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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02
    야만의 세상과 비폭력.
    초원

야만의 세상과 비폭력.

 

 

 

 

 

 

 

 

 

 

 

 

 

 

 

 

 

 

나는 다시 보았다. 물대포에 맞아 온몸이 젖어 벌벌 떨던 이른 아침에 끝이 보이지 않는 전경들이 새까만 하이바를 반짝거리며 달려 오는 것을 보았다. 광기에 서린 눈으로 방패를 땅바닥에 두드리며 미친개의 웃음처럼 무엇에 홀린 듯 미소 지으며 여학생들의 머리채를 잡아 당기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가 울음 섞인 고함을 내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피에 젖은 붕대들을 보았다.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도망가는 나의 그림자를 보았다. 거리 위 붉게 충혈된 눈동자들을 보았다. 우리의 바리케이트를 짓밟는 전경들을 보았다.
 
31일에서 1일 아침까지의 효자동, 삼청동, 안국동은 현재 대한민국의 야만성을 여과 없이 보여 주었다. 나는 그런 야만을 질리도록 봐왔다고 생각했다. 야만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 존재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것들을 외면했고 보수 언론과 수구 권력에 세뇌 당해 있었다. 그래서 인지 일주일 전의 촛불 시위에서 시민들이 방패로 몇 대 맞아 가며 연행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솔직히 나는 별로 분노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분노하는 시민들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그것보다 더 했던 지난날들의 야만스러웠던 폭압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그들이 얄밉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시민들에게 몰아친 폭압들은 그 따위 낡은 회상에 잠겨 있을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이번 촛불 집회를 참가하는 사람들은 조직화 되지 않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의 집단이 대부분이다. 시위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운동권적인 색체를 띠려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려는 모습이었고 시위의 방법에서도 오히려 너무 막연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비폭력의 방법을 유지하려는 분위기였다. 나는 시민들의 그런 자발적인 저항에서 새로운 대안을 발견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다른 운동권들과 마찬가지로 한발자국 뒤에서 시민들의 저항을 지켜 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운동권과 시민들을 구분 지으며 서로의 장단점을 융합시킬 수 없게 되었던 동안에도 권력과 저항을 통제할 수단을 가진 자들에게 우리 모두는 그저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회 불만세력들일 뿐 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시민과 운동권 따위의 구분은 없었다.
 
자발적으로 시작된 집회는 그 스스로의 창의력으로 지금의 모습까지 발전했다. 초기의 촛불시위가 예비군과 의료진 등 색다른 저항 방법들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자발적 집회의 수평적인 의사소통과 토론의 창의력들이 매우 주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제의 집회까지. 거리 위의 정치. 저항의 발전은 이제 새로운 고민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그것은 야만스럽게 내리치는 가진자들의 폭력에 대한 결과물이다. 이때 거리 위의 모든 대오를 그저 억압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며 구분 짓지 않는 권력에 대항에서, 소위 운동권의 집단들은 발전된 철학적 사유와 투쟁 전술을 위장하지 않으며 숨김없이 드러내며 자발적 토론의 장에 참여 해야 한다. 이제는 모두가 시민의 한 사람이 되어 변혁에 대한 주체적인 한 걸음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주체적인 창의력과 권력의 억압이라는 환경이 변증법적으로 결합해서 새로운 모습의 ‘합’을 만들어 내려 하고 있다.
 
비폭력과 폭력에 대한 토론에서 시민들의 대부분은 아직 비폭력의 노선을 이 시위의 절대적 가치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31일에서 1일 아침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점차 대오 스스로의 방어적인 폭력 수단을 수용하자는 사람들도 늘어 나고 있다. 그런데 비폭력에 관한 절대적 가치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졌고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시민들은 마치 성숙된 시민의식과 비폭력의 원칙을 동일시 하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은 폭력에 관한 잘못된 이해와 보수언론과 수구 권력들의 역사적인 행태에 기인 한다. 먼저 소수의 사람들이 혁명적인 폭력수단을 통해 원하는 가치를 이뤄내려는 역사적인 투쟁 전략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방어적 수단의 폭력마저 정당성을 잃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실패한 저항의 폭력들은 단지 형체 없는 이데올로기나 관념에 의해 공격적으로 위기를 선도하려던 폭력들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언론과 수구 권력들이 말하는 폭력 시위를 폄하는 근거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로서 기능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논거의 정당성으로 인정 될 수 없다.
 
