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다시, 초원으로

 

 

 

 

 

 

 

 

 

 

  몇 일전, 어느새 쌀쌀해진 날씨에 다시 이태원 거리로 나가 네팔에서 사온 스카프를 펼쳤다. 버려진 박스 조각을 주워 그 위에다 대충 스카프 열 장을 깔아놓고, 길바닥에 앉아 기타를 연주하며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본다. 꽉 막힌 도로 위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며 느릿느릿 이동하는 자가용들, 빈 맥주병과 먹다 버린 노점 음식들로 지저분한 길가의 쓰레기더미들, 근처의 지하클럽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빠른 비트의 음악 소리, 휘황찬란하게 번쩍이며 새까만 밤저녁의 경계를 어지럽히는 네온사인들, 그 아래를 바삐 오가는 한껏 멋을 낸 들뜬 젊은이들과 지저분한 점퍼를 입고 도로변 벤치에 앉아 무표정하게 그들을 바라보는 거지들. 올 3월에 처음 스카프를 팔던 때나 지금이나 이태원의 번잡한 풍경들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기타를 연주하며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내 옆에는 어느새 몇몇 친구들이 모여 앉아있다. 내가 이곳을 찾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런 만남들을 위해서다. 이 날에는 오바마에 대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던 미국 출신의 어떤 이와 몇 주 전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며 밥 딜런 노래를 어설프게 연주하던 영국 출신의 어떤 이, 그리고 이 날 회사에서 해고당해 미친 듯이 춤추고 싶어 처음으로 이태원을 찾았다는 서른 중반의 아저씨 한 분이 나와 함께 길바닥에 앉았다. 불과 몇 시간의 짧은 만남일 테지만 직업, 나이, 이름, 성별, 국적 등으로 ‘나, 너, 우리’를 규정하게 하는 관념들,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들이 이런 만남들 속에는 존재한다. 나는 다시 자유로운 여행자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갖게 해주는 이런 만남들이 좋았다. 그 만남들은 내게 나의 길을 계속 걸어나가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해주고 내 발걸음의 방향을 확인시켜 주는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번잡한 기운으로 물들어가는 이태원 거리 한복판에서 순수한 관계 맺음의 공간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 멋진 일이지 않는가! 그래서 지난날 나는 종종 스카프와 기타를 들고 거리로 나가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내게 자신감을 주고 희망을 확인시켜 주던 길바닥 위 짧은 만남들에서조차 뜻 모를 소외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스카프 위로 누군가가 동냥하듯 던져주는 동전소리, 바삐 걷는 사람들이 도로변에 잠들어 있는 거지들을 무심코 바라 볼 때와 같은 일상화된 멸시의 눈빛들, 제멋대로 정한 승자/패자의 이분법적인 잣대를 억지로 들이대고선 음흉한 미소를 짓는 어떤 이들의 존재. 분명,  낯설지 않은 무언가가 내속에서 다시 자라나 나를 좀먹어가려 하고 있었다. 익숙했던 것이 낯설게, 아름다웠던 것이 잔인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난 1년의 여행으로 충만해졌던 자유로움과 살아 숨쉬던 주체성은 어느새 분노, 질투, 시기, 조급함으로 바뀌려 하는 것이다. 또 길바닥에서 함께 기타를 연주해준 이름 모를 친구들에게서조차 기분 나쁜 괴리감이 들기 시작했는데, 자유로움과 주체성, 순수한 관계 맺음에 삶의 공간을 일치시키려는 내게 단지 잠깐의 일탈에 즐거워하며 흥분하는 그들의 모습은 왠지 내가 어울릴 수 없는 낯선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 했기 때문이다. 내 꿈은 허공에 멤도는 아지랭이같이 손에 잡히지 않는 곳에서 내 주위를 멤돌 뿐, 나는 원치 않는 모습으로 망가져가며 나의 꿈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꼴이었다.

 

  

  나는 별로 오래 앉아 있지 않았지만 기타를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만난 친구들에게 스카프를 하나씩 선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번쩍거리는 이태원 거리가 나를 마구 조롱하는 느낌이다. 표정 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를 헤집고 나와 인적이 없는 언덕길을 오르는데 참았던 눈물이 찔끔 흐른다. 나 여전히 걷고 있는가? 무엇을 망설이는 걸까?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 무엇을 두려워 하는가? 감춰두었던 질문들이 하나씩 떠오르자 이미 알고 있던 대답들이 내게 말한다. 망설임의 이유도, 그리움의 대상도, 내 발걸음의 흔적도, 모두 내 안에 새겨져 있는 기억이다. 어떻게 행동하고 걸어가야 할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모두를 위한 어떤 것, 굴다리를 지나는 삶의 수레바퀴, 바람을 부르는 법, 지구에 우뚝 솟은 단 하나의 안테나. 헝클어진 내 삶의 조각들을 다시 이어 붙여야 할 때다. 찔끔거린 눈물로 마음을 좀먹던 분노와 증오, 두려움 따위를 토해내자 내가 걸어야 할 길이 너무도 명쾌하게 다가온다. 베이스캠프의 생활을 정리하고 나의 고원으로 올라야 할 때, 바로 지금이다. 언제나 그렇듯, 차분하게 한 발걸음을 옮기고 주위를 둘러보다 보면 다음 발을 디딜 곳은 자연스레 나타나는 법이다. 내게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너무도 간단하고 쉬운 일이었다. 두려움에 떨 필요없이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한 걸음 내디디면 그만인 일이니까.

 

 

  까맣고 하얀 온 세상의 하늘 아래 나의 깃발이 다시 힘차게 펄럭일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