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계안 전 의원,,,강한 한국 이끌 ‘CEO출신 정치인’-①

-현대자동차 경영할 때처럼 평택 발전에 헌신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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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선임기자 박정례= 이계안 전 의원이 저술한 책 두 권을 읽었다. ‘누가 칼레의 시민이 될 것인가?’와 얼마 전에 출간한 ‘잘사는 나라 따뜻한 사회’라는 책이다. 이계안 의원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내친김에 그에 관한 인터뷰 동영상도 찾아보았다.

3년 전부터 시작된 본 기자의 독서관, 정치인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지은 책을 우선적으로 읽어 보자.” 이런 호기심이 이계안 전 의원의 책을 읽는데 까지 이르렀다.

정치인들 중에는 뛰어난 사람이 많다. 그들은 다양한 출신 배경과 경력을 가진 사람들로서 피나는 노력과 경쟁을 치러낸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선거(選擧)라는 수단을 통해서 뽑힌 민의의 대변자들, 하지만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그들을 막연하게 동경할 일도 없고, 반면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경원시 할 일도 아니라 싶다.

때마침 이계안 전의원과 연결이 되었다. 이 기회를 살려서 이계안 전의원을 만나 우리와 교집합을 이루고 있는 부분은 무엇이고, 그가 구상하고 있는 장래계획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인터뷰는 평택역 일대에서 유권자를 만나고 있는 이 전 의원과 잠시 틈을 내 이뤄졌다.

 

-현대시절을 회상하는 모습에서 행복한 미소가 흐른다?

“대단했다. 내 개인의 성숙과 회사의 성장과도 맞물리는 시기였잖은가. 우리사회의 발전 속도와도 궤를 같이하는 흔치 않은 시기였다. 사회 초년생으로 첫발을 내딛은 회사가 국가발전과 함께 괄목상대한 성장을 거듭하며 세계 굴지의 대그룹으로 성장했다. 역동적인 시대였다. 두 번 다시 찾아올 수 없는 행운이었다.”

 

-최고위직까지 올라서 더 그런가 보다.

“열심히 하다 보니 뒤따라 온 결과였다. 크고 작은 목표를 이루며 커나가는 기쁨이 무엇보다 컸다. 나를 알아주는 벗 하나만 있어도 인생이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데, 말단사원으로서 그룹의 총수를 대면하게 된 일이며, 정직한 시선으로 바라본 문제점을 용기 있게 말한 것이 받아들여지고 또 그것이 큰 이익으로 돌아와 회사발전의 공헌으로 이어졌다.”

이 전의원이 현대중공업 서울사무소 재정부에 근무할 때 일이다. 일일 자금계획을 짜는 중에 미심쩍은 점이 발견됐다 분식회계가 의심되는 대목이었다. 혼자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다가 이를 상부에 보고했고, 당시의 상관이었던 이현태 전무는 이 대리를 대동하고 정주영 회장에게 달려가 ‘직보’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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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님의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마디로 파격이었다. 일개 대리였던 나에게 울산 본사를 ‘감사’할 수 있는 직권을 부여하셨던 거다.” 또래 학생들에 비해서 한문 실력이 출중한 것을 살려서 국문과나 역사과를 진학하려든 이계안 전의원에게 “가난한 촌놈은 문과를 가선 돈 못 번다.”며 상과대학을 권한 담임선생의 진로지도가 고마울 뿐이었다. 그 덕분에 경영학을 전공했고, 회계학을 수강한 특.장점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 전 의원은 이후로도 현대중공업에서 다년 간 재정파트에서 근무하며 자금운영에 관한 크고 작은 중책을 맡게 된다.

“1979년 5.25 조치로 일어난 고 정주영 회장의 아우인 고 정인영 회장과의 재판, 현대오일 뱅크와 관련해서는 사돈인 장흥선 회장과 경영권을 소재를 두고도 재판을 했다. 사업 확장 부분에서는 충남 대산 지역에 현대석유화학을 건설한 일과 1998년도의 기아자동차 인수문제 등 고 정주영 회장과 정말 많은 일을 경험하는 나날이었다.” 전문경영인으로서 눈 코 뜰새 없이 바쁘게 회사 발전에 올인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 후 현대카드 회장 때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유명한 광고 카피를 최종 채택하는 안목을 발휘하여 만년 하위권이던 현대카드가 “업계의 리더로 변신할 수 있었다.” 리더의 담대한 결정 하나가 회사발전에 얼마큼 중요한지 실증하는 예가 아닐 수 없다.

이 전의원에 대해서 소개가 좀 필요할 것 같다. 우리나라가 산업사회를 거쳐서 오늘날과 같은 경제발전을 이룬데는 이 전 의원과 같은 산업 전사들의 공로가 크다. 현대그룹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종합기획실의 최고운영책임자(Coo)를 거쳐서 현대자동차 최연소 대표이사 사장(CEO)과 현대캐피탈, 현대카드 대표이사 회장을 역임한다. 그는 이후 정계로 진출하여 서울 동작을에서 제 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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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감이 대단했겠다. 승승장구 아니었나?

