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4/09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09/29
    (미래연대)선진노동자는 인권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투사
  2. 2004/09/08
    (미래연대)1973년 칠레의 교훈
    투사

(미래연대)선진노동자는 인권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선진노동자들은 인권운동이라는 말을 듣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느낌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노동자와 자본가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의 권리'라는 말은 추상적이고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과거에 헌신적으로 투쟁했던 활동가들이 인권운동으로 '전향'하여 백화점식 운동을 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활동가들의 상당수가 노조관료가 되어 자본과 야합하고 대중 위에 군림하는 판에,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는 그래도 그만큼 타락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모습에 신뢰감을 갖기도 한다. 더군다나 인권운동은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정보 등 새로운 운동영역을 개척하고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생각이 들어 노동조합운동의 타락에 신물이 난 노동자들은 신선한 기대감을 갖기도 한다.

이런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생각은 선진노동자들로 하여금 인권운동을 무시해 버릴까, 반대로 차라리 인권운동을 적극적으로 해볼까 하는 혼란까지 느끼게 할 수도 있다. 단순한 거부나 무비판적 동참, 모두 옳지 않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권이란 무엇이며, 선진노동자들은 인권운동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한국노동운동과 인권운동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의 후퇴와 인권운동의 부각


인권운동이 진보운동에서 상대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90년대 중, 후반부터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 즉 계급투쟁적 노동운동이 상대적으로 활성화됐을 때는 인권운동이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87년 여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노동운동이 진보운동의 중심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당시 노동운동은 전투적 조합주의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그것은 성장해가는 운동이 안고 있는 한계였으며,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한계였다. 또한 당시에는 선진노동자라면 당연히 노동자의 과학을 학습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으로 확연하게 갈라져 있으며, 노동자계급이 중심에 서야만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는 점 정도는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때에는 노동자운동을 어떻게 더욱 의식적이고 계급적인 운동으로 발전시켜 해방으로 진군할 것인가가 대부분의 활동가들과 선진노동자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이자 모든 것을 바쳐 이루어야 할 절대적인 과제였다.

그러나 구소련의 변화와 한국 지배세력의 보다 교묘한 통치방식은 노동해방 정치운동의 한계와 맞물려 노동운동을 급속히 쇠퇴시켰다. '자본주의는 영원하다', '노동자계급은 해체되고 있다. 노동운동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가 부자언론과 자본, 정부에 의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활동가들이 썰물처럼 현장과 노동운동을 떠났다. 길을 잃은 선진노동자들은 좌절하고 방황하거나, 무너져가는 현장을 추스르는 데만 자기 활동을 제한하거나 아예 타락한 노조관료가 되기도 했다. 노동운동에서 후퇴했지만 차마 모든 진보운동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일부 활동가들은 마지못해 인권운동을 대안으로 선택하기도 했다. 노동운동의 후퇴에 비례하여 인권운동이 상대적으로 부각됐다. 이 점에서 지금의 인권운동은 '후퇴의 산물'이라는 부정적 측면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인권운동이 노동운동과 대립한다고 간단히 결론내릴 수는 없다. 인권운동도 몇 가지 부류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자본가들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박애주의 캠페인을 들 수 있다. <아시아, 아시아>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그 한 가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노동자들을 고통받는 자로만 볼 뿐, 투쟁과 해방의 주체로 보지 않으며 자본가들의 시혜에 의지해서 탈출구를 찾으라는 환상을 심어줘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흐릿하게 하기 때문에 해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동정적 박애주의 캠페인은 노동운동과 명백히 대립한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인권위나 UN 인권위, 기타 자본가들의 원조를 받거나 정부와 밀접히 연계된 NGO(비정부기구)들은 '인권운동'의 옷을 걸친 자본가적 박애주의 캠페인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자본가적 박애주의 캠페인의 계급적 실체를 항상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폭로하고 경계해야 한다.

