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0월 1일 정진우 노동당 부대표는 수사기관이 본인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비롯해 대화 상대방 3천여 명의 개인정보를 사찰했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11월 27일 공판에서, 실제로 개인정보가 제공된 카카오톡 이용자가 2368명이라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정진우씨의 연락으로 비로소 자신의 개인정보가 제공된 사실을 알게 된 피해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고, 12월 23일 헌법소원 제기와 손해배상 청구 등 대응을 시작했습니다. 피해자들 중 나위님이 심경을 담은 글을 썼습니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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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관객이에요”

2006년에 개봉한 독일 영화 <타인의 삶>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대사다. 영화는 1984년 독일을 배경으로 하는데, 당시 서독에서는 자신도 모른 채 수많은 사람들이 동독 비밀경찰(슈타지)에게 감시 받았다. 10만 명의 비밀 경찰과 20만 명이 넘는 스파이는 전화 도청, 미행 등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사상과 정치 활동을 감시하고 어떻게든 체포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활동했다. 영화의 주인공인 비밀경찰 비즐러는 동독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애인 크리스타를 사찰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타인의 삶에 애정을 느끼게 된다. 어느날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크리스타에게 비밀경찰 비즐러가 다가가 한 말이 바로 “나는 당신의 관객이에요”였다. 크리스타는 인기 여배우였기 때문에 그의 말을 ‘무대’의 관객이라고 알아들었겠지만, 비즐러는 사실 크리스타의 ‘삶 자체’를 들여다보고 있는 관객이었다.
   
“나는 당신의 관객이에요”, 영화에서 대사는 아름다웠다. 비록 동기와 목적은 그릇되었을지언정 영화를 보다보면 타인의 삶에서 사랑과 인간애를 발견해가는 비즐러의 모습에 동화되고, 때문에 그 대사 또한 긍정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삶을 망치기 위해 도청하고 감시하고 있는 비밀경찰인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당사자인 크리스타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데도 그 대사가 용인되는 장면이었다. (사실 이 긍정과 용인 때문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는 영화라는 생각도 들지만, 영화에 대한 평은 다른 자리에서 하기로 하자.)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누군가 내게 다가와 “나는 당신 (삶의) 관객이에요”라고 한다면 어떨까.

“국가는 당신의 사상과 정치활동의 관객이에요”, 알고 있었지만 소름 끼쳤던 어느날

나는 원래 SNS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다.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렸더니 페북이 자동으로 그 사람 얼굴을 인식해서 ‘00님을 태그하시겠어요?’라는 질문을 한 순간 사진은 잘 올리지 않게 되었고, 올리더라도 금방 지우게 됐다. 2013년 8월, 울산 희망버스 투쟁에 참가했던 친구 한 명이 재판을 받으러 갔더니 채증 증거자료로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등록되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카톡 프로필에 내 얼굴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트위터, 페북 등에서 가끔 00이 경찰이니 친구를 끊으라는 경고성 글을 봤을 때도 이곳은 이미 감시당하고 있구나, 생각하고 쉽사리 말을 내뱉지 못하게 됐다.

그럼에도 SNS 어플을 내 폰에서 삭제하지 않고 매일 들여다 봤던 이유는 이미 그것들이 중요한 소통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SNS에서는 다양한 이야기와 고민들이 쏟아져나왔고 때로는 그 공간을 통해 들은 따뜻한 말 한 마디, 응원 한 마디가 힘을 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힘겹게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 민중들에게는 그 통로가 전국을 이어주기도 하고 연대의 한 마디를 전달받을 수 있게 하는, 그런 절박한 공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관객들이 나와 내 동료들의 SNS를 감시하고 사찰한다는 것만 빼면, SNS는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은 도구였을 것이다.

그런데 작년 10월, 한 명의 카톡이 사찰당하면서 그와 관련된 3,000여 명의 카톡도 함께 털렸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소식을 듣고 ‘3천 명? 30명, 300명도 아니고 3천 명이면 그 중에 내 말 한 마디쯤은 있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찰 대상이었던 정진우 동지에게 연락이 왔다. 함께 사용해던 대화방이 사찰당했으니 함께 법적 대응을 준비하자는 제안이었다. 그 대화방은 2014년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투쟁 과정에서 골리앗 삼성에 맞서 연대의 힘을 모으던 사람들이 함께 있던 공간이었다. 난 그 대화방에서 심심찮게 말을 했던 것 같다. 회의에 참석한다, 불참한다는 단순 의사 전달부터 회의 속기록을 공유한다거나 집회 시간이나 장소를 문의하는 등의 말이었다. 그 방이 사찰당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그 방에서 오갔던 수많은 말들이 머리를 스쳤다. 어떤 소식에 함께 눈물 흘리기도 했고, 어떤 소식에 함께 분노하기도 했고, 또 많은 날들에는 당장의 투쟁을 어떻게 할지 서로 논의하고 공유했다. 그걸 보면서 검찰, 경찰들도 영화 <타인의 삶>의 비밀경찰처럼 우리의 투쟁에 공감하고 슬퍼하고, 그래서 우리 삶의 ‘관객’이 되었을까. 아, 그럴 리는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우리의 말들을 통해 나와 내 동료들의 머리에 붙인 바코드를 찍어보고, 삑삑 소리가 날 단어가 하나라도 있는지 몰두했을 것이다.

개인이 사찰을 조심하는 게 아니라 사이버 사찰 자체를 중단시킬 저항에 함께하고 싶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억울하다. SNS는 정말이지 손쉬운 소통 도구다. 유용한 자료를 공유하기도 쉽고, 내 근황을 통해 사람들과 직간접적으로 삶을 나누기도 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왜 내가 원하지 않는 관객들이 여기에 끼어들어서 우리의 모든 말들을 수집하고 감시하는건지, 그리고 그 감시 때문에 왜 우리가 말을 못하게 되어야 하는지 화가 났다. 우리는 안 그래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적은데, 우리의 무기는 말 밖에 없는데, 우리는 단순히 떠드는 몇 마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투쟁하는 사람들의 언어와 말을 널리 전파하고 싶은건데, 왜 그걸 가로막히고 그래서 모두가 암묵적으로 스스로를 검열하고 입을 다물어야 하는지, 생각할수록 이건 아니다 싶었다. 처음에는 나 한 명이 보안을 조심하자는 생각으로 SNS 사용을 줄이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빼앗기기에는 우리는 아직도 할 말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일단 법적 대응의 일환으로 소송을 함께하게 됐다. 수입이 없는 나에겐 10만원 정도의 소송 비용도 부담이지만 그래도 내 말을 빼앗기는 것보다, 내가 침묵하는 것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침묵하게 되는 것보다 무언가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는 아주 작은 바람이었다. 우리가 투명인간이 되어 흔적이 남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흔적들이 감시당하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퍼져야 한다는 그런 바람.

우리는 언제나 감시당한다. 우리를 지배하려는 사람들과 체제가 유지되는 한 언제나 그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의 멋대로 사찰에 당하기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말하면서 행동하면서 모이면서 우리 말과 사상, 행동의 자유를 지켜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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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14 15:40 2015/01/14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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