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김대중평화센터 이희호 이사장 신년 합동하례회...각계 인사 쇄도
-남북평화교류.평창올림픽 성공과 이희호 여사의 건강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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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선임기자 박정례]= 2018년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합동하례회에 참석했다.

이날 합동하례회는 김성재 전 문화관광부장관의 사회로 열렸는데 참석한 많은 인사들은 신년인사를 통해서 남북평화교류와 평창올림픽의 성공과 이희호 여사의 건강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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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국립현충원 DJ묘소 참배 후 동교동으로 이동하여 개별적으로 방문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합동하례회 시간에 자리한 인사들만 한승헌 전 감사원장, 박승 전 한국은행총재,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 박영선, 이훈, 조배숙, 한승헌, 최경환, 천정배, 박준영, 김홍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 등 200여 명이 넘었다. 김홍걸 위원장은 내방객들에게 큰절을 올리는 것으로 인사말에 가름했고 한승헌 변호사를 선두로 새해 인사와 발언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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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변호사는 “저는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 김대중 대통령을 법정에서 변호했다. 시국강연장에도 함께 했다. 감방에서도 모셨다. 민주화투쟁의 현장에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분이 겪은 고난에 대해 얘기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하는 고생은 사서하는 고생이었다. 비켜갈 수도 피해갈 수도 있는 고난이었다. 사서하는 고생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역사를 바로 잡았다. 우리는 시대를 바로잡는데 양심과 용기를 말하지만 자신은 아니고 남에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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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우리가 김대중 대통령의 정신을 이어받고 추모한다며 양심과 용기를 말하는 것에 더해 우리도 사서 하는 고생과 세상이 요구하는 양심과 용기를 서슴지 말고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역사를 바로 잡고 세상에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며 “이 여사님께 세배를 드리며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과 겹쳐서 생각을 한다. 대통령 부인을 퍼스트레이디라고 하는데 역대 대통령 부인들이 다 퍼스트였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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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중요 발언자들은 박영선 의원(더불어민주당)이 125세까지 오래 건강하게 사시라는 말, 조배숙 의원(국민의당) 역시 건강장수를 비는 내용에 덧붙여 “올해는 개헌과 지방선거 등 정치현실이 복잡하다”며 이런 때 “김대중 대통령이 살아 계셨다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하셨을까 묻게 된다.”며 “그 정신을 이뤄드리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드린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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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박준영 국민의당 의원은 “새해 아침에 가슴 설레는 말을 들었다.”는 말로 서두를 열며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표단 파견할 용의가 있다. 이를 위해 북남 당국이 시급히 만날 수 있을 것과 동결상태에 있는 남북관계를 개선하여 올해를 사변적인 해로 빛내야 한다. 평창동계올림픽이 성과적으로 개최되길 진심으로 바란다.’는 뉴스를 뜨거운 마음으로 접했다”며 “북한이 핵 문제 등 논란이 있지만 김정은이 민족문제에 대해서만은 이어가려는 노력과 뜻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며 “6.15 정상회담을 끝내면서 김정일 위원장이 ‘대통령님은 영화지요’ ‘일생이 영화지요’라고 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민족평화와 평창올림픽이 남북한이 같이 노력해 잘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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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 의원 역시 “남북문제와 평창올림픽에 대해 희망이 생겼다”며 현충원에 가서 “김대중 대통령을 참배하며 방명록에 ‘지혜와 용기를 주십시오.’” 서명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이 어느 때인데 김대중 정신을 얘기하느냐. 세월이 바뀌고 상황이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 치고 잘 되는 거 못 봤다. 올바른 정치를 하는 사람 못 봤다. 근본 뿌리로서 김대중 정신을 붙들고 나아갈 때 승리할 수 있다.”고 항변한다.