다음으로 중간계급 인권운동을 들 수 있다. 중간계급이 그 내부에서 상층, 중층, 하층으로 나뉘고 그 사이에도 다양한 계층들이 있듯이, 그들의 인권운동 안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노동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인정하는가, 자본과 정부로부터 독립적이며 그들에 맞서 전투적으로 투쟁하려고 하는가, 자본주의 테두리 안에서의 개량만 추구하는가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는가, 주로 어느 계층에 기반을 두고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는가에 따라 중간계급 인권운동도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종류의 인권운동에 대한 태도는 중간계급에 대한 태도와 다르지 않다. 노동운동은 중간계급 인권운동이 노동자계급 편으로 다가올 때는 박수를 쳐주면서 더 빠르고 곧게 다가올 것을 격려해야 하며, 그 운동이 자본가계급 편으로 후퇴할 때는 비판의 채찍을 휘두르면서 그들이 노동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자계급의 인권운동이 있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권리는 오직 노동해방을 통해서만 완전히 충족되므로, 이 인권운동은 궁극적으로 노동해방운동일 수밖에 없다. 한편 노동자계급은 노동자들의 해방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억압계급의 인간해방을 추구한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인권운동'은 노동해방이라는 확고한 관점 아래에서 피억압계급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모든 형태의 억압과 수탈에 맞서 싸우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자본가적 박애주의 캠페인이나 중간계급 인권운동의 한계에 대해서는 비판적 관점을 갖되, 모든 인권운동을 무조건 적대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권운동을 계급적 경계선을 따라 명확하게 구별하면서, 노동자의 자기해방운동이 바로 진정한 '인간의 권리'를 쟁취하는 수단임을 강조해야 한다. 현재의 인권운동은 주로 선진노동자들과 노동해방 활동가들이 아니라 중간계급 인권운동가들이 주도하고 있기에 숱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노동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부정하거나 회의하는 부문주의, 정치의 모호함, 평화주의, 백화점식 사업태도 등등. 하지만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인권운동을 통해 선진노동자들이 관심을 갖고 개입해야 할 운동의 지평이 확대되고, 여성노동자 차별, 장애인노동자 차별, 이주노동자 차별 등의 형태로 노동운동 내에도 존재하는 불합리한 차별을 보다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다.

이렇게 역사를 검토하면 노동운동 강화가 여전히 핵심 관건임을 알 수 있다. 노동운동이 퇴조하고 인권운동이 떠오른다고 해서 인권운동으로 힘을 집중할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에 더욱 힘을 쏟아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을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으로 이끌 수 있는 굳건한 구심을 형성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아무리 인권운동이 활성화돼도 노동해방은 요원하며, 자본주의는 질기게 목숨을 이어갈 것이다.

노동운동이 활성화될 때만 인권이 실현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과거 노동운동이 활력 있게 전진했을 때는 여성운동, 장애인운동이 오히려 지금보다 더 강력하게 전개됐다. 이주노동자운동, 동성애자운동 등은 노동운동의 후퇴기에 성장한 운동들이지만, 이 운동들이 성장한 것도 과거에 노동자투쟁의 거대한 물결이 있었고 그 물결이 여전히 저조하게나마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노동운동을 철저히 강화시키려 하지 않은 채 몰계급적인 관점에서 인권운동만 강화시키려 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권의 역사


