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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노한다!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고등학생시절부터였다. TV과외 대신 틈틈이 봤던 다큐멘터리에 재미를 느끼다 좀 더 지나서야 더 많은 형태의 다큐멘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큐멘터리 제목인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처럼 많은 것들이 TV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즈음 나에게 다큐멘터리는 세상을 이해하는 텍스트이면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파장이었다.
광화문 네거리의 미디액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인권영화제와 미디액트가 사전 제작을 지원해 준 옴니버스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면서부터다. 당시 편집 장비가 없던 나는 같이 작업한 감독들과 편집실에서 며칠씩 기거하며 작업을 했는데 덕분에 처음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의 두려움을 넘을 수 있었다. 아직도 그 편집실 구조가 기억에 난다. 이후부터 미디액트는 독립다큐멘터리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내게 좀 긴밀한 공간이 되었다. 작업 때 마다 찾았던 녹음실, 차근차근 쌓여 가는 스텝들의 경험을 나눌 때의 즐거움은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주노 동자에 대한 다큐멘터리 이후의 일은 내게 참 중요한 분기점을 만들어줬다. 처음 장편으로 이주노동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나서 마음이 허했다. 다큐멘터리 제작은 끝났지만 뭔가 계속 이주노동자와 같이 할 것이 필요했다. 그때 시작한 것이 미디어 교육이다. 조금씩 더워지는 날씨와 함께 조금씩 지쳐가는 이주노동자 명동성당 농성단과 미디어교육을 진행하게 되는데 그때도 미디액트가 함께 했다. 농성단에 맞는 교안을 만들고 장비를 실어 나르고 했던 기억. 그 이 후로 미디어교육을 해오지만 그 때 교육과정에서 만들었던 영상은 잊히지 않는다.
미디어교육이 끝날 때 즈음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인터뷰프로젝트도 미디액트에서 진행됐다. 많은 스텝들과 감독들이 참여한 프로젝트는 이주노동자 들의 안전과 활동을 위해 한밤중에 진행됐다. 그해 여름밤은 미디액트에서 촬영한 기억으로 가득하다.    많은 사람들이 촬영이 끝나고 첫차가 다닐 때까지 기다리며 보냈던 미디액트 로비, 회의를 했던 틈새 공간들, 그리고 한 여름 밤의 소나기 냄새. 기억들이 쏟아지는 쌀알처럼 자잘하게 들어찬다.
그리고 우연히 다큐멘터리 강의를 맡으면서 좋아하는 다큐멘터리 공부도 하고 수강생 사는 이야기도 들으면서 다큐멘터리에 대한 수다를 실컷 떨면서 좋은 인연들을 만들기도 했다.
이리 주저리주저리 미디액트와의 인연을 나열하는 것은 제작을 하고 연대활동을 하고 다큐멘터리 공부를 지속하게 해준 미디액트의 역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 역할 덕분에 나는 꿈을 꾸물꾸물 피우며 내 시간을 촘촘하게 채울 수 있었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이 내게만 소중하겠나? 그 공간을 지나쳤을 많은 이들이 그만큼 소중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올 많은 이들의 시간도 분명 소중했을 것이다. 그런데 형식적인 공모제로 미디액트와 인디스페스의 운영권을 빼앗아 전리품인 양 권력의 무리들에게 나눠지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황당하다 못해 분노가 인다. 그 많은 경험들을, 그리고 앞으로 있을 많은 경험들을 이제는 할 수 없다는 것이 화가 난다. 어떤 사업인지도 모르고 어떤 철학을 가지고 해야 하는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리를 틀고 있는 이상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의 꿈이, 생활이, 시간이 짓밟힐 것이다. 그 고통을 당해내야 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갑갑해 온다.

주현숙 (독립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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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잊지 말아야 할 노동자 투쟁, 노동자 기록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77일 투쟁백서 『해고는 살인이다』. 지난 달 한 노동자가 이 책을 보면서 눈물 흘리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 노동자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평택에 가보지 못했던 동지였다. 부끄러움 때문이 었을까?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기 때문 이었을까? 그 동지는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가방 속 깊은 곳에 가지고 다니며 화보를 들쳐본다.
노동자들에게 공장은 산업화의 원동력도, 선진국에 대한 열망도 아니다. 노동자에게 공장은 한 밥상을 놓고 삶을 이어가는 공동체의 젖줄이자,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이 들을 보듬고 교육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현장, 땀흘리며 족구 한판 벌이고 막걸리잔 나눠 마시는 우정의 공간이다. 그런 공간에서 별안간 1,000여 명의 노동자가 내몰렸다. 쌍용자동차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구조조정 한파가 닥친 금호타이어, 한진중공업 등 전국의 금속사업장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옥쇄파업 77일 동안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입사 후 지금껏 현장에서 동고동락했던 형, 동생들이 정리해고자와 비해고자로 갈렸다. 회사 경영이 어려워 불안감이 돌 때 여행을 함께 가 “어떻게 되더라도 열심히 살자”던 형님은 사측에 동원돼 구사대가 되었다.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누구보다 제일 먼저 달려오던 아우는 정리해고자가 되어 도장공장 옥쇄파업 현장에 짐을 싸들고 들어갔다. 아래 윗집 김치도 같이 담그던 가족들도 갈렸다. 가족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전국을 눈물 바람으로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측이 나오라고 종용해 관제데모에 동원된 가족들도 있었다. 아이들 교실에서도 “니네 아버지 짤렸지”, “니네 아버지 같은 사람들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 진대 ”는 친구들의 말에 깊은 상처를 받은 아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77일 동안 공장 안팎에서 노동자들은 그리고 가족들은 정리해고를 막아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도장 공장을 점거한 옥쇄파업 노동자들, 70미터 상공 굴뚝 농성자들, 정당과 종교단체를 돌며 눈물로 호소했던 가족대책위, 원하청 연대를 하며 옥쇄파업에 동참한 비정규직노동자들. 이 책은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과 눈물, 삶과 희망,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잘 담아내고 있다. 모든 것을 걸고 싸웠던 노동자들의 기록이 여기에 있다.
이 책은 노조 소식지, 각종 정책자료, 사업보고서, 언론 기사 모음, 사진, 동영상, 회의자료, 회의록, 각종 교안, 공문, 홈페이지 게시판 의견, 파업 프로그램 등을 수집한 것을 기초로 집필했다. 2개월에 걸친 분류 작업을 통해 17권의 ‘쌍용자동차지부 투쟁자료집’을 엮고 그걸 초석으로 삼아 다시 1권의 백서로 엮은 것이다. 자료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조합원 17명의 구술과 4명의 연대단위 면접, 조합원 13명의 서면질의와 면담, 한상균 지부장의 서면질의도 진행했다고 한다.
역사는 가진 자의 역사고 힘 있는 자들의 역사다. 자본이 쓴 역사가 한국사고, 세계사다. 노동자들의 기록은 지워지고 사라졌다. 그 기록을, 역사를 스스로 쓰지 않으면 우리 노동자들이 목숨 걸고 투쟁했던 기억은 말살된다.『해고는 살인이다』가 소중한 이유는 그래서다. 한상균 지부장은 옥중에서 이렇게 썼다. “산 자도, 죽은 자도, 구속자도, 징 계자도, 희망퇴직자도 어떤 위치에 있건 여전히 노동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을 날이 금세 올 것입니다.” 그걸 깨닫게 만드는 기록, 여기『해고는 살인이다』가 있다.

