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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민주주의 증진, ‘친미 정권’ 수립과 ‘전쟁 위기’의 확산(2005.03.09.)

‘미국식’ 민주주의 증진, ‘친미 정권’ 수립과 ‘전쟁 위기’의 확산

 

지난 3월 3일, 미국의회는 ‘민주주의 증진법’을 상하원에 동시에 상정했다.

‘민주주의 증진법’은 전 세계 국가들을 ‘완전 민주적’, ‘부분 민주적’, ‘비민주적 국가’ 등 3등급으로 분류하고, 그 중 ‘부분 민주적’, ‘비민주적’ 국가들에 대해 “군사력 이외의 모든 역량을 쏟아 민주화”시키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안은 부시 정권 2기의 ‘전 세계 자유 및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외교 목표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소위 ‘폭정 종식과 자유 확산’ 독트린을 구체화한 첫 법안이다.

 

우리가 ‘민주주의’, ‘자유’라는 말 그 자체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실제로 행해왔던 역사적인 사실들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다면, ‘민주주의 증진법’이나 ‘폭정 종식과 자유 확산’ 독트린이 현실에서는 미국의 세계적인 패권전략을 구체화하기 위해 ‘친미정부’를 세워나가겠다는 것이라는 점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군사력 이외의 모든 역량을 쏟겠다”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미 정권을 붕괴시키고 친미 정권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이라크의 예에서 보듯 필요하면 언제든지 군사력도 동원할 것이다.

여기서 ‘민주’란 그 형식에서 ‘선거 절차’에 따른다는 것이고, 내용적으로는 ‘친미 정권’ 수립이다.

그리고 그 현실적인 귀결은 각국에서의 ‘실질적 민주주의의 후퇴’와 ‘군비 경쟁과 전쟁 위기의 확산’이다.

 

‘민주주의 증진법’에는 명시는 안됐지만 ‘북한’도 최악의 반민주국가로 규정될 것이라고 한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북한 인권법안’의 통과에 뒤이어 대북 압박과 봉쇄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거세지는 압박과 봉쇄에 대해 북한은 지난 2월 10일 ‘6자회담 불참’과 ‘핵무기 보유 선언’이라는 벼랑끝 전술로 맞서고 있다.

 

북한의 이러한 선언으로 한반도를 둘러 싼 동북아지역의 정치군사적 긴장은 더욱 격화될 것이다.

미국은 중국을 잠재적인 적대국으로 판단하여 미-일 군사동맹체제를 강화하고 있고, 중국은 개방 개혁 이후에 점증하는 사회적 갈등과 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족주의적 패권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은 미-일군사동맹체제의 강화에 바탕하여 국내적으로는 보수 우경화를 국제적으로는 군국주의화를 더욱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다.

동북아지역 패권을 둘러 싼 이러한 정치군사적 긴장과 대립의 정점에 ‘북핵 문제’가 놓여 있고, 그 핵심적인 원인은 ‘민주주의 증진’이라는 명분으로 추진되는 미국의 세계적인 패권전략이다.

 

동북아지역에서의 이러한 정치군사적 긴장과 대립이 더욱 격화될수록, 각 국에서는 정치사회적 우경화, 민족주의적 패권 전략의 강화, 민주주의의 후퇴, 그리고 군비경쟁과 그에 따른 사회복지의 축소 등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 곳에서의 군사적 충돌이 동북아지역 전체의 전쟁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민주주의의 증진’이라는 명분으로 추진되는 ‘미국 패권주의의 확산’이 ‘실질적 민주주의의 후퇴’와 ‘전쟁 위기’의 확산으로 귀결되는 이 모순된 현실에 대해 우리 노동자계급도 두 눈을 부릅뜨고 주목해야 한다.

사태의 진전은 어느 한 순간 노동자계급 전체의 운명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현장으로부터 ‘반전평화’, ‘반제반세계화’ 투쟁의 주체로 서 나가야 할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시점이다.

 

2005.03.09.

[현자노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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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비판’과 ‘계급적 선택’(2004.07.07.)

‘도덕적 비판’과 ‘계급적 선택’

 

‘도덕적 비판’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2004년 임금협상을 위한 파업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6월 말,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은 “고소득 노동자의 임금인상 자제를 통해 노노간 임금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비정규직 해결방안(?)을 제출했다.

당연히 시의적절하게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해 줬다.

지난 6월 10일에는, 144명의 사회원로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동결과 삭감을 요구”하면서, “대기업 노조의 이기심”에 대해 “도덕적인 비판”을 가했다.

5월말 청와대 노사정 간담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대기업 노조들이 중소기업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현대차 노조를 질타(?)한 지 얼마 안되서의 일이다.

“노동계의 정규직 지상주의는 노동시장 왜곡과 고용시장 악화를 초래할 뿐”이고, “정규직 근로자의 근로조건 양보와 경영계의 노력을 통해 비정규직의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현실적인 해결책 마련”에 노동계가 동참해야 할 것이라고 경제5단체가 강변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두 달 전인 5월 초의 일이다.

 

이로서 지난 몇 달에 걸쳐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도덕적 해법(?)’은 완성됐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자제와 노동유연화의 전면화’가 그것이다.

정부와 재계와 보수언론이 주도하고, 사회원로와 노총의 지도부가 들러리를 서면서, ‘사회적 합의’는 이루어지고 있다.

