구안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했던 것이다. 비정규직 조합원들은 이 날 교섭요구안이 보고된 자리에서 찬반토론 끝에 이 같은 교섭요구안이 적혀있던 종이를 다 같이 찢어버리며 자신들의 의지를 표출하기도 했다.
이에 26일, 다시 3주체(금속노조, 현대차지부, 비정규직지회) 간 회의가 진행되었다. 3주체 회의에서 비정규직지회 지도부는 25일 확인된 조합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정규직화에 대한 성과 있는 합의 없이 농성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교섭의제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대차지부의 반대로 인해 이 같은 주장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은 27일, 또다시 비정규직 주체들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3주체의 교섭 요구안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히며 장시간 찬반토론을 진행했다. 격렬한 토론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3주체 회의에서 도출된 교섭 요구안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현대차지부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대신 비정규직지회는 비정규직 조합원들의 주장을 교섭의 단서로 삼아 28일에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사측과 다름없는 정규직지부

 

비정규직지회는 28일 ‘정규직화에 대한 성과 있는 합의 없이 농성을 풀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독자적인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비정규직지회의 독자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현대차지부의 통제와 협박은 더욱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대차지부 이경훈 지부장은 28일 기자회견이 3주체 회의에서 도출된 합의를 깨는 행위라며 비정규직지회를 비난했다. 게다가 이 날 1공장 농성장에 있던 울산연대노조 권우상 전 사무국장을 ‘외부세력’이라고 지칭하고, 욕설과 폭행을 하며 농성장에서 끌어내기까지 했다. 3주체 회의에서 논의된 교섭요구안이 비정규직 조합원들에 의해 계속해서 거부되자, 이에 대한 불쾌감을 ‘외부세력이 비정규직 조합원들을 부추기고 있다’는 식의 폭력으로 드러낸 것이다.
29일에는 결국 현대차지부 소식지를 통해 “비정규직지회의 입장과 관계없이 3주체 회의에서 결정한 교섭 요구안으로 사측에 교섭을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차지부는 어떻게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빨리 마무리 짓기 위해 교섭 전에 먼저 1공장 점거농성을 풀게 할 생각이었으나 비정규직 조합원들의 투쟁의지에 부닥치게 되어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정규직지회를 압박하는 데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차지부의 압박은 금속노조 대의원대회에서 결정된 총파업을 조합원 총회로 찬반을 묻겠다는 데서 절정에 달했다. 조합원 총회 카드는 보수적인 정규직 노동자들의 정서를 이용해 비정규직 투쟁을 가로막아보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2월 8일 진행된 현대차지부의 총파업 찬반투표 결과 공개는 금속노조의 요청으로 14일로 늦춰지긴 했지만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고, 조합원 총회 다음날인 12월 9일 비정규직지회는 1공장 점거농성을 해제했다.

 

 

 

 

방관자 금속노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진행되는 내내 금속노조는 현대차지부와 비정규직지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무력한 모습만 보였다. 3주체 회의에서 도출된 합의내용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거부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지를 현대차지부에서 거부할 때 금속노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경훈 지부장이 겉으로 매번 ‘아름다운 연대’를 운운하면서 현장에서 비정규직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날뛰는 동안 금속노조는 현대차지부 눈치 보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금속노조는 지난 11월 22일에 진행된 대의원대회 결정사항에 따라 12월 1일 중앙쟁대위를 진행했고, 중앙쟁대위에서 12월 3일 전조합원 잔업거부, 8일 4시간 간부파업을 결정했다. 중앙쟁대위에서 결정된 잔업거부와 간부파업은 지난 대의원대회에서 결의한 12월 총파업에 부합하는 결정사항은 아니었다. 이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중앙쟁대위 논의 과정에서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때문에 정규직들까지 파업하면 3일 만에 망한다’고 공공연하게 협박을 하고 다녔던 현대차지부 이경훈 지부장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금속노조가 총파업을 진행할만한 동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사실상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가 총파업을 진행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실질적인 총파업 동력의 문제를 차치했을 때 남는 것은 금속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을 진행하고 있는 투쟁현장에서 얼마나 현실적인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는지의 여부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현대차지부에 의해 가로막혀있을 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연대했어야 할 금속노조는 현대차지부의 비정규직 투쟁 파괴 행위에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고만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현대자동차 아산사내하청지회 송성훈 지회장이 지난 12월 7일 인터넷에서 밝혔듯이 금속노조 박유기 위원장은 3주체 회의에서 1공장 점거파업 유지를 줄기차게 주장했던 송성훈 지회장을 배제한 현대차지부의 행태를 모르는 척 동조하기도 했다.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지켜내지 못한 비정규직지회 지도부

 