'인권'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허점투성이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아주 유해하다.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하늘이 부여한 권리를 갖고 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 등등의 주장을 살펴보자. 하루 12시간 죽도록 일하고도 서너 식구가 생활할 임금도 받지 못하는 수백만의 비참한 비정규직 노동자들, 기아와 식수 부족, 전염병으로 하루에도 부지기수로 죽어가는 북한, 이라크,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보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운운하는 말이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공문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말 역시 노동자들이 겪는 불평등뿐만 아니라 장애인이나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부자유와 불평등을 반영하지 못하는 말이다. 대신 그 말은 자본가들에게 마음껏 부를 축적할 자유 즉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착취할 자유가 있고 시장원리를 거스르는 '불평등한' 조치, 가령 국가가 자본가들에게 누진세를 적용하여 분배의 극심한 불균형을 조금 완화하는 것 등의 조치를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다. 실제로도 자주 그렇게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인권은 반드시 역사를 검토하면서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급했던 원시시대에 인권이란 개념은 희미한 흔적조차 없었다. 노예제 시대에도 인권이란 말은 없었다. 뛰어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마저도 여자와 노예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짐승과 같은 부류로 여겼다. 민주주의를 꽃피웠다고 찬미 받는 그리스 시대에도 오직 자유민들만이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봉건제 시대에도 봉건귀족들은 절대군주에 맞서 자신들만의 권리를 얻기 위해 싸웠다. 그래서 근대적인 인권보장의 첫걸음이라고 하는 자유대헌장(마그나 카르타)에도 모든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봉건귀족들의 권리만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인권이란 말은 프랑스대혁명 등이 있었던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등장했다. 인류가 노예주인과 노예, 봉건영주와 농노, 남자와 여자를 모두 대등한 인간으로 바라보기까지 최소 2,000년 이상의 세월을 걸렸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고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으며, 하늘이 부여한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권리선언은 당시로서는 거대한 진보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 선언은 절대왕정이나 봉건귀족들의 신분적 지배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었으며, 지배자들의 압제에 맞선 투쟁을 고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분적 예속이 사라졌다고 해서 법 앞의 형식적 평등을 넘어서는 실질적 평등이 도래한 것은 아니었다. 토지, 기계, 공장을 가진 자본가와 무일푼의 노동자로 인간이 나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예속과 불평등이 신분적 예속을 대신해서 나타났다. 그리고 프랑스대혁명과 차티스트 운동 당시 민중들이 외쳤던 대로 '생존권 보장 없는 자유는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실업자가 되어 길거리를 떠도는 사람에게 어떻게 인권이 보장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자본가들만이 자유와 평등의 '인권'을 맘껏 누릴 수 있었으며, 노동자들은 빈껍데기뿐인 '인권'에 좌절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노동자들은 몰계급적이고 공허한 껍데기뿐인 '형식적 인권' 대신 항상 일자리 보장, 생활임금 보장, 죽지 않고 다치지 않으면서 일할 수 있는 권리 쟁취, 다쳤을 때 치료받고 휴양할 수 있는 권리 쟁취와 같은 노동자의 권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법조문에 보장된 형식적 인권 대신 실질적인 노동자의 인권을 추구해나갔다. 그 후 줄곧 자본가의 권리와 노동자의 권리가 충돌했다.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 자본가의 경영권과 고용안정을 추구하는 노동자의 노동권이, 이윤 확대를 위해 임금을 삭감하려는 자본가의 권리와 사람다운 삶을 위해 임금을 인상하려는 노동자의 권리가, 그리고 시장 질서를 유지하려는 자본가들의 권리와 노동해방을 갈망하는 노동자의 권리가 격렬하게 부딪혔다.

따라서 노동자의 권리를 인권 또는 노동인권이라는 모호하거나 수줍은 표현으로 대체하려는 것은 피어린 투쟁을 통해 전진시켜온 역사를 뒤로 끌어당기거나 과감히 전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행위일 뿐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몰계급적 인권으로 후퇴시키면 정리해고 분쇄, 임금인상 쟁취, 민주노조 사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같은 계급적 요구 대신에 '인권'이라는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요구로 후퇴하게 된다. 몰계급적 휴머니즘이 널리 퍼지게 되면 노동자들은 날카로운 계급의식과 자본가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질 수 없게 되며, 수동성과 순종의식에 물들게 된다.

