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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59회 – 시간이 흘러서

 

 

 

1

 

예전에 끈끈하게 같이 활동했던 분이 이곳에 오셨습니다.

오래간만에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반갑게 나눴습니다.

저녁에는 술 한 잔 나누며 예전 기억들을 떠올리며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와 같이 활동했던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정년퇴직으로 현장을 떠나셨더군요.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분들도 있었고 몸이 아파서 예전만 못하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구심점이 사라져서 활동을 접은 분의 얘기도 들었고

가정사로 주위 관계들이 소원해진 분의 얘기도 들었고

욕심으로 인해 뜻밖의 행보를 보이는 분의 얘기도 들었고

끝 모를 타락의 길로 떨어져 추하게 변하는 분의 얘기도 들었습니다.

 

즐겁고 희망적인 얘기보다는 안타깝고 추한 얘기들이 많았지만

그곳과 그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사라졌기 때문에

웃으면서 편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87년부터 정말로 치열하게 싸워오면서 한 시대를 열어갔던 이들이 이렇게 사라지고 있었고

그들과 잠시 함께했던 저의 역사도 그렇게 지워지고 있더군요.

파도에 지워지고 다시 쌓이는 모래알갱이처럼

그곳에 남아있는 다른 이들이 다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갈 것이고

저는 이곳에서 제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2

 

sns에서 어떤 분의 암투병 소식을 접했었습니다.

예전에 제가 노동운동을 막 시작할 때 알았던 분이라서 마음이 조금 쓰이더군요.

그 힘겨운 과정에도 sns도 열심히 하시고 간혹 연대활동도 다니시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본인도 워낙 씩씩하고 주위에서도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1년의 항암치료를 진행하고

암세포의 상태를 확인했는데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 후로 그렇게 활발하던 그분의 sns도 조용해졌습니다.

이곳 마을에 살고 있는 분도

그분과 비슷한 시기에 암투병을 시작했고

지금은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다행은 골고루 주어지는 것이 아니더군요.

 

sns에서 그분을 후원하기 위한 움직임이 보였습니다.

요즘 들어 이런 소식들이 많이 들려서 조금 씁쓸하기는 하지만

그분의 고통이 혼자만의 힘겨움이 아니길 간절히 빌어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이 새삼스럽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일이 벌어졌음에도 가해자들이 제대로 처벌되지 못했다는 사실과

지금 그들은 아주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이 결합하면서

많은 이들이 분노하는 한편 사적 제재에 대한 우려도 하고 있습니다.

 

그 뉴스를 보면서

저 역시

“이 빌어먹을 세상은 언제쯤이면 최소한의 정의가 실현될까?” 하는 분노와 함께

“저런 식의 행동은 피해자에게 또 고통을 심어주는 것인데...” 하는 우려를 하고 있었는데

“성민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무수한 가해자들을 잘 살펴봐. 그 속에 너도 보일거야” 라는 얘기가 들리더군요.

 

몇 년 전 me too 열풍이 휩쓸 때만 해도 부끄러움에 심장이 벌렁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려서 고개를 숙이고 살았는데

그동안 자숙과 자성의 목소리를 내며 내 죄를 고했던 것이 은근슬쩍 면죄부로 둔갑하기라고 한 듯이

이제는 당당하게 추악한 현실에 목소리를 높이려 나서고 있는 꼴입니다.

 

시간이 흘러

나의 역사가 서서히 지워져갈지 모르지만

나의 죄악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또렷하게 새겨 넣어 봅니다.

 

 

 

(삼점오의 ‘너의 입은 사과를 말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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