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토론방법을 모른다

조지스트와의 대화

이 글은 '토지+자유 토론광장'에서 <지대조세제가 지대를 제거할 수 없다>는 주제에 대하여 토론하는 중에 올리는 글입니다. 

 

 

 

너희는 밤을 낮처럼 생각하여
흑암 가운데 있으면서도 빛이 가깝다고 말하는구나.
<욥기 17:12>

 

 

 

1. 다음과 같은 논증이 있다고 가정하자.

(1) A는 B다
(2) B는 C다
(3) 따라서 A는 C다

여기서 올바른 반론은
(3)이란 결론을 도출하는데 사용한 (1)이나 (2)가 거짓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추론과정을 구성하는 명제들이 거짓임을 드러내어
그 추론으로 나온 결론을 부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A는 D다. 따라서 A는 C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반론이라고 할 수 없고, 일방적인 진술에 속한다.

100명이 토론을 하는데 상대방의 주장에 대하여 반론하지 않고 제각기 자기 주장만 새롭게 더한다고 하자. 결론이 나겠나? 그런 건 토론이 아니다. 서로의 이야기가 맞물리지 못하여 아무 결론도 얻지 못하고 공회전만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상당수의 토론이 쓸모없는 말싸움으로 끝나는 이유가 아닐까?

조지스트는 토론방법을 모른다.
내 논증은 헨리 조지의 임금지대법칙에서 추론된 것이다.
내가 전개한 추론의 과정에서 결함을 찾아낸 사람이 있던가? 없다.
그들은 그냥 기존 입장을 맥없이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네 말은 틀려, 왜냐하면 내 말이 맞기 때문이야" 이게 그들이 하고 있는 얘기의 전부다.
그러나 진정한 반론이라면 "너의 추론은 이러이러한데, 그 과정에서 이러한 전개부분은 이러하므로 오류야. 따라서 그런 추론과정에서 끌어낸 너의 결론은 참이 아니야"라고 얘기해야 한다.
내 논리를 직접 건드려야 반론이 된다
조지스트 가운데 누가 그렇게 했는가?
남기업 님, 김윤상 님, 조성희 님이 그렇게 하였는가?
그들은 내가 제기한 추론에 정면으로 부딪히지 못하고
그저 일방적 진술만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난 그 분들을 위하여 반론의 가이드라인까지 친절하게 제시해드렸으나,
여전히 그들은 내 논증에 대해서는 꿀먹은 벙어리
다.

그들이 주장한 것들은 지대조세제가 지대를 제거할 수 있어야만 유효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을 나는 이미 '헨리 조지의 임금지대법칙'으로 증명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내 논리를 먼저 반박해야 하지 않나?

그들은 "이해가 안된다"고 둘러대고 있다.
사실 "이해가 안된다"는 얘기는 고등학생이 웃을 얘기다
어려운 한자가 섞였나? 영어로 말했나?
쉬운 우리말로 적었는데 왜 이해가 안되나?
정말 이해가 안된다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과 이해가 안되는 이유를 명확하게 적시해야 할 것이다. 그 정도의 성실함도 없다면, 지성은 둘째치고 토론에 임하는 태도가 불량한 것이다. 이 토론장에서
토론을 회피하는 모습들, 은근슬쩍 무마하고 넘어가려는 움직임이 포착된 게 어디 한 두번인가?

이 토론광장에 지금까지 토론은 없었다. 그저 '비슷한 어리석음'을 공유한 채 무기력한 서로를 위로했을 뿐.

여러분 가운데 정말 권위자가 있다면 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다음과 같은 상식적인 지적조차 감당하지 못하는가?

(1) 땅주인은, 노동자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 이상을 남겨줄 이유가 없으며, 그 나머지는 지대로 거둬들이게 된다. 여기서 노동자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는 임금이 되고, 그 나머지는 지대가 된다. 이 경계가 지대선이 된다.<헨리 조지의 지대임금법칙>

(2) 따라서 조세로 지대를 몰수해서 그 수익을 '땅사유제 아래에 놓여있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늘리는데 사용할 때 그것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늘린 게 아니며,

(3) 따라서 지대조세제는 임금을 늘리는 게 아니라 지대를 늘리게 된다.

 

내가 <헨리 조지의 지대임금법칙>을 잘못 알고 있나? 내가 그 법칙을 현실에 잘못 적용했나? 나의 추론과정에 오류가 있었나? 여러분의 댓글은 일방적 진술로 가득할 뿐, 이 세 가지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2. 사실 여러분들은 먼저 이렇게 반론했어야 했다.

"당신 말대로, 아니 헨리 조지의 말대로 노동자들의 노동대가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공짜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로 결정된다고 하자. 그렇다면 현재 노동자들의 임금은 어떻게 된 것인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은 거의 없지 않나? 공짜땅은 없지 않나?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임금 역시 없어야 하지 않나? 따라서 헨리 조지의 지대선 개념은 틀렸다고 할 수 있지 않나?"

