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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연대)선진노동자는 인권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선진노동자들은 인권운동이라는 말을 듣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느낌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노동자와 자본가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의 권리'라는 말은 추상적이고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과거에 헌신적으로 투쟁했던 활동가들이 인권운동으로 '전향'하여 백화점식 운동을 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활동가들의 상당수가 노조관료가 되어 자본과 야합하고 대중 위에 군림하는 판에,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는 그래도 그만큼 타락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모습에 신뢰감을 갖기도 한다. 더군다나 인권운동은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정보 등 새로운 운동영역을 개척하고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생각이 들어 노동조합운동의 타락에 신물이 난 노동자들은 신선한 기대감을 갖기도 한다.

이런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생각은 선진노동자들로 하여금 인권운동을 무시해 버릴까, 반대로 차라리 인권운동을 적극적으로 해볼까 하는 혼란까지 느끼게 할 수도 있다. 단순한 거부나 무비판적 동참, 모두 옳지 않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권이란 무엇이며, 선진노동자들은 인권운동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한국노동운동과 인권운동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의 후퇴와 인권운동의 부각


인권운동이 진보운동에서 상대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90년대 중, 후반부터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 즉 계급투쟁적 노동운동이 상대적으로 활성화됐을 때는 인권운동이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87년 여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노동운동이 진보운동의 중심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당시 노동운동은 전투적 조합주의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그것은 성장해가는 운동이 안고 있는 한계였으며,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한계였다. 또한 당시에는 선진노동자라면 당연히 노동자의 과학을 학습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으로 확연하게 갈라져 있으며, 노동자계급이 중심에 서야만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는 점 정도는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때에는 노동자운동을 어떻게 더욱 의식적이고 계급적인 운동으로 발전시켜 해방으로 진군할 것인가가 대부분의 활동가들과 선진노동자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이자 모든 것을 바쳐 이루어야 할 절대적인 과제였다.

그러나 구소련의 변화와 한국 지배세력의 보다 교묘한 통치방식은 노동해방 정치운동의 한계와 맞물려 노동운동을 급속히 쇠퇴시켰다. '자본주의는 영원하다', '노동자계급은 해체되고 있다. 노동운동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가 부자언론과 자본, 정부에 의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활동가들이 썰물처럼 현장과 노동운동을 떠났다. 길을 잃은 선진노동자들은 좌절하고 방황하거나, 무너져가는 현장을 추스르는 데만 자기 활동을 제한하거나 아예 타락한 노조관료가 되기도 했다. 노동운동에서 후퇴했지만 차마 모든 진보운동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일부 활동가들은 마지못해 인권운동을 대안으로 선택하기도 했다. 노동운동의 후퇴에 비례하여 인권운동이 상대적으로 부각됐다. 이 점에서 지금의 인권운동은 '후퇴의 산물'이라는 부정적 측면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인권운동이 노동운동과 대립한다고 간단히 결론내릴 수는 없다. 인권운동도 몇 가지 부류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자본가들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박애주의 캠페인을 들 수 있다. <아시아, 아시아>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그 한 가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노동자들을 고통받는 자로만 볼 뿐, 투쟁과 해방의 주체로 보지 않으며 자본가들의 시혜에 의지해서 탈출구를 찾으라는 환상을 심어줘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흐릿하게 하기 때문에 해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동정적 박애주의 캠페인은 노동운동과 명백히 대립한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인권위나 UN 인권위, 기타 자본가들의 원조를 받거나 정부와 밀접히 연계된 NGO(비정부기구)들은 '인권운동'의 옷을 걸친 자본가적 박애주의 캠페인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자본가적 박애주의 캠페인의 계급적 실체를 항상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폭로하고 경계해야 한다.