점거파업 기간이 길어지고 단전과 단수가 반복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조합원들의 피로도는 점점 쌓여갔다. 점거농성이 한창이던 지난 12월 4일에는 사측에서 포클레인을 몰고 와 1공장 외벽을 부수기도 했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조합원들을 괴롭혔던 것은 현대차지부의 농성해제 압박이 사측의 공격만큼이나 거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비정규직지회 지도부는 3주체 회의가 거듭될수록 현대차지부와 금속노조의 압력에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비정규직지회로 이루어진 3주체 회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사수하기 위한 회의체라기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사측과 적절한 선에서 교섭으로 마무리하기 위한 통제장치로 기능했다. 3주체 회의에서 현대차지부의 입장이 전적으로 반영된 교섭 요구안이 만들어지면, 비정규직지회 지도부가 회의 결과를 비정규직 조합원들에게 보고하고, 비정규직 조합원들은 찬반토론을 거쳐 3주체 회의결과에 반대하는 양상이 1공장 점거파업기간 내내 반복되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비정규직지회 지도부는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3주체 회의에서 관철시키지 못했다. 3주체 회의가 열릴 때마다 매번 또다시 현대차지부의 의견이 전적으로 반영된 안을 들고 조합원들에게 돌아오게 되는 광경이 계속되었다. 11월 28일 비정규직지회의 독자적인 기자회견 이후 뜸했던 3주체 회의가 금속노조 중앙쟁대위에서 향후 파업 일정을 결정한 이후 다시 열리기 시작하면서 현대차지부의 압박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지난 6일, 현대차지부는 확대운영위에서 ‘조합원 총회가 예정돼있는 8일 이전에 사측과의 교섭자리가 마련될 경우 총회를 연기하고 비정규직 농성은 해제한다’는 결정을 일방적으로 내리고, 이것을 비정규직지회에 선전포고했다. 그리고 이에 화답하듯 사측에서 “12월 7일 15시 울산공장 본관1층 아반떼룸에서 특별협의체 개최일청을 요청드린다”고 현대차지부에 공문을 보냈다. 이어서 7일 예정돼있던 3주체 회의에서 줄곧 교섭을 위한 점거파업해제를 반대해 온 현대자동차 아산사내하청지회 송성훈 지회장이 현대차지부에 의해, 현대차지부를 포함한 3주체 모두의 암묵적 동의 아래 배제됐다.
이렇게 송성훈 지회장이 배제된 채 7일 3주체 회의가 진행되고, 이때부터 현장에서 비정규직 농성자들에 대한 현대차지부 간부들의 집단적인 회유와 협박이 집중됐다. 회유와 협박을 견디지 못한 백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농성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9일 오전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이상수 지회장이 조합원 총회를 개최했고, 조합원 총회 자리에서 3주체 회의때 논의된 교섭요구안을 보완한다는 조건 하에 농성해제 시기에 대한 결정권을 비정규직지회 지도부에게 위임할 것이 격론 끝에 결정되었다. 이상수 지회장은 곧바로 진행된 3주체 회의에서 결국 선농성해제를 받아들여 1공장 점거파업을 정리했다.
현대차 울산, 전주 비정규직지회 지도부가 아산 사내하청지회 송성훈 지회장이 3주체 회의에서 배제된 것을 묵인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비정규직지회 지도부는 사측의 공격과 현대차지부의 압박으로부터 비정규직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지켜내지 못했다.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동성기업 고용승계의 문제로 협소해지는 것을 우려했던 조합원들의 뜻을 받아 안지 못한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점거파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현대차지부 간부들의 회유와 협박, 비정규직지회 지도부의 동요, 농성해제 직전 사측이 개별 조합원에 대해 가하기 시작한 손배가압류 등 복합적인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1공장 점거파업을 넘어선, 그 이후의 전망 없이 이제까지 임해왔던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투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문제지점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향후에 또다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확산시키는 데 실패하고 말 것이다. 

 

선언이 아닌 실천이 필요해

 

1공장 점거파업이 끝나고 지난 10일 처음으로 노사 상견례 자리가 마련된 이후, 지난 14일, 21일, 28일 세 차례 교섭이 진행되었다. 교섭 자리에서 사측은 “교섭이 아니라 협의체”라는 말만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불법파견 정규직화에 대한 대책은커녕 동성기업 소속 비정규직 조합원들에게 전원복직이 아닌 선별복직안을 제시할 뿐이었다. 교섭을 위해 먼저 농성을 해제하라고 마르고 닳도록 외쳤던 현대차지부는 사측이 제시한 선별복직안을 비정규직 조합원들에게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앵무새처럼 되풀이해 빈축을 샀다. 
이렇게 동성기업 고용승계 문제마저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현장에서는 노사간 교섭과 무관하게 파업에 참가한 비정규직 조합원들에 대한 대규모 손해배상 청구와 징계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비정규직 조합원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다음 투쟁 계획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비정규직지회 지도부는 교섭에서 사측이 전향적인 안을 내오지 않으면 재파업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고 있는 운동단체들도 2차 파업에 돌입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2차 파업에 다시 돌입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지난 11월 15일 울산공장에서 1공장 점거파업이 시작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크고 작은 현장 활동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2차 파업에 돌입하려면 재파업을 하겠다고 선언만 하고 손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1차 점거파업의 열기가 식기 전에 더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끌고나가 재파업의 조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현장 활동의 계획과 실천이 필요하다. 
현재 비정규직지회 지도부는 1공장 점거파업 해제이후 교섭과 현대차지부만을 바라보고 있다. 14일에 공개된 현대차지부의 총파업 찬반투표는 모두가 예상했듯 부결되었다. 그러므로 현대차지부와 교섭일정에 얽매이지 않고 조합원들의 자발성을 밀어 올릴 수 있게끔 훈련이 돼야한다. 현대차지부의 압력에 얽매이지 않는 독자적 투쟁을 전개할 수 있어야 다시 투쟁에 돌입했을 때 승기를 잡을 수 있다.
만약 자기계획 없이 이대로 상황논리에 이끌려가다가 1월이나 2월 중으로 예정된 확정판결의 결과가 뒤집힐 경우, 걷잡을 수 없는 블랙홀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사측은 어떻게든 시간을 더 벌어보기 위해 확정판결이 나올 때까지 별 영양가 없는 교섭을 질질 끌고 갈 것이다. 확정판결에서 불법파견 판정이 뒤집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교섭에만 올인 하는 태도가 지속된다면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은 지지부진하게 전개될 것이고, 조합원들의 투쟁 열기는 시들어갈 것이다. 

 

비정규직노조의 주체성을 강화해야

 

