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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국가보안법 폐지냐? 개정이냐?

  2007 27대 모의국회 주제 선정 와중에 국가보안법에 관해서 쓴 발제인데

 

사실 1시간만에 발로 써서 그닥 질이 높지도 않고 편향적이고 감정적이기까지 한

 

단점이 있지만 너그럽게 봐주시길 ㅋㅋㅋ



 

  국가보안법 폐지냐, 개정이냐?


  국가보안법, 언제나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어왔던 이슈 중 하나이다. 국가보안법이 특정 인사나 단체에 적용될 때는 xxx사건 식으로 크게 보도되곤 한다. 언론-특히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기성보수언론(필자는 이들을 ‘진정한 보수’로 보지는 않지만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표현을 쓰기로 한다.)-은 우리나라에 큰일이라도 일어난 양 호들갑을 떨곤한다. 흔히 얘기하는 ‘색깔공세’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에 한 발자국 더 나가면 ‘북쪽과의 연계성’까지 주장하곤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이러한 공론장1)의 왜곡 때문에 국가보안법에 대한 논쟁이 공정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폐지에 찬성하는 쪽을 ‘국가전복세력’, ‘빨갱이’, ‘좌경용공분자’, ‘친북좌파세력’으로 치부해왔던 것이다. 이 규정을 통해 이성적인 논의는 없어지고 오직 감정싸움만이 존재하는 결과가 초래되게 된다. 현실정치에서의 공론장의 왜곡과 배제를 넘어서서, 순수하게 논리로만 대립하는 하나의 장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가보안법을 모의국회에서 다루는 의의가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필자의 경험 하나를 이야기해볼까 한다. 매년 5월 축제 시기에는 많은 과, 학부, 과/반, 동아리가 장터를 통해 돈을 벌고 친목을 도모한다. 하지만 학생들만이 장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학생회관 앞에서 장터를 하는 ‘민가협’과 ‘유가협’이 바로 그것이다.2) 멋모르고 속없던 1학년 시절에 그래도 이 단체들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기에, 둘 중에 ‘민가협’ 장터에 가서 뭔가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을까 생각하다가 ‘국가보안법 철폐가’3)를 불러드렸다. 예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반응이 무척이나 좋았다. 먹을 것을 권하는 아주머니가 계시는가 하면, 눈물을 흘리시는 아주머니도 계셨고, 한 번 더 부를 것을 요청하는 아주머니도 계셨다. 시간이 없어 인사만 드리고 나왔지만, 이 기억은 아직도 나에게 생생하다. 민가협 아주머니들, 할머니들은 이 국가보안법 철폐가를 수도없이 불러봤을 것이다. 옛날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은 대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고 기소되고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내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내가 뭘 안다고 함부로 그 노래를 불렀을까. 단순히 치기어린 장난은 아니었을까. 그런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이후에 계속 국가보안법에 대해 사유하게 되었다.

  6월 항쟁 20주년을 앞두고 도처에서 평가작업이 행해지고 있다. 이런 평도 나오고 저런 평도 나오고 있지만 모두가 공통적으로 입을 모아 외치는 것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아직 도 걸음마 단계라는 것이다. 그 근거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필자는 진정한 자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냉전의 잔재들이 아직도 사회 도처 곳곳에 남아있다. 이 때문에 진리 양심의 자유, 결사 표현의 자유, 정치 사상의 자유가 특히 침해받고 있다. 민주주의는 사회 구성원 모두를 포용해야 한다. 구성원 중 누군가를 특정한 이유로 배제한다면 그 구성원을 제외한 구성원 중 누군가가 또 배제당하는 악순환이 계속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근본적으로 침해하는 것이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반면 폐지 반대론자들이나 개정론자들은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질서를 해치는 세력은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보안법은 기술적으로도 그 존재이유를 더 이상 찾기 어렵다. 국내의 주요 형사법학회들은 이미 국가보안법의 기능에 대해 사망선고를 내렸다. 2004년 국가보안법 개폐 논쟁4)이 뜨겁게 타오를 당시, 국가보안법은 현재의 형법으로 대체가능하고 정 그것으로 부족하다면 형법으로 보완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는 폐지론에 더욱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또한 조국의 통일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에 의하면 북한은 휴전선 이북의 땅을 무단 점유하고 있는 ‘반국가 무장단체’이다. 실체가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으나,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른 남북관계 법률과도 대치된다. 이러한 법률 간의 모순은 현재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남북관계를 생각한다면 매우 비현실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민주민족애국인사들이 조국의 통일을 주장하다가 국가보안법에 의해 짓밟혀왔는지를 생각해보면 한숨만 나오게 된다. 정권은 ‘국익’을 이유로 이러한 목소리들을 무시해왔지만 무엇이 진정한 ‘국익’이었던가? 겉으로는 통일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온갖 반통일적 획책을 자행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국익’의 실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태의 결과로 이 땅의 자주, 민주, 통일을 향한 발걸음은 조금씩 뒤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이 옳냐, 그르냐는 폐쇄되고 억압된 소통의 장에서는 전혀 실현될 수가 없다. 그것은 바로 올바른 ‘공론장’에서 실현 가능하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두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국가보안법이 폐지가 되면 광화문에서 인공기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상황이 펼쳐지는 것은 차치해두고라도, 그런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동조할 국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하여 이기면 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주체사상’보다 못할 게 없으며 훨씬 우수하고 대한민국을 이만큼 발전시키고 반면에 북한은 낙후된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논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제약없이 논쟁이 펼쳐질 때,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층 더 성숙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말 자체를 꺼낼 수도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정권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고, 가두고, 죽이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현대사의 아픈 질곡들이 과거사 진상 규명을 통해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으며 이는 우리의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국가보안법이 사문화되어 이제는 그다지 논쟁할 필요도 없다고 하지만,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법이 언제 다시 우리의 사상과 행동을 옥죄고 제약할 지는 그 누구도 모를 일이다. 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이나 세력들을 완전히 용인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의 적용을 받아오던 사람이나 집단은 대부분 우리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마음에서 국가보안법상으로는 인정할 수 없는 행동을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다. 법률용어로 따지자면 ‘미필적 고의’쯤 되겠다. 물론 이에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현실 공론장의 내적 배제와 외적 왜곡을 극복하고 모의국회라는 하나의 이상적인 논의의 장을 통해 각자의 목소리와 입장들을 더욱 분명히 하고 어떻게 하면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문제들을 슬기롭게 풀 수 있을지 고민해보았으면 한다.

 

1) 독일의 사회철학자 하버마스의 개념으로, 간추려 말하면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참여해서 여론을 형성하는 마당’이라 할 수 있다.

2) 이들은 민주화운동 관련 가족들의 협의체로서,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3)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짓눌렀는가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노래로, 한번쯤 들어보길 권장한다. http://www.plsong.com의 노래검색란에 제목을 치면 나온다.

4) 노 대통령의 ‘국가보안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야한다’는 말로 시작된 여당의 국가보안법 폐지 시도는 그 동안 국가보안법으로 탄압을 받아오던 이들의 압도적인 지지-단식과 서명 등-로 탄력을 받고 여론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였지만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수구냉전세력과 기득권층의 집중 포화를 맞고 결국에는 야합을 하게 되어 참여정부의 개혁 좌초의 사실상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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