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 신화섭 씨의 특별한 ‘약손봉사’

                           [인터뷰] 타인과 세상을 향해 건네는 따뜻한 에너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나눌 것이 많은 사람은 좋겠다. IT 신화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 빌게이츠는 죽기 전에 자신이 가진 재산의 95%를 나누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은 “내 인생의 후반부는 주로 의미 있게 돈을 쓰는 일에 바칠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이런 인생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사람이란 없을 것이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많다. 그러니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당연하고도 지지받아 마땅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이란 인간이 생존을 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많다고 해서 다 행복한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고 해서 다 불행한 것은 아니다. 이웃끼리 오가는 따뜻한 인정 속에 꽃피는 공동체 의식이나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바치는 선을 향한 봉사행위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인간 본연의 실천행위이다.

‘약손봉사’라는 말을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이는 듣기만 해도 힐링과 치유의 개념이 물신 풍기는 말이라서 언제 들어도 몸과 마음에 보탬이 되는 유익한 말이다. 신화섭 그녀는 ‘약손봉사’자다. 오로지 기공으로 단련된 손놀림으로 몸이 아프고 육신이 힘든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위로와 치유를 건네는 사람이다. 신화섭씨를 만나서 그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본다.

신화섭 씨는 도봉구 ‘국학평화봉사단’ 팀장이다. 그녀가 하는 일은 우리역사 강의를 비롯해서 ‘약손봉사’와 ‘환경교육’ 등이 주를 이룬다. 역사 강의는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또는 교사모임이나 어른모임 등을 찾아다니면서 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이 수면위로 떠올라 우리 모두가 역사에 대한 자각이 새롭게 일기 시작하던 2002년경부터 시작됐다. 이에 비해서 ‘약손봉사’는 주로 문화센터와 노인정과 독거노인들을 찾아다니면서 하는 봉사인데 봉사경력 30여년이 다 되가는 지금까지 쉬지 않고 상시적으로 하고 있는 일에 속한다.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몸이 아파 단전호흡을 시작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지요. 제가 운동을 하게 된 동기는 제 아픈 몸을 고쳐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집이 가난하여 시집을 가면 좀 괜찮을까 싶어서 22살의 이른 나이에 시집을 갔지만 결혼생활은 더 심한 고생길이었어요.”신화섭 씨는 가난한 종가집의 맏며느리였던 것이다. 시집살이가 아무리 고달프다 하지만 그중 가장 큰 시집살이는 가난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식솔 많은 가난한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겪었을 고충이 여간 아니었던 모양이다. 둘째 딸을 낳고서 병을 얻어 몸져눕게 됐을 때도 손쉽게 병원 한 번 못 갔던 설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때 붙잡은 것이 국학기공이다. 허리가 아파 서있기도 힘든 처지에서 발걸음 떼어 간 곳이 구민회관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동사무소나 구민회관에서 하는 운동프로그램은 기껏해야 일주일에 2~3회가 전부다. 신화섭씨는 국학기공을 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몸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면서 이왕에 운동을 하려면 매일 같이 제대로 해야겠구나 싶었다. 그때부터 단학선원을 찾았고 크고 작은 집중수련회에 참석하며 본격적으로 몸 살리기를 시작했다.

특히 자아수련프로그램은 그녀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수련원에서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과정을 거치면서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훨훨 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무렵부터 “국학강사는 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다.”는 말에 봉사자로 나설 용기를 내게 됐다.

하긴 신화섭 씨에게 있어 봉사의 DNA는 오래 전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첫 봉사는 동네 마을문고부터 시작됐다. 아이들이 훌쩍 큰 뒤로는 봉사의 대상이 자연스럽게 성인으로 옮겼을 뿐이다.

‘내 몸 살린 건강비법’을 남들과 나누자. 그녀는 이 결심을 곧바로 실천으로 옮겼다. 그해 가을날 드디어 A4 용지에 전화번호와 함께 ‘매일아침 10시에 국학기공 봉사를 시작합니다.’라고 쓴 전단지 10장을 만들어서 등나무그늘이 있는 동네 일대에 붙였다. 봉사 전단지를 붙이고 돌아와 ‘내일 한 사람도 안 오면 어쩌나?’하는 걱정에 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약속장소에 갔을 때는 10명쯤 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며 괜한 기우를 떨칠 수가 있었다.

국학기공봉사자로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배꼽 밑 단전치기 30번 하겠습니다! 자 그럼 하나, 둘, 셋...서른! 단전치기 다 했지요? 다음은, 음 다음은(?)”

