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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 선생님

 이명박(100년이 지나도 난 이 호칭을 쓸 것이다. 다른 호칭을 붙일 생각은 전혀 없다)의 '취임식'에 장사익 선생님이 나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난 '취임식'을 보지 않았고 재방송도 관련 뉴스도 볼 생각이 없으니 확인은 못하겠지만, 장사익 선생님은 아마 예정대로 나와서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공식 홈페이지에 가보니 몇몇 네티즌이 이미 선생의 결정에 아쉬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또다른 네티즌이 반박글을 올리기도 했다. '노무현 취임식은 되고 이명박 취임식은 안 된다는 논리는 옳지 못하다. 난 선생의 결정을 믿는다'라고 썼다.

 사실 노무현이 말년에 벌인 실정을 보면 이 분 의견에 반박할 말이 없다. 그래도...그래도 좀 씁쓸하다. 이념이나 정파 이전에 '상식'이라는 것이 있다. 지금까지 이명박이 보인 추태는 그가 이념 이전에 '상식'과 최소한의 '도덕'도 없는 사람이라는 증거나 마찬가지다. 사실 난 장사익 선생님이나 다른 민중 음악가들의 사상에 모두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명박의 문제는 이미 사상 문제를 떠난 것이다(한나라당은 이를 자꾸 '진보-보수' 틀로 끌고가려고 하지만 헛소리일 뿐이다). 이명박 이전에 '한국 대통령'을 보라는 분도 있지만, 대통령이라고 해서, 국가라고 해서 내가 무조건 긍정해야 할까? 그건 그들을 절대 숭배해야 할 어떤 '신'의 자리에 올리는 사고 방식은 아닐까?

 나는 사실 불안하다. 장사익 선생이 조정래 씨와 같은 길을 걷게 될까 하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조정래 씨가 박태준을 '위인'의 반열에 올린 것은 '변질'이 아니라 당연한 귀결이었다. <태백산맥>부터 그런 불길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난 오로지 '투쟁', '혁명'만 머리에 가득한 '인간' 없는 '혁명 기계' 염상진의 모습에서, 괴도 루팡을 읽는 젊은이에게 '반동'이라고 욕을 퍼붓는 하대치의 모습에서, 개인의 사소한 행복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민족', '통일',  '역사발전'이라는 너무 거대해서 신기루같은 낙원을 향해 전 '인민'을 몰아가려고 하는 '모세' 조정래를 보았다. 이것은 이미 사회주의가 아니다. 본질을 따져보면 국가 개발 독재와 마찬가지다. 조정래 씨가 이건희 '위인전'을 써도 놀랄 일이 아니다.

  장사익 선생도 같은 길을 걷게 될까? 아니길 바란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것은 사상 문제가 아니다. '상식'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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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관한 글이 없다.

난 이곳을 주로 사회주의 신념을 가지신 분들의 터전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공산주의 중국에 관해 글을 쓰시는 분은 거의 없다.

중국 영화배우에 관한 글은 간혹 있는 것 같지만.

국공내전도, 장제스도, 마오쩌둥도, 천안문도, 덩샤오핑도, 이른바 '사회추의 초급단계'에 관한 글도

여기는 없는 것 같다.

이제 중국은 사실상 자본주의 국가니,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걸까?

그러나 난 이렇게 생각한다.


사회주의는 중국이란 거대한 물음표에

반드시 어떤 답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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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가 넘쳐난다

아웃사이더라면 한마디로 바깥쪽에 있다는 말일테지. '벗어난다'라는 개념이 가장 중요하겠지.

하지만 벗어남에도 단계가 있을 것 같은데...


1단계: '일탈'

 잠깐 벗어난 기분은 든다. 하지만 '관대한' 윗사람-선생님-아버지-지도자님이 허락해줬을 때에야

 

 비로소 느끼는 찰나의 쾌락, 그것도 돈과 여유가 필요한 쾌락에 불과하다.

 겉만 그럴싸한 광고의 소재거리가 된지 오래다. 

 그럼에도 자기는 완전히 자유롭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기 쉽다.

  (*게임오버: '이탈'

 완전히 벗어난다. 의무감이니 사명이니 하는 것에서도 벗어난다.