다음으로 중간계급 인권운동을 들 수 있다. 중간계급이 그 내부에서 상층, 중층, 하층으로 나뉘고 그 사이에도 다양한 계층들이 있듯이, 그들의 인권운동 안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노동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인정하는가, 자본과 정부로부터 독립적이며 그들에 맞서 전투적으로 투쟁하려고 하는가, 자본주의 테두리 안에서의 개량만 추구하는가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는가, 주로 어느 계층에 기반을 두고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는가에 따라 중간계급 인권운동도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종류의 인권운동에 대한 태도는 중간계급에 대한 태도와 다르지 않다. 노동운동은 중간계급 인권운동이 노동자계급 편으로 다가올 때는 박수를 쳐주면서 더 빠르고 곧게 다가올 것을 격려해야 하며, 그 운동이 자본가계급 편으로 후퇴할 때는 비판의 채찍을 휘두르면서 그들이 노동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자계급의 인권운동이 있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권리는 오직 노동해방을 통해서만 완전히 충족되므로, 이 인권운동은 궁극적으로 노동해방운동일 수밖에 없다. 한편 노동자계급은 노동자들의 해방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억압계급의 인간해방을 추구한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인권운동'은 노동해방이라는 확고한 관점 아래에서 피억압계급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모든 형태의 억압과 수탈에 맞서 싸우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자본가적 박애주의 캠페인이나 중간계급 인권운동의 한계에 대해서는 비판적 관점을 갖되, 모든 인권운동을 무조건 적대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권운동을 계급적 경계선을 따라 명확하게 구별하면서, 노동자의 자기해방운동이 바로 진정한 '인간의 권리'를 쟁취하는 수단임을 강조해야 한다. 현재의 인권운동은 주로 선진노동자들과 노동해방 활동가들이 아니라 중간계급 인권운동가들이 주도하고 있기에 숱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노동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부정하거나 회의하는 부문주의, 정치의 모호함, 평화주의, 백화점식 사업태도 등등. 하지만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인권운동을 통해 선진노동자들이 관심을 갖고 개입해야 할 운동의 지평이 확대되고, 여성노동자 차별, 장애인노동자 차별, 이주노동자 차별 등의 형태로 노동운동 내에도 존재하는 불합리한 차별을 보다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다.

이렇게 역사를 검토하면 노동운동 강화가 여전히 핵심 관건임을 알 수 있다. 노동운동이 퇴조하고 인권운동이 떠오른다고 해서 인권운동으로 힘을 집중할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에 더욱 힘을 쏟아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을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으로 이끌 수 있는 굳건한 구심을 형성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아무리 인권운동이 활성화돼도 노동해방은 요원하며, 자본주의는 질기게 목숨을 이어갈 것이다.

노동운동이 활성화될 때만 인권이 실현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과거 노동운동이 활력 있게 전진했을 때는 여성운동, 장애인운동이 오히려 지금보다 더 강력하게 전개됐다. 이주노동자운동, 동성애자운동 등은 노동운동의 후퇴기에 성장한 운동들이지만, 이 운동들이 성장한 것도 과거에 노동자투쟁의 거대한 물결이 있었고 그 물결이 여전히 저조하게나마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노동운동을 철저히 강화시키려 하지 않은 채 몰계급적인 관점에서 인권운동만 강화시키려 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권의 역사


'인권'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허점투성이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아주 유해하다.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하늘이 부여한 권리를 갖고 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 등등의 주장을 살펴보자. 하루 12시간 죽도록 일하고도 서너 식구가 생활할 임금도 받지 못하는 수백만의 비참한 비정규직 노동자들, 기아와 식수 부족, 전염병으로 하루에도 부지기수로 죽어가는 북한, 이라크,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보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운운하는 말이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공문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말 역시 노동자들이 겪는 불평등뿐만 아니라 장애인이나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부자유와 불평등을 반영하지 못하는 말이다. 대신 그 말은 자본가들에게 마음껏 부를 축적할 자유 즉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착취할 자유가 있고 시장원리를 거스르는 '불평등한' 조치, 가령 국가가 자본가들에게 누진세를 적용하여 분배의 극심한 불균형을 조금 완화하는 것 등의 조치를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다. 실제로도 자주 그렇게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인권은 반드시 역사를 검토하면서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급했던 원시시대에 인권이란 개념은 희미한 흔적조차 없었다. 노예제 시대에도 인권이란 말은 없었다. 뛰어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마저도 여자와 노예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짐승과 같은 부류로 여겼다. 민주주의를 꽃피웠다고 찬미 받는 그리스 시대에도 오직 자유민들만이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봉건제 시대에도 봉건귀족들은 절대군주에 맞서 자신들만의 권리를 얻기 위해 싸웠다. 그래서 근대적인 인권보장의 첫걸음이라고 하는 자유대헌장(마그나 카르타)에도 모든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봉건귀족들의 권리만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인권이란 말은 프랑스대혁명 등이 있었던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등장했다. 인류가 노예주인과 노예, 봉건영주와 농노, 남자와 여자를 모두 대등한 인간으로 바라보기까지 최소 2,000년 이상의 세월을 걸렸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고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으며, 하늘이 부여한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권리선언은 당시로서는 거대한 진보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 선언은 절대왕정이나 봉건귀족들의 신분적 지배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었으며, 지배자들의 압제에 맞선 투쟁을 고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분적 예속이 사라졌다고 해서 법 앞의 형식적 평등을 넘어서는 실질적 평등이 도래한 것은 아니었다. 토지, 기계, 공장을 가진 자본가와 무일푼의 노동자로 인간이 나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예속과 불평등이 신분적 예속을 대신해서 나타났다. 그리고 프랑스대혁명과 차티스트 운동 당시 민중들이 외쳤던 대로 '생존권 보장 없는 자유는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실업자가 되어 길거리를 떠도는 사람에게 어떻게 인권이 보장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자본가들만이 자유와 평등의 '인권'을 맘껏 누릴 수 있었으며, 노동자들은 빈껍데기뿐인 '인권'에 좌절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노동자들은 몰계급적이고 공허한 껍데기뿐인 '형식적 인권' 대신 항상 일자리 보장, 생활임금 보장, 죽지 않고 다치지 않으면서 일할 수 있는 권리 쟁취, 다쳤을 때 치료받고 휴양할 수 있는 권리 쟁취와 같은 노동자의 권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법조문에 보장된 형식적 인권 대신 실질적인 노동자의 인권을 추구해나갔다. 그 후 줄곧 자본가의 권리와 노동자의 권리가 충돌했다.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 자본가의 경영권과 고용안정을 추구하는 노동자의 노동권이, 이윤 확대를 위해 임금을 삭감하려는 자본가의 권리와 사람다운 삶을 위해 임금을 인상하려는 노동자의 권리가, 그리고 시장 질서를 유지하려는 자본가들의 권리와 노동해방을 갈망하는 노동자의 권리가 격렬하게 부딪혔다.

