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가운데 묵자墨子만큼 대중의 본성을 정확하게 꿰뚫은 사람은 없다. 묵자는 "백성은 그저 이익을 알 뿐"이라고 단언하였다. 다른 사상가들이 사람의 본성이 선하니 악하니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묵자 홀로 가장 현실에 부합하는 결론을 내렸던 것. 그건 아마도 묵자 본인이 대중을 구하려고 여기 저기 고생스럽게 다녔지만 바로 자신이 구하려는 그 대중의 몰이해로 괴로움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백성들이 자신의 숭고한 이념에 동조하기 보다는 제 이익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고 보지 않으려는 경향을 분명히 발견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일화가 남아있다. 춘추 말기 초나라의 왕은 공수반이 만든 운제라는 무기로 송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묵자는 전쟁을 막으려고 초나라로 가서 공수반과 왕을 설득했다고 한다. 둘은 모두 묵자에게 설득당했고 결국 송을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묵자가 전쟁을 막고 돌아오는 길에 송의 국경에 이르렀을 때 송의 병사들은 묵자를 초나라 첩자로 오해하여 국경을 넘지 못하게 했다. 묵자가 송나라를 구했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묵자는 성문 앞에서 비를 맞으며 고생을 하였고 돌아와서 큰 병치레를 했다고 전해진다. 묵자는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이런 경험을 숱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백성은 그저 제 이익만 알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탄식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정확한 인식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주된 사상이 비공非攻과 겸애兼愛라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묵자에 따르면 백성은 그저 이익을 알 뿐이며, 이익을 추구하려면 공격과 편애가 당연한데, 비공과 겸애는 거기에 맞서기 때문이다. 묵자의 가르침을 따르던 집단을 "묵가墨家"라고 불렀는데 유가와 함께 당시 백성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양대축이었다고 한다. 그런 묵가가 역사 속에서 돌연 자취를 감추고 만다. 어떤 사람들은 반대 정치세력의 공격을 받아 몰살을 당했다고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묵가는 자멸했을 것이다. 묵가의 멸망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의 본성과 맞서 싸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묵가는 사라지기 전에 이미 3개의 파로 분열되었다. 이미 멸망의 전조를 보였던 것이다.
이런 점은 현대의 지식인들에게 소중한 교훈을 준다. 묵가처럼 어떤 종류의 사회운동이 사람의 본성과 맞서게 된다면 그 운동은 결국 좌초될 것이다. 사회유기체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어떤 계기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그런 운동이 튀어나올 수는 있지만 오래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일 묵자가 "백성은 그저 이익을 알 뿐이다"라는 그의 올바른 인식을 기초로 사회운동을 재구성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비공과 겸애를 말하기 전에 비공과 겸애가 어떤 조건에서 싹틀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면, 서로 공격하고 편애하도록(인간의 모든 에너지가 제 가족의 이익이라는 바운더리를 넘지 못하게) 유도하는 경제질서를 바꾸었다면, 즉 화폐제도와 토지제도를 개혁했다면 묵가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유가를 압도했을 것이다. 춘추전국의 역사가 제국으로 귀결되지 않고 권력이 분산되어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역사가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현대의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도 묵가와 마찬가지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이타주의를 자기들 운동의 바탕으로 삼고, 모두가 이타적일 수도 있다는 전제 위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지극히 현실적인 중산층은 당연히 그런 운동에 관심이 없고 때로는 그런 운동이 자기들 이익을 갉아먹을 수도 있다고 염려한다. 그리고 그런 염려는 결코 완전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사회운동가들, 정치가들은 잠에서 깨야 한다. 사람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 우린 다만 "사람들이 이익을 쫓는 행위"가 서로 유익을 주도록 화폐제도, 토지제도를 재설계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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