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노래> 中

내가 봉직하던 UBC에서 반전시국토론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학생 다수와 교사들이 한데 모인 집회에서 전쟁 반대 연설이 한동안 이어진 뒤, 어느 정치학 교수가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미국의 정책 결정 과정이 어떤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반전 논의를 전개하는 이는 역사가나 영문학자, 학자, 일반 학생들 요컨대 미국 정치 비전문가들뿐이다. 전문가인 자기(정치학 교수) 입장에서 보면 전쟁이란 존슨 대통령의 결정이라는 그런 단순한 얘기가 아니라 의회 내의 역학관계, 관료기구, 군부, 그밖에 다수의 압력단체가 얽히고설켜 발생한 복잡한 현상이며 그런 사실을 모른 상태에서 제아무리 반대를 한다 할지라도 전쟁은 쉽사리 멈출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는 취지로 그 정치학자는 발언했다. 나는 과연 그럴 법도 하다고 수긍하는 동시에 정치학자가 현 상황의 설명에 성공하면 할수록 현 상황을 긍정하는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현 상황이 어떻게 성립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현상現狀이 주어진 조건에서 어떻게 필연적으로 도출되었는지를 명시하는 것과 거의 같은 뜻이다. 만일 주어진 조건을 바꿀 수 없다면, 필연적 결과도 바꿀 수 없다. 따라서 필연적 결과, 즉 현상에 반대한다는 의미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전쟁과 같은 극도로 복잡한 현상現象에 관해서는, 그 필연성은 겉모습 즉 표면적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 조건이 지나치게 많은 현상은 엄밀한 인과론적 과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인식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치 문제다. 매일 폭격 아래 아이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논의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뜻이다.

- 가토 슈이치(加藤周一). 2015. <<양의 노래>>. 파주: 글항아리, 515-516쪽.

 

서경식 선생이 재작년 <한겨레>에 실은 칼럼으로 알게 된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 칼럼에도 위의 인용이 실렸다. 나는 저 글귀를 보고 당시에 꽤 감명을 받았는데(그래서 책도 샀는데), 오늘 다시 읽으면서는 문제가 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토 슈이치는 지식인에게 '과학자' 대신 (우선) '인간'이 되기를 요구한다. 당연히 일정하게 합리적인 요청이지만, '인간'이 된다고 해서 '지나치게 많은' 조건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용인하지 않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자는 말이, 일부 지식인들에게는 출발선에서 방방 뛰기만 하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연구자에게는 현상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가장 우선적인 임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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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眼低手更低

2016/05/30 19:37 2016/05/30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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