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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들의 촛불시위를 보며(2005.05.11.)

‘경쟁위주의 입시정책 반대, 내신등급제 상대평가 반대’ 촛불시위를 보며

 

지난 5월 7일, 내신등급제와 상대평가제를 반대하는 고등학생들의 촛불시위로 언론이 떠들썩할 때, 필자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이었다.

촛불시위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교육청 관계자 및 학교교사 760명이 동원되고, 100개 중대 1만여 명의 경찰 동원되어 결국 전국적인 시위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400여명의 고등학생들만이 광화문에 모여 ‘입시 경쟁 교육에 희생된 학생들을 위한 촛불 추모제’를 치렀지만, 그들의 이 사회와 어른들과 교육정책을 향한 절규와 울부짖음에는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 때 이 땅의 천만노동자들이 외쳤던 절규와 울부짖음이 그대로 베어 있었다.

 

그것은 철부지들의 투정이 아니라, 한마디로 학생들의 ‘인간 선언’이었다.

그들이 “학생들은 돼지처럼 학교라는 우리에 갇혀서 시험이라는 것에 사육돼, 등급에 따라 백화점(일류대학)과 정육점(이삼류대학)으로 간다”고 외쳤을 때, 학교나 학원에 수감되어 격리되어 경쟁을 강요받는 생활이 강제수용소처럼 느껴져 “친구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곳이 학교가 되었고, 이건 더 이상 학교가 아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87년 당시 병영 같은 공장의 현실을 폭로하고,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들이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다. 이제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춰 살지 않겠다”고 주장했을 때, 공장의 진정한 주인은 노동자이고,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민주노조를 건설해야 한다던 87년의 노동자들의 뜨거운 바램과 열망을 다시 보는 듯 했다.

 

그들은 이 땅의 교육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내신등급제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서열화의 입시제도 자체가 문제”라고.

‘대학서열화’와 ‘학벌주의’가 공고한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살인적인 대학입시경쟁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한나라당이나 일부 보수언론들이 학생들의 주장을 빌미로 ‘고교등급제의 적용과 ‘본고사 부활’의 흐름으로 연계시키려는 정략적인 시도가 한심하고 치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올 들어 벌써 20여명의 학생들이 성적을 비관하며 자살한 것은 ‘개인적인 자살’이 아니라고, 그것은 “학생들이 학교와 선생님들을 불신하게 하고, 학생들끼리 무한 경쟁으로 치고 받으라는 식의 입시제도”때문이라고, 그래서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내용에 바보같이 억눌려온 시대의 종말을 선포하기 위해 우리가 모인 것”이라고 그들이 선언했을 때, 그들은 이미 ‘교육의 한 주체’로 우뚝 선 것이었다.

 

우리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학생들에게 ‘어른’이고자 한다면,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이 땅의 교육 현실을 헤쳐 나갈 한 주체로 인정하고, 나아가 논술이든, 내신이든, 수능이든 어느 하나 놓칠 수 없어 결국 3,4중고에 처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경쟁 위주의 신자유주의적 입시정책’과 ‘대학 서열화’, 그리고 ‘학벌주의’에 맞서 싸워나가야 한다.

더 이상 그들만의 외로운 ‘촛불시위’가 되어서는 안된다.

 

2005.05.11.

[현자노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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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조로서 최소한의 예의(2005.10.05.)

민주노조로서 최소한의 예의

 

이 글은 현자노조 집행부나 현장 활동가들께 쓰는 것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 평조합원들께 쓰는 것입니다.

혹 현자 조합원도 아닌 사람이 이런 글을 쓸 수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고, 혹 현장의 정서 즉 ‘당신들의 정서’를 모른다고 항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저는 이 글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작년 상반기에 노무현 정권과 보수 언론이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를 향해서 ‘고임금’을 받는 ‘노동귀족’들이라고 몰아 부칠 때, 저와 제가 속한 연구소는 당신들의 ‘고임금’을 옹호했습니다.

대공장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지만, 그것은 주야 맞교대와 잔업철야 등 장시간 노동과 노동강도 강화의 댓가일 뿐이라고.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임금’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일부 지배세력들의 부와 사치와 고소득이 더욱 문제라고.

 

대공장 정규직의 ‘고용 경직성’ 때문에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차별이 심화된다고, 그래서 비정규입법을 강행하겠다고 정권과 자본과 보수언론이 호들갑을 떨 때, 그에 맞서 당신들의 ‘고용 경직성’ 즉 ‘고용 안정’을 옹호했습니다.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것은 대공장 정규직의 ‘고용 경직성’ 때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의 결과라고.

따라서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은 정규직을 비정규직화하는 노동유연화로는 해결될 수 없고,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을 철회해야 가능하다고.

 

분명 ‘당신들’의 고임금과 고용 경직성을 옹호했고 방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들‘만’의 고임금과 고용 경직성을 옹호하고 방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민주노조운동진영 전체가, 고용불안과 비정규직화와 차별과 탄압으로 고통받는 전체 노동자들이 그랬을 겁니다.