따라서 노동자의 권리를 인권 또는 노동인권이라는 모호하거나 수줍은 표현으로 대체하려는 것은 피어린 투쟁을 통해 전진시켜온 역사를 뒤로 끌어당기거나 과감히 전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행위일 뿐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몰계급적 인권으로 후퇴시키면 정리해고 분쇄, 임금인상 쟁취, 민주노조 사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같은 계급적 요구 대신에 '인권'이라는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요구로 후퇴하게 된다. 몰계급적 휴머니즘이 널리 퍼지게 되면 노동자들은 날카로운 계급의식과 자본가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질 수 없게 되며, 수동성과 순종의식에 물들게 된다.

또한 노동운동을 다른 부문운동과 동일한 위상으로 보고 백화점식 사업으로 힘을 분산하여 노동운동을 약화시킨다. 노동자의 계급적 권리보다 인권을 앞세우는 경향의 결정적인 약점은 계급 대립이 격화됐을 때 "자본가들도 인간인데 너무 나가면 안 되는 것 아니냐"며 투쟁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노동자들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조차 누리지 못하는 짐승과 같은 처지로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몰계급적 인권운동이 걸어왔고, 앞으로도 걸을 수밖에 없는 천형의 길이다. 노동자 자신의 요구를 내건 가차 없는 투쟁,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장애인노동자, 이주노동자, 여성노동자, 동성애 취향의 노동자 등의 권리 쟁취를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나가는 투쟁,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 진실로 인권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인권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또 하나는 자본가들이 근대 시민혁명기에는 인권의 대변자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분명히 반(反)인권의 대명사가 됐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귀족들로부터 차별당하고, 봉건군주들에게 세금이란 명목으로 수탈당할 때는 '인권'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성립함으로써 자신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난 다음에는, 그리고 자신들이 노동자계급과 날카롭게 충돌하게 된 다음에는 '인권'보다 자신들의 '질서'를 강조했다. 자본가들은 다른 모든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권문제에서도 이미 오래 전에 철저하게 반동적인 계급으로 돌아섰다. 반면 노동자계급은 다수이고, 여전히 실질적인 인권을 보장받고 있지 못하기에 가장 강력하게 인권을 위해 투쟁할 수 있는 세력이다.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는 피억압 민중들이 노동자계급과 함께 어깨 걸고 싸워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주의할 점이 있다. 군주제, 귀족제가 만연했던 시대에 천부인권 사상은 진보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근대 시민혁명의 결과로 자본가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생산수단을 독점함으로써 국민들이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어 있는 이상, '국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 원리도 자본가들의 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의 민주주의로 나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당시 힘이 더 강했던 자본가들이 권력을 차지해 자본가 민주주의가 먼저 등장하게 되었다. 이 자본가 민주주의가 표현하는 인권이란 '1인 1표' 식의 형식적 권리에 불과했고, 노동자의 파업과 권리개선, 불평등 척결,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회적 보호 등에 관해 자본가 민주주의는 온갖 억압과 공격, 기만을 자행함으로써 스스로 '인권의 적대자'임을 드러냈다. 이윤과 인권은 결코 양립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과거의 인권의 옹호자들은 현재의 인권의 파괴자들로 변화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노동자들은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인권에 대한 자각을 노동자 해방을 향한 대장정에 나서는 것으로 표출하게 된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기에 인권도 자본가의 소유권과 노동자의 노동권으로 나뉘게 된다. 봉건세력에 맞선 투쟁에서 자본가들이 제기한 인권이지만 결국 자본가들이 권력을 잡게 되자 인권보호는 '자본가의 소유권 보호' 정도로 변질했다. 자본주의의 법률과 질서, 공권력이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인권이 바로 자본가의 소유권이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자본가적 인권은 노동자의 인권과 대립하게 되었다. 자본가의 소유권과 이윤권 보호의 이름으로 노동자 투쟁은 무참히 공격당했고, 노동자의 삶은 잔인하게 짓밟혔다. 결국 이 점이 분명해졌다. 이 사회는 두 개의 인권이 충돌하고 있다. 착취자와 억압자의 인권, 그리고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노동자의 인권!

