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 연속혁명과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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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의 연속혁명과 시사점

 

 

핵심: 부르주아지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적/의식적 독립이다. 일국사회주의론의 해악과 국제주의 원칙.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잡는 순간에 계속되고 더욱 격렬해지는 계급투쟁 과정 속에서 국유화 조치를 도입하는 등 사회주의 경제로 이행하게 된다.

 

현 시기에 비추어 잠정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

 혁명을 준비하는 시기(계급투쟁이 전반적으로 고양되었다고 보기 힘든 시기)에 있어서 부르주아지와 정치적으로 '타협'한다는 것은 사실상 대중추수주의이며 혁명기에 이 타협은 정치적 자살이 될 것이다.

 

 20세기 스탈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문제가 어떠한 '권력형태'의 문제라는 사실을 부정하며,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라는 낡아빠진 슬로건에 집착했다. 그들은 격동적으로 전개되는 혁명의 과정을 자신의 이념에 따라 재단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이미 그 성격을 노동자권력의 '형태'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태'로 증명한 러시아혁명을 '노동자 농민의 정부'라는 슬로건 안에 가두었다. 그러나 이는 허공에다 칼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그 당시 일어나고 있었던 중국혁명의 노동자들이 그 슬로건을 몸으로 뛰어넘으려 하자 그 칼날은 코민테른의 완전히 잘못된 지침이 되었고, 바로 중국 노동자계급의 목을 향하고 말았다. 그들이 '농민 정부'라는 명칭을 붙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찢어버리려 눈에 불을 켠 부르주아 권력과 함께. 이는 스탈린주의 '인민전선'의 기본적 내용이다. 그들은 '권력형태'의 문제라는 사실은 부정했으나 결과적으로 인민전선을 통해 수립되는 부르주아 권력(남한 NL의 표현으로 진보적 민주주의 정권) '형태'를 옹호했다.

 이들은 현실에서 그 '중간 단계'가 엄청나게 급속도로 사라지며, 때로는 아예 건너뛰기도 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절망과 비탄에 빠진 그들이 몸소 실천한 것이 바로 소련의 스탈린주의 반혁명과 코민테른의 파산, 즉 세계혁명의 말살이었다.

 현재 남한에서 아직도 민족/민주변혁 또는 민중/민주변혁을 얘기하는 자들이 있다. 80~90년대에 수입된 낡아빠진스탈린주의 서적을 아직도 이론적 교조로 삼는 자들이다. (단순히 낡았다는 것이 아니라 이 책들이 담고 있는 이론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썩고 구린 냄새가 난다) 또한 사회주의 혁명 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전에' 어떠한 '단계'를 설정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들이다. 그 답답한 사람들에게 지금 남한의 현실은 스탈린주의 서적에 나와있는 러시아의 짜르체제다. 2012년 현재 보통선거와 의회주의가 뿌리잡은 이 남한 사회에서 '미완성된 민주주의 과제'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짜르 러시아와 같이 노동자계급은 민주주의의 불철저함으로 고통받는다고 할 것인가? 어찌됐든, 그들이 레닌의 글을 인용해와 그 인용구를 자신들이 원하는 권력형태에 끼워맞추든, 참으로 부르주아지의 입맛에 맞는 사상이라고 할 만하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그들의 이론이 아니라 그들의 실천이다. 그리고 그 실천은 '야권연대', '연립정부'의 이름으로 지금 남한에서 노동자계급에게 행해지고 있다.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자들을 '지도하며' 진보적 민주주의 과제를 해결할 '진보적' 부르주아지라는 관념은 그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며, 그들은 그 썩어빠진 관념의 자를 대고 현실을 난도질하며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발전의 각도를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다.

 

 스탈린주의의 파산과 그 잔당들을 보며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은 우리가 건설할 권력의 형태가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우리는 다른 계급과 권력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결코 그 계급이 우리가 건설할 정부에 똑같은 지도력과 '평등'한 조건으로 참여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오직 정치세력화한 노동자계급만이 여타 피억압 계급을 지도해서 권력을 취하여 자본가계급을 몰아내고 자본주의의 잔재를 일소할것이다. 그 사실은 무엇보다도 지금의 현실이 증명한다. 현 시기 프롤레타리아트 말고 어떠한 독자적 정당을 건설할 수 있는(있을 것으로 보이는) 세력이 있는가? 없다. 농민은 갈수록 대농장화, 집단화 되고 있지만 이들에게 어떠한 독자적 정당 건설의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의식화한 농민은 되려 쁘띠부르주아의 성실한 동맹세력이 되고 있을 뿐이다. 민주노동당 안에 정치세력화한 농민들은 자기 정당에 부르주아지가 유입해 들어오더라도 어떠한 반발도 하지 않았으며 현재 부르주아 연립정부 참여를 지상과제로 삼는 통진당 지도부를 성실하게 따르고 있다. 농민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지도받을 세력일 뿐이다.

 우리는 현 시기 프롤레타리아 독재 강령과 '노동자정부' 슬로건의 유의미성을 다시금 뇌속에 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계급투쟁의 고양기에 올바른 슬로건을 제출할 준비를 해야 한다. 현실은 너무도 급속하게 전진해서 우리를 압도할 것이다. 심지어는 노동자민중권력인가 아니면 노동자권력인가 하는 양자택일로 내몰릴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양자택일은 권력을 잡은 뒤에 역사의 이름으로 제기될 지도 모른다. 준비된 자만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추가: 자본의 법칙이 국제적으로 관철된다는 것을 소련 사회의 모습에 비추어 경제학적으로 해명할 필요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잡으면 자동적으로 사회주의로 이행하게 된다고 표현한 점에서 다소 기계적으로 해석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이는 그 권력이 노동자의 가면을 쓴 사민주의 쁘띠부르주아 권력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이기에 결정론이 아니라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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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9 20:47 2012/11/29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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