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트 영역으로 건너뛰기

민주노조로서 최소한의 예의(2005.10.05.)

민주노조로서 최소한의 예의

 

이 글은 현자노조 집행부나 현장 활동가들께 쓰는 것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 평조합원들께 쓰는 것입니다.

혹 현자 조합원도 아닌 사람이 이런 글을 쓸 수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고, 혹 현장의 정서 즉 ‘당신들의 정서’를 모른다고 항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저는 이 글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작년 상반기에 노무현 정권과 보수 언론이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를 향해서 ‘고임금’을 받는 ‘노동귀족’들이라고 몰아 부칠 때, 저와 제가 속한 연구소는 당신들의 ‘고임금’을 옹호했습니다.

대공장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지만, 그것은 주야 맞교대와 잔업철야 등 장시간 노동과 노동강도 강화의 댓가일 뿐이라고.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임금’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일부 지배세력들의 부와 사치와 고소득이 더욱 문제라고.

 

대공장 정규직의 ‘고용 경직성’ 때문에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차별이 심화된다고, 그래서 비정규입법을 강행하겠다고 정권과 자본과 보수언론이 호들갑을 떨 때, 그에 맞서 당신들의 ‘고용 경직성’ 즉 ‘고용 안정’을 옹호했습니다.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것은 대공장 정규직의 ‘고용 경직성’ 때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의 결과라고.

따라서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은 정규직을 비정규직화하는 노동유연화로는 해결될 수 없고,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을 철회해야 가능하다고.

 

분명 ‘당신들’의 고임금과 고용 경직성을 옹호했고 방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들‘만’의 고임금과 고용 경직성을 옹호하고 방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민주노조운동진영 전체가, 고용불안과 비정규직화와 차별과 탄압으로 고통받는 전체 노동자들이 그랬을 겁니다.

올 상반기 임단협 과정에서 현자 정규직 노동자들이 숨막히는 이러한 현실을 과감하게 뚫고,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간의 계급적 단결을 이뤄낼 것을 기대했습니다.

계급적 단결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 혹은 ‘어떤 희망의 단초’라도 보여주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조금씩 무너져 갔습니다.

비정규직을 ‘고용안전판’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시간이 필요하고, 임금이나 노동조건에서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간의 차별도 하루아침에 없앨 수는 없을 거라 애써 자위했습니다.

그러나 상반기 임단협 과정에서 현대 원청 사용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납치 연행하고, 구속하고, 유혈적인 폭력을 휘둘렀을 때, 대다수 정규직 노동자들이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습니다.

9월 초 비정규직 노동자인 류기혁 동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즉각 ‘열사’로 받아 안지 않고 임단협을 마무리짓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민주’노조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도 아니라는 생각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현자 정규직 노동자분들께 묻습니다.

이것이 ‘당신들의 정서’, 소위 ‘정규직 노동자의 정서’입니까?

현자노조는 당신들‘만’의 노조입니까?

비록 자본에 의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었지만, 한울타리 안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탄압받고 죽어갈 때 현장으로부터 함께 연대하지 못하는 노조가 진정 ‘민주’노조입니까?

 

2005.10.05.

현자노보칼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젖은 낙엽족’과 ‘캥거루족’(2004.09.08.)

‘젖은 낙엽족’과 ‘캥거루족’

 

“일에 쫓겨 이렇다할 취미도 노년에 대한 설계와 준비도 없이 퇴직을 맞아, 일상생활에서 자립하지도 못하고 부인에게 거의 모든 것을 의존하는” 남성 노인을 가리켜 ‘젖은 낙엽족’이라고 한다.

“마치 젖은 낙엽이 빗자루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듯 부인을 24시간 졸졸 따라다니며 한사코 붙어 있다”는 뜻이다.

일본의 도쿄대학 여교수가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한국 사회도 이미 2000년에 65세 이상의 노인인구 비율이 7%가 넘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고, 이러한 ‘젖은 낙엽족’ 현상이 이제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젖은 낙엽족’은 “아침 일찍 출근해 매일 밤 회식하고, 휴일엔 안방에서 뒹구는 생활을 수십년간 해 온 직장인” 출신이 많고, 질병, 고독감, 경제적 빈곤, 사회와 가정에서의 역할 상실 등으로 고통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굳이 65세 이상 노인으로까지 갈 필요도 없다.