한때 추상적인 인권에 집착하면서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선언에 머물던 노동자들은 여러 경험을 통해 자본가의 소유권에 맞서 노동자의 계급적 권리를 내세우게 됐으며, 그것은 결국 노동해방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노동자는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인간'이라는 초기 선언에서, '자본가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이라는 더 명확한 선언을 향해 전진해나갔던 것이다.





모호한 인권 대신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선진노동자들은 몰계급적 인권의 관점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철저히 견지해야 한다. 정규직, 남성, 한국인, 비장애인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장애인노동자를 대등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인간다운 권리를 위해 함께 투쟁하는 것은 무조건 올바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자유와 평등을 만끽해야 한다'고만 막연하게 생각하면 자본가들의 '착취할 자유', '돈으로 국회의원 뺏지를 사고, 합법적으로 정치를 주무를 자유'에 대해서 단호하게 부정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노동자는 하나라는 계급적 관점을 빠뜨린 채 막연히 인간주의(휴머니즘) 관점만 갖는다면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노동자, 장애인노동자들에 대해 보잘것없는 동정, 시혜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비정규직, 장애인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를 모두 스스로 투쟁하고 해방을 쟁취할 잠재력을 가진 노동자계급의 일부분으로 바라보고, 항상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중시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렇게 계급적 관점을 갖게 되면 비정규직의 적이 정규직이 아니고, 여성의 적이 남성이 아니며, 이주노동자의 적이 한국인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노동자들이 분명한 계급의식을 갖고 굳건하게 연대투쟁을 하면 백화점식으로 인권운동을 벌일 때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심지어 여성, 장애인, 외국인, 동성애자 중 노동자는 아니지만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들도 이 힘을 보고 희망을 얻으며 노동자들과 기꺼이 손잡을 수 있다. 몰계급적 인권의 관점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확고히 견지할 때만 결정적 국면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가진 자들의 권리를 짓부수고 노동자의 권리를 전면적으로 쟁취할 수 있다. 그것만이 노동자들에게 승리를 즉, '영원히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다.

노동자 세상에서만 인간해방은 완전히 이루어진다. 자본가 사회에서는 아무리 인간애를 드높이기 위한 교육을 강화하고 '인권'을 외쳐도 남녀차별, 장애인 소외, 동성애자 억압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는 각종 형태의 인간차별이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사람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자본가 근성에 근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소수 자본가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굴러가는 사회다. 자본가들은 첨예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자의 피땀을 단 한 방울이라도 더 쥐어짜내려 한다. 그리고 노동자들 내부에 층층이 위계구조를 만들어 일치단결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 장애인, 외국인, 동성애자 등의 인권을 일상적으로 유린한다. 그러면서도 자본가들은 노동자들과 피억압자들이 자신들의 '질서'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불우이웃돕기와 같은 자선사업에 나서며 불만을 잠재우려 한다. 따라서 이런 가진 자들의 질서에 과감히 도전하지 않는다면 인간해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물론 노동자 세상에서도 모든 피억압자들의 인간해방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노동해방은 인간해방을 위한 기본 동력을 제공하고 반드시 인간해방을 완성시킬 것이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것은 상당기간 동안의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되돌아와서 인권운동은 깡그리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반자본주의 진보운동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권운동도 이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인권운동이란 이름으로 다양한 피억압 민중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벌인다면, 그리고 인권운동가들이 노동자의 정치적 자유와 파업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다면 노동운동은 거기에도 개입해서 노동자의 대안을 제기하고, 그들을 노동해방의 관점 아래 통합시켜 나가야 한다.

역사를 앞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선진노동자들은 몰계급적 인권운동의 한계를 정확히 이해하면서 노동운동을 계급적 단결과 연대, 해방의 깃발 아래 재차 강화해야 한다. 이렇게 중심을 분명히 세우고 인간다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가난한 빈민들, 그리고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모든 이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자 하는 진보적 인권활동가들에게까지 손을 뻗쳐서 새로운 세상을 향한 운동의 동력을 확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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