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사지으며 지역에서 살아가길 꿈 꾸는 청년들에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왜 늘 째깍째깍 줄어드는 초시계는 내 가슴을 오그라들게 했는지.

 저 우주에서 핵폭탄은 날아오고 지구를 만신창이로 만들고 있는 악당 로봇은 왜 그리도 세 보이던지.

 3단 합체 메칸더는 오늘도 기세좋게 야구장을 가르고 출발하지만 늘 죽을둥 살둥 얻어터져야 비밀병기나 악바리 같은 힘이 생기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허무하게 악당 로봇은 죽어버리는 건지....

 

뭐 마무리야  허무했지만 어쨌든지간에 메칸더V가  맘에 들었던 것은, 늘 선의지가 승리한 듯 보였지만 끝내 잡아 족친 악의지의 총 대빵이 메칸더V 1호기의 사랑스런 조종사 지니?의  엄마라는 반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에 의하면 제작회사가 망해서 대충 마무리 하느라 그랬다지만 과정은 중요치 않아!) 공산당, 빨갱이, 미소 양극체제의 시기, 선악이 선명하게 구별되었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만화의 결말을 그렇게 내었으니 이 얼마나 시대에 대한 통쾌한 반항인가. 게다가 때는 노태우가 한중 수교를 맺기도 전인 전두환 때였고 고르바쵸프가 소련을 해체하지도 않았던 심드렁한 시기 였으니 이념이 도덕이 되어 온 사회를 뒤흔들고 있을 때잖은가.

 

  사회화된 도덕적 관성이 교훈이 되지 못한 만화 메칸더V. 그것만으로도 내 마음을 바치기에 충분한데 메칸더v가 내재한 그 진짜 주제를 발견한 순간 난 미친듯이 기뻤다.

 

 그것은 바로 절망. 아니 절망의 없음. 아니 절망이라는 단어가 희망이라는 단어와 동시에 생각되지 않아도 된다는 만남. 핵폭탄이 날아온다는 절망. 악당 로봇에게 쥐어터지고 있다는 절망. 간신히 물리쳤지만 내일 또 다시 찾아 오는 절망.  메칸더V는 삶의 유한함과 존재의 허무함을 만났을때에야 발현되는 힘. 그 근원의 에너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것이 메칸더v가 가진 진짜 주제. ( 물론 우리에게는 메칸더v를 뛰어넘는 대역작 에반게리온이 있지만 에반게리온은 90년대 만들어졌으니 메칸더V가 1빠다. )

 

 핵폭탄은 날아오르고, 북금곰은 얼음보트질을 하고, 불사의 생명을 가진 화폐는 정신을 양식 삼아 스스로를 증식하는 스킬로 인해 가공할 번식력을 가질 수 있게 된 시대. 그러나 우리에게는 매트릭스의 네오가 없다.

 

 

지극히 평범한 네오 되기

 

왼손에 절망 오른손에 아웃백 티켓

골라드세요

 

모피어스의 협박 따윈 없을거에요

대신 가공할 욕망의 K7이 있을거에요.

 

왼손엔 호미 오른손엔 낫

그건 무기잖아요

 

그럴거면 차라리

알파 브라보 탱고

찰리 찰리를 외치겠어요

 

왼손에 절망 오른손에 아웃백 티켓

아니 아니 오른손에 절망 왼손에 그 것

모르겠어요

알아서 드세요

 

왼손이든 오른손이든 상관없잖아요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헐리우드 영화잖아요

 

절망은 절망이에요

삶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종소리에요

 

 

얼마나 기쁜가? 세상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 희망이 없음에 절망은 절망이 아니게 되지 않는가.

나는 우리가 이런 시대에 살고 있음에 행복할 따름이다.  

나는 네오다. 지극히 평범한 네오다. 너도 네오다. 지극히 평범한 네오다. 우리는 네오다. 우리는 네오다. 지극히 평범한 네오다. 그러니 가서 절망하라. 오른손과 왼손의 애매모호한 진실과 욕망 사이에서 과도하게 이성을 남발하다 지쳐쓰러지지 말아라. 그러지 않아도 너는 그냥 네오다.

청년들이여, 그러니 가서 삽을 들고 땅을 파라. 배추를 심어라.