또한 노동운동을 다른 부문운동과 동일한 위상으로 보고 백화점식 사업으로 힘을 분산하여 노동운동을 약화시킨다. 노동자의 계급적 권리보다 인권을 앞세우는 경향의 결정적인 약점은 계급 대립이 격화됐을 때 "자본가들도 인간인데 너무 나가면 안 되는 것 아니냐"며 투쟁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노동자들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조차 누리지 못하는 짐승과 같은 처지로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몰계급적 인권운동이 걸어왔고, 앞으로도 걸을 수밖에 없는 천형의 길이다. 노동자 자신의 요구를 내건 가차 없는 투쟁,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장애인노동자, 이주노동자, 여성노동자, 동성애 취향의 노동자 등의 권리 쟁취를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나가는 투쟁,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 진실로 인권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인권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또 하나는 자본가들이 근대 시민혁명기에는 인권의 대변자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분명히 반(反)인권의 대명사가 됐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귀족들로부터 차별당하고, 봉건군주들에게 세금이란 명목으로 수탈당할 때는 '인권'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성립함으로써 자신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난 다음에는, 그리고 자신들이 노동자계급과 날카롭게 충돌하게 된 다음에는 '인권'보다 자신들의 '질서'를 강조했다. 자본가들은 다른 모든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권문제에서도 이미 오래 전에 철저하게 반동적인 계급으로 돌아섰다. 반면 노동자계급은 다수이고, 여전히 실질적인 인권을 보장받고 있지 못하기에 가장 강력하게 인권을 위해 투쟁할 수 있는 세력이다.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는 피억압 민중들이 노동자계급과 함께 어깨 걸고 싸워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주의할 점이 있다. 군주제, 귀족제가 만연했던 시대에 천부인권 사상은 진보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근대 시민혁명의 결과로 자본가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생산수단을 독점함으로써 국민들이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어 있는 이상, '국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 원리도 자본가들의 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의 민주주의로 나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당시 힘이 더 강했던 자본가들이 권력을 차지해 자본가 민주주의가 먼저 등장하게 되었다. 이 자본가 민주주의가 표현하는 인권이란 '1인 1표' 식의 형식적 권리에 불과했고, 노동자의 파업과 권리개선, 불평등 척결,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회적 보호 등에 관해 자본가 민주주의는 온갖 억압과 공격, 기만을 자행함으로써 스스로 '인권의 적대자'임을 드러냈다. 이윤과 인권은 결코 양립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과거의 인권의 옹호자들은 현재의 인권의 파괴자들로 변화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노동자들은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인권에 대한 자각을 노동자 해방을 향한 대장정에 나서는 것으로 표출하게 된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기에 인권도 자본가의 소유권과 노동자의 노동권으로 나뉘게 된다. 봉건세력에 맞선 투쟁에서 자본가들이 제기한 인권이지만 결국 자본가들이 권력을 잡게 되자 인권보호는 '자본가의 소유권 보호' 정도로 변질했다. 자본주의의 법률과 질서, 공권력이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인권이 바로 자본가의 소유권이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자본가적 인권은 노동자의 인권과 대립하게 되었다. 자본가의 소유권과 이윤권 보호의 이름으로 노동자 투쟁은 무참히 공격당했고, 노동자의 삶은 잔인하게 짓밟혔다. 결국 이 점이 분명해졌다. 이 사회는 두 개의 인권이 충돌하고 있다. 착취자와 억압자의 인권, 그리고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노동자의 인권!

한때 추상적인 인권에 집착하면서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선언에 머물던 노동자들은 여러 경험을 통해 자본가의 소유권에 맞서 노동자의 계급적 권리를 내세우게 됐으며, 그것은 결국 노동해방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노동자는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인간'이라는 초기 선언에서, '자본가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이라는 더 명확한 선언을 향해 전진해나갔던 것이다.





모호한 인권 대신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선진노동자들은 몰계급적 인권의 관점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철저히 견지해야 한다. 정규직, 남성, 한국인, 비장애인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장애인노동자를 대등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인간다운 권리를 위해 함께 투쟁하는 것은 무조건 올바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자유와 평등을 만끽해야 한다'고만 막연하게 생각하면 자본가들의 '착취할 자유', '돈으로 국회의원 뺏지를 사고, 합법적으로 정치를 주무를 자유'에 대해서 단호하게 부정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노동자는 하나라는 계급적 관점을 빠뜨린 채 막연히 인간주의(휴머니즘) 관점만 갖는다면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노동자, 장애인노동자들에 대해 보잘것없는 동정, 시혜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비정규직, 장애인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를 모두 스스로 투쟁하고 해방을 쟁취할 잠재력을 가진 노동자계급의 일부분으로 바라보고, 항상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중시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렇게 계급적 관점을 갖게 되면 비정규직의 적이 정규직이 아니고, 여성의 적이 남성이 아니며, 이주노동자의 적이 한국인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노동자들이 분명한 계급의식을 갖고 굳건하게 연대투쟁을 하면 백화점식으로 인권운동을 벌일 때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심지어 여성, 장애인, 외국인, 동성애자 중 노동자는 아니지만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들도 이 힘을 보고 희망을 얻으며 노동자들과 기꺼이 손잡을 수 있다. 몰계급적 인권의 관점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확고히 견지할 때만 결정적 국면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가진 자들의 권리를 짓부수고 노동자의 권리를 전면적으로 쟁취할 수 있다. 그것만이 노동자들에게 승리를 즉, '영원히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다.

