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8/05/07

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5/07
    초콜릿과 SOFA -김 훈
    내공쌓기
  2. 2008/05/07
    <아버지의 추억>에 실린 김 훈선생님글 일부...
    내공쌓기
  3. 2008/05/07
    기어이 사랑이라 부르는 기억들
    내공쌓기
  4. 2008/05/07
    '밥'에 대한 단상
    내공쌓기
  5. 2008/05/07
    밥벌이의 지겨움
    내공쌓기

초콜릿과 SOFA -김 훈

초콜릿과 SOFA -김 훈


1951년 1월의 피난 열차는 화물칸 지붕위에까지 피난민들이 올라타고 있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열흘이 걸렸다.

열차지붕위에서 피난민의 어린자식들은 굶어죽고 졸다가 떨어져죽고 바람에 불려가 죽고 터널을 지날 때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 객실 안에는 피아노와 셰퍼드까지 싣고 가는 고위층들도 있었다. 그때 열차지붕 위에 실려서 부산까지 내려갔던 세살 먹은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이글을 쓴다.

피난지에서 자라서 유년은 하루 종일 배가 고팠고 1년 내내 배가 고팟다.

미군 보초병들은 이 배고픈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던졌다. 초콜릿 낱개가 백개가 들어있는 박스를 들고 나와서 한 개씩 철조망 밖으로 던졌다. 한번은 왼쪽으로 한번은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계속 두 번 던지다가 왼쪽으로. 한개는 멀리, 한개는 가까이. 계속 멀리 던지다가 가까이 한 개....

그의 초콜릿 날아가는 방향으로 배고픈 아이들은 먼지를 일으키며 우르르 몰렸다.

멀리 던지는 시늉만 하고 던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멀리 쫒아갔던 아이들은 미군보초병을 향해 쌍욕을 해대며 다시 철조망 가까이 몰려 들었다. 그러다가 교대시간이 되면 보초병은 아직도 수 십개가 들어있는 박스를 통째 던졌다.

아이들이 필사적으로 몸을 던져 박스의 착지점을 향해 슬이딩 했다.

박스를 움켜진 아이는 집을 향해 달렸다. 다른 아이들이 그 뒤를 쫒아갔다.

박스를 움켜진 아이는 집을 행해 달렸다. 다른 아이들이 그 뒤를 쫓아갔다.

박스를 움켜진 아이는 추격자를 따돌리기 위해 박스안 초콜릿 몇 개를 뒤로 던졌다.

한개는 왼쪽 한개는 도랑 속으로. 맨발의 아이들은 도랑 속으로 뒤엉키며 뒹굴었다.

하교에는 전쟁고아가 넘쳤다. 미군들은 고아원에 구호물자를 나누어 주었다.

미군들이 올 때면 고아원장은 학교아이들을 빌려주었다. 머릿수가 많아야 구호물자를 많이 받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미군들이 고아원에 오는 날, 누더기를 걸친 고아건 고아가 아니건 고아원 마당에서 놀았다. 양지쪽에 쭈그리고 앉아서 이 자비로운 무사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아이들은 “미군은 똥도 초콜릿이다”라고 말했다. 미군에게 얻어먹은 초콜릿의 맛은 항홀한 감격이었다. 아마도 이 초콜릿의 맛과 그 살포방식이 주한미군에 대한 한국인들의 근원정서가 되어버린 듯하다. 주는 자의 오만과 받는 자의 수치심이 겹치면서, 주한미군의 패악질은 50여 년 거의 방치되어 왔다. 미군은 주는 자의 오만으로써 자국의 인종말자 개망나니 병사들의 행패를 감싸왔고, 한국정부는 받는 자의 치욕 속에서 그 행패에 대한 사법적 대응을 포기해 왔다. 도와 주었으니까 웬만한 행패는 모른 척 해달라는 이 기막힌 치욕이 이른바 주한미군 주둔군 지위협정(sofa)의 정서적 방탕인 것이다.