김대영 (울산 금속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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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부양을 할 순 없자나?

가장 소외된 자들의 혁명성

 

박종필 감독은 장애인과 홈리스 운동에 오랫동안 결합하며 이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왔다. 박종필 감독에게 빈곤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 했는데, 너무 바빠서 시간 잡기가 힘들었다. 지방출장 다녀오는 사람을 새벽에 만나고 보니 자연스럽게 취중 인터뷰가 됐다.

장애인과 홈리스 인권에 대한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학생 때 그림을 그렸는데, 내 그림이 화랑에 걸리면 택시 운전하는 아버지가 내 그림을 향유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 때부터 빈곤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영상 시작하면서 빈곤 문제에 대해 소소한 작업을 하다가 IMF 구제금융 시대 때 노숙인 작업을 했다. 노동에 대한 영화도 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장애인 노동권에 대해 관심이 갔다. 장애인 단체 행사나 토론회 같은 데 쫓아다니다가, 마로니에 공원에서 에바다 투쟁 1,000일 문화제를 접하고 에바다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난 제도 언론과 주류 미디어의 문제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편 거기에 길들여진 상태였던 것이다. 당시 대안 미디어가 별로 없는 상태에서 에바다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이 없다면 현실을 제대로 볼 방법이 없었다. 아무래도 해결이 안 됐으니 투쟁 문화제를 하는 것이고, 그래서 평택으로 내려갔다. 갔더니 뚜껑이 딱 열렸다. 스스로 반성도 좀 하고.
말 안 듣는다고 두들겨 패서 죽이고, 변사체로 발견됐는데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없이 처리되고, 노동 착취는 다반사로 일어나고, 장애인에게 쓸 돈을 착복 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지. 그런 과정을 담아서 문화제에 상영했지만, 완성도가 있거나 깊이가 있는 작업은 아니었다. 자족적인 영상물로 끝낼 수 없어 깊이 결합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장애인 운동을 하는 분들과 관계를 유지했고, 이동권 투쟁이 터지면 또 결합하고, 중간 중간에 홈리스 운동과 결합했다.

작년에 홈리스 행동 주점에 갔다가 뒤풀이까지 따라갔는데, 난 그 때가 홈리스들과 첫 만남이었다. 재밌는 자리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안 나는 냄새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게 어렵더라. 일단 홈리스들과 함께 활동하려면 그런 걸 재껴야 할텐데?

맞다. 그것만 재끼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 처음에 그들과 어울리면서 고민이 심했다. 당시에 만났던 분들 중에서 노숙을 청산한 분이 없었고, 거의 거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 분들 술을 엄청 마셔댔다. 사실 당시에 일을 찾으면 없진 않았지만 임금이 너무 적었다. 노가다 나가면 거리 노숙은 안해도 쪽방이나 여인숙에서 잘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을 깨기가 참 힘들었다. 내가 몰랐다. 그런데 그 분들이 왜 그렇게 사냐면, 대부분 저학력이고 불안정한 가족관계에 처하다 보니, 주위에 도움받을 길이 거의 없다. 자본주의에서 평가되는 값싼 노동력 말고는 없다. 아무리 뼈빠지게 일해봐야 쪽방이란 걸 충분히 경험한 분들이라 노동에 대한 희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분들 참 착하다. 착하지 않았으면 도둑질을 하거나 강도질을 했겠지. 어쨌든 자본주의에 희망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걸 몸으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희망없는 현실을 잊고 싶어서 술과 담배에 찌들어 내일이 없이 사는 거지.
그런 점에서 장애인 운동도 비슷하다. 70년대 일본의 푸른 잔디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장애인의 신체성 자체가 이미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있다.” 장애인의 노동력은 자본가의 입장에서 별로 착취할 게 없잖아? 홈리스나 장애인이나 같은 거지.
그런데 난 이 희망없음에서 희망이 보인다. 상대적이지만 그들은 더 인간적이야. 물질세계에 관련된 욕망과 목적이 약하고 그러다보니 사람에 대한 애정이 더 큰 거 같애.

그러면 우리가 구체적인 그림은 못 그리더라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사회의 소유관계와 분배문제 같은 걸 상상하잖아? 그런 사회라면, 예를 들어 삼성맨하고 홈리스하고 누가 더 잘 적응할까? 홈리스들이?

어. 당연히. 속된 표현일 수 있는데, 가진 게 없을수록 자유로운 거야.

흔히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말을 하잖아? 듣다 보니 그런 느낌이 드는데, 한편으로 법 없이도 살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바보의 전형이기도 한거 같아 아이러니하네. 근데, 그 분들의 준법의식(?)은 어때?

기득권 세력이 만들어 낸 법에 기득권은 자유롭잖아? 사회구조나 법과 관련해서 저학력이고 착한 사람들이라 법에 자유롭다기 보다는 그냥 법을 거부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노숙을 하는 거지.
근데 이 정도 하면 반 쯤 했나?

아 몰라요. 술 마시다 엉뚱한 이야기로 빠진 것 같기도 해.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서, 내가 묻고 싶은 건, 여기 저기 다니다 보면 운동권의 인권 감수성도 영 형편없을 때가 많아. 공식적인 발언이나 연설 듣다가 손발이 오그라들 때가 자주 있거든. 그 쪽 전문가로서 운동권은 어때?

어디? 사노준?

이웃까지 모두 다.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과 장애인, 홈리스 운동이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까?

인권 감수성의 필요성을 모르나? 알면서 못할 수 있겠지. 사회주의자, 좌파 그러면 이성의 화신이란 느낌이 들어. 사람을 움직이는 건 가슴인 거 같은데. 이성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에서 가슴만으로도 사람이 움직이진 않지만, 이성으로 안다면 가슴이 동해야 사람이 변하는 거 아닐까? 그리고 사람은 충돌이 있어야 변하잖아? 난 작업하며 느끼는 게, “충돌없이 변화없다”야. 아, 이런 고민은 힘들어! 내 일상과 다른 것들을 학습했지만, 현실에서는 다른 상황을 만나게 돼. 그걸 연결하는 것도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지. 이론적으로 자본주의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 것 보다 삶 속에서 고통받고 희망을 잃으며 세상을 바꾸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해지는 거 같애. 학생 때 학습하며 노동자가 혁명의 주력부대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표현이 지금은 부담스럽고 고민돼. 그래도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찾는 나는 지금 무지 행복해.
이 신문 “문제는 자본주의다” 자본주의가 끔찍하지만, 그걸 느끼는 건 우리가 자본주의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겠지. 사회주의 운동이 공허하지 않으려면, 자본주의에 거부당했거나, 자본주의를 거부한 장애인과 홈리스들을 혁명의 주체로 함께 투쟁하는 거겠지. 어떻게 함께 할까? 하여간 공중부양을 할 순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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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과 정치

 문화예술위원회의 혼란

문광부 소속 문화예술위는 이상한 이중권력 상태다.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취임한 김정헌 위원장이 이명박과 유인촌에게 해임됐다가 지난달 법원에서 해임 효력정지 결정을 받아 다시 문화예술위원회에 출근하면서 두 명의 위원장이 동거하게 된 것이다. 이 혼란에 책임있는 문광부 장관 유인촌은 “재미있지 않겠어?”란 무책임한 발언을 했다. 국가 권력이 스스로 무능함을 시인하는 모습이 재밌는 건 사실이지만, 이 재미는 문화적으로 상당히 천박하다.
문화예술위는 국가, 지역, 계급, 계층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공공의 영역으로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모든 국가 기관이 인민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더이상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문화예술은 정치권력의 문제로만 볼 수 없는 영역이다. 여기에 어떤 정치가 관계하느냐가 문제다. ‘어떤’은 철학의 문제다. 
 
