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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실의 고고학

설겆이 양을 줄이기위해 반찬통으로만 식사를 하다 어느순간, 밥그릇과 수저를 장식용으로 용도변경하고 보온밥솥 앞에 앉아 김으로 밥솥안의 밥을 싸서 먹는 나를 거울안에서 보고 퍼뜩 '한강에 산다는 괴물이 우리집에와서 나의 밥통을 유린하고 있구나!'하고 느끼다가 정신을 차리고, 거울에 비친 reflection을 한번 더 보고 나의 인생을 찬찬히 reflction해보는 요즘이다.

 

by the way,

 

이렇게 밥이나 물 먹을때 마다 열었다 닫았다하는 아랫칸 냉장실 문과는 달리, 냉동실은 신비와 베일에 싸여 있는 곳이다.

 

 

오늘은 그 냉동실을 탐험해보았다. 냉장실보다 이삼십촉 낮은 으스스한 조명아래 검은봉다리와 흰봉다리 등이 우거져 있는 이곳의 탐험을 시작할때만 해도 이것이 그토록 길고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시간여행이 될줄은 몰랐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몇주전 집에서 택배로 도착한 흰색 위생봉다리에 들어있는 마른멸치들, 멸치들을 응시하자 멸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추워~ 빨리 따뜻한 후라이팬 위에서 간장과 물엿을 입고 뒹굴고 싶어~!!"라고 아우성을 쳤다. "기다려라 이놈들아, 지금은 김으로 충분하단 말이닷!"이라며 일갈하긴 했지만, 어머니는 어쩌자고 날 믿고 저렇게 많은 마른 멸치를 보내주셨을까?

 

멸치들의 아우성을 뒤로 하고  조심스럽게 신생대로 진입했다. 그 뒤를 봤더니 역시 흰 봉다리안에 수줍게 몸을 뒤틀고 있는 쑥떡. 아~ 지난 봄에 고향에 갔다가 기차에서 먹으라고 싸주신 저 쑥떡이 왜 이 음침한 곳에서 고생을 하고 있단 말이냐~! 살포시 꺼내서 보온밥통에 넣어주었다.

 

쑥떡을 빼는 순간 불쑥 모서리를 내미는 붉은색과 초록색의 비닐봉지. 아~ 이것은 고.향.만.두. 중학교때야 비로소 냉동만두의 맛을 깨우친 나는 '복권에 걸리면 그돈으로 고향만두와 통통만두를 반씩 번갈아가며 하나씩 먹어야겠다'고 다짐하곤 했었다. 내가 반가운 마음으로 응시했을때 주둥이가 튿어진 봉지안에는 3개의 만두가 사이좋게 고스톱을 치며 아름다운 욕설을 주고받고 있었다. '곧, 라면에게 광을 팔수 있게 해주마'라고 생각하고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갑자기 나타는 미숫가루, 고등어, 고추가루, 쇠고기 조각들을 뒤로하고 점점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내 키의 몇배가 되는 고사리를 헤치며 중생대로 올라가던 나는 큼지막한 검은색 봉다리를 발견했다.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아~ 냉동실 문을 오래 열고 있어서 추워진거구나....... --;'

 

조심조심 검은봉다리의 매듭을 풀다가 신경질이 나서 찢었다. 그 안에는 다시 흰색 위생봉다리안에 들어있는 정체가 모호한 우유빛깔 고체덩어리.. (참.. 냉동실에는 액체가 없지.) 무엇일까? 한참 관찰하다가 그것이 작년에 어머님이 들고 오신 곰국이라는 것을 알았다. 곰국이 표준어인가? 어쨋든 내 고향에서는 그렇게 부른다. '곰이 많이 사는 고향을 가졌구나'라고 생각하는 당신!! yellow card!! '고향이 북극인가?' 당신은 red card!!

아~ 안먹고 있었구나.. 매일 국없이 밥을 먹으며 메이는 목을 보리차로 달랬던 시절들이 한스러웠다. 오늘 저녁에는 어머님의 사랑을 느끼며 원기를 회복해야지~

 

냉동실의 뒷부분을 향해 나아가는동안 나의 탐험은 백악기를 거쳐 익룡이 새우깡 받아먹는 쥬라기를 지나서 이제 고생대까지 이르고 말았다.

 

나는 삼엽충에게 길을 물으며 떨리는 가슴으로 고생대로 들어섰다.

이것이 무엇인가? 1년 반전 사랑니를 빼고 난 흔적..

<발치후 주의사항>이라는 제목아래

-솜이나 가제는 물고 1신간 뒤 빼십시오.

-침이나 피는 뱉지 마시고 삼키십시오.

..... 등의 안내가 쓰여진 '순천향대학교병원치과'라고 오롯이 찍혀 있는 얼음주머니 화석이 나를 맞이했다. 친절한 치과의사가 친절하게 입 부위만 뚫린 흰천을 얼굴에 덮고 친절하게 어금니 안쪽 사랑니를  가로 한번, 세로 한번 해서 4조각으로 아작내고 친절하게 하나씩 태풍이 전봇대 뽑듯이 이빨 조각들을 뽑아내던 기억이 좌뇌의 기억장치에 불량섹터로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탐험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고대의 생물들의 위협이 너무 거셌다...기 보다는 손이 너무 시러웠다.

 

나의 냉동실의 선캄브리아대에는 무엇이 있을까? 두렵고도 설렌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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