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어떻게 시민을 발명해야 할 것인가?

[짧은글]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 글은 시전문 계간지 <포지션> 제9호(2015년 봄호)에 실린 글입니다. 서평치고는 좀 긴데요. 잡지측에서 말하길, 필자에게 충분한 지면을 할애해 단순 서평이 아니라 약간 심도있는 내용을 소개할 목적이랍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셀프' 서평입니다. 이번호의 키워드는 '인민'과 '시민'인데, '인민'은 인민이란 무엇인가(알랭 바디우 외 지음, 서용순 외 옮김), 현실문화, 2014를 옮긴 서용순 선생의 글이 실려 있고, 제가 쓴 글은 바바라 크룩생크의 시민을 발명해야 한다, 갈무리, 2014에 관한 겁니다. 

알다시피 시민(권)에 대한 연구를 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제가 적절치 않다고 고사했으나...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그냥 청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쓰다 말았습니다. 비판이 빠져 있는데요. 날림으로 건성으로 쓰다보니 분량조절을 못해서 초과분을 날렸습니다. 그냥 책 소개 글 정도로 봐주시면 족하겠습니다. 또한 책 내용과 더불어, 통치성 및 생명정치 연구에 대한 간략한 소개라고 해도 될 텐데요. 이 분야에 관해서는 조만간 국내외 학자들의 심도있는 비판적인 작업이 소개될 예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1년이 지난 책을 다시 보고 평가한다는 게 상당히 어렵더군요. 다시 보니 '과대한' 의역과 오역, 오타가 많던구요. -_-;;;; 아무튼 지난 가을 가장자리 협동조합에서 했던 연속강의가 아니었으면 그나마 붙잡고 있던 내용도 그냥 잊어 버릴 뻔 했습니다. 그당시 같이 했던 동료들과 수강하셨던 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글에는 그들의 배움이 곳곳에 녹아있습니다. 그리고 <인민이란 무엇인가>는 재미 있는 글들이 모아져 있으니 심심할 때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서용순 선생의 옮긴이 후기도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네요. 개인적으로는 디지-위베르만의 글이 기억에 남는군요. 

 

 

어떻게 시민을 발명해야 할 것인가?

― 서평: 바바라 크룩생크, 『시민을 발명해야 한다』, 2014, 갈무리

 

 

대공황 이후 각종 기구와 안전장치를 노련하게 제어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체계적 위기를 예측하고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는 주체성의 생산에서 좌초하고 있는데, 이로부터 우리는 체계적 위기와 주체성 생산의 위기가 밀접하게 얽혀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정치적·사회적 과정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주체화 과정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 펠릭스 가따리

 

모든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위태롭다는 겁니다. 이것이 나의 요점입니다. 위태롭다는 것은 나쁜 것과 전혀 다릅니다. 모든 것이 위태롭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의 입장이 무관심을 초래한다거나 극단적이고 비관적인 모험주의로 흐르진 않습니다.

― 미셸 푸코

 

 

