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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죄죄한 베 조각이라 해도 좋을 옷을 걸치고, 거의 뼈만 앙상한 두 다리를 힘껏 벌리고 땅 바닥으로 폭 고꾸라질 듯한 엉거주춤한 자세로 힘들게 괭이를 휘두르고 있다. 큰 흙덩이를 파도에  비유하면 농부의 뒤로는 완전히 조용해진 호수면과 같이, 일념으로 두드려 부순 지면이 퍼져있다. 놀랍게도 흙을 부순 구획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경계는 자로 그은 듯이 보기좋게 직선이다. 무의식적인 행위의 결과일 리가 없다. 경계선은 그의 의사에 따라 직선으로 만들어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의지랄까, 아니면 옹고집이, 집약농경에 참여하는 농부가 고독하게 흙 앞에 마주설 때 종종 발휘되는 것이다.

파종이랑 긋기, 이랑 돋우기, 쟁기질하기, 모두가 직선이 되도록 일한다. 뒤돌아보아 그것이 완전히 뜻대로 되었을 때 누구에게 자랑할 것도 아니다, 그 ‘오만’이 문득 뇌리를 스친다. 다른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자신에게 바치는 예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단순히 흙을 갈기만 하는 인생에서, 일하는 가운데 미(美)를 찾아 그것을 추구하는 생애였다. 라고 하지 않는다면, 지상에 왔다가 사라져간 수백억 집약농경민의 인생은 너무나도 비참하지 않은가. 작은 새조차도 먹이를 쪼아먹으면서 ‘놀이’를 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머무르는 대부분을 먹이를 생산하기 위해 일하는 인간의 근육통을 치유하기 위해, 신은 모든 일에 아름다움을 부여해 주었다. 이 은총이 없었다면 그들은 아주 옛날에 이미 노동을 내팽개쳤을 것이다.

 

쓰노 유킨토 _ ‘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 소농’  4장, 소농의 의의를 탐색한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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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밭고랑만 봐도 고랑 주인의 농사력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내 밭고랑은 여전히 삐뚤삐뚤

 

올 봄에 밭을 갈아놓고 앞으로 만들어질 밭 모양을 상상하며 '예술 농법'이라고 혼자 이름 붙여 보았다.

 

한 철 지나 내 마음속에 남은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오만'이 아니라 '오기'

 

'두고보자 내년아!'라고

 

그러나,

아름다음이 과연 악다구니로 될까?

그냥 나혼자 하는 말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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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1 23:46 2010/10/11 2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