김대중 정신은 개인이 아니다. 민주평화정신의 실크로드다.
호남은 지역이 아니다. 호남은 정신이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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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4 15:34 2018/01/04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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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도 절경과 ‘큰바위얼굴’

하의도 절경과 ‘큰바위얼굴’
<현지르포-⑥>전설이 현실이 된 전설적 삶을 살다간 김대중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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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선임기자 박정례]= 식당 문을 나서자 대절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30대 중반은 훨 넘게 보이는 여성 운전사가 보인다. 해안도로로 차를 모는 중에 떠오른 화제는 하의도의 발전에 관해서였다. “여기는 편의시설이 부족하다. 커피 한 잔 편히 마실 곳이 없다. 외지 사람들이 봐도 그렇지 않나요?” 분위기 좋은 커피숍이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운행 중에 같은 얘기를 두세 번 들었다. 딴은 그렇다. 주민이든 탐방객이든 차담을 나누며 잠시 숨을 고를 만한 공간이 있다면 좋을 것이라는 거. 

커피숍과 섬마을

스타벅스가 한국 땅에 상륙한지 18년이다. 이 후 대한민국은 커피공화국(?)이라 할 만큼 커피숍이 전국에 널렸다. 여기서 분화 발전하여 생겨난 토종 브랜드까지 합치면 더 그렇다. 분위기로 보나 인테리어 실력으로 보나 럭셔리하고 세련된 커피숍도 아주 많이 생겨나고 있는 현실이다. 견물생심이라고, 도회지 나가서 보고 들은 것이 있는 마당에 괜찮은 커피숍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할 거다.

우리가 탄 차는 개인 차였다. 하의도 형 개인택시라고나 할까. 섬사람들은 편의상 콜택시라 불렀다. 소개를 해준 사람은 여객터미널에서 만난 아저씨였다. 운전하시는 분이나 매표소 아저씨도 외지손님들도 기다리거나 대기 중에 잠시 들려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이 아쉬운 건 맞을 것 같았다.

보이지 않으나 실존하는 실제적 가치

도로변에 야자수가 보였다. 몇 년생 나무인지는 모르나 상태가 좋아보이진 않았다. 하의도에 웬 뜬금없는 야자수(?) 처음 심을 땐 좋은 뜻으로 심었을 테지만 어쨌든 성장이 부진해보였다. 야자수를 심을 예산으로 “다른 수종을 좀 더 고민해볼 것이지”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서행하는 차창 밖으로 보는 야자수가 을씨년스럽고 하의도의 분위기와 왠지 언밸런스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아서 혼자 해본 생각이다.  

문득 모 신문사에서 운영하는 섬 여행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 글이 오버랩 됐다. 섬 여행 전문가인 ‘섬학교’ 교장 선생인 강제윤 씨는 김대중 대통령 생가를 나와 염전 길을 지나 면소재지가 있는 곰실(웅곡)마을 쪽 종남리 마을 어귀에서 만난 할머니에게 질문을 했다.

“할머니, 김대중 대통령이 하의도에 무엇 좀 해주고 갔습니까?”“다른 디는 대통령 나면 동네가 번들번들한디 대중이는 암 것도 안해 줬어라우. 그라니 욕 안 하것소. 대통령 나면 머하냐고 다들 그라요.” 대통령을 배출했으니 대통령 빽 발로 고향 발전을 위해 힘 좀 써줬으면 하는, 할머니 입장에서 하는 말은 당연하기조차 하다. 그렇지만 다 지나간 일이다.

오늘 날 지방 발전을 위해서 제 3자로서 한 마디 한다면 이렇다. 어느 곳이나 개인 사업에 속하는 것과 정부가 나서야 할 공익사업을 구분해야 한다. 관이 주도해야 할 사업은 공익적이고 타당성을 확보한 것이어야 해서 사회 기반시설이나 공공시설 확충에 힘쓰는 일이다. 개인들은 수익사업을 위한 아이디어 창출과 노력을 해야 하고, 업종이 정해지면 사업성을 따져보고 계획서를 작성하여 제도를 통하여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범위와 한도 여부에 대해서 상담을 하는 등 길을 찾아나서야 한다. 공상하기 좋아하는 성격대로 생각의 촉수를 뻗어 보았다.