올 상반기 임단협 과정에서 현자 정규직 노동자들이 숨막히는 이러한 현실을 과감하게 뚫고,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간의 계급적 단결을 이뤄낼 것을 기대했습니다.

계급적 단결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 혹은 ‘어떤 희망의 단초’라도 보여주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조금씩 무너져 갔습니다.

비정규직을 ‘고용안전판’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시간이 필요하고, 임금이나 노동조건에서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간의 차별도 하루아침에 없앨 수는 없을 거라 애써 자위했습니다.

그러나 상반기 임단협 과정에서 현대 원청 사용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납치 연행하고, 구속하고, 유혈적인 폭력을 휘둘렀을 때, 대다수 정규직 노동자들이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습니다.

9월 초 비정규직 노동자인 류기혁 동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즉각 ‘열사’로 받아 안지 않고 임단협을 마무리짓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민주’노조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도 아니라는 생각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현자 정규직 노동자분들께 묻습니다.

이것이 ‘당신들의 정서’, 소위 ‘정규직 노동자의 정서’입니까?

현자노조는 당신들‘만’의 노조입니까?

비록 자본에 의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었지만, 한울타리 안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탄압받고 죽어갈 때 현장으로부터 함께 연대하지 못하는 노조가 진정 ‘민주’노조입니까?

 

2005.10.05.

현자노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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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낙엽족’과 ‘캥거루족’(2004.09.08.)

‘젖은 낙엽족’과 ‘캥거루족’

 

“일에 쫓겨 이렇다할 취미도 노년에 대한 설계와 준비도 없이 퇴직을 맞아, 일상생활에서 자립하지도 못하고 부인에게 거의 모든 것을 의존하는” 남성 노인을 가리켜 ‘젖은 낙엽족’이라고 한다.

“마치 젖은 낙엽이 빗자루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듯 부인을 24시간 졸졸 따라다니며 한사코 붙어 있다”는 뜻이다.

일본의 도쿄대학 여교수가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한국 사회도 이미 2000년에 65세 이상의 노인인구 비율이 7%가 넘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고, 이러한 ‘젖은 낙엽족’ 현상이 이제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젖은 낙엽족’은 “아침 일찍 출근해 매일 밤 회식하고, 휴일엔 안방에서 뒹구는 생활을 수십년간 해 온 직장인” 출신이 많고, 질병, 고독감, 경제적 빈곤, 사회와 가정에서의 역할 상실 등으로 고통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굳이 65세 이상 노인으로까지 갈 필요도 없다.

IMF 외환위기 이후에 ‘오륙도’, ‘사오정’이 당연시 되는 현실에서, 노동자들의 운명은 ‘젖은’ 낙엽은 아닐지라도 ‘추풍낙엽’과 같은 처지로 몰리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전면화되면서 생겨난 신조어 가운데, 또 ‘캥거루족’이라는 것이 있다.

“취업난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지 않기 위해 휴학을 하거나,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취직하지 않거나, 취직을 하더라도 임금이 적어 부모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청년 실업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새끼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캥거루의 특이한 생태에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1998년에 프랑스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지가 ‘캥거루 세대’라 부른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캥거루족’도 이미 한국사회에서 일반화되고 있다.

최근에 대학생 가운데 1/5이 휴학했다.

20대의 48%가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최근 2년간 대졸취업자의 평균나이가 15개월 가량 높아졌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청년실업자가 머지않아 백만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고 평균 취업경쟁률은 83:1에 달하고 있다.

더욱 문제는 ‘캥거루족’이 일시적 유행으로 끝나지 않고 장기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30~40대 취업 노동자들은 ‘젖은 낙엽족’과 ‘캥거루족’ 사이에 끼어 있다.

그렇다고 이런 현실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당장의 고용불안도 버겁지만, 10~20년이면 자신이 혹은 자식들이 닥칠 문제다.

아니 당장 부딪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소위 노인문제 전문가들은 ‘젖은 낙엽족’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자기계발에 힘쓰고, 효율적인 자산운용계획을 세워 최소한 9억원 정도는 준비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청년실업 문제의 전문가들은 캥거루족이 생기는 원인이 경제 불황에 따른 취업난도 있지만, “부모세대처럼 아등바등 살기도 싫고 웬만한 직장은 눈에 안 차는” 젊은 세대에게도 그 책임이 있기 때문에, “눈높이를 낮춰 사회의 밑바닥부터 경험을 해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한다.

문제는 개인에게 있으니 개인이 알아서 책임지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충고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고용없는 성장의 시대’, ‘경제발전이 경제사회적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시대’,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의 제도화에 따라 고용불안이 일상화된 시대’에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것인가?

‘고용’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노동자들의 ‘삶의 양식’ 전체를 어떻게 새롭게 변화시켜 나가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자노보칼럼] 2004.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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