신자유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경제적 개념인가? 정치적 개념인가? 경제적 개념이라면 그것은 어떤 자본주의를 가리키는가? 포스트 포디즘인가? 자본의 금융화인가? 소비자본주의인가? 전全지구화된 초국적 자본인가? 비시장부분의 민영화와 화폐화인가? 정치적 개념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정치의 보수화인가? 경찰국가의 부활인가? 복지국가의 후퇴인가? 민족국가 형태의 재편인가? 아니면 군산복합체의 변형인가? 파시즘 체제나 권위주의 형태의 전조인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복잡한 질문을 얼마간 마음속에 품고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어느 누구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확신하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 자체가 아예 잘못된 것이 아닐까? 질문 자체에 근본적으로 빠져 있는 것이 있지는 않을까? 혹은 이렇게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신자유주의 시대 통치 방식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오늘날 사회적 적대는 어떤 식으로 통치되고 있는가? 지배적인 통치성을 넘어서 대안적인 통치 방식, 혹은 통치성을 넘어선 정치적 행위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 책의 역자로서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계기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대략 위와 같은 질문들이 십년 전 대공장 노동자들의 생활을 연구하면서 내가 가졌던 의문들이다. 이 책은 이런 의문들에 대한 오래된 숙제를 푸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다. 아마도 길게는 1990년대 중반부터, 짧게는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사회에는 유령과 같은 표현들이 돌아다녔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신자유주의’였고 이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 ‘사회적인 것’이 최근 들어 유행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인 것’이 유행하기 직전, 광우병 촛불집회를 전후로 ‘정치적인 것’이란 표현도 잠시 회자되었다. 이 책의 번역은 고전적인 용례로 경제, 사회, 정치에 해당하는 이 신비화된 단어들을 종합적․접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시도이자, 그것들이 최소한의 내용적 검토도 없이 일부 지식인들의 논의에서, 혹은 대중적 담론에서 마법적 전제로 통용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 탓이었다. 그 중에서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모호한 개념적 규정과 분석적 지체가 아마도 가장 컸던 것 같다. 실제로 현실을 들어다볼 때 그것은 분석적 도구로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것이 사회구성체를 결정하는 최종 심급으로서 현실 정치보다 높은 적대적 차원을 뜻한다며, 형식적 민주주의 아래 거리 정치가 폭발했던 국면에서, 그리고 시민의 직접행동이 체제 내화된 상태로 무력해진 지난 몇 년간 적대적 차원은 잠시 드러났다가 순식간에 대의정치적 절차로 회수되었고 대중들은 부동산과 같은 자산-금융축적의 발전주의, 혹은 ‘먹고사니즘’에 투신한 듯 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인 것은 서구 정치철학을 매개로 새로운 비판적 도구를 탐색하던 식자들의 논평 안에서 잠시 고개를 내밀었다가 유행에서 멀어져갔다. 그 다음으로 2007년 미국발 경제위기는 파국적인 종말론적 분위기 아래 부채가 견인한 자산 축적의 신화를 걷어냈지만, 이와 동시에 현 단계 자본주의를 구체적·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대신에 시장의 쓰나미, 즉 신자유주의라는 미규정적 단어를 폭발시켰다. 실제로 신자유주의를 내세우는 많은 논의들 속에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분석하기보다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생산한 비극적 폐해들의 느슨한 나열을 확인하거거나 정관재계의 특정한 엘리트, 혹은 전구적 자본(가)라는 위악의 실체를 음모론적으로 발견할 뿐이다. 또한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는 갑자기 ‘사회적’으로 시작하는 단어와 프로그램을 반기게 되었는데, 오늘날 자본의 위기는 지배층에 호선互選된 시민사회 영역의 자리에 ― 연대, 공감, 협동, 공동체 등 ― 사회적인 것의 이름으로 돌아왔다. 예를 들어, 빈민은 복지의 수급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기업가로 탈바꿈하고 협동조합은 냉혹한 시장 논리를 비판하면서 도덕경제의 이름으로 권장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정치적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사이 이런 생경한 용어들이 숨 가쁘게 동원된 것은 우리의 현실 자체가 매우 급박하게 위기로 곤두박질쳤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및 그것의 등락, 권위주의 정치의 부활, 이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 그만큼 긴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쪽에는 시장근본주의와 권위주의라는 ‘악한’ 축이 존재하고 다른 한쪽에는 도덕적 가치를 표방하는 ‘선한’ 사회적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단순한 이분법적 발상으로는,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구체적 현실을 편리한 도식으로 평가하고 대중적 호소력을 가질 순 있겠지만 ― 그렇다고 이런 것이 전혀 가치 없다는 것은 아니다 ― 불안과 발만에 기댄 분노의 정치는 그 정념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질 뿐이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 기획이 현실에서 어떻게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부단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떻게 자신을 재생산할 수 있는지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실제로 정치적인 것이나 사회적인 것을 동원하는 비판적 담론과 실천 안에서도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전면적인 쇄도, 국가의 파시즘적 과잉, 희생자의 부단한 생산 등으로 단순히 환원되고 그 구체적인 합리성(내적 논리)과 메커니즘이 분석되지 못하는 것 같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신자유주의=권위주의 국가+고삐풀린 시장’이라는 단순한 도식이 급진적인 외양과는 달리 실천의 영역에서는 반동적 효과를 산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보적 대안으로 급속히 확산 중인 사회적 경제나 협동조합은 진보진영 뿐만 아니라 정부와 지자체, 자본연합, 주류 미디어 등에서 자본주의4.0이나 윤리적 경제 등과 같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호명되고 있다. 실제로 사회적 경제를 대안으로 주장했던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그들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준準 공공기관의 재정적·관료적 통제 아래 자발적으로 협력하고 있으며, 그들이 생산하는 담론과 실천은 사회적 위기관리의 수단으로 배치되어 빈민 등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전치하고 있으며, 마침내는 그들이 비판해마지 않았던 신자유주의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시장만능에 대한 인간주의적 해법을 무조건 추구한 나머지, 과거 신사회운동이 수행했던 국가의 관료제적 통제와 억압에 대한 비판마저 상실한 감이 없지 않다.

