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대한민국사회봉사대상 시상 ’물적,공적,인적‘ 등 3개 부문
-’나눔, 다함께 그늘진 사회구석구석에 밝은 빛을‘ 주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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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대한민국사회봉사대상이 8일 오후 4시 하이서울유스호스텔에서 열렸다. 이 시상식은 ’나눔, 다함께 그늘진 사회 구석구석에 밝은 빛을!‘이라는 주제로 행정안전부 후원으로 1,180 단체가 소속된 한국사회봉사연합회(이사장 이진)가 주관하는 시상식이다.

지난 6월부터 9월까지 4개월간 후보자를 접수받은 결과 총 응모자는 2368건으로 이중 개인접수는 1327건이고 학교를 포함한 교육기관과 중앙부처를 포함한 공공기관과 민간기업 및 단체는 1041건이 접수됐다. 수상자 심사는 한국표준화연구소에서 계량화하여 엄격한 심사기준을 거쳐 상의 공정성을 높였다.

또한 대한민국사회봉사대상 제정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정치인과 현직 3급 이상 고위공무원단에 속한 공직자는 배제했고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1개 단체의 선정원칙 준수를 위해 철저한 계량심사를 진행한 결과 인적나눔 부문 5명, 물적나눔 부문 4명, 공적나눔 부문 4명 등 개인 9명과 4개 단체 총 13명의 수상자가 선정됐다.

수상자 면모는 광주·전남 지역에서는 지역전문가 김광동 박사, 전라남도 담양군청, 광주매일신문 남성숙 대표, 녹원에프엔디 문석주 대표, 세가디자인 김영조 대표가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밖에 물적나눔 수상자로는 포렌봉사단 박영식 단장,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이정현 청년위원장, 명보개발 안병렬 대표가 선정됐다. 이어 공적나눔 수상자는 아프리카 교육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단법인 월드샤프, 서울시 은평구 한규동 증산동장이다. 한편 인적나눔부문에는 김해지역 자원봉사센터인 김해야학자원봉사회, 자원봉사자조모임인 희망가위, 조선족장애인후원회 김현덕 이사장이 선정됐다.

현재 한국사회봉사연합회는 행정안전부 소관법인으로 공익적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중앙부처 등록기관 및 단체들의 연합단체로서 시민문화의 질적 향상과 청소년, 여성, 노약자, 장애, 다문화 등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나눔과 섬김’이라는 슬로건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헌신해오고 있다. 이에 사회 기여도가 뛰어난 단체 및 개인을 선정, 선발하여 매년 대한민국사회봉사대상을 시상하고 있다.

*박정례/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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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9 08:37 2017/11/09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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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

SKY채널 S&C에서 팝아티스트인 앤디 워홀에 대해서 봤다. 그는 체코 출신의 미국 미술가로서 출력물 제작자, 그리고 영화 제작자였다. 시각주의 예술 운동의 선구자로 팝 아트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앤디는 이민자 가족의 세째 아들로 펜실베니아주의 피츠버그에서 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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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육체 노동자로서 가정에 대단히 충실한 사람이었다. 일벌레라 할 정도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열심히 했던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성실하게 돌보는 신앙심 깊은 여성이었다. 손재주도 뛰어나고 글씨를 단정하게 잘 써서 여러가지 물건을 만들어 아는 집을 다니면서 이를 팔아 가게에 보탰는데 앤디 워홀은 어머니의 그런 재주를 물려받았나 보다.

신앙은 그들 가족을 성실한 사람으로 이끌어주는 훌륭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일요일이면 매주 10키로를 걸어서 교회에 다녔디고 하니까. 앤디 워홀이 특이한 것은 무도병이라는 병을 앓았는데 이는 근육이 춤추는 듯이 움직이는 병이라고 한다. 이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어머니 곁에서 돌봄을 받으며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어서 두 형들에 비해 내성적이었다고 한다. 형들처럼 건강해서 밖에 나가 축구나 야구를 하며 놀 처지가 못되니 자연 그런 평을 받았을 것 같다. 그대신 관찰자가 되어 사물과 현상에 대해서 인간의 변화하는 모습들을 관찰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정규직을 얻게 되자 교회 가까운 곳으로 집을 사서 이사한 후에도 밖으로 나가기 보다는 정적인 생활에서 유일한 낙은 영화를 보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며 간접경험의 세계에 빠지기도 했다. 앤디는 영화에서 본 셜리 템플의 펜이었고, 펜 레터를 보내어 답장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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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의 그림솜씨를 비범하게 본 부모는 용돈을 넉넉하게 마련하여 앤디를 학교에 보내고, 앤디는 카네기 멜론대학에 진학한다. 카네기 멜론대는 공산품 디자인을 하는 디자인과였다. 앤디는 졸업작품에서 최초의 스캔들을 일으킨다. ' 코파기는 내 마음이다'라는 작품으로 퇴학위기를 맞았다. 졸업작품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에 대해서 교수들로부터 거북감을 샀던 게다. 그래도 1943년 무사히 졸업한다.