단언하건대, 배가 고파서 미군의 코콜릿을 얻어먹은 것은 치욕이 아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그것은 불가피한 생명현상이다. 초콜릿이 던져지는 방향으로 몰리던 아이들의 민첩한 동작은 생명의 발랄한 힘인 것이다. 이만한 자의식을 회복하기에도 세월이 필요했다. 남을 돕는 다는 일은 도움을 주는 쪽에 지극한 선의의 바탕이 있었다 할지라도 도움을 받는 쪽에서는 상처가 될 수 있다. 하물며 도와 주었으니까 행패를 묵인하라는 식의 도움은 도움이 아니다. 초콜릿을 얻어먹은 것이 치용이 아니라, 초콜릿을 이쪽저족으로 마구 던지는 것은 그것을 던지는 자의 치용인 것이다.

미군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전쟁억지력이라고 한다.

 

그 전략적 정당성을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에서 미군은 그 주둔 지역 주민들에 대한 거듭된 패악질로 존재의 근거를 위협받고 있다. 병사들의 행패가 군대전체의 전략적 존재의미를 무의미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세상에 이런 군대가 있는가. 한.미간에 대등한 관계를 설정하는 것만이 미군의 위상을 회복하는 길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아버지의 추억>에 실린 김 훈선생님글 일부...

중학교 때 나는『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소설에 빠져 있었다.
학원사에서 나온 청소년용 문고판이었는데, 겉표지는 노란색이었고

삽화가 들어 있었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중에서도 허클베리는 톰 소여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허클베리는 공부 못하고 집구석은 가난하고 싸움 잘하고

말썽만 부리는 불량청소년이었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모험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동경을 실천할 수 있는 결단성과

행동력을 가진 소년이었다.


허클베리네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다 돈은 안 벌어오고 집에도 안 들어오는

사내였다. 다시는 술 안 먹겠다고 아들한테 맹세해놓고서 그 다음날 대낮부터

또 마시는 사내였다. 어렸을 때 나는 내 아버지가 허클베리 아버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던가. 천지분간 못하는 나는 어느 날 모처럼 집에 온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때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었는데, 내 말이 무엇을 겨누고 있는
지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아버지가 허공을 올려다보더니 한참 뒤에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또 말했다.



아버지에게 말을 달릴 선구자의 광야가 이미 없다는 것을 나는 좀
더 자라서 알았다. 아버지는 광야를 달린 것이 아니고, 달릴 곳 없는
시대의 황무지에서 좌충우돌하면서 몸을 갈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 말이 너무 어려우냐?”
“광야를 달리는 말이 마구간을 돌아볼 수 있겠느냐?”
“아버지는 꼭 허클베리네 아버지 같아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기어이 사랑이라 부르는 기억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내가 사는 마을의 곡릉천(曲陵川)은 파주 평야를 구불구불 흘러서 한강 하구에 닿는다.
 
여름내 그 물가에 나와서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생각했다.
 
마침내 와서 닿는 것들과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것들을 생각했다. 생각의 나라에는 길이 없어서 생각은 겉돌고 헤매었다. 생각은 생각되어지지 않았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생각은 아프고 슬펐다.
 

