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의도 절경과 ‘큰바위얼굴’

하의도 절경과 ‘큰바위얼굴’
<현지르포-⑥>전설이 현실이 된 전설적 삶을 살다간 김대중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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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선임기자 박정례]= 식당 문을 나서자 대절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30대 중반은 훨 넘게 보이는 여성 운전사가 보인다. 해안도로로 차를 모는 중에 떠오른 화제는 하의도의 발전에 관해서였다. “여기는 편의시설이 부족하다. 커피 한 잔 편히 마실 곳이 없다. 외지 사람들이 봐도 그렇지 않나요?” 분위기 좋은 커피숍이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운행 중에 같은 얘기를 두세 번 들었다. 딴은 그렇다. 주민이든 탐방객이든 차담을 나누며 잠시 숨을 고를 만한 공간이 있다면 좋을 것이라는 거. 

커피숍과 섬마을

스타벅스가 한국 땅에 상륙한지 18년이다. 이 후 대한민국은 커피공화국(?)이라 할 만큼 커피숍이 전국에 널렸다. 여기서 분화 발전하여 생겨난 토종 브랜드까지 합치면 더 그렇다. 분위기로 보나 인테리어 실력으로 보나 럭셔리하고 세련된 커피숍도 아주 많이 생겨나고 있는 현실이다. 견물생심이라고, 도회지 나가서 보고 들은 것이 있는 마당에 괜찮은 커피숍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할 거다.

우리가 탄 차는 개인 차였다. 하의도 형 개인택시라고나 할까. 섬사람들은 편의상 콜택시라 불렀다. 소개를 해준 사람은 여객터미널에서 만난 아저씨였다. 운전하시는 분이나 매표소 아저씨도 외지손님들도 기다리거나 대기 중에 잠시 들려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이 아쉬운 건 맞을 것 같았다.

보이지 않으나 실존하는 실제적 가치

도로변에 야자수가 보였다. 몇 년생 나무인지는 모르나 상태가 좋아보이진 않았다. 하의도에 웬 뜬금없는 야자수(?) 처음 심을 땐 좋은 뜻으로 심었을 테지만 어쨌든 성장이 부진해보였다. 야자수를 심을 예산으로 “다른 수종을 좀 더 고민해볼 것이지”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서행하는 차창 밖으로 보는 야자수가 을씨년스럽고 하의도의 분위기와 왠지 언밸런스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아서 혼자 해본 생각이다.  

문득 모 신문사에서 운영하는 섬 여행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 글이 오버랩 됐다. 섬 여행 전문가인 ‘섬학교’ 교장 선생인 강제윤 씨는 김대중 대통령 생가를 나와 염전 길을 지나 면소재지가 있는 곰실(웅곡)마을 쪽 종남리 마을 어귀에서 만난 할머니에게 질문을 했다.

“할머니, 김대중 대통령이 하의도에 무엇 좀 해주고 갔습니까?”“다른 디는 대통령 나면 동네가 번들번들한디 대중이는 암 것도 안해 줬어라우. 그라니 욕 안 하것소. 대통령 나면 머하냐고 다들 그라요.” 대통령을 배출했으니 대통령 빽 발로 고향 발전을 위해 힘 좀 써줬으면 하는, 할머니 입장에서 하는 말은 당연하기조차 하다. 그렇지만 다 지나간 일이다.

오늘 날 지방 발전을 위해서 제 3자로서 한 마디 한다면 이렇다. 어느 곳이나 개인 사업에 속하는 것과 정부가 나서야 할 공익사업을 구분해야 한다. 관이 주도해야 할 사업은 공익적이고 타당성을 확보한 것이어야 해서 사회 기반시설이나 공공시설 확충에 힘쓰는 일이다. 개인들은 수익사업을 위한 아이디어 창출과 노력을 해야 하고, 업종이 정해지면 사업성을 따져보고 계획서를 작성하여 제도를 통하여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범위와 한도 여부에 대해서 상담을 하는 등 길을 찾아나서야 한다. 공상하기 좋아하는 성격대로 생각의 촉수를 뻗어 보았다.

“내가 만약 하의도 주민이라면” 차 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나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는 사람을 물색한다. 이어 섬 안내와 해설에 흥미와 소질을 가진 사람, 요리나 식문화에 자질 있는 사람, 또 특산품 개발과 유통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 고장의 특화된 문화를 체험학습과 연계하여 강의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사람 등을 모은다. 그 다음 마을기업이나 협동조합을 결성하는 작업을 시작하면 어떨까. 내친 김에 신안군수가 행정지도에서 강조한 내용을 보건대. 군에서는 1억5천, 1억, 5천만원 등의 사업비를 내걸고 마을사업을 공모하는 좋은 제도가 있다. 신안군에서 하는 사업이니까 하의도 주민들도 자격이 있다.