1공장 점거파업은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의 물꼬를 텄다. 하지만 정규직화 문제가 단사만의 투쟁으로 실현될 만큼 쉬운 문제는 아니다. 이번 투쟁을 통해 정규직 조합원들의 태도는 이미 확인되었다. 정규직조합원들을 설득하기 위한 활동은 당연히 전개되어야 하지만 실제로 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지부가 중심이 되어 진행될 수밖에 없는 현재의 교섭구조에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와 욕구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규직화는 비정규직 투쟁의 전국적인 확산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1공장 점거파업의 흐름을 타고 얼마 전 고공농성에 돌입한 GM대우 비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지난 12월 23일 창원지방법원에서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냈다. 하지만 불법파견 판정이라는 것은 대중적 분노가 터져 나올 수 있는 “틈”에 불과하다.
이 “틈”을 최대한 활용하여 대중적인 투쟁을 만들어내고 압박할 주체가 강화되지 않는다면 불법파견 정규직화 쟁취투쟁은 소실될 것이다.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에 다시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정규직 전환이라는 목적과 함께 노동조합을 강화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 즉 파업에 참여했던 비정규직 조합원들을 주체화시키고 조직대상을 2, 3차, 한시하청 노동자로 확대하려는 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1차 점거파업 때처럼 조합원들의 자발성과 투쟁의지가 정규직 노조상층부와 충돌해 튕겨져 나오지 않도록, 향후 투쟁의 방향에 전적으로 반영될 수 있게끔 구조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비정규직지회 지도부의 쇄신과 3주체 회의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조합원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려면 가장 먼저 1공장 점거파업에 대한 조합원들의 집단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1공장 점거파업에 대한 평가토론이 진행되려면 전조합원 총회와 각공장별 조합원 총회, 각공장별 분임조 토론이 다시금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확정판결 이후에도 투쟁의 열기를 이어갈 수 있다. 1공장 점거파업에 대한 평가와 토론으로부터 조합원들의 집단적 불만이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출돼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모든 사내하청의 정규직화'라는 목표, 비정규직 노조의 주체적 힘이 강화되지 않고서는 사측과의 교섭도 진척될 수 없다는 것, GM, 아산, 전주  등 다른 비정규직 노조들과의 공동투쟁이 필요하다는 것 등이 확인되어야 한다.
불법파견 정규직화 쟁취투쟁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비정규직 주체들은 확정판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투쟁 국면을 조성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이전 투쟁 과정에 대한 평가,  사측의 탄압에 대한 집단적인 저항없이 교섭에만 의존한다면 기존의 오류가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조합원들을 향한 손해배상과 징계로부터 동성기업 고용승계문제마저도 지켜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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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호][FocuS]위키리크스, 자본가권력의 금기를 깨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1/26 14:28
  • 수정일
    2011/01/26 14:28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작년 12월15일 페이스북 창립자 마크 주커버그가 2010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전 세계 수많은 네티즌들은 즉각 반발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였다. 어산지는 온라인 투표에서도 1위에 올랐다. 올해의 인물이 갑자기 바뀌자 의혹이 제기됐다. <타임>은 도전보다는 안전을 선택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세계적인 이슈 메이커, 어산지에 대한 관심은 세밑까지 뜨거웠다.
해를 넘겨도 어산지에 집중된 세계의 이목은 여전하다. 어산지의 말 한마디가 뉴스가 되고, 화제를 낳고 있다. 특히 어산지가 신변 위협에 맞서 일종의 보험으로 내세운 ‘최후의 심판 파일’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최후의 심판 파일에는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알려졌는데, 인터넷을 통해 이미 배포된 상태다. 어산지가 암호만 공개하면 누구나 열어볼 수 있다.
인터넷 사용자 20억 명 시대, 위키리크스 사태가 불러일으킨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비밀문서 폭로 활동이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비밀주의와 정보공개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정보가 자본의 운동과 권력의 작동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은 가운데, 위키리크스 사태는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현대판 로빈후드

 

작년 11월 무려 25만 건에 달하는 미국 외교전문을 폭로한 위키리크스는 지난 2006년 12월 어산지가 설립한 네트워크 조직이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서 이름을 따왔다. 상근자는 10명 안팎이지만 전문적인 능력을 기부하는 협력자가 1000여 명, 각종 지원을 해주는 지지자가 1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을 만큼 국적을 초월한 최초의 네트워크 조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잇단 폭로로 위키리크스에는 ‘고발 전문’이란 말이 따라 붙는다. 어산지는 이런 위키리크스가 ‘과학적 저널리즘’을 개척했다고 자부한다. 과학적 저널리즘의 핵심은 뉴스를 제공할 뿐 아니라 그 근거가 되는 원문도 온라인에 함께 공개해 독자 스스로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다. 때문에 어산지는 위키리크스가 기존의 언론과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위키리크스로 새로운 형태의 언론이 출현했다고 말한다.
어산지의 남다른 열정은 그의 신념과 관련 있다. 어산지는 스스로를 ‘시장원리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한다. 어산지가 못마땅해 하는 건 시장이 아니라 왜곡된 시장 질서다.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시장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고 여긴다. 시장 참여자 사이의 정보 격차를 줄인다면 결국에는 국가와 기업에도 이익이 된다고 역설한다. ‘공정한 사회’야말로 어산지의 구호인 셈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유행했던 마이클 샌델의『정의란 무엇인가』가 떠올려지는 대목이다.
어산지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도 국가나 기업 자체가 아니다. 국가나 기업이 일삼고 있는 비윤리적인 행위다. 어산지는 자유와 정의가 결핍된 곳에서는 윤리적으로 무장된 시민의 저항이 불가피하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해커 시절에도 ‘뚫고 들어간 컴퓨터 시스템 망치지 않기’, ‘정보 변경하지 않기’, ‘획득한 정보 공유하기’ 등의 원칙은 지켰다고 한다. 윤리의 잣대로 어산지는 감춰진 정보의 공개가 부조리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네티즌들은 열광하고 있다. 어산지는 정의로운 반역자로 불리고 있다. 미국 정부의 탄압 공세에 순교자 이미지까지 덧씌워졌다. 그 영향력은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확대되었다. 작년 12월 7일 어산지가 영국 경찰에 체포되자, 유럽과 남미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어산지를 지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어산지가 호주 출신 때문인지, 호주에서는 1,000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기도 했다. 어산지가 보석으로 풀려나서야 집단행동은 잦아들었다.

 

 

△ 출처 : 민중언론 참세상

 

위키리크스 대전

 

위키리크스 사태가 뜨겁게 달아오른 데에는 미국도 한 몫 했다. 작년 11월 위키리크스가 미국의 외교전문을 공개한 건 2006년 이후 꾸준히 해오던 활동의 일부였다. 지난해만 해도 4월에는 이라크 민간인 학살 동영상을, 7월에는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학살 사례를 각각 공개했다. 미국이 벌이고 있는 전쟁의 추악한 진실은 다시 한 번 세상 밖으로 드러났지만, 그 당시 미국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미국은 태도를 싹 바꿔 발끈하고 나섰다.
미국은 위키리크스가 봐줄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고 보고 있다. 정부기관이나 공직자들의 비리나 비행을 폭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매우 위험한 행위라는 입장이다. 통상 미국의 외교문서는 몇 십 년이 지나 관계자들이 죽거나 은퇴한 다음에야 공개되는데, 위키리크스의 이번 외교전문 공개는 최근 3년간 미국 외교의 실체를 낱낱이 보여주었다. 모르면 모르는 거고, 알아도 모르는 척 해야 하는 외교의 원칙을 위키리크스가 깨버렸다고 난리가 아니다.
미국의 탄압은 가히 전방위적이다. 미국 정부는 호주 국적의 어산지에게 국내법인 간첩죄를 적용할 수 있는지 검토 중이다. 사법처리가 어려울 것이란 게 대체적인 전망이지만 만일 어산지에게 간첩죄가 적용되면 10년형에서 최고 사형까지 구형할 수 있다. 미 의회에서도 조지프 리버먼 상원의원을 중심으로 몇몇 의원들이 ‘반(反)위키리크스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법안에는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문건을 보도한 언론사에 대한 처벌까지 담겨 있다.
위키리크스에 대한 실질적인 압박은 사이트 폐쇄와 자금줄 차단이다. ‘아마존닷컴’, ‘테블로 소프트웨어’ 등 미국 서버 업체들은 위키리크스 사이트에 대한 서버 제공을 중단했다. 결제 서비스 업체 ‘페이팔’, ‘비자카드’는 위키리크스 후원금 계좌를 동결했다. 미국 최대 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도 위키리크스의 금융 거래를 차단했다. 어산지는 이 같은 탄압에 ‘디지털 매카시즘’, ‘비즈니스 매카시즘’이라면서, 위키리크스의 존재를 부정하는 미국에 강하게 반발했다.
위키리크스 사태는 시민사회 대 국가권력 간의 대결로 굳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면서 대결의 구도가 달라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기도 했다. 특히 러시아는 미국 외교가에서 푸틴 총리를 ‘부패하고 비민주적인 관료국가의 우두머리’로 묘사한 것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패권국가 미국을 향해 중국과 러시아가 동조하지 않는 목소리를 내는 모양새가 연출될 만큼, 이번 파문이 끼친 영향은 실로 전 세계적이었다.