  바다는 멀어서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바다의 기별이 그 물가에 와 닿는다. 김포반도와 강화도 너머의 밀물과 썰물이 이 내륙 하천을 깊이 품어서 양안의 갯벌은 늘 젖어 있다. 밀물을 따라서 내륙으로 향하는 숭어 떼들이 수면 위로 치솟고 호기심 많은 바다의 새들이 거기까지 물을 따라 갯벌을 쑤신다. 그 작은 물줄기는 바다의 추억으로 젖어서 겨우 기신기신 흐른다. 보이지 않는 바다가 그 물줄기를 당겨서 데려가고 밀어서 채우는데, 물 빠진 갯벌은 '떠돌이 창녀 시인 황진이의 슬픈 사타구니"(서정주 시 <격포우중>에서)와도 같이 젖어서 질&#54149;거린다. 저녁 썰물에 물고기들 바다도 돌아가고 어두워지는 숲으로 새들이 날아가면 빈약한 물줄기는 낮게 내려앉아 겨우 이어가는데. 먼 것들로부터의 기별은 젖은 뻘 속에서 질척거리면서 저녁의 빛으로 사윈다.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가을이 왔는데. 물가의 메뚜기들은 대가리가 굵어졌고 굵은 대가리가 여름내 햇볕에 그을려 누렇게 변해 있었다. 메뚜기 대가리에도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그것들도 생로병사가 있어서 이 가을에 땅위의 모든 메뚜기들은 죽어야 하리. 그 물가에서 온 여름을 혼자서 놀았다. 놀았다기보다는 주저앉아 있었다. 사랑은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의 이름이라고 . 그 갯벌은 가르쳐 주었다.  내 영세한 풍경에도 사랑이 있다면 아마도 이 빈곤한 물가의 저녁 썰물일 것이었다.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
 
  '사랑'의 메모장을 열어보니 '너'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언제 적은 글자인지는 기억이 없다. '너 '아랫줄에 너는 이인칭인가 삼인칭인가.라는 낙서도 적혀 있다. '정맥'이라는 글자도 적혀 있다. '너'와 '정맥'을 합쳐서 '너의 정맥'이라고 쓸 때. 온 몸의 힘이 빠져서 기진맥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이름'이라는 글자 밑에는 이름과 부름 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락고도 적혀 있다. 치타, 백곰, 얼룩말,부엉이 같은 말을 걸 수 없는 동물들의 이름도 들어 있다. 이 안쓰러운 단어 몇 개를 징검다리로 늘어놓고 닿을 수 없는 저편으로 건너가려 했던 모양인데 . 나는 무참해서 메모장을 덮는다.
 
  물가에서 돌아온 밤에 램프 밑에 앉아서 당신의 정맥에 관하여 적는다
 
그 해 여름에 비 많이 내렸고 빗속에서 나무와 짐승들이 비린내를 풍겼다. 비에 젖어서 , 산 것들의 몸 냄새가 몸 밖으로 번져 나오던 그 여름에 당신의 소매 없는 블라우스 아래로 당신의 흰 팔이 드러났고 푸른 정맥 한 줄기가 살갗 위를 흐르고 있었다. 당신의 정맥에서는 새벽안개의 냄새가 날 듯 했고 당신의 정맥의 푸른색은 낯선 시간의  빛깔이었다. 당신의 정맥은 당신의 팔뚝을 따라 올라가서 , 점점 희미해서 가물거리는 선 한 줄이 당신의 겨드랑이 밑으로 숨어들어갔다.
 
겨드랑 밑에서부터 당신의 정맥은 당신의 몸 속의 먼 곳을 향했고, 그 정맥의 저쪽은 깊어서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정맥이 숨어드는 죽지 밑에서 당신의 겨드랑 살은 접희고 포개져서 작은 골을 이루고 있었다.  당신이 찻잔을 잡느라고 , 책갈피를 넘기느라고 ,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느라고 , 자동차 스틱 기어를 당기느라고 또는 웃는 입을 가리느라고 팔을 움지일 때마다 당신의 겨드랑 골은 열리고 또 닫혀서 때때로 그 안쪽이 들여다보일 듯 했지만, 그 어두운 골 안쪽으로 당신의 살 속을 파고 들어간 정맥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고 사라진 정맥의 뒷소식은 아득히 먼 나라의 풍문처럼 희미해서 닿을 수 없었다. 정맥의 저쪽으로부터는 아무런 기별도 오지 않았는데 내륙의 작은 하천에 바다의 조짐들과 바다의 소금기가 와 닿듯이 , 희미한 소금기 한 줄이 얼핏 스쳐오는 듯도 싶었고 아무런 냄새도 와 닿지 않는 듯도 싶었다. 환청이나 환시처럼 냄새에도 환후라는 것이 있어서 헛것에 코를 대고 숨을 빨아들이는 미망이 없지 않을 것인데, 헛것인가 하고 몸을 돌릴 때, 여름 장마의 습기 속으로 번지는 그 종잡을 수 없는 소금기는 멀리서 가늘게, 그러나 날카롭게 찌르며 다가오는 듯도 했다. 내 살아 있는 몸 앞에서 '너'는 그렇게 가깝고 또 멀었으며, 그렇게 절박하고 또 모호했으며 희미한 저쪽에서 뚜렷했다.