IMF 외환위기 이후에 ‘오륙도’, ‘사오정’이 당연시 되는 현실에서, 노동자들의 운명은 ‘젖은’ 낙엽은 아닐지라도 ‘추풍낙엽’과 같은 처지로 몰리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전면화되면서 생겨난 신조어 가운데, 또 ‘캥거루족’이라는 것이 있다.

“취업난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지 않기 위해 휴학을 하거나,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취직하지 않거나, 취직을 하더라도 임금이 적어 부모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청년 실업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새끼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캥거루의 특이한 생태에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1998년에 프랑스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지가 ‘캥거루 세대’라 부른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캥거루족’도 이미 한국사회에서 일반화되고 있다.

최근에 대학생 가운데 1/5이 휴학했다.

20대의 48%가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최근 2년간 대졸취업자의 평균나이가 15개월 가량 높아졌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청년실업자가 머지않아 백만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고 평균 취업경쟁률은 83:1에 달하고 있다.

더욱 문제는 ‘캥거루족’이 일시적 유행으로 끝나지 않고 장기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30~40대 취업 노동자들은 ‘젖은 낙엽족’과 ‘캥거루족’ 사이에 끼어 있다.

그렇다고 이런 현실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당장의 고용불안도 버겁지만, 10~20년이면 자신이 혹은 자식들이 닥칠 문제다.

아니 당장 부딪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소위 노인문제 전문가들은 ‘젖은 낙엽족’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자기계발에 힘쓰고, 효율적인 자산운용계획을 세워 최소한 9억원 정도는 준비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청년실업 문제의 전문가들은 캥거루족이 생기는 원인이 경제 불황에 따른 취업난도 있지만, “부모세대처럼 아등바등 살기도 싫고 웬만한 직장은 눈에 안 차는” 젊은 세대에게도 그 책임이 있기 때문에, “눈높이를 낮춰 사회의 밑바닥부터 경험을 해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한다.

문제는 개인에게 있으니 개인이 알아서 책임지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충고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고용없는 성장의 시대’, ‘경제발전이 경제사회적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시대’,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의 제도화에 따라 고용불안이 일상화된 시대’에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것인가?

‘고용’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노동자들의 ‘삶의 양식’ 전체를 어떻게 새롭게 변화시켜 나가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자노보칼럼] 2004.09.08.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한노정연의 ‘발전적 해소’-발전적인 전망을 새롭게 모색하기 위해(2006.12.15.)

한노정연의 ‘발전적 해소’

발전적인 전망을 새롭게 모색하기 위해

 

‘안내자’이자 ‘사랑방’

 

“연구소가 사랑방 같았는데 ---”, “연구소는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친정집이었는데 ---”, “10년 넘게 내 삶의 뿌리였는데 ---”, “연구소가 현장 활동의 안내자 역할을 해왔는데 ---”, “그간 노동운동 진영 내에서 전투적인 이론을 제공해 왔는데 ---”. 지난 12월 2일 총회에서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이하 ‘한노정연’)를 발전적으로 해산하기로 결정한 직후에, 참여한 연구원들은 해산에 대한 소감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렇게 밝혔다.

그렇다. 한노정연은 지난 11년간 현장 활동가나 좌파 연구자들에게 ‘안내자’이고 ‘친정집’이고 ‘사랑방’이었다.

1995년 7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이념적 지표를 상실하고 ‘해체’와 ‘청산’과 ‘잠복’만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던 때에, 좌파 연구자들과 현장 활동가들이 함께 모여 ‘계급성, 현장성, 전문성’의 기치로 내걸고 한노정연을 결성한 것은 ‘상실과 절망의 시대’를 뛰어넘어 보고자 했던 하나의 몸부림이자 실험이었다.

한노정연은 좌파 연구자들을 묶어주고, 좌파 연구자들과 현장 활동가들을 이어주며, ‘현장에서 미래를’ 찾기 위한 모색을 했다.