 

이렇듯 신자유주의에 대한 막연한 인상비평은 그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지체시키는 동시에 실천적인 면에서는 비판의 대상과 공모하는 기묘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이러한 현실 진단에서 내 생각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첫째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이 도입한 그래서 우리 사회의 역사현실적 맥락에서 착근되지 않은 이론적․실천적 용어와 그것의 계보를 시급히 검토하고 소개하는 작업이었다. 둘째, 이런 새로운 관점의 도입이 추상적 개념에 그쳐 현실의 분석에 무력하지 않도록 지나친 이론주의와 인문학적 편향을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분석틀은 새로운 이론적 시각을 제시하되, 단순한 인상비평을 벗어나 경험적 연구를 통해서 한국사회 현실을 분석할 수 있는 도구여야 했다. 셋째, 이런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특히 어떠한 권력-지식체계와 실천, 합리성을 매개로 어떠한 제도적 장치 속에서 그것이 작동하는지, 그리고 주체성 및 사회적 관계를 그것이 어떻게 변형하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넷째, 이와 관련해서 신자유주의가 오늘날 자본주의 변형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검토되어야 했다.

 

이상과 같은 몇 가지 기준에서 볼 때, 최근 국내에서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신자유주의) 통치성 분석이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특히 후기 푸코의 역사적․실증적 연구에 영향을 받은 사회과학적 작업을 우리는 유심히 살필 필요가 있다. 하나의 학파라기보다는 느슨한 연구 프레임으로서 통치성 연구는 빈곤과 복지, 금융, 보험, 노동, 범죄 등 비非정치적인 것들을 통한 정치를 다루는 것으로 인문학적 통찰과 사회과학적 분석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1990년대 초 영어권에 소개된 이후 통치성 분석은 2천 년대 들어 다양한 분과학문에서 하나의 유력한 분석적 시각이자 에토스로 수용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통치성 분석은 일부 학자들에 사이에서 일찍부터 수용되었고 자발적인 자기계발이나 과몰입 노동주체 등 기업가적 주체enterprise self에 관한 연구로 성과를 올렸지만, 학계 전반이나 대중들에게 그 전모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시점에서 바바라 크룩생크의 『시민을 발명해야 한다』는 비록 압축적인 서술로 독파하긴 쉽지 않지만, 통치성 관점을 채택한 초기의 (고전적) 연구로서 비영어권 반주변부의 풍박한 독서풍토에서는 압축적인 개념적 이해와 분석적 모델로 참고할 수 있는 적절한 입문서이다. 이 책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의 관점에서 통치성(혹은 생명권력) 개념을 소개하고, 정치적인 것, 경제적인 것, 사회적인 것의 역사적․이론적 지위를 확인하는 동시에 그것들의 관계를 분리적인 방식이 아니라 구성적인 접합의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원리를 고전적 민주주의 이론과 실천으로 소급하고 그것을 시민성이라는 민주주의적 주체성의 생산과 연결하고, 또 이런 정치적 주체성의 형성을 좁은 의미의 정치적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의 구체적인 실천들(예컨대 복지와 사회운동) 속에서 규명하고 있다.

 