이명박과 유인촌의 문화예술
노무현이 임명한 김정헌 위원장이 MB와 유인촌의 코드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표적 감사로 해임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 코드란 무엇일까? 다른 위원장인 오광수를 보면 안다. 문화예술위가 지원하는 문화예술인과 문화예술단체에 지원 조건을 내건다. 데모하지 말 것. 데모에 나간 적 있거나 데모할 성향의 사람이나 단체에는 이미 지원을 다 끊었다. 문화예술은 정치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이명박과 유인촌의 코드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문화예술
거슬러 올라가면, 문화예술이 정치에 길들여진 건 김대중과 노무현 시절이다. 문화예술을 끔찍히 사랑했던 김대중과 노무현은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오랜 군사 정권에 숨죽이던 재야 문화예술인들을 양지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문화예술을 정치에 복종시키진 않았지만, 정치에 길들였다. 문화예술의 정신과 철학이 없어지진 않았지만 약해졌다. 지원없이 문화예술하려니 나이도 들고 힘도 들어 데모 안하고 지원받는 문화예술인들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건 김대중과 노무현의 코드다.
 
그러면 사회주의 문화예술은?
역사적 사회주의의 경험에서 초기 혁명기에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혁명을 지지하고 열광했다. 사회주의 정치가 문화예술을 길들이거나 복종시키려 하기 전에 먼저 지지하고 열광했던 그 한때는 좋은 시절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오래 가진 못했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김범우가 인민군 종군기자였다가 중도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당이 강요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사회주의 정치도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치, 이명박과 유인촌의 정치와 다르지 않았다.
 
문화예술의 정치
김정헌 위원장이 법원으로부터 해임 효력정지 결정을 받은 것과, 그래서 다시 출근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법원의 결정은 이명박과 유인촌의 정치가 패배했다는 의미지만, 만신창이가 된 문화예술위와 김정헌 위원장이 복원된 것은 아니다. 다시 출근하는 것은 그가 앞으로 문화예술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를 떠나 문화예술인의 정치를 시작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문화예술이 더이상 정치에 휘둘리게 둘 수 없다는 표현이다.
정치가 문화예술하는 것과 문화예술이 정치하는 것의 차이다. 러시아 혁명기에 볼셰비키에 가담했던 시인 마야꼬프스키는 혁명기에 이런 시를 남겼다. “러시아의 정치여, 영원하라! 예술이여, 정치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라!” 그리고 그는 예술의 자유가 사라졌을 때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길, 자살을 선택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21세기가 되어 사회주의자들도 문화예술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졌다. 사회주의 정치가 어떻게 문화예술할 것인지의 단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 이제 문화예술을 배우고 익혀 문화예술의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문화예술가를 죽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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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미디액트…

 


미디액트 수강생인 김태화님이 직접 만든 가툰이다. 
문광부 소속 영화진흥위원회는 그냥 이명박, 유인촌 코드다. (사)독립영화협회에서 영진위에 위탁받아 운영했던 미디액트와 독립영화전용관을 이렇게 날리는데 2년 걸렸다. 이명박이 당선될 때부터 이런 결과를 걱정했고,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아쉬운 점은 이런 결과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2년 동안 (사)독립영화협회 관계자들은 너무 눈치만 본 건 아니었나 싶다. 지금 미디액트 홈페이지에는 수많은 수강생과 회원들로부터 탈퇴와 개인 정보 삭제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새 사업자도 회원들을 얻을 수 없지만, 옛 미디액트도 회원들을 잃게 되었다.
문화예술 운동을 공공영역으로 확장했던 미디어 활동가들의 투쟁의 경험과 실력은 여기까지였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다음 라운드를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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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와 균형

 

어슐러 K. 르 귄 읽기 3
 
어스시의 세계
넓은 바다, 작은 섬들의 세계. 헤인의 우주보다 보잘 것 없이 작은 곳에서 고작 수백 년의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리고 놀라운 마법이 세계를 변화시킨다. 마법이라 부르는 그것은 어스시의 세계에서는 과학기술이다. 자연이나 생명 곧 마법을 걸 대상의 본질과 원리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이 어스시의 마법이다. 본질은 이름이고, 원리는 주문이다. 대상의 진정한 이름을 찾고, 이름을 불러 소환하고, 적절한 주문을 걸어 변화시키는 것이 마법의 기본과정이다. 그것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 마법사의 기예다. 마법사들에게 기예보다 중요한 것은 지혜다. 지혜가 풍부한 마법사들을 현자라 부른다. 
 
변화와 균형
어스시는 작은 섬들의 세계이기 때문에 다른 섬들과 교역하기 위해서는 항해술이 대단히 중요하다. 마법사는 배가 잘 항해할 수 있도록 마법풍을 쓰기도 하지만, 그 결과로 다른 곳의 기후 변화를 초래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단히 조심스런 기술이다. 현자들은 폭풍우를 만들거나 없앨 수도 있지만, 웬만해선 자연에 저항하지 않고 감수한다. 반면에 사악한 마법사들이 가끔 등장하거나, 지혜가 모자란 마법사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을 빚기도 한다. 이런 구절이 있다. 
 
좋은 일을 하려고 할 때의 위험한 점은, 마음속으로 선한 의도와 실제로 잘 해내는 행위를 혼동하는 데 있다. 그것은 수달이 옌바나 강을 바르게 헤엄쳐 내려가면서 할 생각이 아니다. 수달은 속도와 목적지, 그리고 달디단 강물의 감촉과 헤엄치는 힘의 달콤함 외에는 별로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제 수달이 된 그는 그대로 수달로 남아 있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쾌적한 갈색 물속에 살아 있는 강물 속에, 언제까지나 수달인 채 있었으면…. 
- 제5권 어스시의 이야기들, ‘찾은 이’ 편에서
 
선한 의도를 가졌지만 일을 망치고서 자신이 부끄러운 나머지 도피하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다. 다행인 것은 저 수달은 자신의 혼동을 깨달았기 때문에 결국 도피하고 싶은 마음을 이겨낸다. 그리고 가능한 만큼 일을 바로 잡는다. 그는 악에 대항하기 위해 수많은 마법사들을 찾아 모으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다. 자신의 실수로 죽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자신의 몸에 남은 상처로부터 평생 고통과 후회 속에 산다.  
르 귄이 강조하는 균형은 마법의 균형뿐만이 아니다. 주인공들이 성장을 보여줄 때는 꼭 고통을 동반시킨다. 좋은 결말 아래에 숨겨진 그 고통이 마음을 너무 후벼파서 르 귄이 미울 정도다. 그러나 그것이 르 귄 작품의 장점이다. 판타지라는 장르가 무색할 만큼 사실적이다.
 