“내가 만약 하의도 주민이라면” 차 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나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는 사람을 물색한다. 이어 섬 안내와 해설에 흥미와 소질을 가진 사람, 요리나 식문화에 자질 있는 사람, 또 특산품 개발과 유통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 고장의 특화된 문화를 체험학습과 연계하여 강의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사람 등을 모은다. 그 다음 마을기업이나 협동조합을 결성하는 작업을 시작하면 어떨까. 내친 김에 신안군수가 행정지도에서 강조한 내용을 보건대. 군에서는 1억5천, 1억, 5천만원 등의 사업비를 내걸고 마을사업을 공모하는 좋은 제도가 있다. 신안군에서 하는 사업이니까 하의도 주민들도 자격이 있다.

덧붙이고 싶은 말은, 대통령이 재임시절에 해준 것은 없었다 치고 ‘하의도’라는 브랜드 하나는 확실하게 심어주고 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일행만 해도 ‘대통령의 섬’이기에 하의도를 찾은 것이다. 역사는 낭만적인 바보들이 만든다고 한다. 척박한 곳에서도 역사는 일어난다. 하의도에는 손으로는 잡을 수 없으나 실존하는 실제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큰바위얼굴’과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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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 도착했다. 해안도로에서 큰바위얼굴’를 바라보기에 가장 좋은 위치라 했다. 차를 몰고 간 해안도로는 대통령이 방문하기 얼마 전에 포장이 된 곳이라 한다. 좁은 비탈길을 돌아다닐 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목격되던 ‘큰바위얼굴’이 보다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전승으로만 떠돌던 이야기가 실제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잘 닦인 해안도로를 타고 들어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이 됐다. 대나무가 많아서 대섬이라고도 불리는 죽도의 끝자락, 거기에 ‘큰바위얼굴’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도를 배경으로 찍은 대통령 내외의 사진이 거치대에 설치돼 있었다. 사진 속의 대통령은 희로애락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동행한 이희호 여사만이 특유의 숱 많은 머리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단정하게 빗어 올린 모습이다. 그만하면 편안한 미소였다.

큰바위얼굴을 바라보면서 김대중 대통령이 이 여사님에 앞서 세상을 떠난 사실이 천행이라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사님이 거들지 않으면 목욕하는 것조차도 싫어했다는 대통령, 여사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수월했을 일이 여사님이 없는 세상에선 하늘만큼이나 땅만큼이나 힘든 일로 변질되었을 터이다. 식사, 목욕, 입성 갖추기, 외출, 손님 접대, 더구나 월.수.금 마다 하루 4~5시간 씩 하는 신장투석의 고통은 남의 손에 의해 수발을 받을 처지였다면 단 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어찌 견뎌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골이 핑 돈다.

해안도로에서 900m 쯤 떨어져 있는 바다 건너 ‘큰바위얼굴’은 높이로는 20~30m에 넓이는 바위한쪽 면적을 거의 다 차지하고 형성되어 있다.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의 나무는 자연스럽게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연상하게 해줬다. 대섬의 ‘큰바위얼굴은’ 대통령이 서거하던 해 4월 이상 현상이 일기 시작한다. DJ 방문 이후 눈썹 부위에 해당하는 소나무 3~4그루가 말라죽어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주민들은 불길한 전조(前兆)라 생각했고, 아니나 다를까 김대중 대통령은 그해 8월 18일 그 스스로 전설이 현실이 된 이승에서의 삶에 마지막 작별을 고한다.


억겁의 인연으로 대섬의 바람들은
큰 바위얼굴을 새기었다.

천만의 함성과 함께
평화의 이름으로 온 산하를 누비던 이,
큰 사람 김대중은
핍박받아 흐느낀 만큼 민중의 희망이 되어
기어코 ‘큰바위얼굴’의 전설이 되었다

이제 막 사랑을 머금은 하얀 눈발처럼
깊고 푸른 음성으로 뜨겁게 부른 노래들
태양새의 전설처럼 날개 짓 하며 역사의 전령이 되어
물러섬 없는 불멸의 전설이 되었다
 
이승의 끝자락에 서서야
영광과 소망의 세월 다 떨치고
단 한번 ‘큰바위얼굴’을 마주하며
DJ는 홀로 불멸의 혜원식을 치르고 갔다

눈에 밟히던 것 모두 떨치고
홀로 그렇게 떠났다.