세상에 관여하고 싶어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으며 세상이 자기한테 관심갖고 관여하는 것도 거부한다.

자본 입장에서 보면 '일탈'한 사람들의  자기과시, 어린이같은
소비 욕구도 없으니 무시.

관심 기울일 필요 없는 '쓰레기'들일 뿐.  하지만 진짜 의미의 '아웃사이더'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폼만 잡는 가짜들이 많다.

자기는 '일탈''에 불과한데도 계속  우기는 자들이다.)


  2단계: '개김'

 '일탈'에 약간의 적극성과 행동이 더해진 결과. 그러나 지속성도 자신만의 구체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눈도 없다. 자칫 잘못하면 더 약자한테 화풀이나 하는 한심한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유령같이 모호한 '페미니스트 *들'을 씹어대면서 울분을 푸는 예비역들처럼.

  3단계: '반항'

 '개김'에 지속성과 나름의 세계관, 철학이 더해진다. 그러나 그 궁극의 목표는 세상이 자기를 받아들여주고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일단 받아들여지면 자신이 반항했던 자들 못지 않게 보수적이 되어, 새로운

반항자들을 '철없는 것들'이라고 젊잖게 훈계하게 된다. 왕년의 반항아들, 불량 청소년들. 서점에 가득한

'인간 승리' 수기 주인공들.

  4단계: '저항'

 '반항'의  순응하는 태도도 버리고  체제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직 추상적이고 모순도 있었던 철학과

시계관이 비로소 일관된 틀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언행일치'라는 중요하지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적은 덕목을 지키는 것이,

다른 어느 경우보다도 더 중요하다.

 5단계: '혁명'

 '저항'하는 자들이 뭉치고 인내심이 한계에 달할 때(즉 지배층이 최소한의 교활함까지 상실하고 바보갈은

삽질을 계속할 때)도달하는 경지. 그런다고 꼭 좋은 것은 아니다(미안하다. 그러나 나는 인간 본성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 않는 보수주의자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만 '이상'이라  부르는 변태적인 인형집의 주인으로

몰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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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가족&quot;에 대해서(1)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볼려고 한다.

 "가족"이란 주제를 놓고 볼 때, 나는 좌파인가? 진보인가?

 미안하다.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도 "미안"할 일은 많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부러 진보적인 척, 정치적으로 올바른 척은 더 이상 할 수 없다)

 

  


나는 가족은,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아버지-자식 한두명, 아니 세 명이 제일 좋지...

이 구성의 이성애 소가족이 "가족"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어머니를 아버지의 앞에 놓은 것을 유의해 주시길.

그러면서도 스스로가, 소위 "정치적 올바름"이란 걸 조금은  지니고 있다고,

거의 용을 쓰며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동성애 가족도 상관없어. 난 동성애에 편견이 없거든"

난 끝에 이런 말을 덧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의 자식이, 스무살도 일찌감치 넘기고 했으니,

 "슬슬 결혼해야지?"라는 말을 나와 내 아내가 꺼낼려고 할때쯤,

갑자기 자신의 동성 애인을 데려와서는 싱글벙글 거린다면,

나는 용납할 수 있을까?(물론 독립한 한 개체의 선택을 가지고,

내가 '용납'이란 말을 쓰는 건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머리만 이렇게 생각할 뿐이다.  내 감정의 움직임은

이성의 통제대로 돌아갈 것 같지 않다. 솔직히.)

물론, 아직 오지 않는 미래를 가지고 여기서 왈가왈부하기는 어렵다.

나중에 어떻게 될 지 봐야 알겠다만...

사실 그런 상황이 되도록 오지 않았으면 한다.

이유는 정확히 말해야 하겠지.

그런 상황이 되면 내가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나도, "동성애자 자식을 둔 부모"라는 굴레를 내가 뒤집어쓰기는 싫은 것이다.

그런다고 자식을, 보신탕거리로 끓일 누렁이마냥 패거나,

"의절"이란 희비극의 상황을 연출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 경우엔 단지, 자식을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숨기고 싶을 뿐이다.