감수성
여기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너무 큰 비약일지 모르겠다. 일군의 사회주의자들이 지금까지의 운동과 다른 질적 성장을 목전에 두고 있다. 아직은 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알지 못한다. 다른 역사를 가진 사회주의자들을, 또는 지금까지 다른 운동이라 생각했던 여성주의나 생태주의 운동을 만날 것이다. 
현실을 아름다운 우화나 상상으로 비유하는 훌륭한 이야기꾼의 감수성과 현실의 고통을 이겨낼 냉철함의 균형을 갖춘다면 사회주의자들이 변화할 이야기의 전개가 조금 더 밝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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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

제1권 어스시의 마법사
어스시의 세계에서 가장 지혜롭고 위대한 마법사 새매(진정한 이름은 게드)의 성장 이야기다. 어릴 때부터 약간의 재능을 타고난 새매는 힘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또래 여자아이가 “나 이런 거 할 줄 아는데, 넌?” 하는 소리에 감당할 수 없는 마법에 접근하는 야망 가득한 소년이었다. 그래서 지혜로운 스승의 가르침 보다 로크 섬의 마법학교를 선택한다. 거기서도 끝내 동급생과 질투어린 마법대결로 치닫고, 너무나 위험한 어둠의 존재에게 쫓기게 된다. 쫓고 쫓기는 모험의 과정에서 마법사의 진정한 책임을 느낀다. 돌아 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어둠의 존재와 대면한다. 그 어둠의 존재는 새매의 다른 모습이었다. 
1권에서는 마법의 원리가 소개되고, 마법을 통한 세계의 변화를 제대로 책임지는 마법사의 자세가 그려진다.
 
제2권 아투안의 무덤
어스시의 변방 아투안은 마법사들의 힘보다 대지의 힘이 지배적인 곳이다. 대지의 힘을 숭배하는 사원의 대무녀는 아르하라는 소녀다. 아르하는 ‘먹힌 자’란 뜻이다. 자신의 이름을 먹힌 채 영원히 환생하는 대무녀의 현신이 아르하다. 원래 이름이 테나인 아르하는 어려서 부모와 헤어지고 시녀들과 환관의 지시에 사육당하는 불쌍한 소녀일 뿐이다. 아르하는 어느 날 지하 무덤의 미로 아래서 유물 도둑과 맞닥뜨린다. 도둑은 미로 속에 갇혔고, 아르하는 처음보는 도둑, 아니 남자를 훔쳐본다. 먹힌 자와 갇힌 자는 오랜 시간 동안 최소한의 대화로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의 도움으로 자유를 찾는다. 도둑은 새매였고, 유물은 옛 영웅의 평화의 상징인 룬이었다. 평화의 상징을 원래 있던 곳에 되돌려 놓음으로 전쟁과 약탈이 판치는 어스시의 세계를 평화롭게 하려는 의도였다. 
마법사 새매보다는 아르하의 운명과 자유의지의 대결이었다. 
 
제3권 머나먼 바닷가
새매는 그간 세계의 불균형을 손질하고 평화의 룬을 되찾는 등 많은 활약을 펼쳐 존경받는 대현자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변방에서 마법사가 마법을 잃어버리거나 마법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하며 어둠이 세계를 덮쳐왔다. 이를 일찍 알아차린 어느 섬 지역의 왕자 아렌이 새매를 찾아온다. 이들은 원인을 찾아 머나먼 여행길을 떠난다. 문제의 원인은 영생을 갈구하는 어둠의 마법사 거미였다. 세계의 균형이 무너져 아주 옛날 인간과 한 종족이었던 서쪽 바닷가의 용들도 말을 잃고 서로를 죽이는 일이 생겼다. 새매와 아렌, 그리고 나이 많은 위대한 용이 만나 삶과 죽음의 경계지로 간다. 겨우 세계의 균형을 바로 잡은 새매와 아렌은 용을 타고 로크 섬으로 귀환한다. 아렌은 800년간 비어있던 어스시의 중심인 헤브너의 왕좌에 오르고 모든 능력을 잃은 새매는 고향 곤트 섬으로 돌아가 은퇴한다.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제4권 테하누
르 귄은 1권 1968년, 2권 1971년, 3권 1972년,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1990년에 제4권 테하누를 출간했다. 게드는 고향에서 2권의 주인공인 테나와 노년을 보낸다. 테나는 부랑자들에게 버려져 불에 반쯤 탄 여자 아이 테루를 돌본다.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해가는 과정에 새로운 가족이 형성된다. 그러나 무언가 다른 테루에게 사악한 마법사가 접근하고 새로운 가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긴다. 위기의 순간 아주 오래된 용이 등장해 사악한 마법사를 물리치고 테루를 자신의 딸 테하누라 불렀다. 이 작품에서는 르 귄이 그간 완벽하게 창조했던 마법의 세계에 의문을 던지며 그 마법보다 더 깊은 곳의 비밀을 드러냈다. 한편 3권까지 마법의 진정한 힘을 탐구하던 내용이 남성 중심적이었다는 평을 받아들여 마법의 힘 보다 인간의 감성과 정신에 더 큰 비중을 두며 여성주의를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제5권 어스시의 이야기들
르 귄은 테하누에 ‘어스시의 마지막 책’이란 부제를 달았었다. 11년 뒤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하며 변화한 어스시의 세계와 새매 이전의 어스시 역사를 다룬 5편의 중단편을 묶어 발표했다. 현자들의 섬 로크가 형성되는 과정인 ‘찾은 이’, 마법의 힘을 넘어선 사랑과 예술, ‘검은장미와 금강석’, 새매의 스승의 이야기 ‘대지의 뼈’, 대현자 게드의 친구이자 숙적인 마법사의 노년 이야기 ‘높은 습지에서’, 그리고 테하누의 자매 ‘잠자리’의 이야기들이다. 이 작품들은 작가의 작품이 독자적인 세계로 변화할 수 있고, 작가는 그 세계를 겸허하게 탐험할 수도 있다는 놀라운 이야기들이다. 
 
제6권 또 다른 바람
남자 마법사들의 세계에 발을 들였던 여자 마법사 잠자리가 용이 되어 날아간 뒤, 그리고 테하누가 장성했을 때, 오지의 어느 떠돌이 마술사는 자신의 고통을 감당할 길이 없어 로크 섬을 거쳐 은퇴한 게드를 찾는다. 세계의 균형이 다시 무너지고, 서쪽의 용들이 인간의 토지를 침략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균열이 생긴다. 모든 문제의 실마리를 가진 자들과 용들이 헤브너의 젊은 왕을 중심으로 모인다. 동쪽에 날지 못하는 용들이 사는 곳의 공주도 헤브너의 왕을 찾고, 이들은 힘과 지혜를 모아 용과 인간의 비밀, 삶과 죽음의 비밀을 밝힌다. 환생하는 인간들, 죽음의 세계에 갖힌 영혼들, 그리고 용들은 다른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난다. 이 작품은 인간의 종교, 문화의 차이들 그리고 억압과 해방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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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공간과 사람들

1주년, 남일당 전경. 나중에 이 앞을 지나면서 번쩍이는 건물을 볼 때 이 사진을 떠올려보시라.