 

이희호의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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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전과 서울사대를 거쳐 미국유학(스캐랏대 사회학 석사)을 다녀온 당대 최고 학벌의 신여성 이희호 여사는 YWCA 총무로 재직하며 대학에 출강하던 커리어 우먼이었다. 그런 여사가 선택한 DJ는 아들 둘을 두고 상처를 한 무일푼의 홀아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희호 여사는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는 야심에 찬 사람이니 내가 도우면 큰 지도자가 될 수 있겠다.”고 판단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DJ의 비전을 신앙으로 단련된 영적인 눈과 지성인의 혜안으로 읽어낸 결과였으리라. 친인척의 반대가 컸다. 친구들과 직장동료들의 반대 또한 거셌다. 가진 것 없는 김대중을 대신해서 두 사람이 나눠 낄 결혼반지도 여사가 마련한다.

종교도 달랐다. 여사는 기독교도요 DJ는 천주교를 신앙했다. 죽음의 순간까지 이희호 여사의 보살핌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은 복인(福人)이라 할 수 있다.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부분이다. 복된 삶이었다. 승리한 삶이었다. ‘큰바위얼굴’을 단순한 전설로만 여겼던, 자신을 상징하는 형상을 죽기 몇 달 전에야 바라보게 되다니! DJ는 전설이 현실이 된 전설적 삶을 살다간, ‘큰바위얼굴’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운구행렬이 국립현충원 장지로 떠나기 전 시청 앞 광장에 잠시 멈추던 때 이희호 여사가 단상에 올라 지지자들의 애도 속에서 남편의 유지와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이글을 마친다.

 

2009년 8월 23일 오후 국장기간에 시청 앞에서

제 남편이 병원에 입원한 기간에
여러분들이 사랑을 베풀어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남편은 일생을 통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오로지 인권과 남북평화 협력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권력이 회유와 압박이 있었지만 한 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평생 추구해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과
평화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원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이 남편의 유지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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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2 22:17 2018/01/02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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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동(花童)의 추억과 행동하는 양심
<현지르포-⑤>인간의 구원과 ‘하의도 음식 연포탕’

[브레이크뉴스 선임기자 박정례]= 아름다움이 지니고 있는 선(善) 기능은 대단한 것이다. 사람이든 땅이든 그 어떤 상징물이라도 말이다. 그런데 미추(美醜)에 관한 기준은 우아미, 인공미, 자연미, 골격미, 관능미 등 실로 다양한 관점에서 논할 수 있는 영역이다. 주관과 객관, 때로는 구상과 추상이 교차하고 시대와 사람에 따라서 선호하는 유형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러더라도 인간은 유사 이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속성에서 단 한 치도 비켜난 적이 없다. 그러면서 아름다움은 많은 부분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바로 인간의 삶과 인생에 기폭제가 되고 때로는 창조와 발전의 에너지원으로 작용한다.

연화부수(蓮花浮水)의 땅 하의도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은 미적인 측면이 강한 별칭을 갖고 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지형이 물위에 떠있는 연꽃 형상이라 해서 생긴 연화부수(蓮花浮水), 어감도 좋고 발음하기에도 꽤나 부드러운 이름이다. 그러니 어떤 분야에서든 아름다운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면 저마다의 가치 상승을 위해서라도 좋은 일임에 분명하다.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다. 그 어느 절집에 가더라도 쉽사리 마주할 수 있는 문양이다. 석가탄일에 내걸린 화려한 연등 행진이 아닐지라도 창살무늬며 단청 등 불교와 유관한 많은 용품에서 연꽃무늬는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이 중 제일의 압권은 대웅전에서 석가모니부처가 커다란 연꽃을 깔고 앉아 미소를 머금고 있는 불상이 아닌가 싶다.