 

아이러니

 

세계를 뒤흔든 위키리크스는 ‘폭로 저널리즘’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무게중심은 ‘폭로’ 쪽에 있다. 하지만 작년 4월까지만 해도 위키리크스는 폭로만 하진 않았다. 자신의 견해도 같이 밝혔다. 이라크 민간인 학살 동영상을 폭로하면서는 ‘부수적 살해’라는 제목을 단 편집 영상도 함께 공개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기존 매체와 차별화 하는 것에서 한 발 물러서기 시작했다. 자신의 입장에 비판이 뒤따르자, 이를 곤혹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기존 매체와 협력하는 방향으로 폭로의 방식을 바꾼 위키리크스는 미국 외교전문 폭로에서도 관련 자료를 미국의 <뉴욕타임즈>, 영국의 <가디언>, 독일의 <슈피겔>과 같은 매체에 사전에 넘겼다. 일제히 보도되도록 시점만 요구했을 뿐 다른 모든 작업은 이들에 맡겼다. 위키리크스는 어디까지나 ‘정보의 유통자’로 남았다. 물론 폭로의 충격파는 컸다. 위키리크스가 정보 공개에 따른 책임을 분산하면서도 정보의 광범위한 확산을 노렸다는 점에서,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들 매체가 주류 언론이란 점은 위키리크스에 족쇄가 될 수 있다. 사실 이번에 폭로된 미국 외교전문의 내용은 주로 외국 정상이나 국제기구 인사들의 사생활, 각국 외교 담당자들이 미국 외교 당국자들과 비밀스럽게 오간 얘기들이다. 25만 건 중 ‘외국전파금지’는 4330건, ‘비밀’은 1만 6652건에 그친다. 많은 수는 비밀로 분류되지 않은 것이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고, 미국의 격한 반응에 견줘본다면 대단치 않는 것들이다.
문제는 그런 정보마저 주류 언론에 의해 재구성되는 과정이다. 미국은 폭로에 가담한 매체들에 칼날을 겨누지 않았다. 보도 자제만 요청했다. 이들 매체에선 자체 검증팀을 가동시켰으며, 만에 하나 미국 안보에 위험이 되는 내용의 경우 미국 정부와 협의까지 했다. 국가 안보와 자기 검열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는 주류 언론의 한계는 여전했다. 위키리크스가 기존 매체의 영향력에 기대는 한, 위키리크스는 자신의 취지와 충돌하는 이들 매체의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위키리크스를 독단적으로 운영하는 어산지의 태도도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폭로의 날카로움은 위키리크스 외부를 향해서만 곤두서 있지, 그 내부에서는 전혀 다르다는 지적이다. 어산지가 위키리크스를 개인숭배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는 비판과 함께 후원받은 자금의 사용처에 대한 의문도 잇따르고 있다. 일부 위키리크스 출신 활동가들이 위키리크스 내부의 실종된 민주주의에 반발해 새로운 정보공개 사이트 ‘오픈리크스’를 출범시킬 것이라는 얘기마저 흘러나오고 있다.

 

자본, 권력, 비밀

 

 

△ 출처 : 민중언론 참세상

미국의 탄압에도 위키리크스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되레 더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미국의 사이트 폐쇄 조치에 위키리크스는 스위스 서버 업체 ‘스위치’의 도움으로 한 숨 돌리게 됐다. 사이트 주소는 wikileaks.org에서 wikileaks.ch로 바꾸었다. 후원금도 늘고 있다. 지지자들은 개인 블로거의 계좌를 통해 송금하는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위키리크스를 살리겠다고 나서고 있다. ‘용기에는 전염성이 있다’는 위키리크스의 구호는 현실에서 증명되고 있다.
위키리크스 사태는 온라인 세상에서 기존 권력이 항상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 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강력한 수호자’임을 자임해 온 미국의 위선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미국이 ‘위키리크스 때리기’에 몰두하면서는 국가 검열의 사유화가 어느 정도인지 그 실상이 확인되기도 했다. 누가 정부고, 누가 기업인지 모를 만큼 탄압에는 한 목소리가 났다. 위키리크스는 박멸해야 할 테러조직일 뿐이었다. 이 모든 게 ‘자유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에서 벌어졌다.
이는 그 동안 기업이나 국가의 불법적 또는 비윤리적인 행위들이 얼마든지 합법으로 용인되어 왔음을 뜻한다. 기업과 국가 간의 단단한 유착 관계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비단 미국 뿐 아니라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다. 위선의 장막을 조금만 걷어낸다면 어디든 비리와 부패, 그리고 그것들을 비밀로 감싸는 침묵의 짬짜미를 확인할 수 있다. 위키리크스는 그 실체를 보여주었을 따름이다.
남한 사회에서도 비밀주의가 판을 치긴 마찬가지다. 천안함 사건의 진실은 끝내 공개되지 않았다. 한미FTA 재협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밀실 협상으로 진행되었다. 정권만이 아니다. 기업에서도 영업 비밀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시민사회단체들이 백혈병 관련 자료를 요구해도 수년째 영업 비밀을 내세워 뻗대고 있다. 유해 물질에 노출된 노동자들의 잇단 죽음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다. 오로지 기업의 이윤만이 중요할 뿐이다.
어산지는 부조리없이 투명한 자본주의를 꿈꾸고 있다. 어산지는 부조리 없는 투명한 세상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자본가들의 사적 소유와 사유재산 보호를 신성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밀주의는 당연한 속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착한 자본주의’, ‘건강한 자본주의’가 실현된다 해도 지배 질서의 금기가 깨지지 않는 한 달라질 것은 없다. 어산지의 바람대로 정보 격차가 줄여질 수는 있어도 해소될 수는 없다.
위키리크스 사태는 정보공개를 세계적인 쟁점으로 부각시켰을 뿐 아니라 정보공개를 바라는 목소리가 대중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는 가능성까지 보여주었다. 위키리크스 지지자들은 사이버 공간에 머물지 않았다. 어산지가 체포되었을 땐, 세계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시위가 조직되기도 했다. 앞으로도 정보공개에 대한 요구는 대중의 요구로 적극적으로 제기되고, 대중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으로 강화될 필요가 있다. 정보공개 운동이 실질적인 대중운동으로 나아가게 될 때, 자본과 권력이 그토록 감추고 통제하려는 온갖 비밀의 실체 역시 대중 앞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위키리크스 폭로, 어떻게 이뤄지나

