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사회운동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한 가지는 사회유기체의 염증반응으로서 나타나는 운동, 다른 한 가지는 사회유기체의 치유반응으로서 나타나는 운동. 이 두 가지는 겉으로 봐서는 언뜻 잘 구분이 안될 수도 있다. 운동의 초기단계에서는 두 가지 모두 활력이 넘치고 새로운 비전에 도취될 테니까.
하지만 그 운동이 제시하는 해법을 차분하게 분석해본다면 차이를 알게 된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치유반응이다. 해결할 수 없다면 염증반응이다. (전자는 그 속성상 작용action, 후자는 반작용reaction이다.)
그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태도 역시 그것을 판가름하는 지표가 된다. 만일 그 운동방향에 대한 엄밀한 비판에 겁먹고 히스테릭하게 반응하거나 아예 귀를 막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염증반응이다. 만일 그런 비판에 귀를 열고 새로운 해법을 모색할 수 있다면 그것은 치유반응이다.
운동의 구성원이 그 운동을 자기와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도 염증반응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 그 운동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운동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그 운동의 과정에서 창조적이거나 비판적인 대안을 모색할 수 없고 그저 운동의 톱니바퀴 정도로 전락하게 된다. 그 때 그 구성원은 좀비와 같다. 그저 옆에 있는 동료와 유대감을 나누고 사회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빼앗기고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운동의 구성원이 구체적인 해법보다는 선전구호에 집착하는 것도 염증반응이라는 증거다. 실제로 이들을 낚는 도구도 선전구호다. 물론 이 선전구호들은 감성적인 호소에 많이 치우친다. 지성은 그 해법을 차분히 살펴볼 수 있지만 감성은 그 운동을 거리를 두고 볼 수가 없다.
우리 시대 사회운동 대부분은 안타깝게도 염증반응이다. 사회유기체가 자연스럽지 못한 조건에 노출되고, 그로 인한 대중의 좌절이 그 운동의 재료가 되고, 기계적인 반작용이 그 운동의 방향이 된다.
그런 운동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그저 그 운동을 상징하는 리더에게 권력을 쥐어줄 뿐...
그래서 우리는 대중운동의 한가운데에 멈춰서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개인의 각성이 여기서 필요하다. 완전히 혼자가 되어라. 당신은 맑스주의자나 케인지언 또는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다. 당신은 그냥 사람이고 순수한 존재다. 당신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되면 안된다. 완전히 스스로를 비워야 한다. 스스로를 "OO주의자"라고 틀지워버린다면 그 틀을 벗어나는 해법이 보이지 않을 것 아닌가? 과거와 결별할 것. 익숙한 운동의 방향이 당신에게 손짓할 것이다. 망가진 인생을 채워주웠던 달콤한 위로들,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동료들과의 끈끈한 유대감이 다시 유혹할 것이다. 그 유혹은 어리석은 믿음을 고집하라고 당신을 간지럽힐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은 당신은 이제 과거로 결코 돌아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당신도 이제 이해하기 시작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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