옮긴이 후기에서 간단하게 밝혔듯이, 이 책은 미로와 같이 복잡하고 압축적인 논의 방식, 화려해 보이는 개념과 주제, 수많은 비판 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오솔길을 걸어가듯이 독자들의 관심에 따라 수많은 통찰력을 얻을 수도 있지만, 이 분야의 논의에 익숙하지 않을 경우 숲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다소 무리한 단순화를 각오하고 이 책에 대한 약도를 그려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이 책의 연구대상은 기본적으로 근대의 ‘자유민주주의’ 아래 그것의 고유한 통치문제와 통치방식에 있다. 여기서 통치문제란 흔히 통치위기로 표출되는 것으로, 보편적 소유권에 기반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민주체제의 안정과 전체사회의 진보를 자동적으로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소유권과 노동권이 충돌하면서 19세기 내내 민주주의 체제는 혁명과 반反혁명의 파고를 거듭했다. 이런 통치위기를 맞아 자유주의가 고심한 통치문제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체제의 안정과 사회의 진보를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있었다. 둘째, 이런 문제설정에서 민주시민의 주체성, 즉 시민성 문제가 중요해진다. 통치문제를 해결한 자유주의적 방식은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해관심을 전체 사회의 그것과 ‘자발적으로’ 일치시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원칙 아래 모든 사람은 그것이 군주든 국가든 타인이든 다른 누군가에게 종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은 만들어져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시민이 스스로 시민성을 갖춰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시민되기(자발성)-만들기(예속성), 혹은 저자의 표현대로 자율과 예속을 결합한 ‘시민-주체’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목표는 규범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인 시민을 형성하는 지식-권력의 기술에서 나온다. 그래서 셋째, 개인이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테크닉이 필요한데, 크룩생크는 그것을 시민성 테크놀로지라고 부른다. 이러한 테크놀로지는 개인 주체를 시민으로 만드는 모든 프로그램과 그것의 실천 및 담론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과거의 새마을운동이나 최근의 사회적 기업, 마을만들기 같은 기획들이 시민되기-만들기의 전형적인 기술이다. 넷째, 시민성 테크놀로지의 핵심적인 논리, 지렛대가 바로 임파워먼트empowerment이다. 임파워먼트는 문자 그대로 권력power의 분산em, 즉 분권을 말하며, 시민되기-만들기는 스스로 ― 자신의 내면에서 ― 권력을 장착한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민중의 자율적 지배를 뜻하는 민주주의는 대중 자신의 자아의 통치를 뜻한다. 다섯째, 시민되기-만들기는 이른바 좁은 의미의 정치적 영역에서 규범적․실천적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시민되기-만들기는 정치적 영역 외부에서, 특히 사회적인 것-일상적인 영역에서 미시적으로 진행된다. 여기서 사회적인 것은 국가와 시민 사이에 걸쳐 있는 영역이 아니다. 사회적인 것은 ‘시민사회’와 같이 자발적인 결사의 영역도 아니고 ‘사회통제’와 같이 순응과 지배의 장소도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경계, 경제와 국가의 경제, 자발과 강제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재배치하는 것으로, 통치성 ― 좁은 의미에서 품행의 지도conduct to conduct ― 이 발휘되는 개입의 추상적 표면이다. 여섯째, 특히 시민의 발명은 학계의 시민권을 얻은 공식적인 학문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비공식적 앎을 통해서 획득된다. 학술적인 지식은 아니지만 행정적인 실천이나 각종 상담기법 등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 권위를 구하는 것들에서 시민들은 만들어진다. 이때 사람들은 무능력, 무책임, 비도덕, 비참여 등 무언가 시민적 자질이 결핍된 존재로 간주되며 이러한 부족함을 메꾸기 위해서, 코칭이나 상담 등 다양한 개입 방식이 취해진다. 예를 들어, 평범한 직장인이 갑자기 해고가 되어 실업자 교육이나 파산자 교육에 들어가면, 직능교육과 노동규율의 주입뿐만 아니라 자기인생에 대한 반성적 고백, 심리검사, 주기적 상담, 재테크 교육 등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정상적 개인은 비정상 개인으로 자신을 재구성해야 하며 사회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상성을 다시금 입증해야 한다.

 

저자는 여러 가지 이론적 자원에 의존하고 있지만 주된 이론적 관점을 미셸 푸코에게서 취한다. 크룩생크는 일단 푸코의 미시권력론에 따라 권력이 일상생활의 모세관을 통해서 생산적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신체에 각인되는 규범을 통해서 작동하는 단순한 훈육권력이 아니라, 후기 푸코의 통치성론(혹은 생명권력)이다. 크룩생크가 보기에 기존의 민주주의 이론과 실천은 푸코가 주장하는 주권권력의 틀에 머물고 있다. 주권권력은 영주가 노예들을 대하듯이 그들의 인신과 수확물을 수탈할 수 있는 권리에서 비롯하며 궁극적으로는 생사여탈권에 토대를 둔 권력인데, 그것은 서구에서 법규범적 논리로 편입된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문턱에 들어 주권권력과는 다른 형태의 권력이 등장하며, 푸코는 그것을 신체 규율 통해 개인에게 각인되는 훈육권력과 인구를 대상으로 통계적 지식에 따라 작동하는 생명권력(혹은 통치성)으로 구분했다. 특히 통치성은 미시적 수준에서의 개인의 품행을 통솔하는 동시에 거시적인 사회적 층위에서 ‘인구’를 조절하는 합리성이자 테크놀로지를 말한다. 그리고 생명권력의 측면에서 통치성은 사회의 불안전성 ― 이를테면 빈곤과 실업 같이 자본주의가 생산하고 19세기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사회적’ 문제 ― 을 해결하기 위해, 보험과 통계학, 경영학, 범죄학, 사회복지 등과 같은 안전장치를 통해 작동한다. 또한 생명권력은 삶과 그 메커니즘을 명시적인 계산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지식-권력을 인간 삶을 변형하는 동력으로 만들며, 특히 생명권력의 정치적 합리성(지배적 논리)은 인간의 욕구와 행복, 욕망을 통치의 영역으로 전환한다. 생명권력은 개인과 인구의 삶 자체를 통치할 수 있게 만들며 그것은 강제력으로 신체에 개입하기도 하지만 특히 인간의 주체성을 주무대로 활동한다.

