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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연구 메모.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694615.html

http://news.khan.co.kr/kh_news/art_print.html?artid=20150607215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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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를 보면서, 가장 가슴이 아팠던 부분은 77일간의 옥쇄투쟁이 아니었다. 그 싸움이 지나고, 한 명씩 해고된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죽어나갈 때마다 숨이 막혔다. 대다수가 자살이었다. 누군가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그 죽음의 순간이 떠올랐었고, 그렇게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소리내서 울지도 못하는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나는 멀리 미국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2.

하버드 박사과정 학생으로 노동자들의 건강에 대해 공부하면서 배우는 온갖 방법론과 이론들이 그 싸움과 죽음 앞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노동자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세계적인 연구들이 쌍용자동차 사태 앞에서는 무력했다.

 

3.

그건 내 실존과도 닿아있는 문제였다. 2011년 박사를 마치고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을 때, 쌍차 파업 직후 수집된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 데이터를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을 만났다. 논문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니까, 세상에 논문으로 이 이야기를 해야지.

 

4.

데이터를 분석하고 표를 만들고 그 내용 중 일부를 한국에 있는 다른 선생님께서 학회에서 발표하기도 했지만, 난 그 연구를 더 이상 진행하지 못했다. 어떻게 써야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영어로 한 문장씩 쓰는데, 사람이 죽어나가는 현실 앞에서 내 문장이 그렇게 초라했다.

 

5.

2013년 고려대에서 일하게 되면서, 다시 그 논문을 시작하려 했다.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야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진행을 했지만, 한국에서 조교수로 일하며 다가오는 행정과 연구로 인해 연구를 진행할 수 없었다. 그 연구는 다른 2차 데이터를 분석하는 논문과 달리 내가 그 안에 더 들어가야 했는데, 난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6.

정리해고 6년이 되어가는 2015년 6월 8일을 앞두고, 쌍차의 김득중 지부장님과 와락 대표 권지영씨를 만났다. 6년이 되어가는데, 그렇게 해서 28명이 죽었는데, 6주년을 앞두고 너무 조용하다고. 함께 해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듣기 전에 답했다. 예, 할께요.

 

7.

더 이상 그들이 이렇게 아프다는 것을, 이렇게 많이 아프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의뢰받은 연구를 하고 싶지 않았다. 다들 알고 있었다. 쌍차 해고 노동자들이 힘들다는 것. 그 구체적인 시간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더라도.

 

8.

시간이 없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연구 가설을 세우고, 설문지를 디자인하고,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결과를 내놓아야 했다. 좀 더 고민하고 생각하고 만나면서 연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런 조건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게는 2가지 선택이 있었다. 연구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9.

한편으로 다행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그들이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10.

함께 노조를 만났던 박사과정 학생이 말했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요.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원래 중요한 모든 일은 이런 식으로 다가온다고. 모든 조건이 평안하고 준비된 상태에서 할 수 있지 않다고. 그건, 연구대상의 삶이 불안정하기에 연구 조건도 불안정한 것 아닌가. 그걸 불평하는 것은 투정이 되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11.

‘노조의 입장’에 서 있는 정치적인 연구 아니냐고 하는 이들의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뭐라고 말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럼, 정치적이지도 않은 이슈에 우리의 시간을 쏟아야 겠느냐고. 보건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죽음보다는 삶이 낫다는 전제 위에서 진행되는 것 아니냐고. 그 윤리적으로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문제를 전제로 시작하는 학문인데, 그 학문에서 중립을 주장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연구과정이 투명하고 방법론적으로 튼튼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우리가 관심을 가장 먼저 기울여야 하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아닌가.

 

12.

연구 가설은 2개를 세웠다. 하나는 ‘해고노동자들’과 ‘무급으로 있다 2013년 복직된 노동자들’과 일반 전일제 임금근로자의 건강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복직의 효과를 말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단면 연구였다.

 

13.

또 다른 가설은 쌍차 해고노동자들의 지난 6년을 검토하며, ‘미끄럼틀’처럼 추락하는 삶 속에서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국민연금, 건강보험, 실업급여, 고용을 위한 재교육 등의 시스템이 과연 어떻게 작동했는지. 좀 더 말하면, 사회복지를 포함한 공적 안전망이 과연 이들에게 얼마만큼 도움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동시에 생명보험, 민간의료보험과 같은 사적 안전망이 어떻게 해고 이후에 해체되기 시작했는지를 통시적으로 검토하고자 했다.