 

하와이 말에서 ‘위키위키(wikiwiki)’는 ‘빨리빨리’란 뜻이다. ‘리크스(leaks)’는 유출, 누설을 말한다. 이런 ‘위키리크스(wikileaks)’에서 폭로하는 과정은 직접성, 익명성, 집단지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우선 누구나 쉽게 내부 고발을 위한 정보를 위키리크스에 제공할 수 있다. 이것이 직접성이다. 내부 고발자가 정보를 위키리크스에 올리는 순간부터는 익명의 인터넷 접속을 보장하기 위한 기술이 가동된다. 그 중 하나가 ‘토르(tor)’다. 토르는 적군에 노출되지 않는 통신을 위해 미 해군이 개발하다 중단한 것을 해커들이 재활용한 기술이다. 제출된 정보에 대해선 내부 고발자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한 암호화 과정도 이어진다. 익명성이 보장된 다음에는 정보의 신뢰성에 대한 검증이 이뤄진다. 소수의 전문가들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와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이 직접 참여해 정보가 악의적인 것은 아닌지 검토한다. 집단지성의 단계까지 거치고 나서야 위키리크스는 그 정보를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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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호][노동]2011년 : 간접고용 확대와 복수노조 시대에 대응해야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1/26 14:20
  • 수정일
    2011/01/26 14:20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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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정부의 전략

2011년에는 정부가 지난 10월 발표한 ‘고용전략 2020’을 실현하기 위한 정책이 하나씩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고용전략 2020’의 목표는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로 고용률 70% 이룰 것”이라는 박재완 고용노동부 장관의 발언에서 잘 드러나듯 비정규직의 전반적 확대이다. 명시적 실업률을 낮추는 동시에 노동유연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기존 비정규직이 주로 기간제나 파견제 위주였다면 노동시간을 자본의 입맛에 맞게 쪼갠 시간제 일자리는 노동시간 감축에 비례해 임금도 감소한다. 결국 임금삭감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로 귀결된다. 이 제도는 공공기관과 여성노동자가 많은 사업장에서 우선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질질 끌어왔던 비정규법 개정을 통해 기간제한 없이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는 업종을 확대하고, 불법파견이 활발한 업종을 파견허용업종으로 변경하여 파견·간접고용을 전 산업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불법파견 투쟁의 근거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노동계의 반발이 예상된다.

 

 

법·제도 통한 노조무력화 공세 이어질 듯

 

작년 타임오프제 강행을 통해 보여주었듯이 정권 차원의 노조무력화 공세가 계속될 전망이다. 새해벽두부터 타임오프를 이면합의한 노조간부들을 형사처벌하려는 시도가 포착되고 있다. 12월31일 단체협약 시정명령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포항·경주 지역 7개 금속노조 지회가 입건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법적처벌은 기아자동차와 같은 대공장노조를 직접 겨냥하기보다는 단순한 압박용 카드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고용노동부는 “조합원 1천명 이상인 민간기업과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타임오프 이면합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점검할 방침”이라며 관련한 사이버 신고센터를 운영하고 내부고발 및 제 3자의 고발을 받을 계획이다. 이외에도 ‘3대 쟁의질서 개선과제’로 ‘생산라인 점거, 불법 피케팅, 공격적 직장폐쇄’ 집중지도를 통해 현장투쟁을 직접 통제하고 탄압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2011년 노사관계의 핵심, 복수노조 허용

 

올 7월1일부터 기업별 단위에서 복수노조가 허용된다. 97년 민주노총 합법화와 함께 초기업별 복수노조, 즉 산별노조는 인정되었으나 기업별 복수노조 허용은 14년째 유예되어왔다.
노동자들의 복수노조 요구가 거셀 때 자본은 복수노조 허용의 문제와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서로 맞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법 개정안 논쟁이 한창이었던 2009년 말에는 자본가들 사이에서도 복수노조를 둘러싼 이견이 존재했다. 당시 경총은 “복수노조로 인한 혼란과 폐해는 노사관계 불안을 조장하고 기업 경쟁력의 악화로 이어”진다며 완곡하게 반대 의견을 밝혔다. 반면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복수노조 허용을 찬성하며 ‘복수노조 3년 유예’를 검토할 수 있다는 경총의 입장에 반발해 경총을 탈퇴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입장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친자본 성향의 이경훈을 지부장으로 한 노조를 두고 어용노조를 만드는 것이 오히려 현재의 노사협력 분위기를 깰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경영계의 한 관계자는 “자칫 사측에서 다른 노조를 지원했다가 현재 노조 내 온건·합리파까지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고민이 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자본가들은 복수노조 시대에 대응태세를 갖추는 모양새다. 여기서 핵심은 교섭창구단일화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복수노조 허용에 따라 노사관리 비용상승과 혼란이 우려되었지만 교섭창구단일화 제도를 통해 일정정도 해소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노조설립의 최소요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교섭창구단일화가 실시되면 우선 자율적으로 교섭창구단일화를 하게 된다. 하지만 단일화가 되지 않으면 과반수이상의 노조로 교섭창구를 단일화하고 과반수노조가 없을 때에는 조합원 수에 비례해서 공동교섭대표단을 꾸리게 된다. 그러나 조합원 수가 10% 미만인 노조는 공동교섭 대표단에서 제외되므로 소규모노조는 설립되더라도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보장되기 어렵다. 또한 개정된 노동법에 따라 지금과 달리 초기업노조 역시 이러한 조건을 따라야 하므로 금속노조나 보건의료노조 등의 민주노총 소속 산별노조가 교섭에 참여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조직노동운동