덧붙이고 싶은 말은, 대통령이 재임시절에 해준 것은 없었다 치고 ‘하의도’라는 브랜드 하나는 확실하게 심어주고 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일행만 해도 ‘대통령의 섬’이기에 하의도를 찾은 것이다. 역사는 낭만적인 바보들이 만든다고 한다. 척박한 곳에서도 역사는 일어난다. 하의도에는 손으로는 잡을 수 없으나 실존하는 실제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큰바위얼굴’과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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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 도착했다. 해안도로에서 큰바위얼굴’를 바라보기에 가장 좋은 위치라 했다. 차를 몰고 간 해안도로는 대통령이 방문하기 얼마 전에 포장이 된 곳이라 한다. 좁은 비탈길을 돌아다닐 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목격되던 ‘큰바위얼굴’이 보다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전승으로만 떠돌던 이야기가 실제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잘 닦인 해안도로를 타고 들어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이 됐다. 대나무가 많아서 대섬이라고도 불리는 죽도의 끝자락, 거기에 ‘큰바위얼굴’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도를 배경으로 찍은 대통령 내외의 사진이 거치대에 설치돼 있었다. 사진 속의 대통령은 희로애락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동행한 이희호 여사만이 특유의 숱 많은 머리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단정하게 빗어 올린 모습이다. 그만하면 편안한 미소였다.

큰바위얼굴을 바라보면서 김대중 대통령이 이 여사님에 앞서 세상을 떠난 사실이 천행이라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사님이 거들지 않으면 목욕하는 것조차도 싫어했다는 대통령, 여사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수월했을 일이 여사님이 없는 세상에선 하늘만큼이나 땅만큼이나 힘든 일로 변질되었을 터이다. 식사, 목욕, 입성 갖추기, 외출, 손님 접대, 더구나 월.수.금 마다 하루 4~5시간 씩 하는 신장투석의 고통은 남의 손에 의해 수발을 받을 처지였다면 단 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어찌 견뎌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골이 핑 돈다.

해안도로에서 900m 쯤 떨어져 있는 바다 건너 ‘큰바위얼굴’은 높이로는 20~30m에 넓이는 바위한쪽 면적을 거의 다 차지하고 형성되어 있다.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의 나무는 자연스럽게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연상하게 해줬다. 대섬의 ‘큰바위얼굴은’ 대통령이 서거하던 해 4월 이상 현상이 일기 시작한다. DJ 방문 이후 눈썹 부위에 해당하는 소나무 3~4그루가 말라죽어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주민들은 불길한 전조(前兆)라 생각했고, 아니나 다를까 김대중 대통령은 그해 8월 18일 그 스스로 전설이 현실이 된 이승에서의 삶에 마지막 작별을 고한다.


억겁의 인연으로 대섬의 바람들은
큰 바위얼굴을 새기었다.

천만의 함성과 함께
평화의 이름으로 온 산하를 누비던 이,
큰 사람 김대중은
핍박받아 흐느낀 만큼 민중의 희망이 되어
기어코 ‘큰바위얼굴’의 전설이 되었다

이제 막 사랑을 머금은 하얀 눈발처럼
깊고 푸른 음성으로 뜨겁게 부른 노래들
태양새의 전설처럼 날개 짓 하며 역사의 전령이 되어
물러섬 없는 불멸의 전설이 되었다
 
이승의 끝자락에 서서야
영광과 소망의 세월 다 떨치고
단 한번 ‘큰바위얼굴’을 마주하며
DJ는 홀로 불멸의 혜원식을 치르고 갔다

눈에 밟히던 것 모두 떨치고
홀로 그렇게 떠났다.

 

이희호의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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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전과 서울사대를 거쳐 미국유학(스캐랏대 사회학 석사)을 다녀온 당대 최고 학벌의 신여성 이희호 여사는 YWCA 총무로 재직하며 대학에 출강하던 커리어 우먼이었다. 그런 여사가 선택한 DJ는 아들 둘을 두고 상처를 한 무일푼의 홀아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희호 여사는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는 야심에 찬 사람이니 내가 도우면 큰 지도자가 될 수 있겠다.”고 판단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DJ의 비전을 신앙으로 단련된 영적인 눈과 지성인의 혜안으로 읽어낸 결과였으리라. 친인척의 반대가 컸다. 친구들과 직장동료들의 반대 또한 거셌다. 가진 것 없는 김대중을 대신해서 두 사람이 나눠 낄 결혼반지도 여사가 마련한다.

종교도 달랐다. 여사는 기독교도요 DJ는 천주교를 신앙했다. 죽음의 순간까지 이희호 여사의 보살핌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은 복인(福人)이라 할 수 있다.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부분이다. 복된 삶이었다. 승리한 삶이었다. ‘큰바위얼굴’을 단순한 전설로만 여겼던, 자신을 상징하는 형상을 죽기 몇 달 전에야 바라보게 되다니! DJ는 전설이 현실이 된 전설적 삶을 살다간, ‘큰바위얼굴’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운구행렬이 국립현충원 장지로 떠나기 전 시청 앞 광장에 잠시 멈추던 때 이희호 여사가 단상에 올라 지지자들의 애도 속에서 남편의 유지와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이글을 마친다.

 

2009년 8월 23일 오후 국장기간에 시청 앞에서

제 남편이 병원에 입원한 기간에
여러분들이 사랑을 베풀어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남편은 일생을 통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오로지 인권과 남북평화 협력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권력이 회유와 압박이 있었지만 한 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평생 추구해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과
평화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원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이 남편의 유지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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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2 22:17 2018/01/02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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