그런 다음 21살에 최초로 모친과 떨어져 불안하지만 뉴욕으로 가서 삽화가로 취직하여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앤디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갑자기 돌연사를 한다. 공사현장에서 오염수에 중독된 것이 원인인 것 같다.


"보이는 것의 겉모습이 나의 내면이다." 할 정도로 작품에 대해서는 설명이니 뭐니 보다 보이는대로 느끼라고 말한다. 그는 어릴 적 주로 지병으로 인해 주로 집안에 틀어박혀 활동을 자제하는 생활을 보냈지만 반대급부로 영화광인 덕분에 영화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런 영향으로 셜리템플, 마릴린 먼로,엘비스 프레슬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말론 브란드 등의 유명 배우와 가수를 소재로 작픔을 제작하고, 작품은 유명세를 타며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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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용품으로는 콜라병 작품과 캠벨 스프 캔이 유명하다. 워홀은 자신에 대해 물었을 때, "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 주세요.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며 철저하게 '예술가의 내면'을 없애고 표면적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유명한 것에 애정을 숨기지 않고, 스타와 정치인이나 사고, 패션 제품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으며, 그것이 유명하고 또 내 자신도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또한 그 자신이 미국의 유명인이 되고 나서도 걸음을 흩트리지 않고, 유명인들을 모티브로 작품을 연출하고 제작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40대에 총 세발을 맞는다. 그 중 한발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가서 여러 장기에 구멍이 나 5시간 이상을 수술한 끝에 죽었다고 기사가 날 정도였으나 가까스로 회복하였다. 그러나 70년대 80년대는 사교계로부터 의뢰를 받아 초상화 실크스크린 제작 프린트를 다수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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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라이프지에 의해서 비틀즈와 함께 1960년대 가장 영향력이 있던 인물로 선정된다. 그의 어머니가 피츠버그에서 사망하면서 전 세계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1982년대~1986년 사이에는 재해와 신화를 모티므로 작품을 창조한다.

1987년 2월 21일 뉴욕 코넬의료센터에서 담낭 수술을 받은 다음 날인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으로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58세 때 일이다. 평생 독신이었다. 그의 시신은 피츠버그의 성 세례 요한 성당의 가톨릭 공동묘지에 묻혔다. 피츠버그 시내에서 아르게이니 강 건너 편 언덕에 노스 쇼어 지역에 앤디 워홀 미술관이 있다. 개인 예술과 전문미술관으로 미국 최대이다.

앞서 말한대로 작품에 비해서 그의 내면을 엿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생활을 드러내놓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아무도 모르게 노숙자들을 돌보는 봉사도 했으며 성당을 지날 때는 차를 멈추고 들어가서 기도를 하고 나왔다고 한다.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개인사에 대해서는 노출시키지 않고 오직 보이는 작품만 봐달라고 한 앤디 워홀이었다.

유년시절은 병으로 얼룩진 기간이었기에 또래들로부터 따돌림 받을 만큼 숫기도 없었지만 나중에는 성격이 바뀌었지만 사생활의 비밀스런 점 그대로였고, 항상 가면속에 진실을 감춘 채 관찰자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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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4 19:57 2017/11/04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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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에 솔직하기

먹는 것에 솔직하기

 

먹는 즐거움에 대해서 솔직해야겠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고백하지 못했던 비밀을 털어놓은 것처럼 홀가분한 심정이다. 왜 나는 먹는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일종의 금기 영역이나 되는 것처럼 가슴에 꽁꽁 싸매고 살았을까? 내 인생에서 하루도 못 굶고, 한 순간도 건너뛰지 못하는 ‘먹는 문제’에 대해서 진지한 소회 한 번 밝히지 못했을까.

인생에 자신 없어서 아닌가. 인생을 자신 있게 산 사람이라면 나처럼 못난 행동은 안 했을 것 같다. 기실 이런 심리를 살짝 들추고 보면 짙은 회색빛, 부정적인 시각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충분히 벌지 못하고 남이 알아주는 직책이나 직업을 지녀 여봐란 듯이 살지 못하고 있다는 자격지심일지도 모른다.