 

민주노총은 큰 틀에서 2011년을 2012년 권력교체기를 앞둔 시점으로 파악하고 “비정규직 문제해결”과 “민중복지”를 핵심사업 목표로 잡고 있다. 상반기에는 최저임금을 가지고 ‘국민과 함께하는 임금투쟁’을 집중적으로 벌일 계획이다. 그리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과 타임오프와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 등 노조법 재개정을 위해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노동관련법 전면 재개정 범국민본부’(이하 ‘범국본’)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제출한 계획에는 기층을 조직하고 투쟁을 지원하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대신 상층중심의 이슈화사업이 자리 잡고 있다. 민주노총이 5월까지 구성할 예정인 범국본은 사실상 시민사회단체, 야당을 중심으로 꾸려질 예정이다. 현장에서 교육과 투쟁을 조직하는 계획보다 야당과의 연대사업이 핵심이다.
이러한 민주노총의 일정은 2012년 대선을 준비하는 흐름 위에 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민주노총은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연대에 편승하여 대선 이후의 위치를 보장받을 심산인 듯하다. 때문에 상반기에 집중하는 최저임금투쟁 역시 ‘대국민 캠페인’을 통한 이슈화에 그칠 것이다.

 

대공장 정규직 운동

 

지난 11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장점거파업을 진행할 당시 현대자동차지부(이하 ‘현대차지부’) 집행부는 “아름다운 연대”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투쟁을 통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단순히 정규직 집행부 몇 명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차지부의 연대파업 찬반투표 부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규직 조합원들 내에서 비정규직 투쟁을 통제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올해 현대차지부는 단협갱신을 앞두고 전임자 임금지급 문제와 복수노조 문제를 한꺼번에 직면하게 되었다. 남은 임기동안 “혼란보다는 안정을 위한 집행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이경훈 지부장의 발언이나 2년간 무쟁의로 임단협을 마무리한 것으로 볼 때 타임오프를 이면합의한 기아차지부와 비슷한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복수노조 허용에 대해 대공장 정규직노조들은 일제히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노조법 개정 논란이 한창이던 2009년 말, 현대차지부와 기아차지부는 소식지에서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어용노조가 설립되어 기존의 ‘건강한 계급적 노조’가 공격받을 수 있다는 우려를 밝히기도 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복수노조를 찬성하는 민주노총의 입장과 반대되는 것으로 대공장노조가 안정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타임오프제와 마찬가지로 복수노조에 대한 대공장노조의 불만이 실질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미 안정된 교섭력을 바탕으로 파트너십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및 투쟁사업장

2010년 7월, 대법원 불법파견 판결은 그 동안 침체되어 있던 대공장 사내하청 투쟁이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열망은 폭발적인 노조가입과 자발적인 현장투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동성기업 노동자 해고로 촉발된 1공장 점거농성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다른 사내하청노조로 이어져 현대차 비정규직 공장점거 직후 GM대우비정규직지회는 부평공장 정문 위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는 독자적인 교섭력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규직노조 통제의 벽을 뚫지 못했다.
때문에 2011년 대공장 사내하청운동은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다. 아직 대중적 투쟁의 분위기가 남아있는 현대차에서 노조를 확대강화하고 주체를 형성할 수 있는 투쟁이 필요하다. 이러한 성과를 쟁취한다면 이후 비정규직 투쟁이 확대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생존 위한 대기업 구조조정

 

한진중공업 부산공장에는 2009년의 쌍용자동차처럼 정규직의 정리해고가 예고되어 있다. 2년 동안 선박을 수주하지 못한 것을 이유로 사측은 400명에 대한 정리해고 계획을 노조에 통보한 상태며 5일 명단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노사협상 재개로 연기한 상태다.
한진중공업은 2010년 초에도 400명 규모의 구조조정을 발표했으나 노조는 인위적 정리해고를 중단하고 선박수주 노력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하지만 이후 3천 명이 넘는 비정규직이 해고되었고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정규직 정리해고가 추진되고 있다. 이는 한진중공업이 필리핀 수빅조선소로 집중하여 세계 조선산업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으로 철회되기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현재 노조의 입장은 투쟁보다는 야당과 연계한 정치적 압력을 통해 구조조정 규모를 최소한으로 하는 방향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때문에 다시 대공장 정규직의 투쟁이 터질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미조직분야에 노조건설 흐름 이어져

최근 몇 년 동안 공공기관과 학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결성과 그에 따른 투쟁이 활발했고 2011년도 예외는 아니다. 얼마 전 동국대 미화노동자들이 본관점거와 삭발투쟁을 통해서 복직했다. 최근에는 홍익대에서 용역업체 계약해지로 해고된 174명의 미화노동자들이 본관농성을 하고 있다.
한편 전북에서는 한국노총 소속이었던 버스노조들이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근로기준법 준수를 쟁취하기 위한 파업에 돌입했다. 한국노총 간부들이 자신들의 급여만 인상하고 조합원들을 무시한 것에 반발한 것이다. 이들은 직장폐쇄와 시도 관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농성과 파업을 이어가고 있다.