비정규직 해결의 공은 이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넘겨졌다.

정규직 이기주의를 넘어 선 ‘도덕적 선택’의 문제로 됐다.

 

‘계급적 선택’

 

도덕적 선택을 강요하는 거대한 공세 앞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도덕적으로” 혼란스러워 하고 동요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공헌 기금’을 제안하기도 하고, 비정규직을 대리한 임금협상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혼란과 동요는 위로부터의 위선적인 ‘도덕적 비판’과 아래로부터 비정규직의 ‘계급적 비판’이라는 이중의 공세에 더욱 빠지게 할 뿐이다.

이런 혼란과 동요가 지속될수록,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의 문제의 진정한 원인이 바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 그 자체라는 점은 은폐된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임금’이 상대적인 고임금일 뿐이고, 사실은 잔업특근 등 장시간 노동과 근골격계로 대표되는 노동강도 강화의 결과라는 점은 가려진다.

 

‘도덕적 비판’ 앞에서 동요할수록 계급적 현실은 은폐된다.

계급적 현실이 은폐될수록, 노노간 대립이 더욱 부각되고, 정규직 노동자는 더욱 고립되며, 비정규직 문제해결은 지연된다.

정규직 노동자는 이러한 계급적 현실을 은폐하는 사슬을 끊어야 한다.

그 출발은 먼저 잔업특근과 노동강도 강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실노동시간을 단축하여 ‘법정노동시간’으로도 ‘생활임금’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출발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일상적으로 연대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존재가 정규직 고용안정의 안전판”이라는, 강요된 현실을 계급적 단결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실천이 지금 시기 민주노조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다.

 

2004.07.07.

[현자노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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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 ‘유연화’, ‘개혁’, 그리고 ‘사회적 합의’(2004.06.07.)

‘안정’, ‘유연화’, ‘개혁’, 그리고 ‘사회적 합의’

 

‘임금안정’

 

‘안정’이란 말이 있다.

그 자체로는 좋은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이 단어를 ‘임금’이란 말과 연결하면, 즉 ‘임금 안정’은 곧 임금을 동결하거나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뜻이 된다.

그래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일단 ‘안정’을 해치는 것이 된다.

지난 2월 노사정위원회가 추진했던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에서는 “향후 경영계가 인위적인 고용조정을 최대한 자제”하는 대신 노동계는 “2년간 임금안정에 협력”하기로 했다.

이 표현을 사실 그대로 “임금을 동결”하거나 “임금인상을 자제하기로 했다”고 바꿔 보자.

합의의 결과로 생길 대중적 분노를 미리 거세해 버린 느낌이 들지 않는가?

 

‘노동유연화’

 

‘노동 유연화’라는 말도 지난 10여 년간 익숙하게 듣던 말이다.

1990년대 초반에 소위 ‘신경영전략’이 일반화되면서 알려진 용어다.

‘유연화’! 얼마나 부드러운 표현인가?

그러나 이 부드러운 표현도 ‘노동’과 결합하면 으시으시해 진다.

‘노동유연화’!, 곧 기업가가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노동자를 해고시킬 수 있고, 필요한 시간에 언제든지 일을 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노동시장의 유연화’라고 고상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만약 이러한 ‘유연화’에 노동자들이 저항한다면, 그 노동자들은 해고로 인한 삶의 고통에 항변하기도 전에, 노동시장을 ‘경직화’시켜 국가의 경제발전과 회사의 발전을 저해하는 자로 찍히게 된다.

 

‘노사관계 개혁’

 

‘개혁’이라는 말도 그렇다.

현실을 바꾼다는 뜻이다.

만약 그 현실이 부당하다면, 그래서 지켜야만 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그 현실을 ‘개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개혁’이 ‘노사관계 개혁’으로 되면, 바꿔야 할 내용과 대상이 전혀 엉뚱해져 버린다.

노무현 정권이 ‘선진노사관계 로드맵(단계별 일정표)’이라는 것을 만들어 노사관계를 선진적 수준 국제적 수준으로 개혁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개혁’한다는 것이 다름 아니라, 정리해고와 변형근로, 그리고 파견근로를 기업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법적으로 확실하게 보장하겠다는 내용이다.

당연히 개혁되어야 할 대상은 이러한 정리해고나 파견근로에 저항하는 노동자나 민주노조가 되고, 이들은 ‘반개혁 세력’이 된다.

게다가 IMF 외환위기 이후 전면화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로 양산된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고용 경직성’ 때문이고, 따라서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해 정규직이 임금인상을 자제해야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계급적 단결과 연대를 하지 못한 결과, 이러한 여론 공세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합의’

 

노무현 정권 2기 들어, ‘사회적 합의’가 위로부터 대대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6월 4일에 ‘노사정 대표자회의’가 만들어져서 ‘노사정위원회 기구 개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으로 추진될 내용은 ‘임금안정’, ‘노동유연화’의 제도화, 그리고 그를 통한 ‘노사관계의 개혁’이 될 것이다.

‘사회적 합의’라는 용어에 현혹되지 않고 ‘임금억제’와 ‘정리해고’, 그리고 ‘비정규직의 제도화’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계급적 단결’ 뿐이다.

 

2004.06.07.

[현자노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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