 

14.

며칠동안 밤낮없이 일해 만든 설문지를 들고서 파일럿 테스트를 위해 평택으로 갔다. 와락에서 해고 노동자 20명 앞에서 연구의 목적을 설명했다.

 

15.

파일럿 테스트를 하는 10명의 노동자들은, 특히 복직투쟁을 계속해온 몇몇 이들은 설문을 하는 내내 불편해했다. 설문을 다 마치고, 내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이런 일반적인 질문으로는 자신들의 시간을 도저히 담아낼 수 없다고. 너무 얕다고.

 

16.

알고 있었다. 일반 근로자 집단과 건강상태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복지패널, 근로환경조사에 쓰인 설문을 그대로 사용해야만 했다. 물론 쌍차 해고자들에 맞추어 새로 넣은 설문이 있었지만, 그 역시 ‘학문적 합리성’을 따져야 했다.

 

17.

6년동안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 내게 건네는 설문에 대한 답답함을 들으며, 여러 생각에 잠겼다. 비교하기 위해서는 표준화된 설문지가 있어야 하는데. 표준화되면서 일반적인 합리성을 지니면서, 그들의 고통을 측정할 수 있는 구체성은 사상되는.

 

18.

점심을 먹고 나와 와락 근처에서 산책을 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양적인 연구 자체의 문제인가. 인간의 삶과 고통을 숫자로 정리해내려고 하는 것이 문제일까. 아니면, ‘표준화된 설문’과 ‘비교’하는 방법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일까. 비교해서 보여줄 때, 사라지는 구체성에 대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급하게 연구를 진행하면서 격게 되는 그러니까 쌍차 해고노동자들과 충분히 긴밀한 관계를 갖지 못해서 생겨난 문제였을까.

 

19.

오후에 쌍차 정문으로 찾아가, 퇴근하는 복직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했다. 저 멀리, 이창근, 김정욱 활동가가 올라갔었던 굴뚝이 보였다. 그리고 도장공장이 보였다. 정말 용산참사처럼 될 수도 있었던, 인화성 물질이 가득한 곳을 들이쳤던 2009년이 떠올랐다.

 

20.

복직자 170여명과 해고자 130여명, 총 300명이 넘는 쌍차 근로자들이 설문지에 응답을 해주었다.

퇴근길에 연락을 받고 찾아와 설문에 응답하는 복직자들에게 설문이 끝나고 노동조합에서 마련한 도서상품권 5천원권을 드렸다. 연구윤리상 '설문에 참여한 대가'를 드려야 한다고. 약간의 민망함과 어색함이 감돌았었다.

 

21.

일요일에 설문응답이 끝나고, 지부장님이 해고자분들 앞에서 한 마디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런 자리에 설 때마다, 형식적이고 그 자리에 어울려보이는 말보다는 내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하고 싶었다.

 

22.

연구를 진행하는 내내, 제 나름대로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첫째는, 설문지를 만드는 내내, 잘 만들면 만들수록,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현실을 반영하려고 하면 할수록 지난 6년간의 상처를 후벼파는 일 같았습니다. 둘째는, 인터뷰를 하고 기록하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을 하는 제게, 과연 이런 방법론으로 지난 6년의 시간 중 얼마만큼을 담아낼 수 있을까. 숫자로 표현되는 결과가 과연 얼마만큼 현실에 가까운지에 대한 회의가 들었습니다.

 

연구자로서 연구가 무력하다는 생각에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귀하게 답해주신 분들의 결과가 좀 더 여러분들의 싸움에 힘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23.

일요일에 수집된 데이터를, 월요일/화요일에 코딩을 했다. 시간이 없으니 나눠서 코딩을 진행하자고 하는데 박사과정 효주가 제동을 걸었다.

교수님, 모든 코딩을 크로스 체크 해야해요.

그럴 시간이 없을거야. 일단 최대한 완성해야해요.

아니요. 크로스체크해야 해요. 최근 연구실에 일이 많아지면서 실수가 생기고 있어요.

아. 그래.

이 바쁜 와중에 학생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다. 다행이다.

 

24.

