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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연대)1973년 칠레의 교훈



1973년 칠레의 교훈




1973년 쿠데타


1973년 9월 11일 장갑차, 탱크와 무장한 군 병력이 칠레 대통령궁을 포위했다. 공중에는 전폭기들이 순회비행을 하고 있었다. 피노체트를 우두머리로 한 군부 쿠데타세력은 대통령 아옌데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곧이어 공군 폭격기가 대통령궁으로 폭탄을 투하했으며, 지상군도 탱크를 앞세워 모네다궁으로 진입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쿠데타는 완료되었다.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의 출범이라는 세계 최초의 실험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아옌데정권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부로서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들을 어느 정도 펼쳤다. 그러자 포악해진 자본가세력은 아옌데정권을 파괴하는 데 머뭇거리지 않았고 단호한 군사행동을 실시했다. 칠레 아옌데정권은 군부 쿠데타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무력하게 무너졌다.

칠레의 경험은 우리에게 노동자의 진정한 정치세력화란 무엇인지 의문을 던진다. 선거에서 당선되면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질 것인가? 그렇다면 선거를 통해 대통령까지 배출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착수했다고 이야기되는 칠레가 결국 쿠데타로 한 순간에 붕괴된 상황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실패한 실험은 그릇된 정치노선을 그대로 반영할 뿐이다. 칠레의 패배는 우리에게 잘못된 정치세력화의 파괴적인 결말과 동시에 진정한 정치세력화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민중연합정부의 건설 - 투쟁의 시작


1970년 9월 칠레 대통령선거에서 민중연합 후보인 아옌데가 36.3%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민중연합은 노동자정당인 사회당, 공산당과 중간계급 정당인 급진당, 사회민주당, 인민통일행동운동(MAPU), 인민독립행동(API)의 6개 정당이 모여 69년에 결성했다. 경제가 악화되고 빈부 격차와 빈곤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들은 기존 자본가 정치세력에 분노하며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 했다. 이 노력이 곧 노동자정당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질서를 건설하려는 민중연합의 길로 이어졌으며, 이 대중적 열망을 토대로 아옌데는 선거를 통해 집권할 수 있었다.

아옌데정권은 출범과 동시에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최초의 40개 정책’으로 노인 및 퇴직자의 연금수혜 확대, 의료비 감면, 400만 어린이에 대한 우유 무료급식, 빈민가 주택개선, 저임금 노동자 66%의 임금인상 등 소득재분배 정책을 펼쳤다. 특히 물가상승률에 100% 연동해서 임금을 인상시키는 제도를 실행함으로써 저임금 노동자의 실질적인 생활개선을 추구했다. 그리고 칠레의 핵심 산업인 구리광산과 철, 섬유산업 등의 국유화를 실시하고 대농장을 몰수하는 등 토지개혁을 통해 가난한 농민층 속에서 지지기반을 확대해나갔다.

하지만 투쟁 속에서 의식적으로 발돋움함으로써 개혁정책의 ‘소극적인 수혜자’에서 ‘적극적인 주인공’으로 도약해나갔던 노동자와 빈농들은 아옌데정권의 제한된 정책을 뛰어넘어 훨씬 멀리 나아갔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스스로 공장위원회를 조직했다. 빈농들 역시 대농장점거와 농민평의회 건설을 통해 생산과 노동을 스스로 통제하는 자주관리를 실행했다. 칠레의 노동자, 빈농들은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하는 데 그치는 소극적인 존재에서 생산과 노동과정을 스스로 통제하는 사회 운영의 주체로 우뚝 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혁명적 조치를 스스로 수행하지 않고서는 절대 이 사회의 주인공이 될 수 없으며, 이제 막 시작된 초보적인 개선조치들을 근본적인 조치들로 전진시킬 수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점차 더 높은 수준의 계급의식을 갖게 된 노동자들은 빠른 속도로 단결의 힘을 강화하여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전면에 등장했고, 아옌데정부의 급진적 개혁을 선두에서 강제해 들어갔다. 그리고 이후 자본의 공세에 맞서 노동자투쟁의 성과를 지키는 실질적 힘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옌데정권의 수립, 그리고 이 정권의 여러 진보 조치들은 이미 그 이전부터 강하게 솟구치고 있던 노동자들의 자주적이고 급진적인 저항을 선거와 의회정치라는 구조 속에 가두어놓기 위해 자본가들이 채택한 차선책이었다. 만약 이 정도라도 진보적 조치를 허용하지 않았다면 칠레의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의 거대하고 결정적인 공세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본가계급이 불안해했던 것은 모네다궁의 아옌데정부 각료들이 아니라 이 궁 바깥에 포진한 더욱 급진화되는 노동자투쟁의 흐름이었다.