  '너'가 이인칭인지 삼인칭인지 또는 무인칭인지 알 수 없는 날엔 혼자서 동물원으로 간다.  동물들은 모두 제 똥과 제 오줌과 제 몸의 냄새를 풍긴다. 기린이나 얼룩말이 목을 길게 빼고 먼 곳을 바라볼 때. 그 망막에 비치는 세계의 내용을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는 기린의 눈의 안쪽으로 나의 시선을 들이밀 수가 없다. 올빼미의 눈과 독수리의 눈에 비치는 나를 나는 감지하지 못한다. 늙은 독수리는 나뭇가지에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고 철망 밖을 내다본다. 백곰은 하루종일 철망 안쪽을 오락가락한다. 그의 앞발은 무겁고 그의 엉덩이는 늘어져 있다. 백곰은 앞발을 터벅터벅 내딛어, 몸을 흔들며 철망 안을 서성거린다. 코를 철망에 비비면서 저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올아온다. 백곰의 눈은 반쯤 감겨 있다. 백곰의 동작은 대낮의 몽유처럼 보였다. 철망에 쓸려서 헤진 콧구멍으로 피를 흐릴면서 , 백곰은 돌아오고 또 돌아간다. 수사자는 시멘트 바닥 위에서 저편으로 돌아누위 있다. 갈기가 흘러내려 바닥에 닿았고 돌아누운 옆구리를 벌떡거리며 숨을 쉰다. 귀 기울이면 사자의 숨소리가 들린다. 숨은 바람처럼 사자의 콧구멍으로 물려 들어갔다가 다시 쏟아져 나온다. 숨이 드나들 때, 창자가 창자가 "가르릉" 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늙은 사자의 숨소리는 불균형하고 숨 쉬는 옆구리는 힘들어 보인다. 코끼리 발바닥은 발가락 다섯 개가 한덩어리로 붙어있고 붙은 발가락에 제가금 발톱이 박혀 있다. 공룡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그 발라락 다섯 개는 분화되지 않았다. 코끼리는 그 들러붙은 발가닥으로 둔중하게 땅을 딛는다. 다시 억겁의 세월이 지나야 코끼리의 발가락은 갈라지는 것이지, 발가락은 갈라짐의 먼 흔적들을 지닌 채 들어붙어 있다.
 
'사랑'의 메모 장에 왜 동물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이지 지금은 기억이 없다. 아마도 사랑이 아니라 죽음의 항목 안에 써 놓아야 할 단어들이었다. 동물원에서 코끼리 발바닥과 기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너는 이인칭이 아니라 삼인칭임을 안다. 너가 삼인칭으로 다가오는 날엔 내가 사는 마을의 곡릉천을 가고 싶다
 