오, 하지만 불쌍한 조지스트들이여, 그대들은 이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자폭이니까. 하지만 조지스트가 아닌 자들, 즉 도그마에 갇히지 않은 자들 가운데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위와 같은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헨리 조지가 세운 경제학은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니까.) 아마도 실비오 게젤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위와 같이 물었을 것이고, 헨리 조지의 지대임금법칙이 틀렸다고 성급하게 단정짓기 전에 '공짜땅'이라는 개념을 좀 더 깊이 파고들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공짜땅'을 세 가지 부류로 분류하였다.

(1) 말 그대로 공짜땅, 지대를 내지 않는 땅

(2) 무시해도 될 정도의 금액만 지불하고 이용할 수 있는 땅, 즉 현실 속에 존재하는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땅'

(3) 땅을 집약적으로 이용할 때 생기는 공짜땅, 즉 비료를 사용해서 더 적은 땅으로 필요한 농산물을 생산할 때 그만큼 새로운 땅이 생기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 것, 또는 고층건물을 건축해서 더 적은 땅으로 필요한 거주면적을 확보하여 공짜땅이 생기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 것. 이것은 '공짜땅'을 기능적인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다. 실제로 땅이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땅이 늘어난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낳는 것.

 

이렇게 공짜땅을 이해할 때, 헨리 조지의 지대선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개념은 여전히 쓸모있다. 노동자들의 노동대가를 결정하는 것은 이 가운데 3번이다. 실제로 물리적인 형태의 공짜땅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기능적으로 공짜땅이 생긴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는 노동자들이 주인이 있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결정짓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여러분이 아직도 미련을 못버리고 붙잡고 있는 지대조세제는 무효함을 알 수 있다. 지대를 조세로 몰수한 다음 그것을 기본소득에 사용할 때, 그것은 위의 1,2,3번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 중 어느 것도 늘리지 못한다. 1,2번은 물론이거니와 3번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도 올리지 못한다. 3번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늘린다는 것은 땅을 집약적으로 활용하는 기법 또는 기술이 더 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본소득' 형태의 지급은 땅을 집약적으로 활용하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 따라서 그것은 노동자들의 노동대가를 늘리지 못하고 지대로 흡수된다. 헨리 조지의 지대선 개념과 지대조세제라는 해법은 완전히 모순된다. 여러분이 지대선 개념에 동의한다면 지대조세제를 긍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효과가 없는 방법을 붙잡고 있는 것은 시간낭비다. 토지공공임대제가 아무리 어려운 목표라고 해도 효과가 없는 지대조세제를 붙잡고 있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낫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목표가 아니다. 다음에는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추신: 합리적 반론이 아니라면 내 글에 댓글을 달지 말기 바란다. 무작정 댓글을 달기 전에 내 주장이 어디 위에 서 있는지 보라. 조지스트 여러분이 신앙으로 삼는, 헨리 조지가 세운 기본개념이다. 정말이지 대꾸할 가치도 없는 진부한 레퍼토리를 읊어대기 전에, 수준낮게 인신공격을 하거나 논지를 흐리기 전에, "이해가 안된다"고 둘러대기 전에 내 글의 논리를 먼저 정확히 이해하기 바란다. 무엇보다 논지를 흐리는 것은 토론자로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다. 그런 사람은 태어나지 않는 편이 차라리 세상에 유익했을 것이다. 왜 태어났나? 귀한 토론 망치려고 태어났나? 시간이 남아도나? 옳은 말을 들으면 왠지 배알이 꼴려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가? 그러고도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려고 태어났나? 진지함, 토론에서 필요한 건 오직 그것 뿐이다. 감성팔이나 할 거라면 피켓 들고 거리에 나가서 관심을 구걸하면 될 일이다. 그걸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삽질, 어리석은 합창, 바보들의 끈끈한 동지애...그런 행위의 바탕에 그것들 말고 또 뭐가 있나? 애초에 그런 사회운동의 방법은 합리적 문제해결의 과정이라고 할 수 없다. 왜인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3. 사회운동가들은 흔히 자신들의 활동을 '투쟁'이라고 부른다. 투쟁은 '싸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과 싸우고 있나? 인간의 본성과 싸우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 자기 이익을 좇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일반대중 뿐 아니라 사회운동가한테도 존재한다. 따라서 그들은 남과 싸울 뿐 아니라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 그것은 명백히 소모적이다. 그리고 위선만 낳을 뿐이다. 따라서 그런 사회운동은 종국에는 실패할 경로에 놓여있다. 인간의 본성과 싸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활용해야 한다. 자기 이익을 좇는 마음이 사회운동의 동력이 되게 해야 한다. 여러분들이 '투쟁'하는 한 여러분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여러분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거센 파도를 거스르지 말고, 그 파도에 올라타서 서핑을 해야 한다. 그래야 가장 멀리 나아갈 수 있다. 중산층이 토지공공임대제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확신케 한다면 토지공공임대제를 쉽게 실현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되겠나? 생각해보라.