그 곳에 절망의 시작도 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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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3 22:34 2010/09/23 22:34

 절망의 숲

 

숲도 시간이 흐르면 늙는다고 한다. 숲이 늙어간다는 걸 아는 방법은 숲에서 서어나무, 너도밤나무, 졸참나무류등이 우점하기 시작하는 때부터란다.  숲의 하늘을 모두 자신들의 잎사귀로 덮어 그 아래쪽에서 더 이상의 새로운 나무들이 자라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자기 자식들마저 자라지 못하게 한다. 그 때를 인간 학문적 용어로는 극상림이라고 한다는데, 결국에 숲은 인간 말로 극상림 시기를 지나면 스스로 수명을 다해 늙어 죽어서 고목으로 쓰러진다고 한다. 그렇게 하늘이 열리면 새로운 종들이 출현하여 숲에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극상림이라니. 이것 참 지극히 인간적인 발상의 이름 붙이기 아닌가 싶다. 미래세대도 생각지 못하고 자기 배만 채우려는 숲에게 상에다가 극까지 붙여서 최고의 칭호를 붙여주는 걸 보면 오일피크를 넘어 물질문명의 끝으로 달려가는 비곗덩어리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생각이리라. 숲은 그냥 그러한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숲은 새로운 종들에게 제 몸 바쳐 비옥한 땅이라도 남겨주지 주지 않는가.

 인간 세상은 뭔가.  몇 만년 인간 역사의 마무리를 장례식장과 요양원으로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아무것도 남겨 줄 생각은 없는게 분명하다. 해남군만해도 서너군데의 장례식장과 여러곳의 크고 작은 요양원들이 생겨났고, 가장 돈 잘버는 사업이 되어 가고 있다. 이것들이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지역 공동체의 마지막 피까지 모조리 빨아먹고 있는 셈이다.

 

 60, 70년대에는 시골의 젊은이들을 여자는 신발공장으로 남자는 선반공장으로 보내 인간 피를 빨고

 남은 농사꾼들에게 비료와 제초제 값비싼 기계를 줘서 땅의 피를 빨고

 땅도 늙고 인간도 늙으니 무엇 빨아먹을게 더 없나 하고 덤벼드는 아귀들처럼 들러붙어 장례식장과 요양원을 만들어데고 있다.  게다가 도시에 있는 자식들은 좋다고 부모들을 고향 집에서 빼내와 요양원 침대위에 눕혀놓고 한달에 150만원씩 내면서 효도한다고 으쓱데고 있으니 아마도 인간세상은 숲으로 따지면 고목이 되서 더 이상 잎사귀 만들 힘은 없고 개미들에게 구멍 뚫릴 그 때쯤 되지 않았나 싶다. 조만간 인간세상엔 빛바랜 아스팔트 위에 빳빳한 지폐 쪼가리만 굴러다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그러니, 그러니 말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지역에서 농사짓고 사는 것이 희망이다 따위의 희망을 품지 않길 바란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서울 바닥 떠나서 지역에 내려간다고 무슨 화기애애하고 인간미 넘치는 노인네들이 하하호호 기다리고 있지 않을게 분명하다.

 그래도 혹시 희망을 품고 지역으로 간다면

 1년에 20일 정도 일하고 (그것도 핸드폰과 계산기 들고) 만평에 기계돌리면 순수익 천만원, 십만평 기계 돌리면 순수익 일억, 백만평 기계 돌리면 순수익 십억하고 억억데다 빚더미에 쌓여 농약먹는 사람들과 만날 것이다.

부인 자식들은 도시 아파트에 살고 남자 혼자 덩그런 시멘트 블록집에서 밤에는 술과 낮에는 트랙터 라디오 소리 애인삼아 대박을 꿈꾸는 슬픈 노예들과 만날 것이다.

 요양원 들어가기 전에 농사짓던 땅 큰 아들 명의로만 이전했다고 자식들 고함소리 듣다가 오늘 농약 먹을지 내일 먹을지 고민하는 그 쓸쓸함과 만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땅의 청년들이 그냥 절망하길 바란다. 인간 세상이 끝나가고 있다고 심각하게 절망하길 바란다.  절망하다 보면 어쩌면, 어쩔 수 없이 살 희망이 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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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9 03:56 2010/09/19 0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