 

한노정연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성장하는 민주노조운동을 지원하며 ‘노동운동의 민주적 계급적 발전’ 전망을 함께 머리를 맞대 연구하고 토론하고 그 결과를 각종 토론회와 단행본, 그리고 [현장에서 미래를]에 발표했다.

90년대 초반 이후 “가랑비에 속옷 젖듯” 변화하는 노동현장을 ‘신경영전략’이라는 이론틀로 포착하여, 자본의 새로운 축적전략과 노동통제전략에 민주노조운동이 적극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96~97년 노동법개악을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총파업 한복판에서, 노동법 개악이 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 공세’를 전면화하기 위한 전주곡이며, 따라서 노동운동은 과거 민주화운동의 단순한 연장선에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투쟁으로 진전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전면화된 신자유주의 공세에 민주노조운동이 힘겨운 총파업으로 맞서면서도 허구적인 ‘사회적 합의주의’로 인해 혼란과 동요에 빠졌을 때, 한노정연은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총파업투쟁을 이론적으로 엄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허구적인 ‘사회적 합의주의’의 유혹을 벗어나 ‘계급적 단결’과 ‘노조 및 현장 민주주의 강화’를 통해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지배세력의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유연화 공세, 민주노조를 고립시키려는 이데올로기 공세로 민주노조운동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한노정연은 그 ‘위기’ 공세에 맞서 한편으로는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을 주장하고, 나아가 조합주의적 운동에서 벗어나 사회변혁운동으로 진전할 것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한국사회의 변혁전략’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했으며, ‘21c 사회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모색했다.

한노정연의 연구자들은 현장과 지역의 활동가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현장을 직접 발로 뛰면서 연구하고 토론하고 교육했으며, 현장과 노조 활동가들이 계급적 변혁적 노동운동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지원했다.

회원들의 회비와 특별기금, 그리고 노동조합의 프로젝트만이 유일한 재원이었고, 어려운 재정 여건에서도 ‘재정 자립’의 원칙을 고수하고자 했으며, 이는 연구원들과 회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매듭’과 ‘모색’

 

한편으로는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 정세와 운동 정세의 변화로 한노정연은 자신의 역사적인 소임을 마무리 짓고 발전적으로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발전적 해소’라기 보다는 ‘발전적인 전망을 새롭게 모색하기 위한 해소’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지난 11년간 한노정연의 정체성은 ‘계급성, 현장성, 전문성’으로 표현해 왔다.

즉 내용적으로는 ‘노동운동의 민주적 계급적 발전’을 위한 이론 정책의 생산을 중심으로, 좌파 연구자들과 실천활동가들이 연구소라는 틀로 모여, 정치조직과 대중조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된 연구 활동을 하는 것, 그래서 연구소라는 틀 속에서 이론과 실천의 긴장을 유지하고 확장해 나가는 것 자체가 한노정연의 정체성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이런 이론과 실천의 긴장을 연구소라는 틀로 유지해 나가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다.

좌파 연구자들은 반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공동의 지반을 가지고 있지만 극복 전망에 대해서는 입장과 방법을 달리했고, 따라서 더 이상 하나의 ‘사상적 이론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게 됐다.

연구 활동은 관심과 입장에 따라 다양화되고 개별화됐으며, 또 제도화되기도 했다.

좌파 정치조직의 분화와 분열 역시 연구소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이상 한노정연이 과거처럼 좌파 전체를 대표하는 이론정책연구소로서의 자신의 위상과 역할을 하기에는 어렵게 됐다.

그리고 이미 대중조직이나 현장의 활동가 조직, 그리고 정치조직을 중심으로 자신의 입장을 생산하고 구체화시켜 나가는 상황에서 회원 조직을 중심으로 연구소를 운영해 나가는 것도 한계에 다다르게 됐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한노정연이 자신의 역사적인 소임을 다했다는 것이다.

‘과거’의 성과에 집착하여 계속 연구소를 유지하는 것은 이후 질곡을 더욱 심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된 현실을 냉철하게 인정해야 한다.

한노정연 ‘발전적 해소’의 첫 번째 이유는 바로 한노정연이 처한 현실을 통해 드러난 좌파 연구운동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 한 ‘매듭’을 짓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인가?