“최연소 현대자동차의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른 일은 개인적으로도 전문기업인으로도 최고의 영광이었다. 크고 작은 일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이유도 컸지만 그 중심에는 늘 경제계의 큰 어른이신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님이 계셨다.” 그러면서 정주영 회장은 여느 기업가 하고는 급이 다른 경륜가이자 경세가임을 강조한다.

모든 샐러리맨의 꿈인 대기업 사장, 이를 40대에 이룬 이계안. 이것이 고 정주영 회장이 지상에서 단행한 마지막 인사였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은 “책상머리에는 답이 없어. 현장에 가봐!”하는 짧은 격려사를 남기고 떠났다. 최고의 선물을 받아 안은 자가 할 일은 자신을 영광의 자리로 이끌어준 이의 유지를 잘 받들어 실현시키는 일이었다. 이계안은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을 가르침 삼아 현대맨으로서의 자부심을 만개시키기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것이 걸출한 기업가요 경세가인 ‘정주영’ 전 회장을 기억하며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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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 회장을 경세가(警世家)라 칭했는데 어떤 사람에게 해당하는 호칭인가?

“단순한 사업가를 뛰어넘는 개념이다. 기업으로 일가를 이뤘을 뿐만 아니라 그로서 사회에 유익을 끼치는 사람을 말한다. 돈 벌어 나만 잘 먹고 잘 살자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다. 경제행위로서 만민과 더불어 살자는 의식이 투철한 분을 말한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겪은 직후에 현대그룹과 LG그룹 간에 ‘반도체 빅딜’이 성사되었다. 이 결과 LG반도체를 인수한 현대에서는 거액의 세금납부 의무를 이행해야 했다. 핵심경영인 7인 회의서 이문제가 주요 안건으로 올랐는데 한 참석자 중에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묘안을 짜냈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절묘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고 정주영 회장께서는 “세금 내지 않으면 나라는 어떻게 살림을 살아.”하면서 성실 납세를 지시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아, 이분이야말로 그냥 기업가가 아니구나!”하는 뭉클한 감동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소떼 1001마리를 몰고 분단의 3.8선을 넘는 정주영 회장의 세기적인 퍼포먼스, 그릇의 크기도, 창의적인 사고력도 남달랐음을 목도하며 현대그룹에서 이뤘던 모든 성과물들은 “정주영 회장이라는 큰 바다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되뇄다.

 

-현대맨으로서 인상에 남는 일 몇 가지만 더 든다면?

“세무감사를 받을 때 직원에게 주판을 내준 일이 있다.”며 웃었다. 작은 일이지만 감사를 받는 입장에서는 탈 없이 빨리 끝나야 좋은 건데 주판을 두드리며 깐깐하게 감사하라는 꼴이었으니 그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현장시찰을 할 때의 기억도 있다. 한 번은 자재를 쌓아놓은 무더기가 흩어져 도로 한가운데 까지 나와 있는 것을 보며 “이게 뭐라 생각하느냐?”고 다그쳐물었다. 담당자가 “돈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래 돈이다. 그런데 네 돈이면 이렇게 하겠어?”하고 일갈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철렁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물자를 한 결 같이 귀하게 여기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현장지도를 톡톡히 받는 순간이었다.

이 전의원 집은 무척 가난했다. 아버지는 사상적인 문제로 운신의 폭이 자유롭지 못한 터라 어머니가 행상을 다니며 살림을 꾸리는 가난한 집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던 초등학교 때의 어느 날 명심보감에 있는 소부재근(小富在勤) 대부재천(大富在天)이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게 됐다. 큰 부자는 하늘에서 내지만 작은 부자는 노력하면 된다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그때부터 몸에 밴 유무형의 자산이 되었다. 이습관대로 아침 6시 15분이면 회사 출근을 하곤 했다.

 

-회사 출근이 6시15분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일찍 일어나기를 실천했다. 명심보감을 배우면서 소부재근 대부재천이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게 된 날부터 한 결 같이.

 

-회사를 위해서 원 없이 열정을 바쳤다는 얘긴데...

“1976년도, 25살 때 현대중공업에 입사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좌제법이 시행돼서 공무원 시험도 못 보고, 연좌제에 걸린 사람들은 어디서 뽑아주는 곳도 없었다. 오직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만이 중앙정보부 같은 곳의 눈치 안 보고 품어줬던 거다.” 이계안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회사 일에 혼신을 다 바쳤다. 그 덕분에 동료들보다 빠르게 인정받으며 승진했고, 마침내 사장에 올랐던 거다. “나를 알아주신 분은 고 정주영회장이고, 나는 그분이 제공한 현대그룹이라는 바다에서 마음껏 노를 젓는 수석 항해사였던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현장에서 30년 되던 어느 날이었다. 이계안은 정치권의 러브클을 받는다. 이때 그의 선택은 보수 쪽이 아니었다. 그의 정치행보에 관해서는 2부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본다.

►이어 2부 인터뷰

 

*글쓴이/박정례 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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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6 14:44 2016/02/16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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