촛불미디어센터 레아
참 많은 문화예술계 사람들이 이 투쟁에 함께 했다. 그 중에 미디어 활동가들은 시간을 기록하는 활동의 특성 때문에 그 공간에 오랜 시간 결합해야만 했고, 자연스럽게 레아 호프를 활동 공간으로 접수(?)해 촛불미디어센터 레아라 이름 붙였다. 카페까지 차려 부업으로 커피장사도 했다. 그러다보니 결합하는 미디어 활동가들이 늘어났고, 다른 장르의 활동가들도 좀 더 편하게 모일 조건을 만들었다. 유가족들과 철거민들이 보기에 카메라 들고 다니며 거기 사는 줄은 알지만, 뭘 하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파악하긴 힘들었던 모양이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서로 알아가며 각자의 투쟁을 벌였다.
어느덧 투쟁이 마무리되고, 레아를 비워야 될 때가 되었을 때, 레아 사람들은 여전히 ‘유가족들과 철거민들에게 우린 뭐였지? 우린 뭘 했지?’하는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1월 19일에 거리투쟁 하느라 영상을 볼 수 없었던 유가족들과 철거민들에게 레아 활동의 결과물들을 상영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19일 상영회 안 했으면 촛불미디어센터 레아는 앙꼬 없는 찐빵으로 끝날 뻔 했다. 유가족들과 철거민들은 그들이 출연한 영상들을 보는 내내 울고 웃고 박수쳤다. 그들이 이 투쟁의 주인공이었음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그 찐빵을 완성시켰다.


촛불미디어센터 레아 사람들은 이제 공간이 없어져 무척 서운하다. 그래도 앞으로 계속 모여 이 투쟁의 기록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구성할 계획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몇 편이 제작될 것이고, 그 중에는 책과 함께 엮는 작품도 있다.



마지막 문화제. 용산투쟁에서 매주 목요일 연극공연이 있었고, 마지막 문화제까지 많은 공연팀이 함께 했다.

마지막 문화제
용산참사 1년, 1월 20일 용산에서의 아주 질긴 투쟁이 마무리됐다. 용산투쟁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참사현장에서 느꼈던 숨 막히던 처절함은 이제 기억으로만 남았다. 마지막 문화제의 날씨는 흐렸다. 부슬비가 내렸고, 강추위는 꺾였지만 한겨울의 추위는 여전했다. 그러나 유가족들, 용산 4상공 철대위 사람들, 대책위 사람들, 문화제에 함께 한 사람들의 표정은 홀가분했다. 파괴과정의 건물들로 둘러싸인 그 공간은 황량한 감각과는 달리 따뜻한 감정이 맴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눈물 흘린 황량한 공간에서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남겨놓고 간 감정의 조각들 때문이다. 설사 이 투쟁이 완전한 패배로 끝나 그 공간에서 억울하게 떠밀려 쫓겨났더라도 그 감정의 조각들은 여전히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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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커처 그리기. 만화가 이동수님이 그리는 철거민들의 캐리커처

김성희, 김수박, 김홍모, 신성식, 앙꼬, 유승하 공저. 4월에 기획을 했고, 6~7월에 철거민들을 취재해 만들어진 만화책. 마지막 문화제 때 이 책과 함께 이승현 작가의 화보집 ‘파란집’이 출판기념회 및 증정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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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여행과 성숙의 대가

어슐러 K. 르 귄 읽기 2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의 한국어판과 영어 판. 이 단편집의 첫 작품 ‘셈레이의 목걸이’는 헤인 에큐먼 시리즈를 탄생시킨 짧은 전설이다. 표지 그림은 셈레이가 살던 은하 제8지역, No. 62 : 포말하우트 II의 바람말과 셈레이로 추정된다. 이 행성은 나중에 다음 작품에서 그 제목인 ‘로케넌의 세계’란 이름을 얻는다.



다르게 흐르는 시간
책을 펴면 당신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다른 환경의 행성을 본다. 거기는 공전과 자전의 주기가 지구와 다르기 때문에 시간의 느낌이 전혀 다르다. 그래서 한동안 시차적응기가 필요하다. 작가가 시차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줄 때도 있지만, 미지를 탐험할 때 안내자에게 너무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시간 개념이 다르면 생각도 분명히 다를 것이란 걸 추리할 수 있다. 단지 관찰의 목적만으로 여행할 거면 그 정도만 유념해도 되겠지만, 다른 행성의 주민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들 방식으로 생각하는 연습도 필요할 것이다. 권리의식이나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라면 이 모험에서 재미보다는 짜증을 더 많이 느낄 것이다. 르 귄의 문장은 그리 쉽게 재미를 선사하진 않는다. 대신 다른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학습시켜 준다.
 
단순한 서사, 깊은 사색
이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자신도 모르고 독자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적과 대결하기 위해(로케넌의 세계), 생존을 위해(유배 행성), 자아를 찾아(환영의 도시), 연맹을 맺기 위해(어둠의 왼손), 위기를 극복하려고(빼앗긴 자들) 떠난다. 이들의 여행은 대단히 고단하다. 자신이 모르는 곳을 여행하기 때문이다. 그 여행을 읽는 독자도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만큼 고단하다.
그런데 이 여행은 의외로 단순하다. 외계인과 결투하거나 괴물에게 쫓기거나 하는 스펙터클한 모험이 펼쳐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이 여행이 흥미진진한 것은 모르는 환경을 익히며 알아가는 지적인 과정의 모험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자아와 여행 속의 자아가 서로 대립하는 모험이다. 이전의 자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것을 잃고, 여행 속의 자아는 뭔가를 얻어간다. 주인공의 여행은 주인공을 서서히 변화시킨다. 그것을 읽는 독자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만큼 독자도 주인공과 같은 변화를 경험할 것이다. 그저 관찰만 해도 상관은 없다. 어떤 소설이나 다 마찬가지 아니냐고 물으면 물론 그렇다. 그러나 다른 어떤 소설들과 차이는 그 깊이가 다르다는 점이다.
 
