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미첼-문화정치와 문화전쟁

[사고들]

요즘 갑자기 쓰나미 같이 일이 몰려와 한가한 삶이 위협을 받고 있는지라, 이 공간에 포스팅하지 못했다. 중요한 문제들은 다른 분들이 건드리고 있으므로, 본인은 하던대로 걍 책 소개나 하려고 한다. 왔다갔다 지하철에서 틈틈히 보다가 엄청난 분량에 지친 책인데, 돈 미첼(지음), 류제헌 외(옮김), 문화정치와 문화전쟁: 비판적 문화지리학, 살림, 2001이다. 원제는 Cultural Geography이고, 번역본으로 6백 페이지가 넘는다. 글자가 작은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보통 책자의 2배 정도라, 제법 좋은 책이지만 특별히 이 분야에 관심이 없다면 선뜻 읽기가 저어해지는 책이다. 그래서 짧게나마 이렇게 글을 남긴다. 왜냐면, 건너뛰어도 되는 부분이 많으니깐^^;; 겁먹지 마시라고 말이다. 여하튼 역자들도 밝혔듯이, 국내에 (신)문화지리학 관련 양질의 도서가 부족한 상태에서, 그것도 대표적인 진보 학자의 '두터운' 책을 번역한 건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다. 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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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도 책을 읽기 전에는 미첼의 입장을 정확히 몰랐는데, 뜻밖에도 미첼은 상당히 강고한 문화유물론자나 문화정치경제학적 입장에 가깝다. 오히려, 요즘 웬만한 문화연구자들보다 더 '전통적인' 영국문화연구의 전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첼은 한편으로는 지리학과 인류학에서 유행하던 문화 관념 -- 일종의 초유기체적 실체로서 문화을 겨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탈정치경제적인 의미생산, 텍스트실천, 삶의 방식 추구와 같은 좁은 의미의 문화 개념을 비판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미첼이 의도하는 바는 정치경제적 조건, 특히 현대 자본주의(와 그 변동) 하에서 공간과 지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을 검토하는 것이며, 이를 문화전쟁(혹은 계급전쟁)의 관점에서 재정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공간과 지리 연구를 일신하고 나아가 기존 추상적인 문화연구에 구체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여기서 구체성이란, 기존 문화연구와 정치경제 문제설정에서 공간 관점이 부재하거나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여겼다는 점이고, 반대로 공간과 지리 연구도 문화연구와 정치경제적 입장을 경시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여하튼 대부분이 논쟁적인 개입적 글이라서, 워낙 많은 사례가 나오니 직접 확인하면 될 것이다. 뭐, 오랜만에 문자를 구사하려하니 잘 안 되는데, 그냥 좀 비약하자면, 요새 두리반이나 명동 등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좀 이론적으로 연구한 거다.

그런데 앞서도 얘기했지만 책이 참 길다! 그런데 만약 독자가 문화연구에 관련된 내용을 좀 알고 있다면 1부 '문화의 정치학'(정치학보다는 정치라는 번역어가 더 낫다. 다른 책들도 politics를 '정치학'으로 많이 옮기는데 실제로는 그냥 '정치'가 적합한 경우가 많다)에 있는 글들은 건너뛰어도 무방하다. 1부는 일종의 이론적 소개와 논쟁을 다루고 있는데, 그래서 당근 조금 재미가 없다. 하지만 미첼이 문화연구를 나름 잘 정리하고 있는 편이라, 문화연구에 관해 간략히 숙지하려면 1장은 도움이 될 것이다(참고로 문화연구에 대한 가장 좋은 소개서는 요시미 순야(지음), 박광현(옮김), 문화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08이다. 짧은데다가 문화연구의 '급진적' 문제설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소개서이다. 슌짱 좀 짱인 듯^^). 그리고, 3장은 지루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미첼이 문화를 보는 관점, 즉 문화유물론이 잘 정리되어 있다. 다음으로, 2부는 경관landscape이라는 지리학과 공간연구의 대상을 문화투쟁의 관점에 서술한 글들이 실려있다. 우리로 치면, 각종 박물관이나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세종대왕 동상과 관련된 문제, 혹은 청계천의 전태일 다리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3부는 섹슈얼리티, 젠더, 이주, 인종, 국가와 민족, 권리, 영토 등과 관련된 주제들을 다룬다. 끌리는 주제대로 보시면 되겠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별다른 내용은 없을 수 있다.