 

크룩생크는 이런 푸코의 주장을 빌려 주권권력의 관점에서 머물고 있는 ― 좌우파의 ― 현행 정치이론과 민주주의 실천의 영역으로 옮기고 있다. 특히 기존의 대의정치나 급진민주주의 기획, 시민사회운동이 주권권력을 목표로 권리의 담론에 치중하는 바람에, 좁은 의미의 정치적 영역 너머에서 일어나는 ‘착종된’ 권력의 (재)생산 관계를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권권력이란 권력자와 피권력자를 분명히 나누고 전자를 시민의 지위에 놓고 후자를 노예의 상태에 놓는 권력관에서 비롯하며, 따라서 해방의 정치는 노예를 시민으로 동원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저자가 언급하듯이 임파워먼트(혹은 자부심 운동)는 1960년대 반反빈곤운동에서 출현하여 여성운동과 민권운동에서 퍼져나간 대항적인 조직전략이었지만, 진보적인 활동가들 역시 역량강화를 명목으로 빈민, 흑인, 여성, 주민 등 결국에는 타인의 이해관계와 욕망에 개입하여 그들의 행동을 대변하고 통솔하려고 했으며 그들의 이름으로 그들의 사고와 감성, 생활방식을 조사하고 정상성의 규범에 따라 그들을 지도하려고 했다. 이러한 전략은 자유주의 통치합리성, 즉 국가의 직접적이고 강압적인 개입과 지배를 최소화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화하려는 전략과 맞닿아 있는데,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임파워먼트는 정치적 입장이나 심지어 체제를 불문하고 비슷하게 동원되었다. 임파워먼트는 국가나 공식적인 통치기구 외부로, 즉 사회와 자아의 영역까지 통치 관계를 분산하고 확장하는 핵심적 장치였다. 복지수급자 계층이 가난한 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원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개인적 특성 때문인데 그들의 (무)행동, (무)능력, 무기력은 외부의 도움이 아니라 자발적 행동을 통해서 극복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외부의 도움은 무한히 증식하는 의존적 형태를 강화하여 이른바 ‘건전한’ 납세자의 주머니를 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빈민, 실업자, 장애인, 노인, 미혼모, 프리터, 오타쿠 등이 아니라 스스로 시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재정지원과 사후감사를 결합함으로써, 사회적 영역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활동가와 자원봉사를 매개로 빈민 등에 대한 간접통치로 전환되고 활동가 및 각종 단체는 그들의 수혜자를 스스로 제어하게 된다.

 