 

수도권장기투쟁사업장

 

G20 국면에서 기륭과 동희오토 투쟁이 정리된 이후 수도권에는 GM대우비정규직지회와 학습지노조 재능지부가 남아 있다. 기륭과 동희오토의 경우 복직에 합의가 되긴 했으나 유예기간이 길기 때문에 향후에 합의내용을 강제하는 투쟁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GM대우비정규직지회는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현재 벌이고 있는 공장정문 고공농성과 지회장 단식을 진행 중이다. 재능지부의 투쟁은 3년을 지나고 있다. 작년 말부터 사측은 노조의 뿌리를 뽑기 위해 노조에 가입해 있다는 이유로 해고를 일삼고, 현장에서 노조탈퇴를 위한 공작이 극심하게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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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호][한반도]2011년 : 평화에 대한 열망이 커지고 있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1/26 13:52
  • 수정일
    2011/01/26 13:52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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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이후 남북관계

 

작년 3월26일 천안함 침몰 이후, 남북관계는 다시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천안함사건이 일어나기 직전만 해도 보스워스 미국 특사가 북한을 방문하고 6자회담 재개와 3차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이 점쳐지는 등 해빙무드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천안함사건은 이 모든 것을 무로 돌려놓았다. 정부는 아직도 천안함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제시한 증거들에 대한 반증이 계속 제기되고 있으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천안함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예상된 바였다. 조중동 등 우익언론에서는 처음부터 이를 이용하여 의도적으로 북풍몰이를 했지만, 실제로는 선거를 앞둔 의혹제기에 그칠 뿐 명확히 북한의 소행이라고 규정하진 못하리라는 것이 대다수의 예측이었다.
그러나 남한정부는 예상을 깨고 천안함 사건을 북한의 소행으로 못 박는 무리수를 두었다. 때문에 남한정부는 끝내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국제사회를 설득하지 못했다. 천안함 사건이후에도 남북관계 악화는 계속됐고 마침내 지난 11월23일 연평도 포격사건이 벌어졌다. 12월20일 남한이 연평도 해상사격 훈련을 강행하면서 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서울 불바다” 발언 이후 최대의 위기상황이 조성되었다.

 

 

오락가락하는 MB 대북정책

 

클린턴 정부에 이어 등장한 부시정권은 집권초기부터 대북강경 기조를 내세웠다. 부시정권은 클린턴 정부가 북한 핵에 대해 지나치게 무른 대응을 했다고 비판하며, 사실상 북한을 고립·압박·붕괴시킨다는 전략을 사용했다. 미국 정부는 인권단체들을 지원하며 북한을 강하게 압박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북압박 정책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불러왔을 뿐이었다. 결국 이라크 전쟁에 지친 부시 정권은 정권 말기에 들어 북미대화를 시작했다.
북미 화해무드는 2007년 영변 핵시설 폭파에서 정점을 이뤘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는 다음 정권에서 “북미정상회담→남북정상회담→남북평화협정 체결”의 수순을 밟을 것으로 점쳐졌다.
이런 상황은 미국의 태도에 영향을 강하게 받는 남한의 보수 세력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2007년 한나라당은 새로운 대북정책인 ‘한반도 평화비전’을 제출했는데, 이 정책은 ▲비핵평화체제 착근 ▲경제공동체 형성 ▲통행·통신협력체제 기반 구축 ▲인도적 협력·지원 ▲인권공동체 실현을 핵심 과제로 제시하여 햇볕정책의 내용을 상당부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명박이 후보시절 제시한 ‘비핵개방 3000’ 정책도 사실상 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비핵개방 3000’은 쉽게 말해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하면 국제사회와 협력해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을 3천 달러를 만들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이회창은 이명박의 대북정책이 햇볕정책과 다를 바 없다는 이유를 출마의 주요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부시 정부나 조중동 등 국내 우익세력이 주장하는 붕괴론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주도자들은 자신들이 대북강경주의가 아니라 중도실용주의자라고강조하고 있다.
햇볕정책의 지지자들은 이명박의 대북정책이 북한 핵의 선(先) 폐기를 주장하고 있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비핵개방 3000’이 북핵의 선폐기를 배타적으로 주장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비핵개방 3000’은 2007년 당시 북핵의 단계적 폐기가 진행되고 있던 상황에서 핵 폐기 단계에 맞추어 북한을 지원을 하겠다는 주장이었다.
문제는 MB정권의 외교노선의 근간이 기본적으로 친미주의라는 데에 있다. 비핵원칙도 사실상 미국의 입장을 그대로 이야기한 것에 다름 아니다. 당시에 어느 정도 실용적으로 보였던 대북정책이 미국의 노선 변화에 따라 오히려 강경정책으로 전화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질서가 미국과 중국의 양강 대결구도로 재편되면서 한반도는 이들 양대 강대국 사이에 끼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노무현의 ‘동북아 균형자론’은 점차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과 여전히 군사·경제·문화적으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군사·외교적인 독자성을 가지겠다는 노선이었다.
반면 현재 MB정권의 외교안보 정책담당자들은 한미동맹 강화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 이런 태도는 결국 남한이 기댈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라는 신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런 친미 노선은 결국 미중 대결구도가 강화될수록 점차 중도실용이 아니라 대북 강경책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긴장 강화를 가장 바라고 있는 것은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미국정책기조의 변화

 

천안함 사건이 터지자, 조중동 등 우익언론은 즉각 북한정부의 공격에 의한 침몰이라고 몰아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하지만 이명박이 최초로 보인 반응은 신중하게 대처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조중동 등 우익세력과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이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조중동을 중심으로 한 남한의 우익세력은 사실상 미국 부시정권과 같은 북한 붕괴론과 흡수통일론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는 사실상 네오콘의 노선과 동일한 것이었으며 부시 정권에서도 임기 말기에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철회한 것이었다.
세계 양대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고 있는 한 북한 정권이 90년대 초반 동구권 국가들처럼 급작스럽게 붕괴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군이 주둔하는 국가와 직접 국경을 맞대기 싫어하는 중국은 경제지원을 통해 북한 정권의 붕괴를 막고 국제사회에서도 북한의 후견인 노릇을 하며 북한을 완충지대로 활용하고 있다. 남북 관계가 좋지 않았던 최근 몇 년 동안 중국과 북한의 경제협력은 중국의 만주개발과 함께 엄청나게 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동 등 우익언론들은 줄기차게 북한 정권이 불안하다는 보도를 쏟아내 왔다. 그리고 최근 3대 세습이 결정된 이후 이러한 보도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정보가 대단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실제로 이러한 보도가 얼마만큼 사실일지는 거의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중동 등과 MB정권의 차이는 결국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집권세력과 이데올로기 세력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연평도 사태이후 MB정권 역시 “주시해야 할 것은 북한 지도자들의 변화보다 주민들의 변화”라거나 “북한 주민들이 대한민국이 잘 산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중대한 변화. 통일이 가까워지고 있다”며 북한의 급변사태를 예고하는 듯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정권의 태도는 미국의 영향이 크다. 오바마 정권이 들어서면서 북미관계가 풀릴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으나 결과는 오히려 더욱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까지 오바마 정권은 국내 문제에 있어서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대신 대외정책, 특히 중국과 북한에 대해 강경하게 나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 전략가들은 카터 정권 이후 안보문제에 약하게 처신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공화당에 주도권을 뺏기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민주당 안에도 북한·중국·이란에 대해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기류가 만만치 않게 존재하고 있으며, 지난 94년 제네바 합의 때도 클린턴 정권이 너무 밀린 것 아니냐는 여론이 일면서 중간선거 패배에 일조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실제로 작년 중간 선거를 앞두고 오바마 정권은 북한에 대해 압박으로 일관했다. 중국에 대해서도 집권 초기부터 인권문제를 내세우며 대립각을 세웠다.
중간선거는 민주당의 패배로 돌아갔지만, 더욱 큰 문제는 중국이 미국의 강력한 경쟁대상으로 떠오르면서 중국을 군사·경제적으로 견제, 압박하고자 하는 미국의 욕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연평도 포격 : 중국-북한 vs 한미일 삼각동맹