노동자 세상에서만 인간해방은 완전히 이루어진다. 자본가 사회에서는 아무리 인간애를 드높이기 위한 교육을 강화하고 '인권'을 외쳐도 남녀차별, 장애인 소외, 동성애자 억압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는 각종 형태의 인간차별이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사람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자본가 근성에 근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소수 자본가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굴러가는 사회다. 자본가들은 첨예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자의 피땀을 단 한 방울이라도 더 쥐어짜내려 한다. 그리고 노동자들 내부에 층층이 위계구조를 만들어 일치단결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 장애인, 외국인, 동성애자 등의 인권을 일상적으로 유린한다. 그러면서도 자본가들은 노동자들과 피억압자들이 자신들의 '질서'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불우이웃돕기와 같은 자선사업에 나서며 불만을 잠재우려 한다. 따라서 이런 가진 자들의 질서에 과감히 도전하지 않는다면 인간해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물론 노동자 세상에서도 모든 피억압자들의 인간해방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노동해방은 인간해방을 위한 기본 동력을 제공하고 반드시 인간해방을 완성시킬 것이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것은 상당기간 동안의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되돌아와서 인권운동은 깡그리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반자본주의 진보운동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권운동도 이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인권운동이란 이름으로 다양한 피억압 민중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벌인다면, 그리고 인권운동가들이 노동자의 정치적 자유와 파업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다면 노동운동은 거기에도 개입해서 노동자의 대안을 제기하고, 그들을 노동해방의 관점 아래 통합시켜 나가야 한다.

역사를 앞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선진노동자들은 몰계급적 인권운동의 한계를 정확히 이해하면서 노동운동을 계급적 단결과 연대, 해방의 깃발 아래 재차 강화해야 한다. 이렇게 중심을 분명히 세우고 인간다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가난한 빈민들, 그리고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모든 이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자 하는 진보적 인권활동가들에게까지 손을 뻗쳐서 새로운 세상을 향한 운동의 동력을 확대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미래연대)1973년 칠레의 교훈



1973년 칠레의 교훈




1973년 쿠데타


1973년 9월 11일 장갑차, 탱크와 무장한 군 병력이 칠레 대통령궁을 포위했다. 공중에는 전폭기들이 순회비행을 하고 있었다. 피노체트를 우두머리로 한 군부 쿠데타세력은 대통령 아옌데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곧이어 공군 폭격기가 대통령궁으로 폭탄을 투하했으며, 지상군도 탱크를 앞세워 모네다궁으로 진입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쿠데타는 완료되었다.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의 출범이라는 세계 최초의 실험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아옌데정권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부로서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들을 어느 정도 펼쳤다. 그러자 포악해진 자본가세력은 아옌데정권을 파괴하는 데 머뭇거리지 않았고 단호한 군사행동을 실시했다. 칠레 아옌데정권은 군부 쿠데타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무력하게 무너졌다.

칠레의 경험은 우리에게 노동자의 진정한 정치세력화란 무엇인지 의문을 던진다. 선거에서 당선되면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질 것인가? 그렇다면 선거를 통해 대통령까지 배출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착수했다고 이야기되는 칠레가 결국 쿠데타로 한 순간에 붕괴된 상황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실패한 실험은 그릇된 정치노선을 그대로 반영할 뿐이다. 칠레의 패배는 우리에게 잘못된 정치세력화의 파괴적인 결말과 동시에 진정한 정치세력화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민중연합정부의 건설 - 투쟁의 시작


1970년 9월 칠레 대통령선거에서 민중연합 후보인 아옌데가 36.3%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민중연합은 노동자정당인 사회당, 공산당과 중간계급 정당인 급진당, 사회민주당, 인민통일행동운동(MAPU), 인민독립행동(API)의 6개 정당이 모여 69년에 결성했다. 경제가 악화되고 빈부 격차와 빈곤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들은 기존 자본가 정치세력에 분노하며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 했다. 이 노력이 곧 노동자정당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질서를 건설하려는 민중연합의 길로 이어졌으며, 이 대중적 열망을 토대로 아옌데는 선거를 통해 집권할 수 있었다.