 

오히려, 재미 있는 내용은 마크 데이비스 외(지음), 유강은(옮김),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 아카이브, 2011에 실려 있는, 미첼의 <빼앗긴 길과 광장: 反도시적 도시>라는 글이 매우 재미있고 시사적이다. 미국에서 공공주택 재개발, 그러니까 우리로 치면 뉴타운 사업 쯤이 되겠는데,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공공영역인 도로를 사유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법원의 사례라서, 인종 문제도 끼어들어 있지만, 요즘 한국 상황과 비교하면 시사점을 얻을 수 있고, 글도 짧으니 금방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 책에 실린 전반부의 글들은 흥미로운 사례가 제법 많다.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재)개발 사례들이 세계적인 현상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심심하면 한 번 보시는 것도 괜찮지만, 이 책도 두 껍고 비싸다. 글을 모은 책이므로 그냥 빌려서 꼿히는 글만 보시면 될 거다.

될 수 있으면 번역 가지고 말을 안하려고 하지만, 이 책은 번역에 대해서 언급해야겠다. 물론 역자들이 많은 노력을 한 건 글을 읽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역자들의 다른 역서에 비해 가독성이 좀 떨어지는 건 사실이고 특히 중간부분부터는 속도가 잘 나지 않는다. 그리고, 출판사에서도 편집자가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다는 의심도 든다. 그래도, 별 다섯개에 3개 반은 줄 수 있다. 하지만, 내용과 관련해서 역자들이 아쉽게도 문화연구와 대중문화에 대해 이해도가 떨어지는 건지 교정을 성의 없이 봤는지 모르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어들이 많다. 특히 핵심적인 용어들을 역자들이 임의적으로 바꾸는데, 예를 들어, 토대 상부구조에서 토대를 '기반'으로, 헤게모니를 '패권'으로, 이데올로기를 '이념'으로, 파놉티콘을 '파노라마'로 옮고 있다. 물론 어떤 맥락에서는 저러한 번역어가 적합하기도 하고 역자들이 원문을 처음에는 병기를 해주고 있지만, 계속 읽다보면 저렇게 번역했다는 걸 잊어버리기 때문에 오독을 할 수 밖에 없고, 게다가 원저자의 입장을 역자들이 중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identity를 '아이덴터티'라고 옮기는데 문맥에 따라 정체성이나 동일성으로 옮겨주는 게 좋았을 것이다. 이외에도 사소한 문제가 제법 있지만 넘어가겠다. 그렇지만, 펑크락 밴드 섹스피스톨스를 언급할 때는 역자들이 음반 '레이블'을 '명칭'으로 착각하는 해프닝은 '참 재미있었다.' 사실, 이 같은 사소한 오역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될 수 있으면 국내에서 통용되는 번역어를 택해주는 게 좋지 않았나 한다. 이런 부분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책이 번역되었다는 게 어딘가!!!

 

덧) 개인적으로는 돈 미첼의 <도시에 대한 권리Right to the City>가 번역되면 좋겠다. 내가 번역할 역량은 안 되는 것 같고 누가 좀 하면 좋을 것 같다. 강현수 선생이 같은 제목으로 문고판을 내기는 했지만, 오늘날 용산이나 두리반 같은 사건을 맞아 전부는 아니라도 이런 현상을 부각시킬 수 있는 이론적, 실천적 자원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책만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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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3 13:36 2011/09/23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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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문화전쟁, 일상적 실천, 스타크래프트

    Tracked from 몽롱일기 [2011/10/0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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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뽀삼님의 [돈 미첼-문화정치와 문화전쟁] 에 관련된 글. 미첼의 저서가 정치경제학적 접근을 강조한다는 평가는 적절한 듯하다. 그럼에도 어쨌든 그는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의 문화에 대한 정의는 용어가 안고 있는 복잡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데올로기'의 측면에 중점을 둔다. 중반부를 읽다 보면 그런 시원시원함이 기존의 문화연구는 물론 다양한 문화현상, 특히 '재생산 체계로서의 경관'에 대한 분석 등으로 탄탄히 뒷받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