소통의 방법 찾기
독자는 여행이 시작되고 주인공과 마음의 대화를 나눌 수 있거나, 스스로 주인공이 되었다면, 이제 새로운 동반자와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의 단계로 넘어간다. 주인공과 여행의 동반자는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왔다. 말은 통하지만 그 생각이 통한다고 볼 순 없다. 시차적응기 같은 한동안의 적응기가 필요하다. 그 시간이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 대화로는 어려워 텔레파시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텔레파시 또한 그들이 살아온 문화를 극복하진 못한다. 그래서 르 귄은 침묵을 권한다. 상대의 말을 들으려면 일단 침묵하라고 한다. 그런데 둘 다 침묵하면 어떻게 들을까? 참 답답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여행은 계속된다. 표정과 손짓 발짓에서 상대를 차츰 알아간다. 오랜 침묵 끝에 서로의 대화는 그 전의 대화보다 좀 더 깊은 공감대를 만든다. 작은 공감대가 형성되면 이제 좀 더 빠른 진전을 경험한다. 이 소중한 경험은 큰 기쁨을 느끼게 만든다. 독자와 주인공과 동반자는 서서히 소통의 방법을 찾는다. 이 정도 되면 긴 여행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끝맺음 할 것인지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책을 놓을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
한편 각 편은 르 귄이 저작한 순서대로 보일듯 말듯 한 희미한 끈으로 연결되어있지만, 각 편은 모두 독립적이다. 그래서 어느 편으로 읽기를 시작해도 상관은 없지만, 로케넌의 세계에서 배운 여행의 기술은 유배 행성의 여행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유배행성에서 배운 여행 기술은 환영의 도시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그런 식이기 때문에 저작 순으로 읽으면 여행을 따라 잡는데 힘이 적게 들고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성숙의 대가
이제 여행의 마지막 단계다. 로케넌은 적으로부터 행성을 지킨다. 유배자들은 멸족을 면하고, 젊은 왕자와 인류는 적의 지배에서 해방된다. 에큐멘의 대사는 겨울 행성과 연맹을 체결한다. 쌍둥이 행성의 물리학자는 두 행성의 유대를 형성하고 사랑하는 동반자에게 돌아간다. 좋은 결말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아주 큰 희생을 치렀거나, 희생을 감당해야 한다. 적이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여행에서 동반자와 진정한 소통을 통해 이룬 유대의 힘이다.
로케넌은 낯선 행성의 여행에서 얻은 텔레파시 능력에 힘입어, 그리고 빛보다 빠른 통신기 앤서블로 에큐멘 본부에 사격지원을 요청하자 곧바로 빛보다 빠른 무기가 적들의 기지를 파괴한다. 본부에서 그 행성으로 곧바로 빛의 속도로 나는 우주선이 하루 만에 그 행성으로 날아갔지만, 로케넌은 이미 죽은 지 몇 십 년이 흘렀고, 행성의 원주민들은 그곳을 로케넌의 세계라 불렀다. 빛의 속도로 나는 우주선이 있지만, 그보다 더 광대한 우주에서 한 인간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 인류의 유대를 위해 에큐멘의 대사들은 자신의 짧은 시간을 기꺼이 희생한다. 참 까마득하고 아스라한 시간의 이야기다.
지금은 지구의 반대편에 불과 하루면 날아갈 수 있다. 불과 500년 전에는 수년간 목숨 걸고 항해했다. 인류는 그렇게 어렵게 다른 문화와 관계를 맺으며 변화해 왔다. 꼭 좋은 방향의 변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변화는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헤인 에큐멘 시리즈의 기나긴 여행과 성숙의 대가는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에서 마법의 균형으로 표현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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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에 대한 인간의 가능성

어슐러 K. 르 귄 읽기 1

SF문학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는 르 귄은 1962년부터 최근 2007년까지 70편이 넘는 소설, 시, 산문, 번역서들을 집필했다. 아직 한국에는 이 작품들 중에서 20여 편이 번역됐다. 그 중 내가 읽은 헤인 에큐멘 시리즈와 어스시 시리즈로 ‘르 귄 읽기’를 쓴다는 것은 시건방일지 모르지만, 그 두 시리즈는 심심치 않게 내가 무언가를 말하게끔 부추기고 있다. 그것을 몇 개의 단어로 표현하기엔 부족하지만 억지로 표현하면, 다른 문화의 감수성, 갈등 풀기, 변화 속의 균형 등이다. 먼저 헤인 에큐멘 시리즈로 이글을 시작한다.


문화 또는 문명의 충돌
인류의 과학기술은 우주진출을 이미 시작했다. 아직 알 수 없지만, 곧 외계인과 조우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이 넓은 우주에 지구에만 생명체가 있다는 믿음은 이제 종교적 맹신으로 치부된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에 심심찮게 대중을 심각하게 만드는 외계인과 조우에 대한 기대와 걱정은 인류의 수많은 문명과 문화가 충돌한 경험 때문일 것이다. 자본은 완전히 세계화되어 지구 어느 오지에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며 심각한 충돌을 만들고 있다. 그 양상은 다르지만 역사시대 이전부터 좁게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넓게는 공동체들 사이에 충돌해왔다. 한편 충돌의 역사는 서서히 거대한 공동체를 만들며 거대한 공동체 문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상적인 공동체를 향한 인류 정신의 최고 단계를 아직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공산주의라는 상당히 구체적인 이상을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했고 여전히 실천하고 있다. 그 변화가 너무나 더디게 보이기도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변화의 방향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염세적인 인간들의 디스토피아식 저주 또한 어느 정도는 좋은 세계를 위한 경고와 계몽의 메세지로 읽을 수 있다. 인류는 어렵지만 서서히 앞으로 나가고 있다고 말하면 막연한 낙관같지만, 대중이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되려는 신념과 노력 또한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이다. 
르 귄의 헤인 에큐멘 시리즈는 지금보다 훨씬 앞으로 나간 인류에 대한 상상이다. 그러나 이 상상은 지옥의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르 귄이 살고 있는 지구, 미국,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유럽의 문화, 자신이 공부한 중국의 노자 사상 등이 상상의 재료다. 지금보다 훨씬 앞으로 나간 인류는 어떤 충돌을 경험할까? 개인과 개인의 충돌은 똑같고, 공동체들 간의 충돌은 행성간의 문명 충돌로 표현하고 있다. 행성간 다른 인간 종족의 충돌은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한 다른 문화의 차이보다 훨씬 클 것이다. 이 시리즈는 다른 문화와 문명의 충돌을 어떻게 극복하고 소통하는가의 이야기다. 