자본가세력의 반격


노동자들의 투쟁 열기에 위협을 느낀 자본가세력은 칠레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깨뜨리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무기를 하나씩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옌데가 선거를 통해 당선되기는 했지만, 의회에서 다수파는 여전히 자본가세력이었다. 그들은 다수파의 유리한 지위를 이용하여 민중연합정권의 소득재분배정책, 산업국유화 정책과 토지개혁에 대한 법안통과를 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대단히 현실적인 자본가들은 의회에서의 공허한 말다툼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모든 것은 의회 바깥의 실제 투쟁에 의해 결정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우선 기존의 경제혼란을 확대하여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을 불어넣으려는 의도에서 ‘자본가파업’을 일으켰다. 자본가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운수업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중소기업가들이 회사를 폐쇄하고, 소상점주와 의사들이 영업거부에 들어갔다. 특히 트럭 운수업자들의 파업은 물자수송에 타격을 주어 경제에 커다란 혼란을 일으켰다. 아옌데정부는 이러한 자본가들의 입체적인 공격에 부딪혀 최소한의 개혁정책조차 실행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옌데정부는 자본가파업을 진압하라는 대중의 요구, 즉 반항하는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주도자들을 구속시키라는 요구를 외면했다. 오히려 이 정부는 대중의 요구와는 정반대로, 자본가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급격한 개혁을 자제해야 한다는 그릇된 결론을 이끌어냈다. 대중이 접수한 공장과 대농장을 자본가와 지주들에게 다시 돌려주고, 자본가세력을 자극하여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한다며 대중적 시위를 자제시키며, 심지어 각 지역에서 자본가에 대항한 투쟁들을 경찰을 동원하여 진압하기 시작했다. 아옌데의 민중연합정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자본가의 쿠데타로부터 정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과거의 반동적인 군 장성 3인을 장관으로 임명했다. 심지어 쿠데타가 일어나기 얼마 전에는 쿠데타 수괴노릇을 할 피노체트를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하기에 이르게 된다. 한마디로 아옌데정부는 노동자의 힘을 강화하고 자본가들의 힘을 제거하는 대신, 자본가들에게 ‘이 정부는 당신들과 협조하고, 당신들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오.’라고 확신시키는 데 집착했다.

이것은 두 가지 결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한편으로 노동자들은 이 정부로부터 점차 멀어졌고, 그 결과 이 정부는 자신을 방어해줄 가장 중요한 토대를 잃어버린 채 허공에 붕 떠버렸다. 다른 한편으로는 저항을 통해 상당한 재미를 본 자본가들이 자신감을 강화시키면서 ‘이참에 아예 이 정부를 쓸어버리고 아주 강력한 자본가 독재정권을 수립해 노동운동을 말살시켜야겠다’는 야심찬 계획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자본가세력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려 했던 민중연합정부의 무기력한 희망과는 달리, 군 장성들은 공장점거와 토지점거를 파괴하고 노동자들의 무장을 막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민중연합정부의 소심한 대응에 모든 것을 맡겨두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독자적 힘을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자본가파업에 대처했다. 각지에서 노동자들은 공장점거를 확대했다. 각 지역의 노조와 부인회 등으로 구성된 물자공급위원회가 물자분배와 소매상의 매점매석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했다. 민중연합정부에 대한 자본가들의 공격은 바로 자신들을 향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노동자들은 전체 노동자계급 단결의 힘을 끌어 모으기 위해 분투했다.

자본가들은 1973년 3월 국회의원선거에서 승리하여 민중연합정부를 탄핵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민중연합에 대중은 표를 던졌다. 노동자들은 이 정부를 믿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당장에는 이 정부에 표를 던지는 것이 전술적으로 이롭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선거는 다시 한 번 민중연합의 승리로 끝났다. 합법적인 방식으로 목적을 달성할 모든 수단이 실패하자, 마지막으로 자본가세력은 쿠데타라는 결정적 카드를 꺼내들었고 재빨리 준비에 들어간다.

그해 6월 29일 쿠데타 미수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24시간 총파업을 조직했고, 9월 4일에는 80만이 모여 민중정부 사수를 위해 노동자들이 무장해야 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자신의 목에 쿠데타라는 칼이 겨누어지는 상황에서도 아옌데정부는 오히려 자본가세력과의 타협 가능성을 굳게 믿었고, 노동자들의 무장요구를 묵살했다. 결국 아옌데정부는 노동해방을 향해 철저하게 전진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에 의지하기보다는, 노동자들을 압살하고자 하는 자본가세력에 더 의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투쟁의 성격이 근본적인 지점을 향하면 향할수록 아옌데정부는 혁명을 할 의지가 전혀 없는 개량주의 세력임을 드러냈는데, 이것은 자연스럽게 이 정부를 노동자의 편에서 자본가의 편으로 이동시켰던 것이다.

1차 쿠데타 시도에서 민중연합정부의 무기력함(이것은 기본적으로 급진화되고 노동해방을 향해 전진하려는 노동자들의 열망을 대변하려 하지 않았던 데 기인한다)을 확인한 자본가들은 결정적인 2차 쿠데타를 감행한다. 결국 9월 11일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는 성공했고, 군부는 의회를 폐쇄하고 모든 정당을 금지했다. 피의 보복이 뒤따랐다. 쿠데타 과정에서 아옌데 대통령이 사살된 것은 물론, 이날 이후 단 일주일 만에 3만 명의 노동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거대한 사회적 격변의 시기에 구 지배계급과 타협하려는 시도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이 또 한 번 비극적으로 입증되었다.