다른 종교를 보자. 천주교에도 상징 꽃이 있다. 가톨릭에서는 미사를 드릴 때 제단을 온갖 예쁜 꽃으로 장식하는데 특히 예수의 어머니 성모마리아 축일에는 장미꽃을 온통 사용하여 전례를 진행한다. 성모를 아름답고 복된 여인이라 해서 장미의 계절 5월을 성모의 달로 정하고 장미꽃을 성모의 꽃으로 찬탄한다. 한편 예수의 양아버지인 성(聖) 요셉을 상징하는 꽃은 백합이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밴 마리아를 내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내로 맞아들여 성가족을 이룬 공로와 그의 고결한 인품을 찬양하는 뜻으로 백합을 성 요셉의 상징 꽃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연꽃은 어떤 이유에서 불가의 꽃으로 쓰이는 것일까. 연꽃은 늪이나 연못의 진흙 속에 몸을 담고 있지만 맑고 청정한 꽃을 피워내는 속성으로 인해 탐욕에 물들지 않고 고결함을 추구하는 나타낸다. 또 꽃이 피는 동시에 열매를 맺는 속성으로 인해 득도를 상징한다. 득도는 성불이다. 이어 연꽃은 세속을 초월한 경지를 함유한다. 그것은 곧 구도자의 고상한 기품과 덕목에 비유될 수 있어서이다.


여객터미널의 인상


하의도로 화제를 돌려본다. 목포에서 출발하는 쾌속선은 7시 10분에 뜰 예정이다. 모두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싸늘한 바람 속에서 바라본 항구의 모습은 오롯이 어둠과 불빛으로 대변됐다. 물결에 비친 가로등은 다채롭게 흔들리며 항구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 틈을 가르며 우린 발걸음을 서둘렀다.

여객터미널의 첫인상은 한가하기조차 했다. 그러나 개찰을 하고 들어서자 딴 세상이 열려 있었다. 군락을 이루고 있는 여객선들이 저마다 손짓을 하며 소리를 높이고, 이를 좇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분주했다. 항구는 그렇게 아침부터 바쁜 일과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 1025개의 섬 중 72(76개라는 설도 있음)개의 유인도와 무인도 935개소로 이뤄진 신안군, 각 행선지로 떠나는 배들이 너나없이 출발을 다투고 있는 모습이었다. 새삼스럽게 목포는 ‘섬들의 수도’요 신안은 ‘섬들의 고향’이라는 지역민들의 표현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목포를 출발한 쾌속선 엔젤호는 1시간 만에 우리를 목적지로 데려다줬다.

대통령의 섬 하의도 오전 8시, 일행은 곧장 후광리 97번지로 달려갔다. 방문 목적에 부합하는 최우선 목적지였다. 신안이 초행길인 우리 두 사람이나 신안군 출신인 문 선생이나 모두 하의도는 처음이다. 우리가 미리 합의를 본 일정은 대통령의 생가 방문 외에는 미리 정해진 것은 없었다. 나머지 일정은 덤으로, 홀가분하게 보내도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우린 ‘하의도 농민기념관’에 이어 ‘하의초등학교’ 등을 찾았다.

화동(花童)의 추억

하의농민기념관을 떠나 하의초등학교에 다다랐을 때다. 문 선생은 어렸을 적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서 자라도를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에게 꽃다발’을 건넨 기억을 말해줬다. 67년 제 7대 국회의원 선거였던가 보다.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을 떨어뜨리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공화당 후보를 뽑아만 준다면 목포가 뒤집어질 만큼 발전시켜주겠다는 공약을 퍼부었다. 떠오르는 젊은 정치인 김대중 한 사람을 누르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내각을 통째로 옮겨와 목포에서 내각회의까지 주제하며 올인 한 박정희였다. 김대중으로서는 져서는 안 될,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선거였다.

김 대통령에게 꽃다발을 건넨 당시의 꼬마는 자라서 그의 지지자가 됐다. 그가 문철권 씨다. “우리 동네는 그 당시 접안시설이 돼 있지 않았다. 타고 들어온 배를 놔두고 종선으로 갈아타고 들어와야 했다.” 작은 배로 갈아타고 들어오던 김 대통령을 기다렸다가 달려가 꽃다발을 전한 장면이 슬로비디오처럼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다섯 살 꼬마는 자라 지금 50대 후반의 어른이 됐다.

