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0월 1일 정진우 노동당 부대표는 수사기관이 본인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비롯해 대화 상대방 3천여 명의 개인정보를 사찰했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11월 27일 공판에서, 실제로 개인정보가 제공된 카카오톡 이용자가 2368명이라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정진우씨의 연락으로 비로소 자신의 개인정보가 제공된 사실을 알게 된 피해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고, 12월 23일 헌법소원 제기와 손해배상 청구 등 대응을 시작했습니다. 피해자들 중 박진씨가 심경을 담은 글을 썼습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2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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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좀 해봤다. 나는 어떤 물질로 구성되었으며 어떤 사람일까. 곰곰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검찰이 정진우 씨의 카카오톡을 털어서 2368명의 개인정보를 들춰본 사람들이 있다는데, 그중에 내가 끼었다. 나를 들여다 보았을지도 모를 그는 알까. 내가 어떤 사람일지….

나와 정진우 씨는 잘 모르는 사이다. 어느 집회에선가 마주쳤을 때 '서로 알 법도 한데 눈 부딪혔으니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던 기억이 있는 정도의 안면이다. 그러나 그와 나는 어느 카카오톡 방에서 친구로 맺어져 있었던가 보다. '삼성'과 관련한 사안을 나누는 어떤 방으로 짐작한다. 그 방에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싹쓸이 자료 제공의 대상이 되었다. 

정진우 씨가 세월호 사건으로 집회·시위를 하다 구속된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이의 카카오톡 정보가 정보 기관에 무차별적으로 제공되었다는 보도도 보았다. 도대체 왜 집회·시위로 재판받는 이의 어떤 증거를 더 수집하기 위해 카카오톡 방을 뒤져야 하는지 알 수도 없지만, 사건과 상관도 없는 모든 단체 카톡방을 뒤지고 그 방의 누군가의 정보를 얻는다니, 맙소사.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심지어 내가 2368분의 1이었다니…. 이를 알게 된 순간을 말하자면, "기분 참 더럽다."

정진우 씨 카카오톡의 단톡방은 세월호, 밀양, 쌍용차, 철도노조, 삼성 등 우리 사회 주요 현안들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는 곳이었다. 그 방 구성원들 정보를 누군가 요구했다는 것은 정진우 씨 집회·시위와 관련한 어떤 범죄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는 것 이상이었다. 본래 수사나 공소제기 목적이 아니라 사회에 비판적인 이들을 감시할 목적이 분명하다. 

정진우 씨가 느낀 당황스러움만큼 나도 당황스럽다.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카카오톡 압수수색 영장 집행에 대해 국가와 다음카카오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과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로 했다. 피해자들 요구가 해결되는 것이 상식일 테지만 요즘 같은 법원이 당연한 판단을 할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법원으로 사건을 들고 간다. "국가가 나를 감시했답니다. 가족과 친구들과 동료들과 수다를 떨거나 회의를 하거나 고민을 나누었던 내 사생활이 누군가에 의해 발가벗겨졌답니다"라고 외쳐봐야 들어줄 이 없는 공허한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감시와 사찰은 당연하다. 그리고 감시와 사찰이 당연하다는 생각은 우리 안의 판옵티콘이 되었다. 판옵티콘이라 불리는 원형 감옥에서는 간수가 중앙에 있는 탑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다. 박정자 교수는 "감시의 시선은 보이는 듯할 필요는 있되 확인될 필요는 없다. 시선은 확인되지 않을 때 더욱 공포를 자아낸다. 판옵티콘이야말로 단순히 시선 하나로 가동되는 이상적인 권력 장치이다. 이때 시선은 앎과 직결된다. 죄수를 바라보는 감시인은 죄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되지만 감시인을 바라보지 못하는 죄수는 감시인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어느 순간,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사회를 비판하는 일에 앞장 서 있기 때문에 늘 감시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생각은 실제로 감시당하는 것보다 훨씬 억압적이다. 무얼 먹거나 무얼 입을 때조차 누군가 나를 보고 있고, 누군가 대화를 도청하고 있을지 모르며 누군가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알거나 사무실 내 컴퓨터를 밤늦게 들어와 들춰보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만, 정부와 자본이 원하는 방향으로 순종하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해 판옵티콘에 갇혔다.

