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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간직할 수 있을까?

이지형과 루시드폴과 언니네이발관이 함께 한 콘서트에 갔다왔다. 살짝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 이지형이 토이의 노래를 부른 그 이지형이라는걸 콘서트 시작 조금전에야 알았다ㅠㅠ 언니네이발관 5집을 1번부터 10번까지 순서대로 연달아서 들은건 행운이었다. 내 엠피3은 좀 이상해서 노래를 넣으면 가수이름으로는 대충 정렬되는데 그 안에서 곡의 순서가 마구 섞이는데, 역시 언니네이발관 5집은 순서대로 들어야 한 편의 이야기로 살아나는 듯. 그리고 예상외의 이석원의 개그 센스. 루시드폴은 실물은 처음 봤는데, 생각보다 키가 크더라. 마이크가 낮아져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노래를 불렀다. 사람이었네를 부를땐 뭐랄까 내가 지금 이 노래를 듣고 있는것이 세상의 둘도 없는 축복같았다. 특히 마지막부분의 충만한 사운드는 마치 한 편의 대하소설의 결말과도 같은 느낌. 출소하고바로 루시드폴 3집을 사서 이 노래를 맨 처음 들었을 때의 감동이 다시 물밀듯 밀려왔다. 콘서트를 보는 내내 생각했었는데, 과연 인간이 순간을 간직할 수 있을까? 노래를 들을 때 심혈을 기울여 만들고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은 음반이 라이브보다 더 완벽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어쨋든 CD플레이어가 만들어내는 소리일뿐. 라이브가 전하는 감동을 간직하지는 못한다. 그건 라이브 앨범에서도 마찬가지인 거 같다. 가수의 거친 숨소리와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그저 소리가 아니라 공간을 가득채운 일종의 물질성을 가진 개체로 느껴질 때의 느낌은 그 순간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가수가 똑같은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그 때마다 그 노래들은 각 각 다른 노래이며 이 세상에서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는 오직 하나뿐인 노래다. 사람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하지만 지나버리고 나면, 그건 각자의 기억에 조작되어버린 이른바 추억일 뿐. 그렇다고 추억하는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순간은 그 시간과 그 공간에 존재할 때만이 유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꼭 가수의 노래가 아니더라도 모든 순간은 순간으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기쁘고 즐거운 순간이든 견디기 힘든 고통스런 순간이든. 사람들은 사진으로, 혹은 동영상으로, 혹은 언어적이 표현으로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지만, 그렇게해서 태어난 각각의 기억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이 될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것들의 원본이었던 그 순간만은 될 수 없다. 그것을 깨닫는다고 해서 과거를 기억하거나 추억하려는 작업들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불가능을 인식하는 것과 그럼에도 끊임없이 불가능을 행하는 것은 별개다. 불가능하다고 해서 포기해버린다면 인간됨을 증명할 수 있는 중대한 행위를 멈춰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오만하지 말것이며, 지금 이 순간은 다시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기억하며, 지금 이순간에 최선을 다 하면 되는거다. 순간을 간직할 수도 망각할 수도 없는 우리 인간의 몫은 딱 그 정도일 것이다. 지나간 과거를 미화할 필요도 없고, 다가올 미래를 낙관할 필요도 없이,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세상과 함께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자. 그것이 '이 순간'을 의미있게 살아가는 유일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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