사실 쿠데타는 결코 아옌데 민중연합정부를 겨냥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정도의 소심한 정부라면 유럽에서 볼 수 있듯이 ‘개량주의 노동당이나 사회민주당의 집권’처럼 충분히 그냥 허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아옌데정부로서는 노동해방의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도처에서 자본가들과 충돌하면서 스스로 생산수단과 현장통제권을 확보해나가고 있었던 거대한 노동자투쟁의 흐름을 저지할 수 없다는 점이 바로 핵심적 문제였다. 이 흐름을 박살내서 자본주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아옌데정부가 아니라 총과 감옥으로 무장한 피노체트 군사자본가정부가 절실히 필요했다. 쿠데타는 모네다궁의 아옌데정부가 아니라 이 궁 바깥의 노동현장에 포진한 혁명적 노동자들을 정확히 겨냥했다. 쿠데타세력이 학살하고 진압했던 것은 바로 이 노동자들의 조직이었던 반면, 확대하고 보존했던 것은 모네다궁의 자본주의 정부 질서였다.


노동자 정치세력화 - 운명공동체로서의 자각


칠레의 경험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몇 명을 노동자정당에서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구하는 정치노선으로는 새로운 사회 건설이 불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대통령직 획득, 소위 선거를 통한 집권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과업의 끝이 아니라 단지 아주 자그마한 시작일 뿐이라는 점, 노동해방 사회는 불평등과 착취를 완전히 없애는 경제적 변화와 연결될 때 가능하다는 점,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투쟁기구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유형의 정부를 창조하지 않고 기존 자본가정부의 구조를 유지한 채 노동해방을 꿈꾸는 것은 노동자계급에게 독약과 같다는 점이 다시 한 번 여실히 증명되었다.

자본가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협하는 노동자들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선거를 통해 정부를 노동자에게 빼앗겼던 칠레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사용할 무기 중 단지 하나만을 빼앗긴 것뿐이었다. 자본가들은 의회의 권력으로 노동자들의 공장점거를 불법화할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었고, 공장, 기계, 버스, 트럭 등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을 발동하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으며, 여전히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대와 경찰의 물리력으로 노동자투쟁을 파괴하고 민중연합정부를 전복할 수 있었다.

역으로 칠레의 패배는 진정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란 단결력, 투쟁력, 노동자 정치의식을 성장시켜 하나의 핏줄로 연결된 운명공동체로서 세력화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역사적 운동에 뛰어든 노동자들은 선거에서의 승리가 노동해방을 향한 출발점일 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노동대중은 한걸음 더 나아가 공장과 토지점거를 통해 생산현장에서의 힘을 쟁취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계급의식으로 각성된 노동자들은 자본가 쿠데타로부터 자신의 정부를 방어하기 위해 목숨을 걸겠다며 ‘무장할 것’을 주장했다. 노동자들의 단결된 조직력과 역동적인 투쟁은 민중연합정부의 형식적인 권력보다 훨씬 강한 힘이었다.

민중연합정부의 패배는 이와 같은 노동자 정치의식을 더 높이 성장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투쟁력을 약화시키는 그릇된 정책 때문이었다. 그 배경에는 기존 자본가들의 권리와 질서를 결정적으로 침해하지 않고서도 불평등과 착취를 없앤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공상적인 관념이 있었다. 민중연합정부는 이 공상적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본가들의 협력을 필요로 했고, 공장과 기계를 돌려달라는 자본가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노동대중의 힘을 기반으로 건설된 민중연합정부는 역설적으로 노동자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자본가들의 입지를 확대하는 타협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한 것이다.

지난 역사가 보여주듯이, 그 결과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4월 총선


2004년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4월 총선은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첫 번째 선거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획기적인 돌풍을 일으키지는 못하더라도, 기존 정당에 환멸을 느껴 탈정치화하고 있는 노동대중이 자본가정당들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출발점 역할을 일정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칠레의 패배를 주의 깊게 검토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듯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노동자들이 독립적인 정치세력으로 결속하는 것은 현장의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전체 계급의 일부로서 자신을 간주하며 단결하고 투쟁하려는 의식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노동자정치세력화의 힘은 의회 내로 갇히는 것이 아니라 노동현장에 바탕을 둔 단결과 투쟁력을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곧게 뻗어나가야 비로소 참된 의의를 다할 수 있다.

현재 한국노동운동의 상황에서 “선거의 한계는 분명하기 때문에 보이콧해야 한다.”거나 반대로 “당선을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것 모두가 어리석은 주장이다. 문제의 핵심은 계급적 정치의식을 대중 속에 불어넣고 현장 노동자들의 단결력과 투쟁력을 확대하는 데 선거라는 계기를 종속시키고 활용하는 데 있다. 칠레의 역사적 경험은 이러한 사실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진정으로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칠레의 비극적 경험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경험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배운다면, 그럼으로써 선거와 의회를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면서도 우리의 힘은 근본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직접적인 단결과 투쟁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명심한다면, 칠레의 교훈은 우리 운동의 전진을 위한 값진 거름이 될 것이 분명하고 또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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