쉽게 말해, "'가족'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만 조용히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미안하다. 하지만 이것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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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브에나비스타...

디디님의 [마콘도, 혹은 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에 관련된 글.

 

사실은 빔 벤더스의 명성 때문에 어쩌다 영화를 보게 되었지만,

 

보면서 아, 이게 문화고 예술이고 노래인 거구나.

 

인생이 쌓이면서 진정으로 성숙해진 예술이란 게, 이런 거구나.

 

했던 기억이 난다.

 

....

 

참, 한국은 아직도, 뭔가 좋은 걸 더 많은 사람이 즐기고 하는 것은 좋지만,

 

그게 너무나, 똑같아져버리고, 고정관념에 갇혀버리고, 무엇보다 몇몇 "고수"가,

 

모든 해석을 독점해버리면서, 그 외의 것은 그저 "못하는 것", "열등한 것"으로나 치부,

 

결국 보통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거나 보면서, 다시 소외되버리는...

 

그런 식이 되어버린다.

 

좀 예가 같을지는 모르겠으나, 한때 정말 대단했던 디디알만 봐도,

 

사실 그냥, 춤을 즐기자고 만든 물건 아닌가.

 

하지만 곧 있으니, 난이도는 너무나 올라가버리고, 그냥 우스꽝스러워도 좋으니

 

그냥 "흔들어"대고 싶었던 아저씨 아줌마, 그리고 나 같은 몸치는

 

또 소외되버린다. 고수들의 퍼포먼스에 넋이 나가서 쳐다보는 구경꾼으로 전락한 채...

 

슬픈 일이다.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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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제, 부끄러운 행복

무화과님의 [현실도피] 에 관련된 글.

나는 축복받은 "신의 아들"이다. 쉽게 말해 면제자다. 너무나 약한 나. 국가를 위해 봉사(라고 쓰고, "죽어라"라고 읽는다)하라는 그 빌어먹을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을 때, 과장 않고,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면제해 달라고 기도한 것 뿐. 하느님 바쁘신데, 그 옷자락 붙잡고 한다는 부탁이, 세계 평화니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행복 같은 거여도 부족할 판에 군대 안 가게 해 주세요, 이런 소리나 지껄여대며, 우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 젊은 나한테 왜 이런 게 왔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어떤 병. 덕분에 나는, 면제되고, 수술 잘 되서 건강도 되찾았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아직도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감옥에 있는 징집 거부자들, 또는 이제 그 투쟁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뿐. (+대체복무제 도입을 찬성하는 정당에 표 던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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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못했다, 안티삼성 축제

돕헤드님의 ['아저씨, 저는 안티삼성인데요?'] 에 관련된 글.

광주에서 살다보니 한 번 서울 올라갈 결심 하기가 어렵다...

 

고 해도 변명인 것도 사실이다.

 

아펙에는 꼭 간다. 거기서도 안티 삼성의 목소리가 크게 났으면 좋겠다.

 

삼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삼성 반대를 무슨 이념의 문제로 몰고 갈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망언, 내가 이 문구를 처음 접한 건

 

어렸을 때지만, 이미 그때도 나는 정이 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었다.

 

빌어먹을, 그래 니들 1등끼리 다 해먹고 살아라! 라고 생각했다.

 

2등이면 어떻고, 3등, 아니 꼴등이면 어떤가, 그럼 살 가치도 없는 건가.

 

니들이 기억 안해줘도 상관 없다. 니들이 기억해주는 거, 싫다.

 

나는 나대로,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 거다.

 

삼성을 거부하는 건, 곧, 나의 진정한 "자유"의 선언이다.

 

1등 따윈, 엿이나 바꿔 먹으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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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가지고 싶은 DVD

레미제라블 DVD입니다.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팅......이라는 군요. 국내에선 출시가 안 된 것 같습니다. 저한테는 10주년 기념 공연 DVD만 있습니다. 뮤지컬의 주요 노래들을 부르는 공연인데, 정말 좋더군요. 노래들도 다 좋고. (테나르디에 부부의 노래가 특히 흥겹고 좋았습니다. 노래 정말 잘하더군요) 사실은 DVD보다는 공연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만, 언제 또 내한공연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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