처음에는 떨려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순서가 생각나지 않아서 숨 들여 마시고 내쉬고를 스무 번은 더 했을 것이다. 동작의 순서를 챙겨가며 구령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 휴우~ 40여 분을 겨우 채우고 나서 생각해 보았다. “아하~ 머리서부터 시작해서 발끝으로 내려가면 순서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하는 깨달음이 번득 스쳐왔다. 한 번의 수업은 다음 시간을 위한 답을 제시해줬다. 요령과 지혜를 터득하는 재미도 좋고 국학기공봉사를 하며 사람들과 소통하는 시간도 보람을 더했다. 신화섭 씨의 삶은 그렇게 점차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신화섭씨의 구령에 맞춰 운동을 잘 따라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는 것이었다. 뒤를 돌아다보니 한 남자가 쓰러져서 있었다. 그걸 본 신화섭 씨는 남자에게 다가가서 손을 뻗었다. “공심空心으로 금소를 짚어 활공을 시도했지요.” 공심이란 잡념 없는 깨끗한 마음이고, 활공이란 십전혈(穴) 즉 손끝에 기를 모아 급소를 짚어가며 하는 경락마사지를 말한다. 신화섭씨의 급소를 찌르는 활공봉사가 서너 차례 반복되자 남자의 눈에서는 초점이 잡히고 입에서는 한숨이 터지기 시작했다.

국학기공은 단학선원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비해서 훨씬 대중화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국학기공과 ‘약손봉사자’로서 일로매진하는 그녀의 꾸준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륜과 실력을 겸비한 배테랑 봉사자의 위치에 서게 했다. 주민 센터에서의 강사 활동이나 구청과 학교 각종 복지기관에서 인기초청강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역사 강의에도 열심이시던데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역사 공부는 저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지요. 저의 봉사경력 30여년 중 후반부는 주로 역사 강의가 차지 하고 있어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귀를 쫑긋하고 있는 아이들만 생각하면 힘이 절로 솟구칩니다.”초등생들 수업은 주로 독도이야기, 국경일이야기 같이 주제를 정해서 이루어진다. 우리 역사는 일제탄압을 비롯해서 해방 이후엔 서구사상문화의 우세로 인해서 수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유신과 군부독재가 득세하던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부터 우리 것에 대한 자각이 일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서 단학계열이 선도수련의 대중화를 선도하고 또 역사복원을 위한 노력으로‘국학원’을 설립했다. 국학원은 그야말로 종교와 직업에 상관없이 기공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2002년에 설립한 역사연구 단체인데 이를 근간으로 전국의 3천여 군데에서 무료봉사로 첫 활동을 시작했다.

국학기공은 오늘 날 전국의 주민센터에서 생활체육의 몫을 담당하면서 몸 수련에 걸 맞는 이론적 토대로서 우리 민족 최고의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근간으로 신인합일(神人合一)을 비롯한 천지인(天地人)사상, 단군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과 제세위화와 같은 철학적인 토대를 복원하기에 열심이다.

 

-신화섭 씨의 강의현장과 약손봉사 시범

지난 주 일요일 본 기자는 종로구에 있는 국학원 교육장에서 중.고생들을 상대로 봉사교육을 하는 현장을 참관했다. “어르신들의 약봉지는 중요한 정보일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 개인적으로 털어놓은 이야기를 잘못 옮기지 말아야한다. 우리 눈에는 낡은 것으로 보이지만 어르신이 지니고 있는 소지품들은 사랑하는 아들딸을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의 보고일 수 있는 것이다.” 말벗봉사, 청소봉사, 약손봉사 등에서 필요한 실제요령도 뒤따랐다.

신화섭 씨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심기혈정(心氣血精)이란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마음이 가는 곳에 에너지가 흐르고 에너지가 흐르면 생명의 변화를 일으켜 물질의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뜻이 담긴 말이다. 그녀는 봉사를 하면서 전에는 누가 알아봐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렇지만 “국학(國學)을 알고 나서 달라졌다. 내 뿌리에 대해서 알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나니까 스스로 바뀐 것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렇다. 봉사는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을 향해 건네는 따뜻한 햇살이자 싱싱한 바람이다. 그리고 봉사란 그냥 홍익이다. 신화섭 그녀에게서는 따뜻한 에너지 바로 그 치유의 기(氣)가 흐른다.

 

*인터뷰어(박정례 )/ 기자, 르포작가, 칼럼니스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4/07/27 10:56 2014/07/27 10:56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8434pjr/trackback/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