그렇지 않다. 좌파 연구운동이 처한 현실적 한계는 한노정연이라는 틀 속에서의 한계일 뿐이다.

오히려 현실 계급정세의 변화는 좌파 연구운동에 새로운 과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의 결과로 고통 받는 노동자민중들은 새로운 대안과 구체적인 비전을 요구하고 있다.

그간 다양한 영역에서 개별적인 연구 활동을 진행해 오던 좌파 연구자들은 연구자들간의 혹은 연구자들과 대중간의 새로운 방식의 소통과 연대를 요구하고 있다.

좌파의 정치조직들 역시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조직적 정체성을 세워나가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서로간의 소통과 접점을 형성하고 연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절박하게 느끼고 있다.

 

한노정연의 발전적 해산이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가능성을 곧바로 현실화시켜 내지는 못할 수도 있다.

물론 짧은 시간 내에 혹은 일거에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주체에 의해서든 어느 시점에서든 이 필요성이 제기되고 새롭게 모색되어야 한다.

만약 한노정연의 해산이 이런 노력을 위한 새로운 계기를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그 때 이름 그대로 ‘발전적 해산’이 될 것이다.

 

맑스주의, 그 내부로부터 ‘혁신’과 ‘확장’, ‘재구성’

 

사실 한국의 좌파 이론 지형과 관련하여, 최근 몇 년간 맑스 코뮤날레 학술대회와 [진보평론], [마르크스주의 연구] 등의 발간, 그리고 여러 좌파 연구소와 정치조직의 기관지 발간 등을 통해 그 이론적 패러다임의 여러 쟁점들이 대체적으로 드러났다.

크게는 맑스주의의 전통을 옥소도스하게 지켜나가려는 ‘정통 맑스-레닌주의 경향’, 들뢰즈와 네그리 등의 이론을 도입하여 맑스주의를 폐기하거나 혹은 맑스주의 외부로부터 맑스주의를 해체 재구성하려는 ‘신좌파적 경향’, 그리고 맑스주의를 ‘내부로부터 혁신하고 확장하고 재구성하려는 경향’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세 번째 경향은 소위 정통 맑스-레닌주의와 신좌파적 경향과 구별하여, 21c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맑스주의를 그 내부로부터 혁신하고 확장하고 재구성하여, 새로운 이론적 전망과 패러다임의 구축을 모색하는 일련의 문제의식과 실험적 시도를 포괄하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은 하나의 사상적 이론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여러 영역에 걸쳐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존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이론을 21c 자본주의 현실에 맞게 내적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를 비롯하여, 스탈린주의에 의해 왜곡되거나 형해화된 철학을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시도, 21c 서구에서 좌파 정치가 실패한 원인을 분석하고 ‘차이의 정치론’의 한계를 극복하여 맑스주의 정치이론을 확장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 그리고 기존의 맑스주의에서 부차적으로 다루어져 왔던 여성, 환경, 인권 문제 등 새롭게 부각되는 사회적 의제에 대한 연구를 통해 맑스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통속적이고 경제결정론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문화와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새로운 좌파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있으며,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간의 오래된 대립구도를 뛰어넘어 새로운 국제주의적 변혁 전략을 탐색하는 시도 역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에 바탕하여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 노동운동의 새로운 발전 전략과 정책을 모색하려는 시도 역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도들이 최종적으로 향하는 지점은 ‘21c 사회(코뮨)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는 것이다.

이를 향한 각개 약진이 아직은 개별화된 수준에서, 또한 아직은 추상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서로의 소통과 접점을 요구하게 될 것이고, 새로운 사상적 이론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집단적인 노력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하나의 사상적 이론적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에 맞선 노동자민중들의 저항과 구체적으로 결합해 나갈 때, 이러한 경향과 시도는 현실의 힘으로 전화할 것이다.

한노정연의 발전적 해산이 맑스주의를 그 내부로부터 혁신하고 확장하고 재구성하려는 그간의 여러 시도들을 결집시켜 나갈 수 있는 계기로 된다면 그 역시 자신의 역사적 소임을 다하는 것일 것이다.

 

2006.12.15.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