아옌데정권은 출범과 동시에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최초의 40개 정책’으로 노인 및 퇴직자의 연금수혜 확대, 의료비 감면, 400만 어린이에 대한 우유 무료급식, 빈민가 주택개선, 저임금 노동자 66%의 임금인상 등 소득재분배 정책을 펼쳤다. 특히 물가상승률에 100% 연동해서 임금을 인상시키는 제도를 실행함으로써 저임금 노동자의 실질적인 생활개선을 추구했다. 그리고 칠레의 핵심 산업인 구리광산과 철, 섬유산업 등의 국유화를 실시하고 대농장을 몰수하는 등 토지개혁을 통해 가난한 농민층 속에서 지지기반을 확대해나갔다.

하지만 투쟁 속에서 의식적으로 발돋움함으로써 개혁정책의 ‘소극적인 수혜자’에서 ‘적극적인 주인공’으로 도약해나갔던 노동자와 빈농들은 아옌데정권의 제한된 정책을 뛰어넘어 훨씬 멀리 나아갔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스스로 공장위원회를 조직했다. 빈농들 역시 대농장점거와 농민평의회 건설을 통해 생산과 노동을 스스로 통제하는 자주관리를 실행했다. 칠레의 노동자, 빈농들은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하는 데 그치는 소극적인 존재에서 생산과 노동과정을 스스로 통제하는 사회 운영의 주체로 우뚝 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혁명적 조치를 스스로 수행하지 않고서는 절대 이 사회의 주인공이 될 수 없으며, 이제 막 시작된 초보적인 개선조치들을 근본적인 조치들로 전진시킬 수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점차 더 높은 수준의 계급의식을 갖게 된 노동자들은 빠른 속도로 단결의 힘을 강화하여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전면에 등장했고, 아옌데정부의 급진적 개혁을 선두에서 강제해 들어갔다. 그리고 이후 자본의 공세에 맞서 노동자투쟁의 성과를 지키는 실질적 힘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옌데정권의 수립, 그리고 이 정권의 여러 진보 조치들은 이미 그 이전부터 강하게 솟구치고 있던 노동자들의 자주적이고 급진적인 저항을 선거와 의회정치라는 구조 속에 가두어놓기 위해 자본가들이 채택한 차선책이었다. 만약 이 정도라도 진보적 조치를 허용하지 않았다면 칠레의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의 거대하고 결정적인 공세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본가계급이 불안해했던 것은 모네다궁의 아옌데정부 각료들이 아니라 이 궁 바깥에 포진한 더욱 급진화되는 노동자투쟁의 흐름이었다.


자본가세력의 반격


노동자들의 투쟁 열기에 위협을 느낀 자본가세력은 칠레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깨뜨리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무기를 하나씩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옌데가 선거를 통해 당선되기는 했지만, 의회에서 다수파는 여전히 자본가세력이었다. 그들은 다수파의 유리한 지위를 이용하여 민중연합정권의 소득재분배정책, 산업국유화 정책과 토지개혁에 대한 법안통과를 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대단히 현실적인 자본가들은 의회에서의 공허한 말다툼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모든 것은 의회 바깥의 실제 투쟁에 의해 결정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우선 기존의 경제혼란을 확대하여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을 불어넣으려는 의도에서 ‘자본가파업’을 일으켰다. 자본가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운수업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중소기업가들이 회사를 폐쇄하고, 소상점주와 의사들이 영업거부에 들어갔다. 특히 트럭 운수업자들의 파업은 물자수송에 타격을 주어 경제에 커다란 혼란을 일으켰다. 아옌데정부는 이러한 자본가들의 입체적인 공격에 부딪혀 최소한의 개혁정책조차 실행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옌데정부는 자본가파업을 진압하라는 대중의 요구, 즉 반항하는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주도자들을 구속시키라는 요구를 외면했다. 오히려 이 정부는 대중의 요구와는 정반대로, 자본가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급격한 개혁을 자제해야 한다는 그릇된 결론을 이끌어냈다. 대중이 접수한 공장과 대농장을 자본가와 지주들에게 다시 돌려주고, 자본가세력을 자극하여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한다며 대중적 시위를 자제시키며, 심지어 각 지역에서 자본가에 대항한 투쟁들을 경찰을 동원하여 진압하기 시작했다. 아옌데의 민중연합정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자본가의 쿠데타로부터 정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과거의 반동적인 군 장성 3인을 장관으로 임명했다. 심지어 쿠데타가 일어나기 얼마 전에는 쿠데타 수괴노릇을 할 피노체트를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하기에 이르게 된다. 한마디로 아옌데정부는 노동자의 힘을 강화하고 자본가들의 힘을 제거하는 대신, 자본가들에게 ‘이 정부는 당신들과 협조하고, 당신들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오.’라고 확신시키는 데 집착했다.