그 기억들은 어디서 무엇이 되었다가 이제야 되살아난 것일까. 어린 화동(花童)의 가슴에 안겨있던 꽃무더기들이 한 토막의 이야기로 피어나고 있다.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어린 시절의 추억담에서 파생된 기억의 파편을 줍기에 한창이다. 김대중에 대한 촌노의 발심(發心)은 손자의 가슴에 꽃다발을 품어 전하도록 하였다. 지금처럼 화원이나 꽃집이 흔한 세상도 아니던 시절, 총 가구 수라야 200여 세대 밖에 안 되던 작은 섬 자라도는 더구나 그랬다. 하지만 노인은 기어코 김대중을 꽃으로 맞았다.

그 모든 것이 합을 이뤄 선을 이루는 결과를 냈다. 촌노의 발심과 수많은 ‘행동하는 양심’들이 모여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5번의 죽을 고비와 6년간의 감옥살이와 55번의 가택연금과 10년간의 망명생활 중에도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꿈을 포기하지 않은 김대중도 대단하지만 그를 저버리지 않은 지지자들도 장하다. 그는 견뎠고 지지자들은 그가 부활할 수 있도록 수혈을 계속했다. 해해연년 피고지고피고지고 또 피고 지는 꽃처럼 그의 꿈이 자신들의 염원이 다시 피어나도록 50년 가까이 그 일을 계속했다.

문 선생님의 할아버지께서는 ‘행동하는 양심’ 족이었나 보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은 말을 했다. 문 선생은 “아~ 내가 그 일 때문에 대통령님 지지가 돼 부렀소.”하고 대답한다.  

연포탕과 고향의 맛

식당에 앉았다. 비교적 이른 점심이었다. 메뉴를 고르며 든 생각, 여러 끼니를 비싼 생선 요리만 먹었다싶었다. 한 끼쯤 된장찌개도 괜찮겠지 하고 있는데 “하의도에 왔으면 연포탕 정도는 먹고 가야 하지 않나요?”하는 문 선생의 말이 들려왔다. 연포탕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문 선생의 기세가 좌중을 압도하는 것 같았다. “아 예~ 전 좋습니다.” 베로니카 씨가 재빨리 응수를 했다. “좋은 거면 저도 뭐 괜찮습니다.” 재청하듯이 나도 맞장구를 쳤다. 점심 메뉴는 문 선생의 주장대로 결정되었다.

낙지 대가리를 연포라 했다. 하지만 연포만으로는 조리를 하지 않는단다. 낙지를 주재료로 해서 맑은 국물이 있게 하는 낙지요리를 연포탕이라고 했다. 음식이 나오자 “바로 이 맛입니다. 아~ 개운하다.” 문 선생이 국물을 떠먹으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모처럼 찾은 하의도인데다 원하는 음식까지 앞에 놓고 보니 기분 나이스인가 봤다. 기념으로 사진 한 장을 찍겠다고 말한다.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보니 폼깨나 잡는다. 여기서 살짝 폭로(?) 할 게 있다. 문 선생은 셀카광이다. 수시로 핸드폰을 꺼내들고 셀카를 찍는 모습이 아주아주 빈번하다.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사진 찍기를 엔간히도 권해 싼다.

들어가자 기분이 좋아졌다. 목포로 나갈 때는 좌석식 쾌속선이 아닌 온돌식 완행을 이용하기로 했다. 문 선생이 “지금은 아침밥 못 먹은 것을 보충하는 시간이다. 점심은 아직 먹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 의미는 뭘까. 조금 있으니 “하의도 바다 선상에서 신나게 먹을 라면이다. ㅎㅎ”라고 하기에 “라면요?” 되물으면서 원 없이 웃었다. 연포탕 값은 문 선생이 냈다. 1인 당 1만5천, 세 사람 분 4만5천 원이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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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7 23:31 2017/12/27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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