  다시 사랑의 메모 장을 연다. 시선 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강 이라는 단어도 적혀 있다. 시선을 적은 날은 봄이었고 강을 적은 날은 가을이었다. 봄에서 가을 사이에는 아무런 메모도 없었다. 메모가 없는 날들이 편안한 날들이었을 것이다. 시선 밑에는 건너가기 라고 적혀 있고 강 밑에는 또 혈관 이라는 말이 적혀 있다. 농수로 도 있고 링거주사도 보인다. 불쌍해서 버리고 싶은 단어들인데 버려지지 않는다.
  내가 당신과 마주앉아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서 나를 바라보았고, 당신의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았다. 당신의 시선은 내 얼굴을 뚫고 들어와 몸속으로 스미듯 했고, 나는 당신을 부르는 나의 목소리에 이끌려 , 건너와서 내게 닿은 당신의 시선에 경악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그 부름으로 당신에게 건너가고 그 부름에 응답하는 당신의 시선이 내게 와 닿을 때,나는 바다와 내륙 하천 사이의 거리와, 나와 코끼리 발다닥 사이의 시간과 공간이 일시에 소멸하는 환각을 느꼈다. 그것이 환각이었을까. 환각이기도 했겠지만 살이 있는 생명 속으로 그처럼 절박하게 밀려들어온 사태가 환각일 리도 없었다. 그리고 당신이 다시 시선을 거두어 고개를 숙일 때, 당신의 흘러내린 머리카락 위에서 햇빛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당신은 당신의 피부로 둘러싸였고  나는 나의 피부로 둘러싸여 , 당신의 먼 변방에 주저앉은 나는 당신의 겨드랑 밑으로 숨어드는 푸른 정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 당신의 푸른 정맥은, 낮게 또 멀리 흐르는 강물처럼 보였다. 나는 나주 남평의 드들강을 생각했다. 드들강은 넓고 고요하다. 들에 낮게 깔려 다가오는 그 강은 멀리 굽이치며 마을로 다가왔고 다시 굽이쳐서 들로 나아갔다. 강안에 둑이 없어서 수면은 농경지에 잇닿았고, 굽이치는 안쪽으로 물풀이 우겨져 새들이 퍼덕거렸다. 느리게 다가오는 강은 강가에 앉은 자의 몸속을 지나서 흘렀다. 저녁이면 노을이 풀리는 강물은 붉게 빛나고 , 강물이 실어오는 노을과 어둠이 몸속으로 스몄다. 당신의 겨드랑 속으로 사라지는 당신의 정맥이 저녁 무렵의 강물처럼 닥쳐올 시간의 빛깔들을 실어서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기를 나는 그 강가에서 꿈꾸었던  것인데. 그때 내 마음의 풍경은 멀어서 보이지 않는 바다의 기별을 기다리고 또 받아내는 곡릉천과도 같았을 것이다. 곡릉천은 살아서 작동되는 물줄기로 먼 바다와 이어져 있다.
  내 빈곤한 사랑의 메모 장은 거기서 끝나 있다. 더 이상의 단어는 적혀 있지 않다. 관능이라고 연필로 썼다가 지워버린 흔적이 있다. 아마도, 닿아지지 않는 관능의 슬픔으로 그 글자들을 지웠을 것이다. 너의 관능과 나의 관능 사이의 거리를 들여다보면서 그 두 글자를 지우개로 뭉개벼렀을 것이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가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차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합륜(이런 말이 있는가?)이건 치정이건 순정이건 다 똑같다.거기에 언어를 들이댈 수가 없다.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사랑도 나에게는 잘 전달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전달되거나 설명되지 않고 다만 경험될 뿐일 것이다. 경험될 뿐, 전달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낙원은 그 지옥의 다른 이름일 터이다.
  그래서 내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은 모두가 인격이나 성격에 미달하는 동물들이다. 나는 여자를 완성시키지 못한다. 여자, 또는 사랑에 대하여 말해야 할 때 나를 지배하는 글자는 생명이라는 두 글자다, 그리고 그 생명은 개별적 존재의 생명이다. 나는 결국 생명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내 이야기 속의 여자들은 생명만 있고 성격이나 역활이 없다.
  의과대학에서 해부학 교과서를 빌려다 읽기도 했다. 여자의 몸을 각 부위별로 해부해 놓은 컬러 사진들이    그 책 속에 실려 있었다. 실핏줄과 신경과 숨구멍, 땀구멍 들이 엉켜 있었다. 허벅지와 국부와 겨드랑과 엉덩이. 두개골, 안구, 입 속의 구조를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어떻게 여자의 생명이 깃드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의사들에게 물어보아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생명을 말하려는 내 글은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의 답답함만이 적을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러니 어찌 소설을 쓸 수 있겠는가, 사랑과 생명에 관하여 말할 때, 결국 말하여지지 않는 것들의 답답함 만이 말하여진다. 사랑은 결핍이고 상실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밥'에 대한 단상