저항의 기본적인 성격은 본래적으로 폭력적이다. 몰아치는 구조의 폭력과 권력의 폭력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 저항이라면 그것은 방어적인 형태의 폭력의 모습을 띄게 되는 것이다. 거리를 점거하고 교통의 흐름에 지장을 주는 것도 폭력이고 전경의 무리를 향해 물병을 던지는 행위도 폭력이다. 커다란 구호를 외쳐 도시의 조용함을 깨는 것도 폭력이며 저들이 만들어 놓은 법의 테두리를 박차고 일어 나는 것도 폭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의 폭력성은 직접적 의사 표출 수단이 막혀있는 권력적 구조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민주적인 형태의 의사표출 방식이다. 촛불시위의 형태가 거리점거로 바뀌게 되고 전경을 향해 물병을 던지게 되는 형태로 까지 발전 한 것은 이러한 민주적인 대중의 주권 표출 방식인 것이다. 비폭력의 원칙은 벌써부터 조금씩 무너졌고 우리는 그 과정의 발전을 분명히 인식하며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
 
사회정의는 사회질서에 우선한다.홍세화
 
 무엇보다도 폭력에 관한 고민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권력과 구조를 점유하고 있는 높으신 분들이 그 제도상의 폭력성으로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경우 우리는 방어적 형태의 폭력을 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지금의 촛불시위를 불법 폭력 시위로 규정하려는 수구 언론들의 노력들과 마찬가지로 여태까지 시민들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노동자 농민 빈민들의 시위 또한 마찬가지의 취급을 당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구 언론들이 만들어낸 사회질서의 틀은 아직까지 많은 시민들의 머릿속에 내재되어 정당한 방어적 폭력의 행사를 가로 막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 되어야 할 것은 4.19나 광주항쟁 6월 항쟁의 단편적인 사실들이 아니라 그러한 주체성들이 어떻게 발전되었고 그 주체성들이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지금의 촛불시위가 단지 4.19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만 할 뿐인 발작적인, 단발마적인 집회로 되풀이 된다면, 우리는 망월동 광주 5.18 추모관 피 묻은 태극기 위에 걸려있는 이 말을 다시 되새기게 될 것이다.
 
“ 과거를 기억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아직 비폭력을 말하며 자신이 이미 폭력의 영역에 들어와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거리시위 참가자들의 일부는 그 근거를 과연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일부 사람들이 예로 드는 간디의 경우에는 그 논거를 종교적인 이유에서 찾았고 종교색이 강한 나라였던 인도국민들은 그 비폭력 시위에 동참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설정하는 비폭력과 폭력의 기준선은 어떻게 정해졌는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역사적 경험으로 존재하는 방어적 폭력들의 발전경로여야 한다. 근거 없이 설정된 비폭력에 대한 절대적 가치는 우리가 방저적 폭력의 발전상에 대한 고민을 해 나가려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해 버리는 전경버스 같은 바리케이트가 될 뿐이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방어적 폭력의 발전 경로를 기억하고 실천하자는 말을 듣고 다시 화염병이나 죽창과 쇠파이프를 떠올린다면 그것은 아직도 운동권과 시민을 구분 짓는 낡은 상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앞서 말했듯 이제 우리는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의 일부로써 과거 경험의 장단점과 거리위의 창의력을 보완해서 새로운 상상을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방어적 폭력의 발전경로를 따라 지금의 시위는 한 단계 더 진화 하는 모습을 갖춰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사유를 가로막는 근거 없는 가치들을 밝혀 내는 것이 중요하다.
 
 
야만이 지배하는 대한민국. 야만과 거리 위 창의력들의 싸움이 한창인 지금 그 어느 쪽에도 서지 않으면서 말로만 떠들거나 키보드만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중립적인 척 혹은 탈 정치적인 척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지금 거리 위에 서지 않는 당신은 당신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야만의 편에 서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거리 위의 정치는 오직 거리의 촛불들로만 그 의사를 전달 할 수 있기에 생겨난다. 휩쓸려가는 삶 속 새로운 주체성을 발견 할 수 있는 곳. 야만의 구조 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야만의 실체, 세상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곳.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며 거리 위에서 만나자.
전 우주에 유일한 존재. 살아있는 하나의 촛불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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