이것은 두 가지 결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한편으로 노동자들은 이 정부로부터 점차 멀어졌고, 그 결과 이 정부는 자신을 방어해줄 가장 중요한 토대를 잃어버린 채 허공에 붕 떠버렸다. 다른 한편으로는 저항을 통해 상당한 재미를 본 자본가들이 자신감을 강화시키면서 ‘이참에 아예 이 정부를 쓸어버리고 아주 강력한 자본가 독재정권을 수립해 노동운동을 말살시켜야겠다’는 야심찬 계획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자본가세력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려 했던 민중연합정부의 무기력한 희망과는 달리, 군 장성들은 공장점거와 토지점거를 파괴하고 노동자들의 무장을 막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민중연합정부의 소심한 대응에 모든 것을 맡겨두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독자적 힘을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자본가파업에 대처했다. 각지에서 노동자들은 공장점거를 확대했다. 각 지역의 노조와 부인회 등으로 구성된 물자공급위원회가 물자분배와 소매상의 매점매석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했다. 민중연합정부에 대한 자본가들의 공격은 바로 자신들을 향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노동자들은 전체 노동자계급 단결의 힘을 끌어 모으기 위해 분투했다.

자본가들은 1973년 3월 국회의원선거에서 승리하여 민중연합정부를 탄핵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민중연합에 대중은 표를 던졌다. 노동자들은 이 정부를 믿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당장에는 이 정부에 표를 던지는 것이 전술적으로 이롭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선거는 다시 한 번 민중연합의 승리로 끝났다. 합법적인 방식으로 목적을 달성할 모든 수단이 실패하자, 마지막으로 자본가세력은 쿠데타라는 결정적 카드를 꺼내들었고 재빨리 준비에 들어간다.

그해 6월 29일 쿠데타 미수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24시간 총파업을 조직했고, 9월 4일에는 80만이 모여 민중정부 사수를 위해 노동자들이 무장해야 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자신의 목에 쿠데타라는 칼이 겨누어지는 상황에서도 아옌데정부는 오히려 자본가세력과의 타협 가능성을 굳게 믿었고, 노동자들의 무장요구를 묵살했다. 결국 아옌데정부는 노동해방을 향해 철저하게 전진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에 의지하기보다는, 노동자들을 압살하고자 하는 자본가세력에 더 의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투쟁의 성격이 근본적인 지점을 향하면 향할수록 아옌데정부는 혁명을 할 의지가 전혀 없는 개량주의 세력임을 드러냈는데, 이것은 자연스럽게 이 정부를 노동자의 편에서 자본가의 편으로 이동시켰던 것이다.

1차 쿠데타 시도에서 민중연합정부의 무기력함(이것은 기본적으로 급진화되고 노동해방을 향해 전진하려는 노동자들의 열망을 대변하려 하지 않았던 데 기인한다)을 확인한 자본가들은 결정적인 2차 쿠데타를 감행한다. 결국 9월 11일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는 성공했고, 군부는 의회를 폐쇄하고 모든 정당을 금지했다. 피의 보복이 뒤따랐다. 쿠데타 과정에서 아옌데 대통령이 사살된 것은 물론, 이날 이후 단 일주일 만에 3만 명의 노동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거대한 사회적 격변의 시기에 구 지배계급과 타협하려는 시도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이 또 한 번 비극적으로 입증되었다.

사실 쿠데타는 결코 아옌데 민중연합정부를 겨냥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정도의 소심한 정부라면 유럽에서 볼 수 있듯이 ‘개량주의 노동당이나 사회민주당의 집권’처럼 충분히 그냥 허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아옌데정부로서는 노동해방의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도처에서 자본가들과 충돌하면서 스스로 생산수단과 현장통제권을 확보해나가고 있었던 거대한 노동자투쟁의 흐름을 저지할 수 없다는 점이 바로 핵심적 문제였다. 이 흐름을 박살내서 자본주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아옌데정부가 아니라 총과 감옥으로 무장한 피노체트 군사자본가정부가 절실히 필요했다. 쿠데타는 모네다궁의 아옌데정부가 아니라 이 궁 바깥의 노동현장에 포진한 혁명적 노동자들을 정확히 겨냥했다. 쿠데타세력이 학살하고 진압했던 것은 바로 이 노동자들의 조직이었던 반면, 확대하고 보존했던 것은 모네다궁의 자본주의 정부 질서였다.