'밥'에 대한 단상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외국 대사관 담 밑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광장에서, 전경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다. 닭장차 옆에 비닐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먹는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다 먹으면 신병들이 식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잔반통을 치운다.

 

시위군중들도 점심을 먹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전경들이 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의 길을 열어준다. 밥을 먹고있는 군중들의 둘레를 밥을 다 먹은 전경들과 밥을 아직 못 먹은 전경들이 교대로 둘러싼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밥벌이의 지겨움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베터리가 다 떨어지면 핸드폰은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 죽는다.
핸드폰이 죽는 소리는 가볍고 하찮다.

핸드폰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핸드폰이 죽을 때 내는 이 꼬르륵 소리는 대선사들의 오도송(悟道頌)보다도
더 절박하게 삶의 하찮음을 일깨운다.

핸드폰이 꼬르륵 죽어 버리면 나는 이 세계와 단절된다.
거리에서, 핸드폰이 꼬르륵 죽어 버리면 나는 그만 살고 싶어진다.
내가 이 세상과 단절되는 소리가 이처럼 사소하다니, 꼬르륵.....

모든 ''먹는다''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모든 포유류는 어금니로 음식물을 으깨서 먹게 되어 있다.
지하철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짜장면을 먹는 걸인의 동작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에이프런을 두르고 거위간을 먹는 귀부인의 동작은 같다.
그래서 밥의 질감은 운명과도 같은 정서를 형성한다.

전기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 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느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 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다.
술이 던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 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넘겨야 다시 이것을 벌 수가 있는데,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을 벌기 위하여 이것을 넘길 수가 없도록 몸을 부려야 한다면
대체 나는 왜 이것을 이토록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가.
그러니 이것을 어찌하면 좋은가. 대책이 없는 것이다.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 쪽으로 끌려간다.

저쪽 물가에 낚싯대를 들고 앉아서 나를 건져올리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 자가 바로 나다. 이러니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 다시 밥을 벌 수가 있다.

예수님이 인간의 밥벌이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씨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거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먹이시느니라" 라고 하셨다지만, 나는 이 말을 믿지 못한다.
하느님이 새는 맨입에 먹여주실지 몰라도 인간을 맨입에 먹여주시지는 않는다.

봄에, 새잎 돋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나는 늘 마음이 아팠다.
나무들은 이파리에 엽록소가 박혀 있어서 씨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면서
햇빛과 물을 합쳐서 밥을 빚어낸다.

자신의 생명 속에서 스스로 밥을 빚어내는 나무는 얼마나 복 받은 존재인가.
사람의 밥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굴러다닌다.
그래서 내 밥과 너의 밥이 뒤엉켜 있다.

핸드폰이 필요한 것이다. 엽록소가 없기 때문에 핸드폰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들 핸드폰을 한 개씩 차고 거리로 나아간다.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 글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밥벌이는 밑도 끝도 없다. 그러니 이 글 에는 결론이 없어도 좋을 것이다.

나는 근로를 신성하다고 우겨대면서 자꾸만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라고 몰아대는
이 근로 감독관들의 세계를 증오한다.
나는 이른바 3D 업종으로부터 스스로 도망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인간들의 저 현명한 자기방어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아무 도리 없다.

- 김 훈 / 밥벌이의 지겨움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