여러분이 피켓을 들고 거리를 방황할 때, 여러분은 소수의 따뜻한 눈빛과 대다수의 관심없는 자 또는 흘겨보는 자를 발견하게 된다. 여러분은 소수의 따뜻한 눈빛을 위로 삼아 오늘도 삽질을 계속 하겠지만, 사실은 대다수의 관심없는 자와 여러분을 흘겨보는 자야말로 여러분 운동의 결과를 좌우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관심없는 자는 여러분의 운동이 자신에게 특별한 이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흘겨보는 자는 여러분의 운동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틀리다고 말하고 싶나? 그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익에 관한 한 여러분들보다 진지할 것이 분명하다. 여러분은 정의를 읊어대지만 대중들은 자기의 이익이 곧 정의이며, 여러분의 정의가 자기의 이익을 갉아먹는다고 생각한다면 자기들의 귀를 막거나 여러분의 입을 막을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이 아무리 고매한 이상을 가져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여러분의 운동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5천년이 지나도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4. 조성희 님은 최근 자신의 글 '지대조세제'에 대한 소고에서 나의 주장을 완곡하게 무마하고 넘어가려고 하였다.  

혹자는, 토지사유제 하에서 지대조세제를 실시할 경우 지대의 전가 발생하고, 세금을 공익사업에 투자하게 되면 결국은 토지소유자에게 이익이 돌아가기 때문에 토지사유제가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세율을 단계적으로 높이며 적용하게 되면 초기에는 일시적으로 지대의 전가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지대조세제가 확고한 정책으로 결정되고 분명한 계획 하에 실시된다면 지가의 거품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제거되기 시작할 것이다. 현재까지 부동산 시장은 투기소득에 대한 기대심리에 의해서 주도되었고 이는 금융정책과 조세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공공복지에 대한 투자는 사회전체에 이익이 된다. 예컨대 지대조세에 따른 세수를 확보하여 교육복지를 구현하게 되면 누구나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교육은 지혜를 함양하고 지식을 보급하고 기술을 연마하여 노동의 효율과 생산성을 높이는 수단이다. 그리고 민주의식을 고양한다. 따라서 권리의식이 높고 지식과 기술을 갖춘 사람이 산업노예생활을 당연하게 생각할리 없다. 따라서 사회개혁은 더욱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지가의 거품이 사라지면 창업비용이 줄어 자가노동자가 늘게 되고, 중소기업이 활성화되어 노동시장의 정상화가 이루어지면 노동의 가치를 수탈당하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투자가 지주들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도 틀렸다. 지금까지는 그 혜택이 지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지만 지대조세제가 실시되면 그에 따른 지가상승분이 고스란히 세수에 편입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조성희 님은, 내가 <헨리 조지의 지대임금법칙>을 잘못 알고 있음을 증명하지도 않았고, 내가 그 법칙을 현실에 잘못 적용했음을 증명하지도 않았으며, 나의 추론과정을 직접 공격하지도 않았다. 그는 '내 주장에 대한 반론'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에둘러서 '자기 주장'을 하였을 뿐이다. 난 이런 무책임한 반응에 분노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가르치면 된다. 그러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가망이 없다.

그런데 조성희 님만 이런 게 아니라 남기업 님, 김윤상 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일방적인 진술'은 이 토론광장의 일부 무지한 자들에게는 먹힐지 모르겠으나 지성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사람에게는 어림도 없다. 반론할 수 없다면 그대로 상대방의 주장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정직함이 없다. 난 실비오 게젤의 이론으로 헨리 조지를 공격한 게 아니라 헨리 조지의 이론으로 헨리 조지의 해법을 공격했다. 결코 새로운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조지스트 모두가 알고 있고 동의하는 전제로 그의 해법 중 한 가지인 지대조세제가 효과 없음을 논증한 것이다. 이게 이해가 안된다면 당신들, 정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당신들이 가르치는 학생들도 여기 올 것 아닌가? 그들 중 일부는 이 토론을 보고 뒤에서 얘기할 것이다. "이렇게 명백하게 모순인 학문을 배울 이유가 있는가? 헨리 조지의 경제학에서 기본전제와 해법 사이에 놓인 거대한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왜 교수라는 사람이 이렇게 기본적인 논쟁에서 무능한 모습을 보이면서 아무 반론도 하지 못하는가? 우리가 그에게 배울 합당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점잔을 빼고, 헛기침을 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고 싶겠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 토론기록은 계속 저장되고 있다. 반론을 하든지, 나의 주장이 옳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당신들이 나의 주장에 대해 책임감 있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바로 당신들이 우리 사회의 '진짜 보수'이며, 진보는 다른 곳에 있음을 우리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진보와 보수는 그저 정치적 입장에 관한 게 아니다. 그것은 소통에 임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다. 당신들이 지금까지 이 토론에서 보여준 태도는, 당신들이 욕하는 그 누구보다도 보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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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3 22:42 2016/06/03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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