소통을 위한 기술, 과학과 정신
르 귄은 소통을 위한 과학기술로 빛보다 빠르고 거리를 초월한 실시간의 통신기 앤서블을 발명해낸다. 이 과학기술은 행성간 교류와 발전이라는 인류의 진보에 날개를 달아주지만 르 귄은 인간을 과학기술에만 의존하는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소통을 위한 인간의 정신적 노력으로 언젠가 텔레파시의 능력을 습득하게 만든다. 말과 문자 언어가 가지는 오해와 한계를 지적하며 정신 그대로를 상대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상상한 것이다. 이 정신적 노력이야말로 르 귄이 추구하는 소통의 핵심이다.
한편으로 과학과 정신 두 가지 기술은 악용되기도 한다. 그 기술을 지배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정체불명의 존재를 에큐멘의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빛보다 빠른 물질의 이동 기술은 메세지 통신이 아니라 파괴를 위한 에너지의 이동 또한 가능케 한다. 텔레파시의 능력도 차원 높은 소통이 아니라 약자의 정신지배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의 과학기술의 이용방법은 에큐멘 보다 정체불명의 적에 가깝다. 첨단 과학은 대중을 지배하려는 자본가 계급의 전유물이며, 약소국을 강탈하려는 제국주의의 무기였다. 
다른 종 사이의 소통을 위한 상상은 SF세계의 매우 중요한 요소다. 얼마 전 본 영화 아바타에서는 판도라 행성의 생명체에 ‘교감’을 위한 촉수모양의 감각기관을 상상하고 있었다. 인간의 환경파괴를 막아낸 것은 촉수들로 판도라 행성의 모든 생명체가 교감을 나눠 그 감각기관이 없는 인간을 물리친다는 내용이었다. 아바타에서 말하는 ‘교감’의 촉수기관은 대단히 훌륭한 상상이지만, 그 촉수기관으로 관계를 맺은 사이는 주종관계와 소유관계를 형성했다. 약간만 삐딱하게 보면, 판도라의 종족은 만물을 다 따먹고 군림하는 종족이었다. 헤인 에큐멘 시리즈에 등장했다면 분명히 적이었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에큐멘의 대사들과 주인공들은 다른 문화와 소통을 위해 끝없는 이해와 노력을 아끼지 않고, 희생도 불사하지만, 약자를 지배하려는 적들에 대해서는 두가지 기술을 무기화해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한다. 인류 역사 속의 뛰어난 혁명가들을 연상케하는 대목이다.
현실로 돌아와 지금의 양자물리학은 앤서블 같은 기술이 이론적으로 가능함을 증명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앤서블의 실현은 시간문제다. 텔레파시의 능력은 과학적이라기보다 정신의 영역이다. 대중의 열망이라는 거대한 에너지를 귀신같이 악용하는 기업과 정치인들이 있고, 대중의 열망을 직접민주주의로 실현하려는 사회주의자들도 존재한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대중의 열망이 언어와 이미지라는 데이터로만 파악되지는 않는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음이고 정신이다. 지배가 아니라 소통을 목적으로 눈과 귀를 열고 마음을 여는 것이 텔레파시의 출발이 아닐까?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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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인 에큐멘 시리즈
아주 오랜 옛날 헤인(인류)은 은하 곳곳에 인류의 문명을 전파했다. 그 뒤 각 행성의 인류는 고립된 채 독자적인 문명을 만들어 나갔다.
다시 오랜 시간이 흘러 헤인은 은하 곳곳에 떨어져 있는 인류를 찾아 서로 교류하기 위한 에큐멘이란 행성 연합을 결성한다.

 
로케넌의 세계, 1966년
이 저작은 ‘셈레이의 목걸이’이란 단편의 뒷이야기로 시작한다. 셈레이가 며칠간 우주여행을 했지만, 셈레이가 살던 곳에서는 2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로케넌의 세계’는 셈레이의 여행 때 잠깐 등장했던 에큐먼의 로케넌이 셈레이가 살던 행성을 탐사하며 정체불명의 적과 대결한다. 이 행성은 아직 이름이 없었고, 석기 문화의 두 종족과 청동기 문화의 한 종족이 살고 있었다. 당시 에큐먼은 엔서블이란 통신기를 사용했고, 로케넌이 모험 과정에서 적이 아닌 정체불명의 어떤 존재에게 텔레파시의 능력을 훈련받는다. 로케넌은 적에게서 이 행성을 지켰고, 원주민과 에큐멘은 로케넌의 공로를 기려 이 행성에 ‘로케넌의 세계’란 이름을 붙인다.


유배행성, 1966년
로케넌의 모험 보다 수천 년이 흘러 다른 행성은 배경으로 새로운 종족과 새로운 문명이 어떻게 탄생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에큐멘에서 석기 문화의 어느 행성에 연구그룹이 이주했지만, 앤서블과 우주선을 잃고 고향 행성과 천 년 전에 연락이 끊겨 이주민들은 서서히 소멸해가는 상황이었다. 석기인은 온순한 농경족과 겨울이 되면 남하하는 포악한 수렵족이 있다. 수렵족의 이동은 농경족과 문명족 모두에게 큰 위협이었다. 농경족의 족장 딸과 문명족 지도자의 사랑 때문에 수렵족의 이동에 두 종족간의 공조가 깨져 큰 비극을 맞이한다. 그러나 이 비극을 해쳐나가는 과정에서 문명족과 석기족의 이종교배 가능성이 생긴다. 텔레파시는 다른 두 종족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환영의 도시, 1967년
‘유배행성’에서 새로운 문명이 탄생한지 다시 수 천 년이 흘러, 이 문명은 옛날 빛의 속도로 나는 우주선의 과학을 복원한다. 그리고 싱이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적이 출현한다. 새 문명의 젊은 왕자는 싱에게 쫓겨 테라라 불리는 지구로 오지만 모든 기억과 능력을 상실한다. 테라 또한 싱의 지배를 받고 있다. 싱은 상상을 초월하는 환영으로 인류의 소통을 통제하며 과학기술의 사용을 막고 있다. 젊은 왕자는 테라인의 도움으로 서서히 기억과 능력을 되찾아 싱과 일대 결전을 벌인다. 텔레파시의 발전은 소통능력을 넘어서서 정신을 지배하는 무서운 힘으로까지 발전했다. 두개의 막강한 정신의 대결에서 힘이 아니라 지혜가 승리한다.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SF식 헌사라 할만하다.


어둠의 왼손, 1969년
에큐멘이 겨울행성과 연맹을 맺는 과정이다. 텔레파시가 등장하지 않고, 앤서블이란 통신기를 행성간 외교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것으로 보아 ‘로케넌의 세계’ 보다 이전의 연대기다. 겨울행성은 매우 추운 행성이라 매우 더디게 문명이 발전하지만 우주진출 직전의 과학의 수준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매우 게으르고 관료적이며 보수적인 가치가 지배적이다. 특이한 점은 이 행성의 종족은 자웅동체고, 생리주기가 되면 하나의 성징이 나타난다. 에큐멘의 사절은 겨울행성의 두 나라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지만, 왕조의 대신 에스트라벤과 사랑과 우정의 친교를 맺으며 끝내 에큐멘과 외교를 성사시킨다. 양성인의 문화를 이분법이 없거나 둔화된 사회로 묘사한 상상력이 빛나는 작품이다. 


빼앗긴 자들, 1974년
에큐멘이 결성되기 직전 우라스와 아나레스라는 쌍둥이 행성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우라스는 자본주의가 최고도로 발전한 사회고, 이에 폭발한 혁명으로 건설된 무정부 사회가 아나레스다. 아나레스는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지만 환경이 황폐해 매우 가난하고, 관료제와 집단주의는 한계 상황에 이르렀다. 아나레스의 물리학자 쉐벡이 두 행성의 교류와 발전을 위해 우라스로 간다. 두 행성으로 갈라진 사회, 각 사회의 장단점들에 대한 실감나는 비교는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의 비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두 행성 모두에게 외면 받는 독특한 충돌 속에서 쉐벡은 빛의 속도 보다 빠르고 공간의 거리를 초월한 실시간 이동의 기술을 발명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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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마음을 좋아하는 글로리아


 