 

중국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만난 가장 강력한 적수로 성장하고 있다. 소련은 애초부터 경제적으로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결국 무리한 군비경쟁 끝에 붕괴했다. 한때 경제력에 있어 미국의 턱밑까지 추격했던 독일이나 일본은 군사적으로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는 약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플라자 합의 같은 인위적인 환율조정을 강요하여 이들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환율을 둘러싼 중미의 대립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중국은 독일·일본과 달리 중국은 미국에 고분고분할 이유가 전혀 없다. 현재의 추세라면 중국경제는 15~20년 내로 미국을 추월할 가능성이 높다. 경제성장에 발맞추어 군비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미국경제에 폭탄으로 작용할 수 있는 막대한 양의 미국 국채를 가지고 있다.
미국은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이 더 성장하기 전에 최대한 견제장치를 마련해 놓으려 한다. 미국은 이를 위해 미사일방어체제(MD)를 고리로 한미일 삼각동맹을 구축하고자 하고 있다. 이는 아시아판 나토(NATO)를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유라시아 대륙의 양끝에서 잠재적인 적대국들인 중국·러시아·이란을 압박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전 단계로 한일군사협정 체결 등이 필요하지만 반일정서가 강한 남한에서 유사시에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등의 내용이 포함될 수 있는 한일군사협정이 사회적 동의를 받기는 상당히 어렵다.
북한의 위협으로 인한 한반도 긴장 강화는 미국에게 있어 그러한 구상을 추진할 수 있는 가장 큰 명분이다. 만일 한반도 긴장이 완화되어 남한 국내에서 전시작전권 환수, 나아가 주한미군 철수 등의 논의가 본격화된다면 미국으로서는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미국은 천안함 사태이후 대화를 요구하는 북한에 대해 일체의 회담을 거부하고 계속 압박하며 군사적 긴장을 높여오고 있다. 최근 군사적 긴장이 극에 오른 상황에서 한일군사협정 체결 논의가 오고가고 있다는 것은 한반도 긴장 강화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미국정부의 이러한 태도야 말로 북한으로 하여금 연평도 포격과 같은 강수로 군사·외교적 압박에 대응하도록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한과 중국의 유착관계는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북한 정권의 핵에 대한 집착은 더욱 커지고 있다.

 

계속 이렇게 갈 수 있을까

 

하지만 미국과 남한의 입장에서도 이런 식의 대결구도를 계속 밀어 붙일 수는 없는 일이다. 최근 미국의 <폭스뉴스>는 북한이 이란과 공동으로 핵실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중동이나 다름없는 <폭스뉴스>의 보도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보도는 북한의 핵기술이 이란으로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미국의 불안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북한의 핵보유 자체는 미국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지 못할 수 있지만, 북한이 이란에 핵시설을 제공하여 이란이 핵보유국이 된다면 이는 여전히 중동에 우선적인 전략적 관심을 갖고 있는 미국에게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남한도 마찬가지다. 남북관계의 불안과 안보문제의 부각은 오히려 보수파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있다. 이미 6·27 지방선거 결과는 북풍이 더 이상 먹히지 않으며 국민들의 평화에 대한 열망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정권 인사들 대부분이 군면제자인 상황에서 한반도 긴장의 강화는 정권의 안보무능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때문에 한나라당 지도부에서조차 강경 일변도의 대북정책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남한자본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이미 개성공단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했음에도 노동력과 시장을 중국에게 뺏기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다. 또 남북관계의 불안은 시장에서 투자자금이 빠져나가게 하여 주가가 폭락하는 경제적 혼란을 빚을 수 있다.
북한의 평화공세 역시 부담이다. 북한은 이미 여러 차례 회담 재개를 주장해왔고 남한과 미국이 여러 가지 이유로 회담을 거부해왔다. 1월5일 북한은 다시 한 번 무조건 회담을 재개하자고 제안했다. 이런 거듭된 북한의 외교 공세는 현재 한반도 불안의 원인을 미국과 남한의 책임으로 돌리는 효과를 낳고 있다.
전쟁 각오를 다지던 이명박이 6자 회담 수용 입장을 갑자기 밝힌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 역시 일단 중간선거에서 패배한 민주당이 긴장관계가 극한으로 치닫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1월19일로 예정된 중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관련된 모종의 합의가 도출될 가능성이 높다.

 

평화에 대한 열망

 

MB정권은 원래 작년 G20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이후, 남북관계의 극적인 반전, 국내 정치권과의 통 큰 화합을 통해 이명박을 평화와 화합의 상징으로 부각시켜 집권 후반을 화려하게 장식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내일신문>에 의하면 “보수인사 중심이었던 대통령 외교안보자문단도 중도나 개혁적 전문가까지 포괄해 개편하는 안을 확정짓고, 명단까지 작성했다”고 한다.
남북관계가 안정화될 때, 남한자본이 얻는 이득은 상당히 크다. 남북관계의 불안 때문에 남한의 주가가 항상 실제보다 저평가 되어 있다는 소위 “코리안 디스카운트”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한반도의 안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북한이 적극적으로 평화를 요구하고 있을수록, 평화에 대한 갈망이 높아질수록, 북한문제가 대선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변수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여전히 미국이다. 미국이 한반도 긴장을 계속 바라고 있는 한 남북관계가 당사자들의 이해만을 가지고 풀리기는 어렵다.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이 널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북한정권도 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연평도 포격 등의 도발과 평화회담 공세 등 당근과 채찍 전술을 통해 대화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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