평택에서 메르스 환자가 확진되었다. 메르스는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아서, 모두들 언제 자신에게 다가올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주요한 사건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시스템에 화가 나다가도, 이 사건이 덮게 될 그 많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25.

코딩이 끝난 데이터를 서울과 원주에서 동시에 분석을 진행하면서, 하루종일 소방관 인터뷰를 하고, 새벽까지 쌍차 노동자 데이터 분석을 하고 ppt를 만드는 학생들을 지켜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먼 훗날에라도 내가 하는 연구들이 내 학생들의 앞길에 장애가 되지는 않을까. 첫 제자를 받으면서부터 했던 생각이다. 학생들을 선발하기 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걸로 변명이 되지는 않을게다. 어쩔 수 없이 각자 감당해야 하는 무게가 있는 법. 선생으로서 연구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내가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일게다. 나와 함께 하는 시간속에서 학생들이 각자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용기와 의미가 생겨날 수 있기를.

 

26.

춘천과 원주에서 다른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인터뷰를 하는 중간중간 쌍차 데이터 분석 결과를 점검했다. 원주 호텔에서 한팀, 서울 안암캠퍼스 연구실에서 한팀, 이렇게 2팀이 함께 데이터를 분석했다. 핸드폰을 스피커폰으로 켜놓고 회의를 계속하며 지시하고 이야기했다.

 

27.

많이 힘들었을텐데, 학생들 모두가 하나라도 일을 더 하려고 했다. 고마웠다. 하루종일 운전을 하고 다음날 아침 원주 시내 카페에서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어, 잠을 12시경 미리 청했다. 같은 방을 쓰는 학생은 결국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28.

오후 6시부터 안암에서 쌍차 노동조합 분들을 대상으로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다. 서울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였다. 2시간 내로, 발표 자료를 모두 정리해야 했다. 커피를 몇 잔을 먹어도, 이틀 내내 운전한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이틀을 함께 한 학생들이 내 몸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좀 더 일정이 여유 있었으면 좋았을텐데요. 아니야. 원래 중요한 일들은 항상 이렇게 한꺼번에 벌어져. 원래 이런 거야.

 

29.

9월부터 공식적으로 대학원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한 학생이, 연구실 학생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서 놀랐다. 이렇게 일하는 팀이 있을 줄 몰랐어요. 그 짧은 일정안에 이런 수준의 발표를 준비해낼 줄 몰랐다는. 난 알고 있었다. 우리 연구실 학생들은 그 정도 역량이 된다.

 

30.

6시를 20분 정도 남겨놓고, 학생이 김밥을 사오겠다고 했다. 사오라고 했다. 실은 어차피 저녁 식사를 하지 못할 것 같았다. PPT를 1시간 째 고치고 있었다. 부분부분 내용은 나누어 만들었을지언정, 발표자료를 마무리하는 것은 발표자가 해야 한다. 마지막 5분을 남겨놓고까지, PPT는 계속 바뀌었다. 발표를 5분 남겨놓고, 연구 제목은 <2015 함께 살자 희망 연구>로 정했다. 2015 뒤에 붙은 두글자의 네 단어가 모두 듣기 좋았다.

 

31.

발표를 끝내고, 질의 응답 시간이 되었다. 이 연구는 잘하면 잘할수록 우울해지고 답답해지는 연구였다. 다만, 내 답답함과 막막함이 연구 대상자인 쌍차 해고자들이 겪는 먹먹함에 비할바가 아니겠지 라는 마음으로 버틸 뿐.

 

32.

주말 내내 기자들에게 연락이 왔다. 열심히 답했다.

 

33.

'한겨레 21'에 기사가 뜬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퍼지기 시작했다. 기사 제목은 '쌍용차 사태 6년 해고자들, 정규직보다 우울증 47배'였다.

 

34.

난 이 47이라는 숫자가 불편했다. 내 연구에서 나온 숫자이지만, 위험비가 3만 넘어도 숫자가 너무 커서 무엇가 잘못된 게 아닌가 의심하고 데이터를 재검토하는 역학연구를 고려하면, 47이라는 숫자는 이 세상 숫자가 같지 않았다.

 

35.

그 숫자로 세상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 숫자로 누군가가 마음을 아파한다면 누구일까. 그 숫자는 이미 쌍용자동차 문제로 마음 아파하던 누군가가 아닌, '외부 사람'에게 의미있게 다가갈 수 있을까. 이 숫자는 '우리만의 리그'를 넘어서 힘을 가질 수 있는 숫자인가.