“2년 전에는 후원의 밤을 했습니다. 작년부터 회원의 밤을 합니다. 후원의 밤을 기대하다가 후원이 끊기면 우리 살 길이 막막하지만, 회원의 밤은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라 우리가 살길을 찾아 우리 회원들이 모여 함께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10월 13일 오산이주노동자센터 회원의 밤에서 장창원 목사가 한 인사말이다. TV에도 거리에도 기부를 선동해대는 계절에, 거기다 정부는 기부가 빈부격차를 해소할 대안이라 사기치는 시대에 일침을 놓는 속시원한 이야기다. 글로리아씨도 이런 마음으로 오산이주노동자센터에 자원 봉사를 하고 있다. 뭐 대충 넘어가도 되지만 계속 ‘봉사’란 말이 나와 넌지시 이런 이야기를 던졌다.
“내 생각에는요, 돈있고 힘있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하는 척 보여주는 것이 ‘봉사’인 거 같아요. 우리는 진짜로 서로 돕자고 하는 일이니까 ‘봉사’ 보다는 ‘활동’이란 말이 좋은 거 같은데...”
“아니에요, 난 봉사하는 거에요. 활동을 하면 페이를 받아야 되는데, 난 어려워서 못해요”
“아, 그런 뜻이군요. 하하하”
대화가 이런 식으로 깔끔하지 않았다. 저 대화는 요점정리라 보면 되겠고, 실제로는 서너배 더 길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요점 정리를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뒤에 인용하는 대화는 대부분 요점정리로 읽으면 되겠다. 어쨌든 30여분의 대화 뒤에 잠시 쉬자고 말했다.
“내가 글로리아씨 이야기를 알아듣기 힘들어서 미안해요”
“왜 힘들어요?”
“머리가 나빠서겠죠”
“하하 한국 남자들 머리 나쁜 거 맞아요”
“푸하하하, 맞아요, 한국 남자들 머리 나빠요”
이 대목은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러니까 짧고 쉬운 대화는 꽤 잘 통했다.

한국의 느낌
글로리아씨는 필리핀에서 교회를 통해 남편과 만났다. 결혼 과정이 무척 어려웠던 모양이다. 남편의 직장에서 가능한 휴가 기간과 글로리아씨의 사정이 잘 안 맞았는데, 거기다 관료적인 사람들을 여러 차례 거쳐서 남편과 일정을 조율한 듯 싶다. 자세히 알 순 없지만 우역곡절 끝에 1996년도에 필리핀에서 결혼을 하고 한국에 왔다.
한국의 가을이 참 좋았다. 느낌이 너무 복잡했지만, 그래도 뭐가 좋은지 좋았고, 조용하고 멋졌다고 회상한다. 처음에 힘들었던 것은 음식이었다. 한국 음식에는 비린내가 심해서 시어머니가 맛난 음식을 잔뜩 해 놓아도 잘 안 먹었다. 지금은 한국 음식을 너무 좋아한다. 필리핀 음식은 너무 달단다. 아직 음식을 잘 못해서 남편에게 부끄럽다는데, 닭도리탕, 닭조림, 김치찌개, 된장찌개, 콩나물국, 갈비찜, 나물볶음 등을 할 줄 알고, 나물무침, 야식, 떡이 너무너무 어렵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과일샐러드다.
“어떤 과일샐러드에요? 드레싱은?”
“생선이나 오징어 넣어서 이것 저것 야채 넣고 통깨 뿌려 초고추장으로 버무린거요”
“하하 나도 그거 아주 좋아해요. 근데 그건 회무침인데”
한국 음식 특히 회무침을 좋아하는 글로리아씨는 필리핀 음식 중에는 5월에 나는 과일들이 너무 그립다. 필리핀에서는 과일을 사먹기 보다는 나무에 올라가서 따서 바로 먹는다고 한다. 싱싱함이란 표현은 없었지만, 말이 잘 안통해서 그랬는지, 글로리아씨 표정과 말투에서 그 과일들의 싱싱함에 입맛을 다시는 듯 했다. 과일 따다가 종종 다치는 사람도 있단다. 한국에선 돈이 들고 필리핀에선 용기가 필요한 것인가?
“아, 한국에서 과일 따먹다가 경찰에 잡혀가는 경우 있으니까 조심하셔야 돼요”
“아, 그건 알아요, 전에 남편이 아들에게 남의 과일 따먹으면 안된다고 가르쳐 줬어요”
그 외에 한국에 특별히 인상 깊은 것은 결혼식의 예쁜 신부란다. 글로리아씨는 비싸고 화려한 치장에 친구들 다 모인 결혼식이 너무 보기 좋다며 한마디 덧붙인다.
“한국엔 공주들이 많아요. 왕자들이 많아요. 하하”
글로리아씨는 13년간 여전히 한국에 적응 중이다.

슬픔과 위기
2005년에 아주 슬픈 일을 겪었다. 첫 아들이 강에 빠져 죽었다. 많은 이주여성들이 겪는 문제라는데, 엄마와 아기 사이에 이야기가 잘 안 통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슬픈 일에 크게 자책했던 모양이다. 남편과도 많이 힘들었다. 두 사람이 싸우고 남편이 나가는 일도 있었다. 지금은 글로리아씨가 더 말이 많고 목소리가 커서 그럴 일은 없다.
그리고 둘째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국말 공부가 가장 크다. 첫 아들을 떠나 보내기 전보다 훨씬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역사 공부는 정말 싫다. 왜 그러냐니까, 필리핀의 역사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웠던 슬픈 이야기라서 싫단다. 한국도 그건 마찬가지라서 역사 공부가 싫다. 대화 중에 역사 뿐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어렵고 생각하기 싫다는 이유로 다른 화제로 돌리곤 했다.
오산이주노동자센터에 나오며 다른 이주민들과 만나며 글씨와 말이 따라따로라서 너무 어렵고 힘들다고 한다. 이럴 때 나라마다 친절한 사람이 있어야 서로 대화가 가능해진다며, 그 친절한 사람의 마음을 ‘넓은 마음’이라 표현했다. ‘넓은 마음’은 글로리아씨가 어떤 어려움을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 같았다.
남편과 필리핀 부모님과 관계가 걱정인데, 말이 안 통하니 서로 연락도 안하고 사랑을 전하지 않아 글로리아씨 가슴이 몹시 아프다. 한국 사람들이 이해하는 마음으로 조금만 더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 마음도 ‘넓은 마음’이라 그랬다. 남편이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필리핀 부모님께 사랑을 전하길 바란다.

12월 13일 오산이주노동자센터 회원의 밤. 지역아동센터 다솜공부방 아이들의 춤공연에 사진을 찍으러 무대 앞으로 모인 엄마들. 오른쪽 끝이 글로리아



시선에 대한 의식
글로리아씨가 가족과 오산이주노동자센터 말고는 대화 주제를 넓히지 않아 자세히 이야기를 듣진 못했다. 어렵게 어렵게 물어, 길가는 모르는 사람들이 글로리아씨를 보는 시선이 어떤지에 대해, 명료한 답이 나왔다. “싫어요” 일종의 유도질문이었던 걸 인정하지만, 그 대답은 강하게 남는다.
다문화 가정을 둘러싼 사회적 문제는 많다고 하면서 그 예로 술문화 하나만 들었다. 어쨌든 글로리아씨는 이런 문제를 빨리빨리 해결하도록 많은 교육 프로그램들이 갖춰지길 바라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사소한 교육 프로그램이라도 모두 유료인데, 한국엔 무료 프로그램이 많다는 말도 했는데, 이 대목에서 무료 프로그램에 적극성을 띠는 자세는 살짝 웃게 만드는 꽤 익숙한 모습이다. 글로리아씨가 가끔 구분하기도 하지만, 분명히 자기도 한국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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