노동자 정치세력화 - 운명공동체로서의 자각


칠레의 경험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몇 명을 노동자정당에서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구하는 정치노선으로는 새로운 사회 건설이 불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대통령직 획득, 소위 선거를 통한 집권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과업의 끝이 아니라 단지 아주 자그마한 시작일 뿐이라는 점, 노동해방 사회는 불평등과 착취를 완전히 없애는 경제적 변화와 연결될 때 가능하다는 점,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투쟁기구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유형의 정부를 창조하지 않고 기존 자본가정부의 구조를 유지한 채 노동해방을 꿈꾸는 것은 노동자계급에게 독약과 같다는 점이 다시 한 번 여실히 증명되었다.

자본가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협하는 노동자들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선거를 통해 정부를 노동자에게 빼앗겼던 칠레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사용할 무기 중 단지 하나만을 빼앗긴 것뿐이었다. 자본가들은 의회의 권력으로 노동자들의 공장점거를 불법화할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었고, 공장, 기계, 버스, 트럭 등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을 발동하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으며, 여전히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대와 경찰의 물리력으로 노동자투쟁을 파괴하고 민중연합정부를 전복할 수 있었다.

역으로 칠레의 패배는 진정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란 단결력, 투쟁력, 노동자 정치의식을 성장시켜 하나의 핏줄로 연결된 운명공동체로서 세력화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역사적 운동에 뛰어든 노동자들은 선거에서의 승리가 노동해방을 향한 출발점일 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노동대중은 한걸음 더 나아가 공장과 토지점거를 통해 생산현장에서의 힘을 쟁취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계급의식으로 각성된 노동자들은 자본가 쿠데타로부터 자신의 정부를 방어하기 위해 목숨을 걸겠다며 ‘무장할 것’을 주장했다. 노동자들의 단결된 조직력과 역동적인 투쟁은 민중연합정부의 형식적인 권력보다 훨씬 강한 힘이었다.

민중연합정부의 패배는 이와 같은 노동자 정치의식을 더 높이 성장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투쟁력을 약화시키는 그릇된 정책 때문이었다. 그 배경에는 기존 자본가들의 권리와 질서를 결정적으로 침해하지 않고서도 불평등과 착취를 없앤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공상적인 관념이 있었다. 민중연합정부는 이 공상적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본가들의 협력을 필요로 했고, 공장과 기계를 돌려달라는 자본가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노동대중의 힘을 기반으로 건설된 민중연합정부는 역설적으로 노동자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자본가들의 입지를 확대하는 타협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한 것이다.

지난 역사가 보여주듯이, 그 결과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4월 총선


2004년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4월 총선은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첫 번째 선거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획기적인 돌풍을 일으키지는 못하더라도, 기존 정당에 환멸을 느껴 탈정치화하고 있는 노동대중이 자본가정당들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출발점 역할을 일정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칠레의 패배를 주의 깊게 검토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듯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노동자들이 독립적인 정치세력으로 결속하는 것은 현장의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전체 계급의 일부로서 자신을 간주하며 단결하고 투쟁하려는 의식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노동자정치세력화의 힘은 의회 내로 갇히는 것이 아니라 노동현장에 바탕을 둔 단결과 투쟁력을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곧게 뻗어나가야 비로소 참된 의의를 다할 수 있다.

현재 한국노동운동의 상황에서 “선거의 한계는 분명하기 때문에 보이콧해야 한다.”거나 반대로 “당선을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것 모두가 어리석은 주장이다. 문제의 핵심은 계급적 정치의식을 대중 속에 불어넣고 현장 노동자들의 단결력과 투쟁력을 확대하는 데 선거라는 계기를 종속시키고 활용하는 데 있다. 칠레의 역사적 경험은 이러한 사실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진정으로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칠레의 비극적 경험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경험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배운다면, 그럼으로써 선거와 의회를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면서도 우리의 힘은 근본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직접적인 단결과 투쟁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명심한다면, 칠레의 교훈은 우리 운동의 전진을 위한 값진 거름이 될 것이 분명하고 또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