 

36.

누군가는 해고자와 정규직을 비교하면 당연히 해고자가 훨씬 건강이 안 좋지 않냐고, 그 당연한 결과를 굳이 연구해봐야 아냐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37.

그러나 모두 잊고 있는 듯 하지만, 이 연구에서 해고자로 분류된 이들은 6년전에는 쌍용자동차 정규직 노동자였다.

만약 쌍차 해고자들이 얼마만큼 건강이 심각한가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비교 집단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나 실업자 집단을 골랐을 것이다. 실업자들과 비교해서도 이렇게 나쁘다고 말하는게 더 효과적일테니까.

하지만, 나는 쌍차 해고 노동자들이 짐작컨대 6년전에는 어떤 건강상태를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이 다시 예전처럼 정규직 노동자로 복귀한다면 어떤 건강상태를 가질 수 있는지를 묻고 싶었다.

그래서, 내 연구의 비교집단은 '함께 해고되었지만 2013년 복귀한 쌍차 복귀자들'과 '3차 근로환경조사에 참여한 남성/상용직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 이었다.

 

38.

연구 결과는 어마무시한 숫자들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이런 숫자들에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다. 굴뚝에 올라가 그 외로운 싸움을 100일동안 해도 이제 사람들은 놀라지 않고, 하루에 자살로 40명이 넘는 사람이 계속 죽는다해도 놀라지 않고, 삼성과 현대 같은 세계적 기업이 있는 나라에서 기아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와도 놀라지 않는다.

 

39.

기자회견날, 약속한 시간보다 2시간 먼저 쌍차 본사 정문에 도착했다. 혹시라도 늦을까봐, 파주에서 새벽 6시에 출발한 결과였다. 노조 사무실 옆에 있는 식당에서 백반을 먹었다.

 

40.

기자회견을 기다리다가, 사무국장님과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건물 옆에 조그마한 텃밭이 있었다. 상추며 하는 것들이 작은 밭에 파릇파릇 보였다. 노조에서 키우는 것이라고 했다. 해고 노동자 한분이 오시더니, 집으로 가져가라며 다 크지 않은 상추를 따기 시작했다.

 

41.

굴뚝에 올라갔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 막막함과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텃밭 앞에서 들었다. 언제인가 기회가 되면, 굴뚝에 올라가서 싸움을 해야 했던 노동자들에 대해 연구해 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싸움이 끝나고 나서, 가슴에 남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42.

'극단적인' 싸움 방법을 택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그렇지 않으면 보도조차 되지 않는 사회환경 때문인 것이고, 그것은 노동운동의 힘이 그만큼 미약하기 때문일게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의 자본주의가 얼마나 저열한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43.

기자회견을 하는 내내 맨 앞 줄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연구에 대한 설명을 하고, 현재 메르스에는 알려진 치료약이 없다고. 하지만 쌍차 해고자들에게는 치료약이 있다고, 그건 복직이라고 말했다. 해고 노동자분들이 그 말을 좋아하셨다.

 

44.

그런 말도 했다. 쌍차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정리해고로 시작된 6년동안의 실업으로 생각하면 안된다고. 90%에 가까운 해고노동자들이 해고 이후에 구직과정에서 차별을 경험했다고 말하고 있다고, 70%가 넘는 이들이 해고가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고, 해고자가 아닌 이들과 어울리는 것조차 힘겨워한다고. 한국처럼 국가의 공적 안전망이 취약한 나라에서 60%가 넘는 이들이 만약을 대비해 가지고 있던 사적 안전망들, 생명보험이나 민간보험이니 하는 것들을 모두 해약했다고. 차별과 낙인으로 인해 직장을 구할 길이 막히고, 사적 안전망조차 모두 해체되어 이제는 절벽에 서 있는 노동자들이라고. 28명의 죽음은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고.

 

45.

기자회견에서 말하는 내내 어떤 딜레마가 있었다. 여기서 비극적이고 어려운 현실을 잘 이야기해서 많은 이들이 이 상황을 알았으면 하지만, 내가 하는 이야기가 자신들이 보낸 6년의 세월인 당사자들이 바로 옆에 있었다.

 

46.

월요일 기자회견이 끝나고, 아직까지 전화를 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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