2012년 8월 한 남자가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의 민간인 불법사찰 피해자 엄윤섭 씨였다. 기무사에 의해 자신뿐만 아니라 아내까지 사찰대상이었음을 알게 된 그는 "이명박 정부는 가정파괴범"이라며 분노했다. 그는 자신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두려워했고 친한 이들의 연락도 피한 채 자신 근처에 "오지 말라"고 말했다. 불안과 공포, 분노는 결국 그를 극단적 선택으로 몰았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관련 당사자들과 가족들을 인터뷰했었다. 그들은 내란음모라는 사건에 빼곡히 쌓여있던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증거물로 만나야 했다. 이후 그들은 다시는 기록하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30년 넘게 모은 일기와 편지. 제가 해직당하고 복권되면서 모았던 그 소중한 재판기록 등도 다 버렸어요. 매우 힘들게 이겼거든요. 나의 인생에 소중한 기록들을 다 버렸어요…." 감시와 사찰은 단지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생활, 추억과 기억마저 모두 송두리째 빼앗아 간다. 그들의 육성을 기록하면서 나 역시 판옵티콘에 갇히게 되었다. 아주 몹쓸 세월이다. 그런데 이번 카카오톡 사건은 그러한 생각에 근거를 제시한 꼴이다. 맞구나, 감시당한 것이 맞구나. 비로소 내가 볼 수 없는 불빛 너머 누군가 시선 속에 갇혀있음이 증명되었다. 

'타인의 삶'이라는 독일 영화가 있다. 1984년 동독의 비밀경찰 스타지의 감시원이었던 비슬러가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 크리스타를 감시하다 스스로 변화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를 통해 감시와 사찰 행위에 회의를 느낀 비슬러는 감시하던 그들을 결론적으로 보호하게 된다. 그러나 감시당한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는 스타지가 존재했던 시절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고 비극적 삶을 산다. 독일 통일 이후 비슬러의 보이지 않았던 도움을 알게 된 드라이만이 쓴 책을 서점에서 만난 비슬러는 '이 책을 'HGW/XX7'에게 바칩니다.'라는 문구를 발견한다. 비슬러는 책을 들고 와 계산대 앞에 서고, 선물로 포장할 것이냐는 점원의 질문에 "아니오. 이 책은 나를 위한 겁니다"라고 말한다. 당시 동독 정부는 비밀경찰인 슈타지를 이용, 국민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슈타지는 10만 명 직원과 20만 명 정보원을 통해 국민들을 감시하고 있었으며, 이는 동독 국민 4명당 1명에 해당하는 수치였다고 알려져 있다.

문득 카카오톡을 들여다보고 있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졌다. "나를 통해서 이 시대 고통받는 누군가들을 만나면 좋겠습니다. 밀양과 쌍용차, 삼성과 세월호에서 침몰하는 우리 시대 인권들을 짚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을 들여다보면서 당신이 보아야 할 것은, 불법으로 모아야 할 정보들의 정체는 그것입니다. 당신이 들여다 보고 있는 내 삶을 통해 이 시대의 소중한 가치를 당신에게 전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어쩌면 나는 내 소임을 다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 시대의 스타지들이 몇 명이나 될지 우리는 모른다. 그조차 국가의 안보와 관련되어 있을 테니까. 민주주의는 무릇 시끄러운 것이며, 사회의 균형과 발전은 비판과 견제를 통해서 나온다. 그것을 막겠다고 나서는 국가는 이미 정당성을 잃었다. 국민을 감시하고 사찰하는 권력은 독재다. 정진우 씨 카카오톡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 독재의 말로가 비참했다는 것을 아버지한테서 배우지 못한 대통령. 그 대통령과 함께 살고 있는 오늘은 너무나 피로하다. 

마지막으로, 당신들이 뒤적인 내 삶이 어떻던가. 뒤적여 보니, 참 이 여자 피곤하게 산다 싶지 않은가? 당신들 때문이다. 우리 일 좀 줄이고 서로 살자, 피차간에 이게 사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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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2 16:27 2015/01/02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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