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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반 공감

 

 

 두리반에 관한 논쟁에 참여할려고 글을 썼는데, 논쟁글이 닫혀져 버렸다.

이왕 쓴김에 두리반에 더해서 운동에 대한 생각을 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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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리반과 관련한 트윗과 포스팅을 보다가 참담한 글을 보게 되었다. 그

글의 내용은 몇 년전에 본 기사에 나온 법학자의 관점과 흡사했다.

 

 '트랜스젠더가 성폭행을 당했더라도, 법규정이 없고, 성립이 되지 않기 때

문에  폭행죄만 적용될 수 있다'

 

 내가 참담함을 느낀 이유는 논란이 된 글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동정

과 시혜로 두리반을 바라보고 있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두리반

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들도, 권리금과 보상에 대한 포스팅을 읽고 나

니, 명분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나보다. 보상과 이면합의의 시나리오 하나

가 死대강반대나 be정규직 문구를 프로필 사진에 달고 있는 이들로 하여

금 두리반을 비합리적 투쟁으로 단정짓게 만들었다.

 

1. '권리금'이라는 떡밥과 명분찾기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이나 두리반에서 앰네스티에 보낸 호소문에 나

와 있는  '시설투자비'도 권리금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해주지 못한다. 권리

금이라는 개념 자체가 동북아시아, 한국에서만 있기 때문이다. 시설권리금,

바닥권리금, 영업권리금의 땅, 임대, 상가 뿐만 아니라 우유배달, 신문배달

등의 사회전반을 아우르는 권리금을 뭐라 말할 것인가.

 

 김대중 정부의 정비사업으로 포장된 신자유주의 (재)개발은 수많은 문제

들을 야기 시켰다. 권리금에 대한 논의, 입법도 전무하다가 2001년에  만

들어진게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이다. 하지만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도

계약해지, (재)개발 등으로 인해 권리금을 잃게 되어 자살한 임차인들의

죽음을 대변하지 못했다.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에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지금까지도 '권리금'에 대해 국가, 자본 뿐만이니라, 기존 사회운동에서도

대응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주류 경제학 뿐만 아니라 맑스정치경제학에

서도 '권리금'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운동조차 그들이 말하는 '중간계급'의 죽음을 모른채 하다가 용산

참사로 인해 무시하지 못할 정도가 되자, 마련한 것이 '계급동맹'을 내세운

소극적 연대이다. 권리금과 (재)개발 대한 논의와 대안은 헨리조지를 따르

는 토지정의시민연대가 홀로 내놓고 있는 형편이다.

 

 두리반에 연대는 해야 겠으나 어디에 나와있지도 않은 새로운 투쟁에 갈

피를 못잡고 있다가, 권리금과 이면합의의 시나리오 하나에 명분찾기 마저

도 그만두는 것이다.

 

2.

 

 권리금 하나만의 이슈가 아니라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가 극명하게 드러

나고 있는 두리반 현장에 왜 기존 운동이 소극적 연대에 그치고 있을까?

 

  합법투쟁, 의회투쟁을 하는 민노당이 법에 나와 있지 않는 '권리금'과 이

를 둘러싼 관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할리 만무할 뿐 아니라, 민주노총

을 비롯한 운동들이 맑스정치, 경제, 담론에 갇혀 도심재개발에 맞선 투쟁

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용산에서도 그러했듯이 운동 안에서도 고립되고 있는 것이다.논쟁글에 써

있는 있는 것처럼, 그들이 원하는 명분을 찾지 못한 투쟁은 '아나키스트'의

투쟁이 되버리고 마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파시스트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 역시 그들과 다른 운

동을 하는이들을 아나키스트라고 칭했다. 파시스트와 사회주의자에 의해서

'아나키스트'들이 추방되고 숙청당한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존 운동이 용산, 두리반 뿐만 아니라 촛불 '광장'의  '잡민

(multitude)의 투쟁'에 갈피를 못잡고 두리반을 '아나키스트'라고 칭한 점은

의미심장하다. 두리반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진행되고 있는 '직접행동'이 '

아나키'인가에 대해서는 평가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기존과 다른 운동'을

아나키로 폄하하는 용법은 다시 말하지만 늘 있어왔던 일이다.

 

3. 두리반의 '생동'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운동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질때 '아나키'로 폄하하

기는 너무나도 쉽다. 명분찾기를 그만두고 방관하면 되기 때문이다.

 2003~4년 명동성당 들머리에서의 이주노동자 농성투쟁 때도 운동 내부

의 반응도 이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노동운동에서의 비정규직노동자, 여

성노동자, 이주노동자, 실업노동자운동 등에 대한 운동내부의 미온적 태도,

온건화된 민주노총의 문제만이 아니다.

 

  두리반을 철거민의 시선이 아닌, 국가,자본의 관점으로 보는 것에 자칭 '

진보'들이 동의하는 참담한 현실이다. 이는  홍대 총장, 직원, 학생들이 보

기에는 똥휴지 치우는 아줌마들이 어디에서 쉬고 얼마를 받는지 지 알바

가 아닌 것처럼 두리반을 대하는 것이다. 국가와 자본은 언제라도 법과 정

의에 따라 정당하게 처리할 수 있지 않은가?

 

 서울만해도 300개가 넘는 곳에서 (재)개발이 예정 중에 있거나 진행중에

있다. 그곳에서 두리반은 현실에 맞서고 있는 투쟁의 현장이다. 철거민, 기

륭 노동자, 홍대청소노동자의 시선이 아니라 일반적인 법적인 원칙에 따라

사회의 이익을 위해 이면 합의금을 받고  끝내라는 것이 뼈아픈 이야기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혹자는 두리반을 뉴욕에서의 '도시투쟁'과 비교하기도 한다. 두리반의 '생

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물론 비판적 성찰을 가지고 2011년에도 여전히 진

행중인 두리반을 운동에서조차 고립시키지 않고 같이 만들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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