인생을 적극적으로 산 사람이라면 자기 입속으로 들어가는 ‘피가 되고 살이 될’ 음식에 대해서 자신만의 관점과 당당한 태도와 함께 진지한 자세를 지니고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중년 이후 먹는 문제에 대해서는 동생의 영향이 지대했던 것 같다. 딸내미가 비만이다 보니 동생은 그 애 앞에서 안 먹고 절식(絶食)하는 모습을 보이느라 밥상 앞에서는 늘 고성과 감시와 위선과 허세와 명령이 빈번했다 모욕적인 언사와 핀잔이 서슴없이 동원되었던 적이 많았다. 이에 대항하여 조카는 수긍하는 자세와는 달리 거부와 반항, 길길이 날뛰는 사나움을 보여왔다. 당연히 날선 기 싸움과 신경전이 벌어지곤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몇 년, 몇 십 개월이 지나다 보니 즐겁고 행복한 식사가, 좋은 것을 먹고 싶어하는 욕구가 큰 잘못이나 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자주 연출되었다.  처음엔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티끌처럼 작은 것들이 모아져 점점 부정적이고 어두운 그림자로 자릴 잡게 되었다. "금식을 하는 고독한 수행자가 못 되고 어찌 넌 돼지처럼 살찐 것이냐?'는 식의 질책과 감시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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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식과 먹거리를 대하는 지점에서 나의 문제는 여자라는 점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매끼니 식사를 준비해야 입으로 음식이 들어갈 수 있으니, 가녀린, 게으른 내 손에, 식구들의 밥이 달려있으니. 족쇄처럼 자유를 구속한다 인식되고, 혼자서만 책임을 짊어진다는 것이 불공평하다 생각하는 식이어서 반항하고 싶고 거부하고 싶고 내려놓고 싶은 짐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짓눌러 콤플렉스를 안겨주었다고 고백한다. 내가 했으면 얼마나 했으며 아이들을 거둬먹였으면 얼마나 잘 거둬먹였겠는가만, 잘한 것 없다는 자격지심이 평생을 따라다니는 거다. 어떤 땐 나처럼 몸약하고 일 하기 싫어하고 밥하기 싫어하고 반찬 만들기 싫어하는 사람은 다시 없다는 전제 하에서 “네 죄를 네가 알렸다!”식의 인정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존재했던 것이었다. 그 같은 나의 원인도 상당하고, 동생한테 영향 받아 깊숙히 물들어 있는 음식과 먹거리에 대한 전도된 의식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딴 부정적인 생각은 과감히 털어버리려고 한다. 한쪽으로 쫘악~ 밀치고 털어내어 저 아래 골짜기에 떨어뜨려 박살내려한다. 매 순간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으로 받아들이자. 똑같이 주어지는 음식을 앞에 둔 시간과 기회에 앞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생각을 최대치로 끌어내자.

그리 못한다면 행복한 인간이 못 될 거다. “헛배웠어! 지성적인 인간이 아니었구만!” 이렇게 말해주며 단순 솔직해질 거다. 그 시간들을 음미하면서 행복을 길어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

손수 조리해서 먹든, 음식점에 가서 먹든, 매끼마다 내 의지대로 자신 있게 메뉴를 선택하여 먹고 산다는 기회의 수중함과 멋진 생을 긍정하고, 인간에게나 맹수에게나 미물에게나 생명이 있는 것들이 먹는 모든 행위는 아주 고유한 생명의식에 해당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한다. 내 몸과 내 입에 들어가는 먹거리와 음식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매순간의 퍼퍼먼스이니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난 이제부터 ‘먹는 것에 솔직하리라.’ 다짐하면서 어제의 식사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 넘어가야겠다. 김포에서 두 끼를 먹었다. 점심으로 갈치조림, 저녁으로 부대찌개를, 그 중 가수 홍진영이 모델로 나오는 ‘박가네 부대찌개’에서 먹은 저녁밥이 맛있다고 자평한다.

여기서 느낀 점은 기존의 유명한 프랜차이즈라 해서 후발 메이커나 음식점 주인들이 대단하닥 쫄거나 납작 엎드릴 필요는 없다 싶다. 도전하여 새로운 메이커를 만드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되기 때문이다. 박가네 부대찌개, 나름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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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7 18:06 2017/10/2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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