크룩생크가 크게 의존하고 있는 말년의 푸코는 생명권력을 다루는 어느 글에서 ‘살게 하고 죽고 내버려 둔다’는 식으로 그것을 묘사했다. 살게 한다는 것은 개인과 인구의 육성과 조절을 의미하고 내버려 둔다는 의미는 구제불능의 쓰레기들을 자연적으로 도태시킨다는 것이다. 『시민을 발명해야 한다』는 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관한 책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의 주장을 냉정히 확장하면 민주주의 체제 아래 시민으로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 혹은 시민이 될 생각이나 태도가 없는 사람들, 시민이 되기에는 모자란 사람은 그 누구든지 죽음의 영역으로 내쳐질 수 있다. 실제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근대 자본주의 아래 쓸모 있는 생산적 노동력도 아니고, 상품․용역․대출의 소비자도 아니고, 출산이나 생체를 제공하는 역할마저 필요 없어진다. 흔히 ‘신빈민’으로 불리는 이런 사람들이 그래도 쓸모가 있다면 일반화된 불안정 노동 아래 워킹푸어, 하우스푸어, 렌탈푸어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거나, 그것도 불가능할 경우 눈에 띠지 않는 슬럼이나 난민캠프 같은 곳에서 서서히 죽어가거나, 생체장기산업과 신약개발의 소재로 정도로 이용된다. 비록 탈역사적이고 존재론적인 과장이 없진 않지만, 조르조 아감벤은 이런 비참한 사람들의 형상을 ‘호모사케르’라고 묘사하면서, 이런 산죽음ubdead 상태를 배제하는 것이 모든 정치체의 근본적인 구성 원리라고 주장한다. 즉 공동체를 구성하는 내부의 배제선에서 진정한 정치적 행위가 벌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사회적 적대라고 한다면, 그리고 적대로서 정치가 은폐되는 지점, 즉 탈정치의 기제가 통치라고 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정치(적 자유)와 저항의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 간단히 말해 인간적 고통이 양산되는 상황에서 어째서 혁명이나 저항은 빈빈히 억제되는가? 푸코식의 논의는 오히려 탈정치화와 대중의 무력감을 부추기지 않는가? 그리고 크룩생크의 주장 역시 푸코에 대한 이런 일반적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는가? 급진적 정치나 시민사회 활동조차 권력의 효과에 불과하다면, 그래서 시민이란 정치사회적 범주가 규범적 기능을 할 수 없다면, 대항적 주체화는 어디서,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에 대해서 크룩생크는 분명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지만, 모든 곳에 권력에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곳에 정치가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말은 대항품행이 개인적․집단적으로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모두冒頭에 인용한 푸코의 말처럼 권력이 모든 곳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정치적 냉소나 무력감을 부추기는 것은 아니다. 푸코의 주장은 우리가 명증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모든 것이 사실은 매우 위태로운 상태에 있다는 것이며, 권력은 자유라는 저항지점에서 언제나 실패한다는 뜻이다. 즉 권력이 있는 곳에 주체가 행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場이 내재적으로 열리기 때문에, 그것은 저항의 가능성이 적어도 권력과 동시적이란 뜻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경제적 측면에서 금융자본주의 우위라고 할 때, 그리고 그 주된 메커니즘을 신용창출이라고 할 때, 부채를 짊어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체성은 어떤 형태일까? 아마도 그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금리를 따져가면서 살아가는 금리생활자와 비슷할 것이고, 국가가 사회 안전을 제공하지 않는 이상 시장이 제공하는 다양한 옵션에 따라 리스크를 따져가면서 자신과 가족의 삶을 최적으로 설계해야 할 것이다. 이런 부채인간들이 주도하는 세계에서, 고전적 의미의 투사나 카리스마적 영웅은 칭송받거나 회고될지 모르지만 정치적으로 보편적인 형상은 아닐 수 있다. 투사나 영웅, 혹은 군인은 리스크 이상의 죽음을 감당하는 행위자이기 때문이다. 약간의 무리한 비약을 감수한다면 세월호가 가라앉았을 때, 우리가 곳곳에서 확인한 사태는 부채인간들이 보여준 지극히 합리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보험계약 때문에 다이빙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잠수사들을 한쪽으로 제쳐놓고, 어느새 우리는 대의정치와 거리정치로 환원되는 주권권력의 틀 ―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 만 고집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신자유주의를 소비주의(물론 부채를 통한)의 확산으로 간주할 때, 심지어는 연애, 사랑, 효도 등 일상의 친밀한 행위까지 상품으로 제공될 때, 보통의 사람들은 어떤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이들은 공적 사안도 마치 상품을 구매하듯이 수많은 대안 중에서 골랐다가 금방 싫증내고 다른 선택을 고르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들이 시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이 과연 실업자, 빈민, 철거민, 노숙인, 신용불량자, ‘아픈 청춘’, 성범죄자, 싸이코패스, ‘종북’ 등 다른 사회적 구성적 범주와 얼마나, 어떤 식으로 다른가? 크룩생크의 주장대로 이들은 정치적 주체로 미숙한 존재가 아니라 이미 시민성을 갖춘 시민들이다. 다만 신자유주의 아래 (그것이 구체적으로 분석되어야 하겠지만) 과거와는 다른 식으로 시민이 된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들이 정치적 무대에 올랐을 때 그 가능성과 한계를 최대한 가늠해보는 작업이다. 정치적 투쟁은 다른 장면에서 형성된 주체성을 통해 전개된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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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30 18:57 2015/03/30 1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