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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규명부터 잘못된 처방전, 인터넷 실명제

파차님의 [원인규명부터 잘못된 처방전, 인터넷 실명제] 에 관련된 글.

 

올해 초 인터넷에서는 아주 평범한 한 학생이 누리꾼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 학생은 쉬는 시간에 교실 칠판에 천사모양을 한 날개를 그려놓고 사진을 찍어서 실명으로 운영되고 있는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올려놓았다. 평범하게 보이는 사진이었지만, 이 사진은 누리꾼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천사소년’이라는 별명까지도 얻었다. 포털사이트 인기검색어 상위에 링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학생은 미니홈피 프로필 게시판에 자신이 싫어하는 가수로 ‘핑클’을 적어놓았다는 이유 때문에 순식간에 핑클 팬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으며, 결국 자신의 미니홈피를 폐쇄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인터넷 실명제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명제 게시판에서는 단순히 개인의 사적인 의견을 올려놓는 것도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는 것. 또 실명제 게시판에서는 민감한 개인정보가 쉽게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프라이버시 침해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사이버 폭력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실명제 게시판에서도 욕설과 비난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 우리가 인터넷 실명제를 놓고 꼭 고려해 봐야할 사항이다.


몇일전 정보통신부는 사이버 폭력의 주요 원인이 인터넷 익명성에 있다면서,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보통신부는 익명성이 왜 사이버폭력의 주요 원인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설득력있는 근거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정보통신부가 사이버폭력의 대표적인 사례로 주장하는 사건들의 직접적인 원인이 익명성 때문인지에 대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사이버 폭력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는 ‘연예인X파일’사건. 이 사건은 제일기획이라는 회사가 연예인들의 개인정보를 무분별하게 수집하고, 무책임하게 유출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것의 직접적인 원인을 익명성으로 볼 수 있을까. 또다른 사례를 보자. 얼마전 지하철에서 애완견의 배설물을 치우지 않아서 문제가 된 여성이 네티즌들로부터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의 핵심적인 원인는 그 여성을 식별할 수 있는 사진과 개인정보가 인터넷에 올려짐으로 해서 네티즌들로부터 표적이 되었고, 결국 프라이버시 침해와 마녀사냥식의 인민재판을 받은 것이다. 정보통신부가 이런 문제들의 원인을 익명성으로만 한정해서 보는 것은 잘못된 원인분석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정말 익명적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대부분의 포털사이트와 민간홈페이지에서는 회원으로 가입할 때, 실명과 주민등록번호를 통해서 개인을 인증하는 시스템을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덧글을 쓸때 조차도 먼저 로그인을 해야만 하는 사이트들이 늘고 있다. 이렇게 실명제로 운영되는 게시판에서도 사이버폭력의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며, 천사소년의 사례와 같이 프라이버시 침해라는 또다른 인권침해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로그인을 했을때, 실명이 아니라 아이디만 보인다고 해서 익명게시판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로그인을 하고 글을 쓰게 되면 누가 썼는지, 언제 썼는지에 대한 기록들이 모두 서버에 남게 되고, 글쓴이에 대한 파악을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터넷 실명제는 인터넷에서 개인을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제도의 하나로 사이버감시체제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위험한 제도이다. 글을쓸때 개인인증을 해야 한다면, 인터넷에서 누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글을 올리는지 정부나 인터넷 사업자가 쉽게 모니터링 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정부 정책이나 정치인에 대한 과감한 비판이나 용감한 고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오히려 이것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통신비밀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권리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도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인터넷 실명제로 인해서 발생할 수 있는 개인정보유출과 이로 인해서 발생할 수 있는 제2, 제3의 문제들이다. 인터넷 실명제를 하기 위해서는 사이트 운영자가 개인인증에 필요한 주민등록번호나 실명을 수집해야 하며, 상시적인 확인을 위해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놓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인터넷 이용자수가 3천만명에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때, 인터넷 실명제를 위한 개인인증 데이터베이스는 엄청난 규모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데이터베이스는 언제나 유출의 위험을 안고 있다. 아무리 보안을 철저히 한다고 하더라도 해킹에 의한 유출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으며, 내부자에 의한 유출은 근본적으로 막기 힘들다.


“인기포털사이트 3천만명 주민등록번호, 실명, 인기아이디 유출”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게 될 지도 모른다. 끔찍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미 우리나라 인터넷 사이트들은 주민등록번호와 같이 필요없는 개인정보를 무분별하게 수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처해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한번 유출된 개인정보는 악용될 소지도 높다. 이미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번호나 아이디를 도용한 사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쓰지도 않은 글에 대해서 도용된 아이디와 주민등록번호 때문에 고소고발을 당할 수도 있다.


사이버인권침해와 폭력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원인규명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실제 실효성에도 문제가 있는 인터넷 실명제를 졸속으로 도입하려는 것은 잘못된 처방이다.


사이버폭력의 근본적인 원인에는 프라이버시와 같은 타인에 대한 인권감수성이 부재,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등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의 교육체계에서는 사실상 이런 인권에 대한 교육이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인권에 대한 의식을 한층 높일 수 있는 사회적인 교육과 캠페인을 벌여나가야 한다. 또한 개인정보의 과도한 수집은 사이버폭력의 표적이 될 수 있는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주민등록번호 등 민감한 정보는 수집하지 못하도록 하고, 수집할 경우에도 OECD 프라이버시보호원칙에 따른 적절한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제부터라도 정부는 사이버폭력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원인규명과 함께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들을 보호하면서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설득력 있는 대책을 마련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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